설마 하고 뒤를 돌아본 순간 이전에 보았던 흰 양복에 백발의 머리를 묶고 있는 남자가 나타났다.
“박기철이 오랜만이군.”
“누구…?”
아이들을 뒤로 숨기며 할아버지가 앞으로 나섰다. 백발의 남자는 할아버지의 이름을 대며 아는 척을 했다.
“이런이런… 벌써 나를 잊은 건가? 이제 50년밖에 지나지 않았는걸”
“설마, 넌… 봉학이?”
할아버지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 나다. 하지만 이제 그런 이름은 쓰지 않는다네. 내 이름은 마츠모토라고 하네.”
“비열한 놈! 일본에게 네 영혼까지 팔아치운 게냐? 네가 그 악랄한 마츠모토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다.”
할아버지가 막 달려들어 그의 멱살을 잡으려는 순간 백발의 남자 뒤쪽에서 묵직한 손이 튀어나오며 할아버지의 손목을 꽉 잡았다.
“으윽!”
거인 같은 체구의 남자가 할아버지의 손목을 잡은 채 내동댕이치자 할아버지는 힘없이 세찬이의 쪽으로 쓰러졌다.
“이 나쁜…”
“어서 도망쳐라. 너희들은…”
“할아버지!”
“어서!”
세찬이와 친구들은 얼른 뒤쪽으로 뛰어갔다. 할아버지는 일어나 백발의 남자 앞을 막아서며 아이들이 도망칠 수 있게 했다.
“하하! 그래. 아이들이 필요한 것은 아니니까… 눈물겨운 사랑이시구만.”
많은 수는 아니었지만 백발의 남자 뒤쪽으로서 서 있는 사람들은 보기에도 개성이 뚜렷한 덩치가 큰 거인 말고도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보통이 아닌 사람들임에는 틀림없었다.
“자자, 이쪽도 만만치 않은 사람들을 모시고 왔으니 길게 얘기 끌 거 없다. 어서 나머지 탈들을 모두 내놓거라.”
“스승님의 보물을 훔쳐다가 일본에 팔아넘긴 것도 모자라 남아 있는 것까지 가져가겠다는 게냐? 내가 죽기 전에는 절대 그렇게는 못한다.”
“오호! 저승에 한번 다녀오더니 이젠 죽음이 두렵지 않다는 건가? 저 영감한테 제대로 된 저승을 한번 구경시켜줘라!”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이번에는 목검을 들고 있던 빼빼 마른 남자가 어느 사이엔가 할아버지 앞에 서 있었다. 움직임이 전혀 느껴지지 않을 만큼 순간이동을 한 것처럼 보이는 빠른 스피드였다. 목검을 치켜든 그의 앞에 숨이 막힐 것만 같은 압박감이 전해져 왔다.
“마지막으로 묻지. 어디 있는가? 나머지 탈들은?”
“아이들에게만은 손대지 마라.”
“물론이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해를 입히려고 이 먼 길을 온 게 아니니까 말이야. 기철이 자네도 잘 알지 않나? 난 굳이 스승님의 죽음을 보고 싶지 않았단 말이지. 그 보물만 그대로 줬어도 되었을 텐데 그때 왜 3개밖에 탈들을 훔쳐내지 못했는지 말이야.”
“뭣이?”
“아! 이번에 굿을 위해 내가 요청했던 탈들이 이미 완성되었다는 건 알고 왔으니 헛걸음을 하게 하지는 말게나. 이곳에 없다고 해도 믿지 않을 테니 말이야.”
“그럼 그 편지를 보냈던 것도 바로…”
“그래. 바로 나였어. 요즘 세상에 탈이 가진 주술력에 대해 알고 있을 만한 자가 나 말고 또 누가 있겠는가? 요즘 그런 것에 관심을 갖는 사람은 우리 같은 사람들 말고는 없다고. 안 그런가?”
백발의 남자가 비아냥거리듯 입술을 씰룩거리며 차갑게 미소 지었다.
“악마에게 영혼을 판 너 같은 놈에게 줄 우리의 영혼은 없다!”
“이 늙은이가 정말!”
목검을 들고 있던 마른 남자가 목검을 내리치는 순간 그의 목검이 공중으로 튕겨져 날아가 버렸다.
“뭐, 뭐야…?”
목검을 들고 있던 남자가 고개를 치켜들어 앞을 가로막고 있는 거구의 남자를 보았다. 몸에서 불이 활활 타오를 것만 같은 남자가 무서운 표정을 하고서는 할아버지 앞을 굵은 팔뚝으로 막아섰다.
“배, 백정 회광?”
백발의 남자가 놀라 뒤로 물러서는데 뒤에 서 있던 아까 그 거구의 사내가 회광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 정도의 힘에 물러날 회광이 아니었다. 남자는 회광과 힘겨루기를 하다가 팔뚝의 붕대가 모두 날아가 버리며 공중을 날 듯 뒤로 튕겨져 나갔다.
“어서 이곳에서 썩 꺼져!”
우람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느 사이엔가 할아버지의 곁에 부네도 차가운 표정으로 그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벌써 눈을 뜬 건가? 그들이?”
백발의 남자가 부들부들 떨면서 뒤로 주춤주춤 물러섰다.
“푸하하하! 얼른 꺼지지 않으면 모두 내가 요절을 내 주리라!”
목재창고의 천장 쪽에서 웅크리고 있던 방상씨의 목소리가 들렸다.
“우왓!”
백발의 남자가 도망을 치자 나머지들도 방상씨의 얼굴을 보고는 겁에 질려 황급히 차를 몰고 도망쳐버렸다.
“할아버지 괜찮으세요?”
세찬이가 할아버지를 부축하며 물었다.
“그래. 괜찮다. 할애비는. 용캐 방상씨를 깨웠구나. 세찬이가.”
할아버지의 웃음을 보니 그제서야 안심이 되었다.
할아버지를 부축해서 사랑방으로 돌아온 세찬이 일행은 할아버지에게 그 백발의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옛날에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때부터 탈을 만들었었는데, 봉학이라는 친구가 탈을 만드는 일을 배우겠다고 함께 일을 했었단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에 그 친구가 일본인에게 매수되어 돈을 벌겠다고 집안에서 내려오던 하회탈 중에서 3개를 훔쳐 달아나 버린 후로 하회탈은 아홉 개밖에 전하지 않았단다. 비밀리에 전해 내려오던 것이라 그 원형을 복원할 수도 없었지. 너희들이 다루는 탈들의 영혼은 바로 너희들이 가지고 있는 우리 조상의 넋이고 우리 조상의 혼이란다. 너희들이 그것을 잊고 외국 것만은 생각하고 그것에 빠져들면 어느 사이엔가 우리 것들은 있어야 할 곳을 잃고 만단다. 방상씨가 우리의 혼을 지켜주는 역할을 했듯이 이제는 너희들이 우리 혼을 지키고 이어나가야만 한다. 이 할애비의 말, 무슨 뜻인지 알겠니?”
“예.”
세찬이와 고운이 그리고 우람이는 모두 할아버지의 얘기를 들으며 자신들이 이어받은 조상의 혼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앞으로 겪어야 할 수많은 모험들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1권 끝...
- to be continued -
어떻게 재미있게 읽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열 하루간 한 권의 이야기를 달렸습니다.
연재 시작 전에 잠시 언급했듯 원래는 창작동화로 시작한 1권 단행본이던 것이 장편 시리즈로 기획을 바꾸고 웹툰과 애니메이션을 염두에 두면서 2권부터는 판타지 장르물로 변신을 합니다.
물론 1권의 이야기 뼈대와 등장인물들을 그대로 두고 더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기 시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