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게임기에서 시선을 떼고, 게임기의 화면과 세찬이를 뒤바꿔보면서 대학생 형이 말했다.
“누구신데, 저희에 대해서 이미 알고 계시죠?”
고운이가 약간은 차갑고 냉정한 얼굴로 그의 말을 가로채며 나섰다.
“오호~ 누가 부네 짝지 아니랄까 봐 이렇게 똑 부러지고 예쁘장하시게 말씀하시나? 참한 꼬마 애기씨? 섣불리 다가가다가는 그 가시에 손가락 다 찔리겠네.”
게임기를 잡던 두 손에서 한 손을 들어 올리며 그가 개구진 얼굴로 웃어 보였다. 세찬이는 아무 말 없이 그가 어떻게 방상이를 알고 있는지에 대해서 추리하기 시작했다.
“너희는 아직 아무런 소리를 듣지 못했구나? 하긴, 이제 눈 뜬 지 얼마나 되었다고 그게 다 들리고 느껴지겠니. 그래도 수련을 시작했나 보구나. 아니면 굉장히 자질이 뛰어난 친구들이던가...”
“아니, 그러니까 누구신데 우리에 대해서 그렇게 잘 알고 계시는 것처럼 말씀하시는지 알려주셔야 맞는 거 아닌가요?”
“벌써 와 있었던 게냐?”
공방 문이 열리며 아까 들어간 정장을 말끔히 차려입은 아저씨와 할아버지가 활짝 웃으며 밖으로 나왔다.
“할아버지! 안녕하셨어요?”
“오! 우현이도 왔구나! 이게 얼마 만에 오는 게냐?”
할아버지는 이미 대학생 형과도 아는 사이인 듯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얘들에게 또 무슨 장난이라도 치고 있었건 거냐?”
정장의 남자가 게임기를 들고 있던 대학생 형을 보며 무겁게 한 마디 했다.
“할아버지가 그렇게 되셨던 것도 그렇고, 무엇보다 얘들이 눈을 떴다는 소식을 듣고 참을 수가 있어야죠.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었는데 작업실에서 좀처럼 나올 수가 있어야지요. 이런 일이 아니고서는 만날 수도 없으니까요.”
“하여간 네 녀석의 장난기는....”
아저씨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우현이라고 불린 이름의 형의 앞으로 다가섰다.
“할아버지, 이번에 스위스에 갔다가 이 초콜릿 하고 재미있어 보이는 목각인형 사 왔는데요.”
가방에서 주섬주섬 선물 박스를 꺼내는 우현의 어깨에 남자가 손을 감으며 나섰다.
“준비해온 선물이면 얼른 드리고 우리는 먼저 박물관으로 움직이자. 할 말은 가면서 듣기로 하고...”
“할아버지, 이따가 행사 끝나고 들릴 수 없을지도 모르니까 지금 드리려고 온 거예요. 아무래도 오늘 그 놈들이...”
한복 정장의 남자가 발걸음을 돌리며 할아버지에게 말했다.
“자네가 건강한 모습 봤으니 내 그것으로 됐네.”
아주 잠시였지만 정장의 남자가 할아버지에게 ‘자네’라는 단어를 사용하며 하대하는 것이 세찬이에게는 너무도 어색한 위화감을 느끼게 했다. 길게 대화를 나눈 것은 아니었지만 할아버지의 언행은 남자에게 어디에도 없을 만큼 공손하고 윗사람을 대하는 듯했고, 남자는 할아버지에게 아랫사람을 대하는 듯한 묘한 위화감을 조성했다.
“그만 좀 떠들고 가는 것이 낫겠구나.”
할아버지에게 선물상자를 드리자마자, ‘우현’이라고 불린 대학생 정도로 보이는 남자는 끌려가듯 한복 두루마기의 남자와 함께 공방을 나섰다. 할아버지는 말끔한 한복 정장의 남자가 문을 나서기까지의 모습을 보면서도 다시 한번 시선을 마주치고는 손을 가지런히 앞으로 모으며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고 인사를 전했다.
“그래. 앞으로의 일은 내게 맡기고, 자네는 건강만 잘 챙기도록 하라구. 자네는 아직도 제자들을 키워야 할 막중한 책임이 있지 않나.”
할아버지의 인사에 답례하듯 말하고 문을 나서는 남자의 언행은 무거웠다. 왠지 모르게 굉장히 점잖고 무게 있는 행동이라 중간에 뭐라 끊을 수 없는 격이 느껴지는 사람이었다. 자동차의 곁에 서 있던 운전기사가 황급히 뛰어 움직이며 차문을 열고 그들을 맞았다. 그들이 탄 차가 공방 앞 골목을 빠져나가고 나서야 세찬이는 할아버지에게 그들이 누구인지 물을 여유가 생겼다.
“할아버지, 저분은 누구예요? 탈을 만드는 일을 배우는 사람들은 아닌 것 같은데...”
“인연이지. 아주 오래된 인연들. 너희와도 그렇고... 너희들에게는 선배, 아니 어쩌면 선조라고 하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구나. 허허!”
“인연이요?”
할아버지는 특별한 설명 없이 그저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될 것이라는 말씀만 남기셨다. 탈 박물관으로 가는 길의 차 안에서 세 친구는 심각한 표정으로 그 두 사람의 정체에 대해 저마다의 추리에 집중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우리 모두에 대해서 아주 잘 알고 있었어.”
고운이의 중얼거림을 들은 것처럼 우람이도 대꾸하듯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맞아. 백정이가 보인다고도 했어. 회광이라는 이름까지 알고 있었고...”
‘어떻게 방상이의 존재까지 알 수 있었을까?’
세찬이도 최근 수련을 하면서도 왜 방상이가 그 날 이후로 모습을 보이지 않는지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모습을 모두 그에게 들켜버린 것 같다는 생각에 뭐라 내색을 할 수도 없었다.
탈 박물관 앞에 내린 세 사람은 엄청난 인파에 놀라 할 말을 잊었다. 안동에 내려와서 이렇게 많은 인원을 본 적도 없었지만, 서울에서도 볼 수 없는 각 세계에서 온갖 방송국의 차량이 다 와 있는 것처럼 입구에서부터 왁짜지걸 소란스러웠다. 외국인 기자와 리포터들이 카메라와 마이크를 들고 있었고, 이미 커다란 기와집으로 된 박물관 주변은 온통 사람들로 인산인해였다.
“이렇게 대단한 행사였어? 그 협조 협약인지 MOU를 한다는 게? 아니면 그 게임이...”
고운이가 놀란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나도 며칠 전에 알았는데, 그 수수께끼의 해답은 바로 저 게임이었어.”
우람이가 손가락을 가리키는 방향에는 커다란 애드벌룬에 달려 있는 전광판 그림 같은 것이 있었다. 작은 기구처럼 움직이는 물건의 아래에 전자 전광판 같은 것이 홀로그램 같은 영상을 만들어 마치 미래의 어느 도시에 온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탈 박물관의 외형과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거대한 전광판이 공중에서 형태와 색깔을 명확하게 드러내 보였다.
애드벌룬의 아래에 펄럭이는 글씨에는 ‘탈(MASK), 이제 그 가면을 벗다!’라고 적혀 있고, 하회탈들의 모습이 드러나 있었다. 무엇보다 놀란 것은 부네와 백정의 모습이 탈이 아닌 원래의 형태로 명확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었다.
“이건 우연의 일치가 아니야.”
세찬이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일단 들어가 보자. 이 게임, 아무래도 단순한 게임이 아닌 것 같아.”
고운이가 우람이와 세찬이를 이끌며 행사장 안으로 들어갔다. 사람들이 가득 찬 행사장 안에는 이미 좌석이 꽉 차 있어 움직이기 힘들 정도로 붐비었다.
“이쪽으로 와!”
언제 어디서 나타났는지, 귀에 묘한 이어 프리 같은 것을 끼고 있는 대학생 형이 세 사람의 뒤에 나타났다.
“어? 아까 봤던 형이네?”
“여기서는 잘 안보이니까, 너희는 이쪽으로 와. 미리 자리를 마련해뒀으니까...”
우현은 조용히 세 친구를 데리고 성큼성큼 앞쪽으로 앞쪽으로 걸어갔다. 그의 목에 걸려 있는 신분증 같아 보이는 카드를 보고는 스텝 어느 한 명도 그를 제지하지 않았다. ‘vip석’이라고 적혀 있는 앞자리의 세 자리가 비어 있는 것이 보였다. 우현은 아무렇지도 않게 경비를 보는 스텝들을 지나 그 앞에 세 친구를 앉혀주었다.
“여기 앉아도 되는 거예요?”
“비어있는 자리인데 좀 앉으면 어때? 내가 아까 미리 와서 맡아둔 자리니까 그냥 앉아도 돼.”
“와! 시장님도 오셨네?”
우람이가 뉴스에 자주 나온 얼굴이라 기억하는지 안동시장의 얼굴을 보며 놀라서 그 자리에서 놀라 일어서려고 했다.
“아무도 너희에게 이 자리에서 비켜달라고 못할 거야. 내가 미리 찜해둔 자리니까... 그리고 여기가 오늘의 제일 좋은 자리거든. 그러니까 너희는 오늘 초대된 가장 귀한 손님들이니까 여기서 보면 돼. 재미있는 볼거리가 많이 벌어질 예정이거든.”
고운에게 한 눈을 찡끗해보이는 여전히 장난기 가득한 우현의 얼굴을 보면서도 세 친구는 정신이 없었다. 뭐라고 물어볼 새도 없이 우현이 사람들 틈으로 사라져 버렸고, 그를 따라가려고 일어서려는 순간, 행사장의 모든 조명이 일시에 꺼졌다.
- 이제 곧 그들이 온다!
몸 전체를 울리게 하는 웅장한 음악과 함께 영화에서 들어봤던 성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행사가 시작되었다. 하늘에서 벼락이 치는 것 같은 정전기가 사람들의 눈에 보였다.
“오~!”
사람들은 여느 곳에서 볼 수 없는 퍼포먼스에 놀라며 즐거워했다. 엄청난 음악과 효과들이 진짜처럼 나타났다. 가상현실처럼 홀로그램으로 만들어진 백정과 부네도 그랬지만 다른 하회탈들이 게임의 캐릭터들과 동화해서 움직인다는 새로운 방식의 RPG 게임이 소개되었다.
세 친구들도 설명을 들으며 알게 된 사실은, 이 게임이 매우 오래전부터 기획된 것이었고, 게임을 개발한 회사 입장에서도 매우 오랫동안 공들였던 행사로 전 세계의 게임 유저들에게는 굉장히 기다리던 소식이었다고 했다. 그리고 세 친구가 그날 제대로 알지 못했던 사실은 또 한 가지 있었다. 그날 탈 박물관에서 최초로 일반과 해외 보도진들에게 하회탈의 원본을 공개한다는 소식 때문에 한국 정부의 주요 인물들이 제법 많이 모였다는 것이었다. 문화재청장은 물론이고, 문화체육관광부의 장관을 대신해서 차관 및 다양한 인물들이 이 행사에 참여했다는 사실은 그들이 단순히 특강 정도로 생각했던 것과는 많이 달랐다.
“자아, 오늘 많은 귀빈들이 자리해주셨는데요. 여기 문화교육관광부 차관님 오셨습니다. 문화재청장님 오셨습니다. 전 외교부 장관님 오셨습니다....”
귀빈이라고 말하며 세 친구가 앉아 있는 자리의 앞으로 나이가 많은 어른들이 몇몇 일어나며 사람들에게 일일이 인사를 하는 모습이 보였다. 세 친구가 뒤늦게 알게 된 사실 중에 사소하지만 놀랄 만한 것은 세 친구가 앉은자리에 이미 세 친구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는 것이다. 앞의 무대가 아주 잘 보이는 자리도 자리였지만 중요한 인물들의 한가운데에 자리할 것을 이미 안배했다는 것은 그들이 이곳에 올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누군지 잘 알지도 못하는 아저씨들이 뭐가 그렇게 대단하다고 뭐 이렇게 지루하게 인사들을 하고 난리야? 게임도 아직 소개하기 전이구만...”
우람이의 투덜거림이 심해질 무렵에서야 거의 모든 귀빈들의 소개와 인사가 끝났다.
“이제 안동시와 엔쓰리의 MOU 협약식을 거행하겠습니다. 시장님과 회장님을 이 자리에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소개받은 안동 시장이 우람이의 곁에서 가만히 일어섰고, 무대의 뒤쪽에서 익숙한 얼굴의 남자가 곱고 격조 있는 감색 한복 두루마기를 입고 조명을 받으며 무대에 나섰다. 워낙에 큰 키와 체격에 그를 한 번이라도 봤던 사람이 그를 몰라보는 것이 더 어려울 정도였다.
“고운아, 저 아저씨...”
세찬이와 정면으로 그의 눈빛이 공중에서 엉켰다. 그는 마치 세찬이가 어디에 앉아서 이 모습을 보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는 눈빛으로 웃음을 지어 목례를 보냈다. 남자는 방상씨의 존재를 알고 있던 할아버지를 찾아왔던 아침에 만났던 그 정체모를 아저씨가 맞았다.
“응. 맞아. 아까 그 아저씨.”
고운이가 조용히 그를 응시하며 대답했다. 그녀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세찬아! 우람아! 준비해! 아무래도 우리가 오늘 자리를 잘못 찾아온 것 같아.”
세찬이의 눈에, 고운이가 가지고 다니던 작은 목걸이의 뚜껑을 열며 물을 손가락에 묻히는 것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