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상씨의 탈> 2부 - 12

여섯. 제주도에 사는 이매탈 - 하

by 발검무적

지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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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커다란 산이 보이고 배가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해가 뜨지 않은 밤인지 아니면 공간 자체가 어둠 속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검은 어둠 속의 바다는 여전했다.


“이리 오너라~”


큰 소리로 방상이가 뒷짐을 지고 배에서 풀쩍하고 돌로 성을 쌓아둔 곳에 뛰어내렸다.


“여긴 어디야?”

“제주도, 아마도 명월포 즈음일 게다. 이제 녀석이 마중 나올 때가 되었는데...”

“아니고! 이게 누구십니까?”


툭 튀어나온 동그란 두 눈, 굳게 다문 입, 벙거지 같은 모자를 쓰고 있는 머리, 구부정한 자세에 한쪽 어깨는 추켜올리고 굳게 움켜쥔 두 손으로는 배를 감싸 안고 있는 거대한 그림자가 밑에서 나타났다. 주변에 있던 돌덩어리들이 뭉쳐서 길을 만들고 그 앞에서 양쪽을 길을 내어 마치 붉은 카페트를 깔 듯 배 앞의 세찬이와 방상이에게 이르렀다.


“저건...”


세찬이가 배에서 내리려다가 놀라 주저앉을 뻔했다. 제주도에 놀러 왔을 때 보았던 돌하르방이, 바로 자기 눈앞에서 말을 하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공손히.


“네가 이곳을 관할하는 존재라 들었다만...”

“예. 방상님이 이곳으로 오신다는 전갈은 미리 받았습니다만, 다짜고짜 그들을 찾는다고 하셔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일단 그들의 거처에 다녀왔습니다만. 강화도와 진도에 있는 이들까지 그곳으로 속속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습니다. 마치 방상님이 오신다는 연락을 받은 이들처럼...”

“그래. 그들도 느끼고 있었던 거겠지. 됐다. 앞장서거라. 어디냐?”


옷자락을 펄럭이며 방상이가 팔을 앞으로 뻗자 다시 배가 그들의 앞에 미끄러지듯 섰다.


“항파두리성으로 가시면 바로 됩니다. 제가 앞장서지요.”

“그들이라는 건, 누굴 말하는 거지?”


배가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앞서 날아가는 돌하르방을 보며 세찬이가 방상이에게 물었다.


“지금부터 나라에게 버림받고 처절하게 죽어갔던 불쌍한 이들의 이야기를 하나 해줄 거야. 그러니 잘 들어.”


방상이의 얼굴이 오랜만에 심각하게 어두워졌다.


“그들은 원래 귀족도 양반도 아니었다. 하지만 자기가 사는 땅에,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이들이 쳐들어와 자기 형제를 죽이고, 자기 아내를 죽이고, 자기 자식을 죽이는 광경을 눈앞에서 봐야만 했지. 그리고 그들은 심지어 자신을 공격한 이들에게 사로잡혀 그들의 노예이자 가축처럼 길러지고 그들의 군사로 싸워지기를 강요당했다. 그들은 다시 자신의 형제와 자신의 이웃을 공격하는 최전방에 떨궈져 피 묻은 칼과 도끼를 들어야만 했다. 그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지. 매일 죽어나가는 곁에 있는 사랑하고 지켜야 할 사람을 보면서 좌절해야만 했거든. 그런 그들은 대단한 꿈이 있는 것도 아니었지. 나라를 지킨다는 명분도 필요 없었고. 그저 그들은 자신이 사랑하는 가족과 농사짓던 땅에서 웃고 울고 그렇게 살면 그뿐이었지. 정작 나라를 지켜야 할 이들은 나라와 상관없이 자신의 안위를 위해 도망쳤고, 자신들의 사병들만 전장에 내밀었다. 그렇게 이름도 알지 못한 남의 땅에 끌려갔던 이들은 저마다 처절할 정도로 힘들게 삶을 연명하며 다시 자신이 살던 땅에 돌아왔다. 그러던 차에 그들은 마지막이자 처음으로 자신들의 자유와 자유의지를 가지고 자신들의 싸움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들이 누군가의 명령을 받지 않고 자신들의 분노에 분연히 일어나 칼을 잡고 자신들을 잡아갔던 놈들에게서 배운 무예와 전술을 가지고 그들을 쳐부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신들을 지켜줬어야 하는 위치에 있어야 할 놈들이 저지르는 만행에 대해 분노하고 칼을 들었지. 하지만 결국 그들은 자신이 나라라고 불렸던 땅의 왕과 그 대신들에게서 부정을 당했지. 그래도 그들은 자신의 자유 의지로 든 칼과 도끼를 내려놓지 않았다. 그들은, 그들을 버린 나라를 위해서도 아니고, 자신들이 나라를 뒤집겠다고 반란을 일으킨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그저 그들이 가지고 있는 분노를 그들에게 소중한 모든 것들을 앗아간 그 놈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남은 생을 불태웠다. 정작 그들을 치러 큰 물을 건너온 이들조차도 그들과 같은 민족이었으니 그들은 정작 분노를 제대로 분출해보지도 못하고 칼을 내리고 도끼를 거두어야만 했다. 그런 그들의 분노가 중국에서 날아와 이 평온한 자연의 영혼에 끌려왔던 이매들과 자연스레 융합하게 되었단다. 마치 처음부터 하나였던 것처럼 말이지. 처음엔 강화도에 자리 잡았던 몇몇이, 진도로 옮기면서 그 영혼들과 쉽게 어우러졌고, 큰 물을 건너 그들의 모든 영혼이 사그라져가는 분노의 뜨거움이 결국 이매에게 형상을 주게 되었단다. 그런 그들의 힘이 지금의 너희들에게는 반드시 필요할 게다.”


말이 마치기가 무섭게 배가 덜컹하고 뭔가에 부딪힌 것처럼 멈췄다.


“이곳이 항파두리성입니다. 저들이 저리 이미....”


배 앞의 돌하르방이 앞서 느껴지는 자기장같이 강하게 밀어내는 기운을 가리키며 길을 멈췄다.


“멈추라. 이방인. 더 이상 우리들의 안식처로 들어오는 것을 허하지 않는다.”


굵고 묵직한 울림이 동굴 안에서 울려 퍼지듯 들려왔다. 목소리와 함께 아울러 여러 그림자들이 드러났다. 붉은 짐승의 눈 같은 것들이 안광을 내뿜으며 보였다. 엄청난 숫자의 그림자가 우람한 체격을 드러내며 뒤편 성곽을 하나 가득 메웠다.


“신의군(神義軍)들이 맞으신가? 대장은 어디 계신가?”

“두 번 말하지 않는다. 너희들은 이미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어섰다. 우리는 뭍에서 온 외부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가거라. 외부에서 온 자여.”

“참! 듣던 대로 꽉 막힌 것들뿐이로구나. 대장에게 일러라. 방상씨가 왔다고.”


방상이가 앞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파 바바박!

방상이의 발 앞으로 검은 화살 같은 것이 날아와 일렬로 박히며 창살처럼 앞을 막았다.


“이런 버릇없는 것들을 보았나! 힘으로 설복시키기를 원하는가?”


방상이가 팔을 휘두르나 흰 도포자락이 붉은 색으로 불타오르듯이 짙은 검붉은 빛으로 물들며 빛나기 시작했다.


철컹하는 소리와 함께 뒤에 있던 검은 그림자들이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건...?”

놀란 세찬이의 눈에 들어온 것은 이매탈을 쓴 건장한 검은 그림자 덩어리의 거구의 무장(武將)들이었다. 얼굴에 모두 똑같은, 턱이 없는 이매탈을 쓴 이들은 갑옷과 무기로 정갈하게 무장을 하고 있었고, 어느 하나 다를 것 없는 거대한 몸집을 갖추고 있는 다부진 체격의 무장들이었다.


“감히 이매 따위가 나 방상씨에게 덤벼보겠다는 건가?”


방상이가 입고 있던 흰색 도포는 이제 완전히 검붉은 색의 불이 불타오르는 것처럼 달아올라 색깔이 완전 변해 환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방상아...”


금세라도 서로 큰일이라도 낼 듯이 불꽃 튀는 일촉즉발의 상황에 세찬이가 앞으로 나섰다.


“나 방상씨의 탈을 부리는 박 세찬! 그대들에게 고한다. 그대들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여 찾아왔다. 살기를 거두어달라.”


금방이라도 파란 불이 이글거리며 모든 것을 태워버릴 것 같던 이매탈 부대원들이 바다가 갈라지는 기적처럼 순식간에 가운데로 도열하듯 갈라지며 중앙에 길을 내어 그들을 맞았다.


“죽은 이들을 관할하시는 자여! 이런 곳까지 어쩐 일이신지요.”


같은 무장을 한 같은 이매탈의 모습임에도 뭔가 느낌이 다른, 기이하게도 장검을 차고 있는 모습만으로도 그가 그들의 대장임을 미루어 알 수 있었다. 가만히 살펴보니 거대한 활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뒤에 도열한 것이 그 수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어둠 속까지 붉은 안광만이 가득 정면의 세찬이와 방상이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대가 신의군의 대장인가?”

“이제 그런 이름은 없습니다. 아울러 우리들에게도 이름은 없습니다.”

“아니면 '삼별초'*라 불러야 하는가?”

‘삼별초?’


세찬이가 깜짝 놀라 방상이의 얼굴과 대장의 이매탈을 번갈아 보았다.

“그 이름으로 불렸던 시절이 있었던 것조차 이미 잊은 지 오래입니다. 저희는 그저 안식을 바라며 이 곳 자연에 조용히 잠들어 있었을 뿐입니다. 강화도에서 진도까지 저희 부대원을 일일이 찾아다니셨다고 들었습니다. 강화도와 진도의 부대원들까지 이 곳 제주도에 잠들어 깃들어있었던 까닭은 우리에게 묻혀버린 세월을 꺼내고 싶지 않아서였습니다.”

“아니. 착각을 한 듯 허구만. 지금 자네들을 찾아 도움을 청하고자 하는 존재는 내가 아니라네.”

“이 땅에 외세의 사악한 기운이 스밀어 올라온 것이 처음도 아니고, 하나도 아니거늘 어찌 새삼 저희들에게 그 싸움에 동참하라 이르십니까?”

“아니. 우리는 그들에게 싸움에 동참하라 온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굳이 저희에게 왜...”

“자네들과 상성이 맞는 이가 급히 성장해야 할 필요가 있어 그대들의 소망을 이루기 위해 그 해결의 방안을 이 아이에게 담아줬으면 하여 부러 데리고 왔다.”


방상이가 가만히 세찬이의 등을 밀어 대장의 앞에 세웠다.


“돌아가라. 인간의 영혼을 그대로 가진 이여. 이제 한 줌 육신을 가지고 있지도 못한 이런 우리에게, 그대는 무엇을 바라는가?”

“우리 민족혼을 다른 외세에서 온 도둑들이 멋대로 훼손하거나 훔쳐가게 둘 수 없어요. 나에게, 아니, 우리에게 그대들이 도움을 주었으면 합니다.”


떨리는 목소리였지만 세찬이는 주먹을 꼬옥 쥐고 방상이의 앞을 가로막으며 당당하게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민족혼?”

“나는 그대들이 우리나라에 살고 있는 민족혼의 하나이자, 그 하나하나가 우리 민족혼을 대표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대들의 얼굴에 그 탈이 씌워졌을 리 없었을 것을 아니까요.”

“이것은...”


그들이 세찬이의 당돌한 말에 손을 탈로 가져가며 대답을 바로 하지 못했다.


“그대들을 지켜주지 않은 왕이나 귀족들을 위해 싸울 필요는 없어요. 수백 년 수천 년이 흘러도 역사를 배운 우리 후대들은 그대들의 희생과 아픔을 공부하고 기억합니다. 하지만 지금도 그 역사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어요. 우리 민족혼을 다른 나라의 나쁜 사람들이 강탈하는 것을 저는 원하지 않아요. 그대들도 그럴 것이라고 나는 확신합니다. 그대들 역시 내 생각에 동의한다면 우리에게 힘을 빌려줄 수 없을까요?”


대장이 묵묵히 아무런 대답도 없이 생각에 잠긴 듯했다.


“우리에게 왜 이 탈이 생겼는지 우리는 정확히 기억하지 못한다. 우리는 이름 없는 민초(民草)였고, 그 이름 대신 우리의 얼굴 하나하나에 이 탈들이 씌워지게 되었다. 왕조가 바뀌고서도 우리에게 도움을 청하는 기운이 있을 때 우리는 썩은 관료들을 혼내고 민초를 지키는 역할을 강화도에서 진도 그리고 제주도에 이르기까지 이 한반도 전역에서 해왔다. 하지만 어느 사이엔가 우리는 다시 잊혀갔고, 우리가 민초들을 위해 무언가를 할 기회도 공간도 없었다. 외세의 사악한 기운들이 자리 잡고 우리 땅에 외세가 자리 잡아 우리 민초들이 핍박받을 때도 우리는 민초들을 위해서 움직였을 뿐, 결코 이 나라를 위해 무언가를 하고자 하는 뜻은 없었다. 우리가 그대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도울 수 있단 말인가?”

“길게 말할 필요 없어. 이 아이에게 네가 무언가를 느꼈다면, 그대가 직접 느낀 것들을 확인하면 된다. 내 부탁은 하나이다. 이미 느꼈겠지만 이 아이는 단순한 인간의 육체를 지닌 시간의 한계를 가지고 있는 존재가 아니다. 나 방상씨를 천년의 잠에서 깨어나게 한 장본인이기도 하지. 그런데 정작 자신이 가지고 있는 힘을 어떻게 꺼내 써야 할 줄 모른다. 아직 나를 다루기에도 부족하고, 결국 이 아이와 내가 연결되어 있다는 것 때문에 내가 어떻게 내 공간으로 들여오는 것도 못할 판이라, 그대들에게 데리고 왔다. 내가 다시 돌아오는 것은 섣달그믐이 될 게다. 그전까지 삼별초의 신의군 중에서도 신의군의 대장급으로 만들어 주었으면 하는 것이 우리들의 부탁이다.”

“유체이탈의 반영혼 상태로 그렇게 오랜 시간을 나와 있는 것은 인간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일입니다.”


삼별초의 대장 이매탈이 방상씨에게 물었다.


“이 아이의 영혼은 저승에서 세 숨꽃밭에 한 식경 이상이 넘도록 뛰어다녔던 영향을 받아 지금 이런 상태로 이곳에 있는 것에 아무런 장애를 느끼지 않는다. 그래서 그대들을 찾을 수도 있었던 거고.”

“으음...”

“그리고 이번에 자네들의 영혼을 노리는 이들은 단순한 존재가 아니다. 그 옛날 몽골이 그러했듯이 우리 민족의 영혼을 노예로 삼아 화살받이로 쓰려는 아주 질이 나쁜 놈들이다.”

“으음! 그런 일이 있었군요. 미세하나마 느끼긴 했는데, 그래서 다른 탈들이 함부로 나서지 못했던 것이었던 거군요. 무슨 의미인지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이 소년을 저희들이 잠시 맡도록 하지요.”

“세찬아! 괜찮겠지?”


방상이가 세찬이를 바라보며 물었다.


“응. 반드시 더 강해져서 돌아갈게. 모두에게 전해줘. 반드시 내가 힘을 길러서 돌아가겠다고...”

“좋아. 그래야지. 부탁한다. 이매탈 대장!”


세찬이는 대장과 함께 도열한 이매탈들의 안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다음 편은 여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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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삼별초


고려 무신정권(武臣政權) 때 만들어진 특수 군대. 1219년(고종 6) 최충헌(崔忠獻)의 정권을 계승한 최우(崔瑀)가 방도(防盜) 등 치안유지를 위해 설치한 야별초(夜別抄)에서 비롯된 것으로, 별초란 ‘용사들로 조직된 선발군’이라는 뜻이다. 그 뒤 야별초에 소속한 군대가 증가하자 이를 좌별초 ·우별초로 나누고, 몽골 병사와 싸우다 포로가 되었다가 탈출한 병사들로 신의군(神義軍)을 조직, 이를 좌 ·우별초와 합하여 삼별초의 조직을 만들었다. 삼별초는 무신정권의 전위(前衛)로서 다분히 사병적(私兵的)인 요소도 있었다. 그러나 항몽전(抗蒙戰)에서는 그 선두에서 유격 전술로 몽골병을 괴롭혔으며, 무신정권이 무너지고 몽골과 강화(講和)가 성립되고 고려 정부가 개경으로 환도하자 개경 정부 및 몽골과 대항하여 항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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