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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Mar 09. 2022

왜 배우는 것에도 때가 있다고 하는가?

배우는 자가 갖춰야 할 마음가짐에 대하여.

子曰: “學如不及, 猶恐失之.”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배움은 따라가지 못할 듯이 하면서도 행여 때를 잃을까 두려워하여야 한다.”

이 장의 가르침 역시 딱 여덟 자, 짧다. 심지어 어려운 글자도 없다. 그래서? 어렵다. 왜 무조건 짧은 가르침일수록 어렵다고 공식화하느냐고 따질 수도 있겠다. 이미 설명한 지 오래되어 잊었을까 싶어 다시 한번 말해주겠다.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 많아지면 말이 많아지고 글이 많아진다. 그런데 어느 경지에 오르면 그 긴 설명과 말을 알아들을 사람들만 알아들 수 있는 수준으로 압축시켜 구현할 수 있게 된다. 인간이 오를 수 있는 그 분야의 최고 경지에 오른 사람이 쓴 글을 당신은 아침마다 한 장씩 읽고 있는 것이다. 말과 글이 길어질수록 상세해지고 짧아질수록 압축적이다.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 긴 것도 긴 것이겠으나 그 내용이 형이상학적인 내용에, 고급 수준의 배우는 자만이 이해하게 만들기 위한 목적이 아닌 누구나 이해할 수 있도록 하려면, 거기에 더해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이해하도록 폭을 조절하는 말과 글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래서 짧은 글일수록 조심해서 잘 새겨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들 해석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장이 그리 어렵지 않다고 착각하는 현대의 해설서를 낸 이들이 그야말로 ‘가볍게’ 해석한 내용을 보면 시중에 나온 책들의 80%가 원문에서, 뒷 구절의 ‘때를 잃을까 두려워해야 한다’고 해석한 부분을 ‘배운 것을 잃어버리지 않을까 두려워해야 한다.’고 새기고 있다. 원문에서는 물론 목적어가 구체적으로 제시되어 있지 않고 대명사 ‘之’로만 되어 있다.


그리고 앞에서 ‘배움(學)’이라는 주어가 있으니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럴 수 있다고 내가 양해해주는 것은 고문을 잘 모르거나 이제 공부를 시작한 비전문가들에게 한해서 용인되는 범위이다. 스스로 전공자니 전문가니를 자처하며 서점가에 종이 공해를 일으키며 다른 사람들에게 읽으라며 책까지 내면서 그렇게 어설픈 수준으로 해석하여 속뜻은 고사하고 진의를 읽어주지 못하면 어쩌겠다는 것인가?


그들의 해석이 왜 잘못되었는지에 대한 것을 선배 주자의 주석을 통해서 살펴보기로 하자.


사람이 학문을 함에 있어서, 이미 따라가지 못할 듯이 여기면서도 그 마음에 오히려 두려워하여 혹시라도 때를 잃을까 염려해야 함을 말한 것이니, 배우는 자들이 마땅히 이처럼 해야 함을 일깨워주신 것이다.


대부분의 현대 해설서에서는 이 장의 여덟 자를 그대로 해석한다. ‘배울 때에는 힘이 미치지 않는 듯한다’라는 해석이 도대체 무슨 의미인지 정체를 알 수가 없다. 힘이 미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힘이 그 배움의 내용과 가르침을 따라잡지 못할까를 걱정하며 부단히 노력하라는 의미라고 주자는 명확하게 설명한다. 그리고 문제의 뒷절에 대해서는 배운 것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때(시기)’를 잃을까 봐 염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석하는 것이 정석이 되어버렸다.

만약 대부분의 현대 해설서에 담긴 것처럼 ‘배운 것을 잃어버린다’는 것으로 해석하게 되면 정말 백보 양보하여도 배운 것을 잊고서 행하지 않게 될까 봐 걱정한다는 의미로밖에 새길 수 없게 된다. 아니다. 만약 배운 것을 잊어버릴까라면 그저 끊임없이 복습하여 그 가르침을 새기라는 의미가 되는데 그렇다면 앞절과 호응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 앞 절에서는 마치 달려가는 사람을 쫓아가지 못할까를 걱정하는 것처럼 그 가르침을 모두 익히고 따라잡지 못할까를 걱정했는데, 갑자기 그 배움을 잊어버릴까 봐 두려워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물론 선배 학자들 중에서도 ‘익힐 습(習)’으로 뒷절을 보는 견해가 있었다. 그것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 의미가 복습의 의미가 아니라 학이편의 처음에서 보았던 것처럼 ‘습(習)’은 배운 것을 잊어버릴까 봐서 하는 것이 아니라 몸에 배어 그것이 완전히 머리부터 몸에 배어야 하는 과정을 강조한 것이다.


특히, ‘걱정하다’와 ‘두려워하다’의 의미가 갖는 차이는 굉장히 크다. 배운 것을 잊어버리는 것을 걱정은 할지언정 그것을 두려워하지는 않는다. 치매라도 걸려 자의와 상관없이 잊어버리게 된다면 두려워한다라는 표현을 쓸 수 있겠으나 공자는 특수한 상황을 짚어 말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왜 두려워한다는 말인가?


그래서 배우는 자들이 혼란스러워할 것을 걱정한 정자(伊川)가 이 장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학문을 함에 따라가지 못할 듯이 (부지런히) 하면서도 오히려 잃을까 두려워하여, 방과(放過)할 수 없는 것이니, 잠깐이라도 우선 내일을 기다린다고 말한다면 불가한 것이다.”


정자는 아예 여기에서 ‘때(시기)’를 직접적인 비유로 제시하고 있다. 배움에 있어 잠깐이라도 우선 내일을 기다린다고 말하는 순간, 배움의 때를 놓쳐버려 배움은 달아나고 만다는 것이다. 이 개념은 배운 것이 도망가거나 날아간다는 개념이 아니고 배움에 있어 나중에 해도 된다는 안일한 마음이나 태도를 가져서는 안 된다는 해석을 명확히 한 것이다.


특히, 마지막에 직접적으로 절대 그래서는 안된다는 ‘不可’라는 표현을 쓴 것이 인상적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공부를 하는 이들의 게으름은 경계의 대상인데, 원문의 앞절의 비유를 통해 배움을, 달려 나가는 사람으로 보고 그를 놓칠까 싶어 쫓아가는 마음가짐으로 공부하였는데, 조금 어렵다고 아니면 조금 힘들다고 내일 다시 해도 되지 않겠느냐며 스스로에게 안일해진다면 배움은 그대로 달려가버려 다시 잡을 수 없게 된다는 의미를 명확히 한 것이다.

공자는 내내 배우는 자들이 인식하고 실천해야 할 호학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강조한 바 있다. 그 기조에서 이 장은 실제로 배움의 태도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가에 대한 방법론의 제시이자 평생 배움을 실천해왔던 자신의 경험담을 담담하게 일러주는 내용에 다름 아니다. 누차 설명하고 강조한 바 있지만, 공자에게 있어 배움은 실천을 배제한 개념이 아니다.


공자에게 배움은 실천을 분리하고 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즉, 이 장의 가르침을 단순히 배우고 익히는 것으로만 이해하려고 한다면 절반도 채 그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 것이라고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단순히 머릿속에 있는 지식을 담고 그것이 날아가거나 잊어버릴까 봐 걱정하는 1차원적인 수준의 개념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다산(정약용)은 이 장에 대해 “그 감정이 행인이 관문으로 달려갈 때 그 문이 닫힐까를 두려워하는 것과 같다”라고 보면서 “얻은 것을 잃을까를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道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 마치 귀중한 보배가 앞에 있는데, 다른 사람이 먼저 가져갈까 염려하듯이 해야 한다는 것이다”라고 보았다.


무언가를 배우는 것이 마냥 쉽고 즐겁고 재미있기만 하다면 모든 사람들이 배움을 마다할 리가 없고 모두가 배워나갈 것이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것이 그러하듯이 소중한 것은 그 가치를 배우고 얻는 데 그만한 노력과 노고를 기울여야만 한다.

일본 만화 <강철의 연금술사>라는 작품을 보면 만화 속의 연금술과 세계관을 장악하는 캐치프레이즈 같은 문구가 계속해서 등장한다.


 ‘세상은 등가 교환의 법칙에 의해 움직인다.’


이 말은 그 만한 것을 얻고자 하면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만 한다는 아주 당연한 자연의 섭리이자 진리를 말한다. 뜬금없이 만화를 소개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그런 아이들이 읽는 만화에서조차 세계관이라고 할만한 것을 명확하게 이야기하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쉽게 얻은 것은 쉽게 잃는다, 라던가 정점까지 올라 있는 사람을 그저 부러워할 줄만 알았지 그가 정점까지 오르는 동안 흘렸을 피눈물은 지금 당신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 라던가 하는 말이 바로 그 자연의 진리를 현실에 녹여서 풀어준 말들이다.


‘세계화’라는 단어가 더 이상 생경한 용어가 아닌 것이 되고 세계여행이 자유화되면서 대한민국에서도 수십 개국에서 수백 개국을 여행한 일반인들이 늘어나게 되었다. 1990년대 초 세계여행의 자유화는 당시 젊은이들에게 유럽 배낭여행이라는 것을 대학생들의 필수코스인 양 환치시켜 놓았다.


그들은 최소한의 비용으로 유로패스를 끊고 가장 저렴한 유스호스텔을 찾아 반드시 가서 사진으로 남겨야 하는 장소에서 사진을 찍고 오는 방식의 한국적 여행을 하게 만들었다. 당시 스마트하지 못했던 시대적 특성상 무식하게 큰 배낭을 멘 대학생들은 영어사전을 통째로 들고 여행을 나섰다. 그리고 그들은 깨닫게 된다. 자신도 영어를 잘 못했지만,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지 않는 유럽의 수많은 사람들이 영어를 자신보다도 더 못해서 유럽에서 영어로 의사소통하는 것이 만만치 않은 일이라는 사실을.

제1외국어인 영어를 비롯해서 인문계 고등학교에서라면 모두 배우는 제2외국어는 당당히 학력고사와 수능에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그렇게 공부해서 대학을 간 이들이 영어로 의사소통을 하고 자신이 배운 제2외국어로 그 나라에 가서 그 나라 사람과 막힘없이 소통한다는 것은 요원한 이야기였다.


왜였을까? 취직을 하기 위해 토익을 만점 맞았다는 친구가 회사에서 처음 간 미국 출장에서 제대로 된 브리핑은 고사하고 스몰토크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상황을 우리는 적잖이 봐왔고, 심지어 그것이 당연한 것처럼 여기는 지경까지 이르렀었다.


언어는 소통의 가장 기본적인 도구이다. 상대와 의사소통을 하지 못하는 언어는 의미가 없다. 그렇다고 멀쩡히 앞에 사람을 두고 나는 시험을 위한 독해만 해서 회화가 되지 않으니 이탤릭체도 아니고 정자체로만 글씨를 써준다면 소통하겠다고 우기는 똘아이가 되어버릴 수도 없는 것이다. 맞다. 영어를 비롯한 한국의 외국어 교육이 갖는 가장 큰 문제점은 언어교육의 목적이 달랐다는 점이었다.


유럽에서 영어를 공부했던 이들은 모두 의사소통에 목적을 두고 있지, 토익시험의 고득점이 목표가 아니었기 때문에 영미권의 네이티브 스피커와 대화를 하는데 큰 문제를 겪지 않는다.

심지어 그런 문화적 분위기가 형성되어 요즘 아이들은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정작 세계 곳곳에 나가보면 영미권의 네이티브 스피커들은 한국인들이 그렇게 무시하는 발음이 그지 같다는 인도애들보다 더 아래라는 냉정한 평가를 받고 있다.


왜 갑자기 배움에 대해 이야기를 하다가 외국어 공부 이야기를 꺼내는지 생뚱맞다고 딴지를 걸고 싶은가? 그렇다면 당신은 그 논리가 진행되는 중간의 흐름을 놓쳐버린 것이다. 알파벳을 배우고 평생을 그 시험성적 제출에 목을 매었던 영어공부를 비롯해서 지금도 제대로 해야지 하면서 새해 계획에만 담겨 있는 당신의 외국어 공부도 지금 그 모양 그 꼴인데, 하물며 당신의 사람됨을 다스리는 공부는 제대로 시작조차 하지 않았는데 당신이 사람이 되어 죽기 전까지 제대로 사람의 모양새를 갖출 수 있겠는가 하는 이야기를 하려고 가져온 이야기이다.

이미 사람인데 무슨 사람이 되는 공부를 하냐고 묻고 싶은가? 그렇다면 당신은 아직 마흔이 한참 덜 된 사람이겠구나. 누가 가르친 적도 없고, 청학동 출신도 아닌데, 마흔이 가까워오면 한국사람들이 갖는 토속병이 있단다. 듣기도 싫어하던 트로트를 술만 마시게 되면 찾아 부르며 입에 착착 감긴다고 생각하며 놀라고, <논어>나 <맹자> 같은 성현들의 가르침을 원전으로 읽고 싶다는 욕망이 불쑥불쑥 솟아나는 것이 그 병의 주 증상이란다.


내가 세계를 주유하며 느낀 것인데, 형태가 조금 다를 뿐 생리적으로 그즈음의 나이가 되면 자신에 대한 근원적인 것을 제대로 배우고 알고 싶어 하는 마음을 갖는 것은 전 인류가 갖는 공통적인 증상이더라.


모르는 것을 찾아서 배우고 그 배우는 과정에서 자신이 몰랐던 것, 그렇게 알고 싶어 하고 제대로 익히고 싶어 했던 것을 알게 되고 잘하게 되는 것에서 희열을 느끼는 경험은 공부를 싫어하는 사람들도 살면서 경험해본 것이다. 위에서 외국어를 예로 들었지만, 외국어는 내가 당장 매일같이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배울 때는 분명히 무슨 뜻인지 알았던 것 같은데 다시 하루가 지나 책을 펼치면 다시 무슨 뜻인지 몰라 답답해지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기타를 기가 막히게 치는 사람을 보고 기타를 배우려고 하는데 일단 말랑한 손가락이 줄을 잡고 코드를 만들어 제대로 된 소리를 나게 하기 위해 굳은살이 배기는 과정을 겪지 않고서 완성할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매일같이 외웠던 단어를 가지고 그 나라에 가서 열심히 사용하고 배우고 익혔는데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2~3년은 고사하고 단 6개월만 지나도 그 나라의 말이 잘 튀어나오지 않는 배신감에 늙어서 그런 것인지 속상하고 억울해짐을 느껴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아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공부가 그렇다. 운동은 그렇지 않던가? 물만 먹고 매일 새벽 음파 음파부터 시작해서 겨우 4가지 영법을 다 끝내고 철인 3종 경기까지 달렸던 경험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1년만 바쁘다는 핑계로 일에 치여 아무런 운동도 하지 않게 되면 오랜만에 살겠다고 다시 찾은 수영장에서 50미터 국제경기장 풀도 아니고 25미터 일반 동네 풀장을 도는 것도 힘들어 옆에서 초등학교 수영반 꼬마보다도 물을 헤치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단 말이다.


이 장의 가르침은 그렇게 될 것을 두려워하라는 것이다. 그것을 다시 정점의 단계로 만들기 위해서는 젊고 공부하고 운동에 전념하던 그 시기처럼 한 달 정도만 다시 정신 차리고 집중하면 돌아올 수 있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다시 당신이 생각하는 그 옛날로 돌아가기 위해 당신은 처음 배웠을 때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야 할지도 모른단 말이다.


당신이 세월을 멈추게 만들거나 거스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면 배움의 때가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당신의 몸에 배어 평생에 걸쳐 자연스럽게 나오게 하려면 죽는 그날까지 그 수행의 과정을 멈춰서는 안 된다는 점을 공자는 말해주고 싶었던 것이다.

배움은 끝이 없는 것이기에 한순간도 나타해지거나 만족해서는 안 되며, 영원히 도달하지 못할 것 같은 절박한 태도로 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배우고 또 배워나가되 그 배우는 시기를 한 때라도 게을리하여 놓쳐버려 다시 돌아가버릴까를 두려워야 한다는 것이 최고의 정점에 이르렀던 성현이 당신을 위해 던져주는 절실한 외침인 것이다.


들리는가, 그 외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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