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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Mar 10. 2022

천하를 소유하고서도 관여치 않을 수 있겠는가?

작은 권력에 세상을 얻은 듯 방약무인할 무지몽매한들에게.

子曰: “巍巍乎! 舜禹之有天下也而不與焉!”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위대하시다! 舜임금과 禹임금은 천하를 소유하시고도 그것을 관여치 않으셨으니.”
순임금의 상상도

이 장은 특별히 어려운 해석은 없다. 다만 천하를 소유하고서도 그것을 관여하지 않았다는 의미를 잘 새기면 되는데, 이미 천자가 되어 천하를 소유하였는데 그것에 관여하지 않았다는 것은 마치 도교식 어투를 연상하게 만든다. 이는 순임금과 우임금의 위대함이 그 두 사람이 자기 스스로 왕 노릇 한다는 것을 즐거워하지도, 자랑하지도 않았다는 설명이다. 이 장에서 강조하여 그들이 위대한 군주일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것에서 비롯하였다는 설명이기도 하다.


무엇을 가지고 그렇게 판단하는가? 공자의 시대에 왕위의 계승은 너무도 당연한 듯이 세습에 의해 이루어졌다. 자신의 자식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방식이 자리 잡았던 공자 당시의 관습에는 상당히 심각한 문제를 배태하고 있었다. 공자는 그것에 대해 단순히 비판하는 것을 넘어 제대로 다스려지던 중국 고대의 국가까지 거슬러 올라가 진정한 왕위의 계승 방식은 세습하는 것이 아니었음을 확실히 하고 있다.


순임금과 우임금은 아버지가 왕이 아니었다. 

즉, 세습에 의해서가 아니라 덕행과 능력으로 천하를 얻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이 전권을 전횡하는 방식이 아닌 훌륭한 인재를 등용하여 그들에게 정사를 맡겼고 자신의 다음 후사도 그중에서 능력이 있는 자를 선택하여 양위하였다. 그것은 공자의 시대에 어느 위정자도 따르지 못했던 이상적인 양위 방식이다.


천하에 관여하지 않았다는 것은 자신이 임금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 아등바등하지도 않았고 왕위에 올라서도 자신의 지위를 자랑하는 등의 참람된 모습을 보이지도 않았다. 특히 자신의 왕위를 세습하는 방식으로 우를 범하지 않고 가장 일을 잘했던 신하에게 능력에 맞게 양위해주는 모습으로 그 권력이나 자리에 무관심하고 연연하지 않았다. 


그 모든 과정과 마음가짐이 그들이 위대한 임금으로 숭앙받을 수 있는 배경으로 작용했다는 것이다. 특히 자신이 왕의 자리에 있을 때 정치하는 방식에서도 현명한 신하들에게 맡기고 능력 있는 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능력을 십분 발휘토록 하게 하는 ‘무위(無爲)의 다스림’을 그 근본으로 삼았다. 이 부분에 대한 언급은 뒤에 20장에서 다시 나오니 그때 상술하기로 한다.

순임금

그렇다면 늘 언급되긴 하지만 번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해 어렴풋하게 알고 있는 순임금에 대해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정리하는 차원에서 살펴보기로 하자.


순임금은 전욱(顓頊)의 6대손으로 성이 ‘우(虞)’또는 ‘유우(有虞)’씨다. 그래서 흔히 ‘우순(虞舜)’이라 부르며, 이름은 ‘중화(重華)’이다. 눈동자가 겹쳐졌다고 하여 ‘중동(重瞳)’이라고도 불렸다. 그는 기주(冀州) 사람으로 부친은 고수(瞽瞍)이다. (맹인이라는 설이 있지만 맹인이 아니라 세상 물정을 모르는 사람이라는 의미에서 그렇게 불렀다는 속설도 있다.) 순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고수는 다시 아내를 맞이하여 아들 상(象)을 낳았다. 고수는 무도했고 어머니는 험담을 잘했으며 상은 교만했다. 가족이 모두 그를 죽이고자 하였으나 순은 항상 공손하게 자신의 도리를 잃지 않고 효도를 다하였다.


순은 나이 스물에 효성이 지극하다고 소문이 났고, 서른에 사악(四岳)의 추천을 받아 요(堯) 임금으로부터 시험을 받게 된다. 요는 아황(娥皇)과 여영(女英) 두 딸을 순에게 시집보내 그의 행동을 관찰하게 하였다. 그리고 아홉 아들을 그에게 보내어 받들게 했다. 순은 가정생활이 근엄하였으므로 두 딸은 고귀한 신분임에도 순의 가족에 대해 오만하게 굴지 않고 부녀자의 도리를 다했다. 아홉 아들 역시 성실함으로 임했다.


그가 역산(歷山)에서 농사를 지을 때 그곳 주민은 모두 서로 밭의 경계를 양보했고, 뇌택(雷澤)에서 물고기를 잡자 순의 덕에 감화되어 사람들이 서로에게 잘 잡히는 장소를 양보하게 되었다. 또 하빈(河濱)에서 그릇을 구웠는데, 그곳에서 생산되는 그릇은 하나도 조악한 것이 없게 되었다. 순이 사는 곳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1년이 지나자 촌락이 이루어졌고, 2년이 지나자 읍이 되었으며, 3년이 지나자 도시가 형성되었다. 이에 요는 순에게 옷과 거문고를 하사하였고, 창고를 지어주며 소와 양을 상으로 주었다.

한편, 고수는 여전히 순을 죽이려고 했다. 하루는 순에게 창고에 올라가 흙을 바르게 하고 아래에서 불을 질러 창고를 태워버렸다. 순은 양손에 삿갓을 들고 이것을 이용하여 뛰어내려 죽음을 면하였다. 그 후에 또 고수는 순에게 우물을 파게 했다. 순이 우물을 파 들어가자 고수는 상과 함께 흙을 퍼부어 우물을 메워버렸다. 


하지만, 순은 몰래 옆으로 구멍을 파놓아 이것을 통해 나올 수 있었다. 이러한 일이 있은 후에도 순은 더욱 정중하게 아버지를 섬기고 동생을 사랑해주었다. 순은 이처럼 신중하고 어질며 지혜로웠다. 온화하고 공손하며 진실하여 숨은 덕이 조정에까지 들리니, 이에 제위를 이으라는 명을 받게 되었다. 


삼가 오전(五典)을 아름답게 하라 하니 오전이 잘 지켜졌고, 백규(百揆)의 직책을 맡기니 그 직무를 잘 처리하였다. 사문(四門)에서 제후들을 영접하게 하니 사문에 화기가 넘쳐흘렀고, 대록(大麓; 큰 산의 기슭)에 들여놓았으나 매서운 바람과 뇌성을 동반한 폭우 속에서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요임금과 순임금

이에 요는 순이 천하를 물려받을 만하다고 생각했다. 요임금이 말했다.


“그대 순에게 이르노라! 일을 묻고 말하는 것을 살펴 그대의 언행이 공적을 이룰 수 있다고 보아온 지 3년이 되었노라. 이제 그대가 제위에 오르도록 하시오.”


순은 겸양하여 이를 사양하고 제위를 잇지 않았다. 요는 이제는 늙어 정사를 돌볼 수 없다고 여겨 순에게 천하의 일을 대행하게 하고 사방을 다니며 시찰하였다.

'요-순-우'로 이어지는 왕위 계승 과정 순서도

순이 천하의 일을 맡아 행할 때 법을 정해 일정한 형벌을 내리고, 잔혹한 오형(五刑; 살갗에 먹물을 넣는 묵형(墨刑), 코를 베는 의형(劓刑), 발뒤꿈치를 베는 비형(剕刑), 불알을 까는 궁형(宮刑), 죽이는 대벽(大辟) 등의 다섯 가지 형벌)을 유배형으로 대신하여 형벌을 너그럽게 했다. 채찍으로써 관에서 내리는 형벌을 삼고, 종아리 치는 것을 교화의 형벌로 삼았으며, 벌금으로 몸에 가하는 체형(體刑)을 대신하기도 하였다. 과실과 재난 때문에 지은 죄는 용서했으나, 지은 죄를 끝까지 뉘우치지 않을 때는 사형에 처했다. 


형벌은 오직 긍휼히 여겨야 한다고 생각하여 담당 관리들에게 삼가고 또 삼가도록 하였다. 그리고 공공(共工)을 유주(幽州)로 유배 보내고, 환도(驩兜)를 숭산(崇山)에 유배 보냈다. 삼묘(三苗)를 삼위산(三危山) 쪽으로 축출하고, 곤(鯤)을 우산(羽山)에서 참하였다.(곤은 우임금의 아버지로 치수에 실패한 책임을 물어 처형한 것이다.) 이처럼 네 죄인을 단죄하자 천하 사람이 모두 따르게 되었다고 한다.

순임금의 동상

순이 등용되어서 일한 지 20년이 되자 요는 그에게 섭정하도록 하였다. 순이 섭정한 지 8년 만에 요임금이 붕어하였다. 이때 순의 나이는 58세였다. 요의 3년상을 마치고서 순은 요의 아들 단주(丹朱)에게 제위를 양보하였으나 천하 사람들이 모두 순에게 귀의하였다. 


그렇게 순은 61세에 천자의 제위에 오르게 된다. 순은 22명의 대신(大臣)에게 각자 직분을 맡겨 3년마다 한 번씩 그들의 공적을 살폈고, 세 번 살핀 결과에 따라 강등시키거나 승진시키니 백관들의 공적이 하나같이 올라갔다.


대신 중에 특히 고요(皐陶)는 대리(大理)가 되어 공평하게 판결을 내리자 백성이 각기 심복 하고 실정(實情)을 사실대로 토로하게 되었다. 백이(伯夷)가 예(禮)를 주관하자 위아래가 겸양해졌고, 수(垂)가 공사(工師)가 되니 모든 공인(工人)들이 직분에 충실하여 좋은 물건을 만들어냈다.  그중에서 우(禹)의 공이 컸는데, 전국의 9개 산을 개간했고, 9개의 호수를 통하게 했으며, 9개의 강 물길을 통하게 했고, 구주(九州)를 확정했다.

우의 성공적인 치수를 묘사한 그림

위 내용은 《상서(尙書)》의 <우서(虞書)>와 《사기(史記)》의 <오제 본기(五帝本紀)>의 내용을 간추려 정리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임금은 또 어떤 인물이었는지 간략히 살펴보자.

우임금은 중국 고대 국가인 하나라를 건국한 인물이다. 아버지는 앞서 언급했던 곤이며, 곤의 아버지는 오제의 한 명인 전욱이다. 전욱이 황제의 손자이므로 우는 황제의 고손자가 된다. 도산씨(塗山氏)의 딸에게 장가가 계라는 아들을 낳았다. 우는 인덕을 가져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탁월한 정치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장에서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스스로를 자랑하지 않았다.


우는 즉위 후에 한동안 무기의 생산을 중단하고 궁전의 재증축을 재고하였으며 관문이나 시장에 걸려있는 여러 세금을 면제하였다. 그리고 지방에 도시를 만들고 번잡한 제도를 폐지해 행정을 간략화했다. 그 결과 중국 안에서는 물론 밖에서까지도 조공을 요구해 오게 되었다. 


또한 우는 많은 하천을 정비하였고 주변의 토지를 경작해 초목을 키웠으며 중앙과 동서남북의 차이를 기(旗)로써 사람들에게 나타냈고 옛 방식도 답습해 전국을 나누고 구주를 두었다. 우는 검약 정책을 취해 스스로 솔선해 행동했다.

요임금 당시 아버지 곤이 물을 다스리는 명령을 받고서도 제방을 쌓아 홍수를 막으려 하였으나 물길을 커서 큰 물을 소통시키는 방법을 몰라, 결국 그 책임을 물어 순임금이 즉위하자 처형을 당하고 우가 그다음의 일을 맡게 되면서 천하의 물을 다스리는 것으로 인정을 받는다. 전설에 의하면, 우는 황하를 다스리는 13년 동안 3번이나 자신의 집 앞을 지나갔지만 한 번도 집에 들르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머릿속에는 홍수가 범람하여 집이 떠내려가고 다 자란 곡식이 물에 잠기고 사람들이 기근에 시달리는 참상만이 있었다. 황하를 다스려서 백성들을 구제해야 하겠다는 일념으로 불철주야 일했기 때문에 한 번도 집에 들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십수 년간의 노력 끝에 그는 홍수를 바다로 소통시키고 수해 방지에 성공했다. 그는 그렇게 사회를 안정시키고 번영시키는데 큰 기여를 했다.

우임금

이렇게 정리를 해보니 공자가 왜 역사를 언급하면서 순임금과 우임금을 그렇게 위대하다고 칭송하는지를 객관적인 근거를 통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 본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권력욕은 그 어떤 욕구보다 더 강하다. 자신이 위정자가 되기 위해 핏줄을 죽이는 일도 서슴지 않고,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 어떤 짓도 서슴지 않는다. 그리고 그 자리에 오르게 되면 자신의 권력을 자랑하고 그 힘으로 할 수 있는 것 이상의 것을 하겠다며 칼자루를 손에 쥐고 뒤흔든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자리를 유지하는 것은 물론이고 자신의 입지를 위해 뒤를 이를 자를 세습의 형태로 보존한다. 


그래서 자신의 입장을 지지하고 자신의 부정을 캐거나 자신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 자를 지정한다. 하여 자신의 말도 안 되는 만행을 판단하거나 심판하지 못하게 하고자 한다.

역대 최고의 초박빙의 대선이었다. 24만 표 차이. 영화에서 24만 명이 보면 망한 영화라고 할 정도의 정말 어이가 없는 차이일 수밖에 없다. 굳이 복기를 통해 결과를 분석하자면, 60대 이상의 투표율이 80%를 넘겼는데, 40대가 77%밖에 되지 못했다. 나 역시 강남 주민이지만 그 서초를 중심으로 한 강남의 주민들은 기어코 빨간당에 표를 압도적으로 던졌다. 135만의 표가 들어있던 강남 3구를 필두로 서울에 사는 그들이 그렇게 결정했단다.

쭉 강남에 살면서 주변에서 봐왔던 주변 사람들의 그 무책임함과 오로지 세금 세금을 떠들어대던 그 모습을 생각하면 그들이 얼마나 큰 잘못을 하고 실수를 한 것인지 그 책임을 5년간 온몸으로 체감할 수 있기를 바란다. 결국 그에 대한 지지가 아닌 ‘정권교체’를 하겠다는 이승만 시대 때의 ‘못살겠다 갈아보자’식의 태도라던가 ‘파란당 후보가 되면 강남의 우리 집값은 박살 난다. 세금도 어마어마 더 내야 한다’ 따위의 공포감에 의한 이기심이 결국 이 사단을 내고 말았다.


내 의사를 대표하는 이를, 국가의 모든 것을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대통령을 뽑는데, 제대로 일을 할 수 있고 나라를 대표할 수 있는 사람을 뽑는데, 이전의 정권이 싫다고 해서 반대쪽을 찍어야 한다며 투표를 했던 이들이 과연 정상이라 말할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실망한 것은 그러한 무지하고 감정적인 국민들을 혹세무민(惑世誣民)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얻기 위해 틈새를 파고들었던 빨간당이 아니다. 너무도 명료하고 너무도 명징하여 그 흠과 잘못 터럭 하나까지도 다 보이는 그 법비를 나라의 대표로 뽑는 우를 범한 같은 이름으로 ‘국민’이라고 불러야 하는 그들이다.


초박빙의 24만 표라는 차이보다 더 어이가 없는 것은 무효표가 30만 표였다는 것이다. 무효표가 표차보다 더 크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공중부양을 한다며 자기 집을 궁전이라 부르고 아줌마와 할머니들한테 용돈 챙겨 먹는 이가 받은 표가 28만 표나 받아 4위가 되었다는 것도 더더욱 어이가 없게 만든다.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나라가 도대체 어떻게 되려고 이런 국민들이 이런 짓을 벌였단 말인가? 잘못된 것을 잘못이라 지적하고 바로잡지 못하는 이 지경을 어떻게 할 것이란 말인가? 굳이 똥인지 된장인지 찍어먹어 봐야만 알겠다고 그런 짓을 벌인 이 어리석은 자들아! 정말로 스스로 개돼지의 탈을 쓰고야 말았구나. 오호, 통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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