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발검무적 Mar 11. 2022

백성의 아버지가 되는 일이 그리 쉬운 일이겠는가?

공자가 요임금을 극찬한 이유에 대하여.

子曰: “大哉堯之爲君也! 巍巍乎, 唯天爲大, 唯堯則之! 蕩蕩乎, 民無能名焉! 巍巍乎其有成功也! 煥乎其有文章!”
공자께서 말씀하였다. “위대하시다! 堯의 임금 노릇 하심이여! 높고 크다. 오로지 하늘이 가장 크거늘, 오직 요임금만이 그와 같으셨으니, (그 공덕이) 넓고 넓어 백성들이 무어라 형용하지 못하는구나. 높고 높은 그 성공이여! 찬란한 그 문장이여!”

바로 앞 장에서 순임금과 우임금의 위대함을 천자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관여하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칭송한 내용에 왜 그 이전의 요임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았는가 궁금해했다면 따로 이 장에서 훨씬 더 극찬을 하기 위함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주자는 공자의 요임금을 극찬한 의미를 다음과 같이 꼼꼼히 풀어 해설해 주고 있다.


蕩蕩은 넓고 원대한 것을 지칭한다. 만물 중에 높고 큰 것은 하늘보다 더한 것이 없는데, 요임금의 덕만이 능히 하늘과 더불어 평준이 되었다. 이 때문에 그 덕이 넓고 원대함이 또한 하늘과 같아서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것과 같음을 말씀한 것이다.


공자는 요임금의 덕을 극찬함에 있어 그 공덕은 너무도 큰 데 보이지가 않으니 그것을 칭송하고자 하여도 백성들이 어떻게 형용하지 못할 지경이었다고 설명하면서 그나마 가시적으로 보이는 성과에 해당하는 성공과 문장을 칭송하고 있는데, 그 부분에 대해 주자는 다음과 같이 해설해주고 있다.


成功은 事業이다. 煥은 찬란히 빛나는 모양이다. 文章은 禮樂과 法度이다. 堯임금의 덕은 형용할 수 없고, 볼 수 있는 것은 이것뿐이다.


보이지 않는 덕이 너무 큰데, 그것을 백성들이 어떻게 형용할 수조차 없어 뭐라 설명할 수 없음을 안타까워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공덕이 컸다는 것이 도대체 어떤 부분을 말하는 것인지 구체적으로 이해하고 싶어 하는 배우는 자들을 위해 윤 씨(尹暾)는 이 장의 가르침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천도(天道)의 큼은 무위(無爲)이면서 이루어지는데, 오직 이룬 오직 堯임금만이 이것을 본받아서 천하를 다스렸다. 그러므로 백성들이 그 덕을 형용할 수 없고, 형용할 수 있는 것은 그 사업과 문장이 위대하고 찬란할 뿐인 것이다.”


앞의 장에서 잠시 언급했던 ‘무위(無爲)’로 공덕의 구체적인 윤곽을 드러내고 있다. 정치의 궁극적인 도달점은 자신이 무언가를 억지로 하겠다고 해서 하는 것이 아님을 최고 경지로 삼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정리한 말이다. 그런데 그 정점에 이른 사람으로 공자가 인정하고 극찬한 사람은 요임금이라는 것이다.


조선의 성호 이익(李瀷)은 요임금이 하늘을 본받았다는 점에 대해 ‘요임금이 하늘의 공평함을 본받아서 천하를 그 아들에게 넘겨주지 않고 어진 자에게 주었으니, 그것이 공정함이 크다는 것이다’라고 했다. 이것은 앞서 공자가 순임금과 우임금이 아버지를 왕으로 두어 세습하는 방식으로 천자가 되지 않은 것, 즉 양위 방식에 의한 것을 공덕의 첫 번째 기준으로 삼았던 것과 같은 맥락에서 해설하여 정확하게 이해한 것이다.


이제 앞 장에서와 같이 堯임금에 대해서 조금 상세하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정리하고 갈 필요가 있겠다.

堯임금은 고대 중국의 삼황오제(三皇五帝) 전설에서 오제(五帝)에 해당하는 인물이다.

도(陶) 지방에서 태어나 당(唐) 지방에 나라를 세웠다고 한다. 출신지와 성장 배경을 따서 ‘도당씨(陶唐氏)’라고 부르기도 하고 ‘당요’라고 하기도 한다. 일각에서는 출신지 이름(질그릇 도陶)과 요(堯)라는 이름을 종합해 볼 때, 정교한 토기 제작 기술을 보유한 집단의 지도자로 추정하기도 한다. 《사기(史記)》에는 20세에 왕위에 올라 70년간 나라를 다스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堯는 성군의 자질을 고루 갖추었던 이였다.

임금인데도 매우 검소하여 겨울에는 가죽 옷을, 여름에는 삼베옷을 입었으며 띠집에 살면서 채소 국의 소박한 음식들로 끼니를 채웠다고 한다. 워낙 자신을 돌보지 않고 백성들을 위한 일을 돌보았던 탓에, 악전(齷佺)이라는 신선이 요를 보고 “저렇게 피골이 상접하도록 생긴 것이 과연 임금의 얼굴이란 말인가?”하고 동정하여 수명을 늘릴 수 있는 신령스러운 잣을 나누어줬다는 이야기도 전하는데, 정작 그것을 받고서도 먹을 새도 없이 다시 일했다고 한다.


덕분에 천하는 평화로워져 시골 노인이 평상복 차림을 한 요 임금 앞에서 태평성대에 취해 막대기로 땅을 치며 [擊壤] “해가 뜨면 일하고 해가 지면 쉬고, 우물 파서 마시고 밭을 갈아먹으니, 임금의 덕이 내게 무슨 소용이 있으랴.” 하는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고 하는데, 이 일화에서 태평성대를 의미하는 <격양가(擊壤歌)>가 유래했다고 한다.

이 장의 주석에서 언급하고 있는 바와 같이 무위(無爲)의 정치는 가장 기본적인 것이 신하를 잘 가려서 적재적소에 쓰는 것이다. 《사기(史記)》에서는 요임금이 신하를 어떻게 적재적소에 배치하였으며 어떻게 명을 내려 그 밸런스를 유지했는지를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희씨(羲氏)와 화씨(和氏)에게 하늘을 공경스럽게 따르고 일월성신의 운행 법칙을 헤아려서 인민에게 삼가 때를 맞추도록 명령했다. 희중(羲仲)에게는 양곡(暘谷)이라고 불리는 욱이(郁夷)에 머물러 있으면서 떠오르는 해를 공손히 맞이하고 때맞추어 농사를 짓게 하라고 명령했다. 낮밤의 길이가 같은 날 조성(鳥星)이란 별이 하늘에 나타나는 시각을 잡아서 춘분을 정하게 했다. 이때가 되면 인민은 들로 나가 농사를 지었고, 새나 짐승은 교미해 새끼를 낳았다. 희숙(羲叔)에게는 남교(南交)에 살면서 때맞추어 여름 농사를 받들게 하라고 명령했다. 낮이 가장 긴 날 화성(火星)이 정남쪽 하늘에 나타나는 시각을 잡아서 하지를 정하게 했다. 이때가 되면 인민들은 여전히 농사에 바빴고, 새나 짐승들은 털갈이를 하느라 털이 성글었다.


화중(和仲)에게는 매곡(昧谷)이라는 서토(西土)에 살면서 지는 해를 공손히 보내고 가을 농사를 때맞추어 잘하게 하라고 명령했다. 밤과 낮의 길이가 같은 날, 허성(虛星)이 정남쪽 하늘에 나타나는 시각을 잡아서 추분을 정하게 했다. 이때가 되면 인민들은 편하고 느긋했고, 새나 짐승들은 새 털이 났다. 화숙(和叔)에게는 유도(幽都)라는 북방(北方)에 살면서 겨울 곡식을 잘 저장하게 하라고 명령했다. 낮의 길이가 가장 짧은 날 묘성(昴星)이 정남쪽 하늘에 나타나는 시각을 잡아서 동지를 정하게 했다. 이때가 되면 인민은 따뜻하게 지냈고 짐승들에게도 따스한 털이 났다. 1년을 366일로 정하고, 3년에 한 번씩 윤달을 두어 사계절을 바로 잡았다. 백관들의 성과를 심사하니 모두의 업적이 올라갔다.


‘무위(無爲)’라고 하여 자신이 아무것도 잘 모르면서 그저 그 분야의 전문가를 불러서 그에게 일임하고 신경 쓰지 않는 방식이 아니었다. 자신이 모든 것을 다 알고서 일을 시켰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시기는 물론이고 장소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일러주었고 무엇보다 그 일의 목적을 명확하게 하여 그들이 잘못 엇나가지 않도록 지도자이자 스승의 입장을 취하며 전체를 바르게 이끌었다.


그렇게 어느 정도 체계를 갖추고 나자, 자신의 뒤를 누가 이어서 나라를 더 발전시킬지에 대해서 당연히 고민하게 된다. 요임금에게는 멀쩡한 아들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뒤를 누가 이을지 고민했다는 사실은 그것만으로도 그의 사람됨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앞서 주석을 통해 성호 이익이 말했던 것처럼 그저 단순히 자신의 아들이 아닌 능력 있는 인물을 찾아 그에게 권력을 양위했다는 단순한 구조가 아님을 《사기(史記)》에서 다음과 같이 그 과정에 대해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요가 “누가 이 일을 이어받을 수 있을까”라고 묻자, 방제(放齊)가 “후계자이신 아드님 단주(丹朱)께서 사리에 밝고 명석하십니다”라고 대답했다. 요는 “아, 덕이 없고 다투길 잘해 쓸 수가 없네”라고 했다. 요가 “누가 괜찮겠는가?”라고 다시 물었다. 환두(讙兜)가 “공공(共工)이 사람들을 널리 모아서 많은 업적을 세우고 있으니 그가 쓸 만합니다.”라고 대답했다. 요는 “공공은 말은 잘하지만 사람을 치우쳐 등용하고, 겉으로는 공손한 것 같지만 하늘마저 업신여기니 안 되오”라 했다.


요가 또 “아, 사악(四嶽)이여! 홍수가 하늘까지 넘쳐서 물줄기가 산을 감싸고 언덕까지 덮치니 인민들의 걱정이 태산인데, 이 홍수를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이 없겠소?”라고 물었다. 모두들 곤(鯀)이 그 일을 할 수 있다고 했다. 요는 “곤은 명을 어기고 동족을 훼손시켰으니 안 되오.”라 했다. 사악은 “그렇지 않습니다. 시험해보시고 안 되면 그만두셔도 됩니다”라고 했다. 요는 그리하여 사악의 말을 듣고 곤을 기용하게 된다. 하지만 곤은 9년이 지나도록 공을 이루지 못하였다.


요가 “오, 사악(四嶽)이여. 짐이 자리를 지킨 지 70년, 그대들도 일을 할 수 있으니 짐의 자리를 맡으시오”라 했다. 사악(四嶽)은 “비천한 덕으로 제왕의 자리를 욕되게 할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이에 요가 사악(四嶽)에게 “귀한 친척이 되었건 관계가 멀지만 숨어 있는 사람이 되었건 모두 천거해 보시오”라고 했다.


모두 한 입으로 요에게 “민간에 우순(虞舜)이라는 홀아비가 있답니다”라고 말했다. 요는 “그렇소. 짐도 들었는데 어떻소”라고 물었다. 사악은 “장님의 아들인데 아비는 나쁘고, 어미는 남을 잘 헐뜯고, 동생은 교만합니다. 하지만 효성을 다해 화목하게 지내고, 점점 나아지게 하여 간악하지 않게 했습니다”라고 답했다. 요는 “내가 그를 시험해보리다”라고 말했다.




이렇게 되어 어제 장에서 설명했던 바와 같이 요임금은 자신의 딸 둘을 순임금에게 보내 그를 시험하게 되는 과정을 거치며 그의 능력을 충분히 검증하고 천자의 자리를 양위하게 된다. 물론 순임금도 냉큼 그 자리를 받지 않는다. 그것이 도리가 아니라고 여겼기에 고사하다가 결국 요임금 대신에 섭정을 하다가 요임금이 세상을 떠나고서도 그의 아들에게 자리를 양보했지만 사람들이 자신만을 따르는 지경이 되자 마지못해 천자의 자리를 잇는다.


어제도 설명할 때 이야기했지만, 중국 고대의 전설에서 이어져 나오는 구체적인 첫 임금이 자신의 자리를 자신의 아들에게 세습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주 큰 의미를 갖는다. 성호 이익이 보았던 것처럼 그 첫 전범을 남긴 인물로 요임금은 상징적인 의미를 가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대강 고문의 이야기를 귀동냥으로 듣고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할까 싶어 오늘 요임금에 대해 간략하지만 정리를 해보았다.


한 나라의 지도자가 된 자의 몰골이 일하느라 힘겨워졌다는 모습은 요임금이 어떻게 국정을 임했는가에 대한 상징적인 설명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순임금도 그러하였고 자신의 아버지가 치수(治水)를 담당했는데, 9년이나 맡긴 치수에 성과를 거두지 못하여 결국 처형당하고서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그 일을 제대로 해냈다는 공적으로 천자의 자리를 계승하게 된 우임금의 경우는 더더욱 그러하다.


무엇보다 오늘 요임금이 천자의 자리를 양위하기 전의 국정을 다스리는 모습을 상세히 설명한 이유는 백성들을 돌보는 진정한 위정자의 모습을 그가 보여줬기 때문이다. 머리가 나쁘고 공부하지 않고 부지런하지 않은 자는, 자신이 공부하지 않고 그저 전문가랍시고 불리는 자를 ‘소개받아’ 그에게 맡기고 그가 하는 대로 따른다. 요임금이 나라의 기반을 닦았기에 고대의 중국은 나라의 형태를 갖출 수 있었고, 그가 아들이 아닌 제대로 된 사람을 그렇게 찾고 또 찾았으며 그 긴 기간에 걸쳐 자신의 딸들을 보내 관찰하고 시험하였음에도 조심스럽기 그지없었다.

위에서 사마천이 적어 내려 간 《사기(史記)》의 기록을 보고 내가 생각건대, 요임금은 자신이 그렇게 피골이 상접할 정도로 온 몸과 온 영혼을 바쳐가며 기반을 닦은 나라를 당연히 사랑했을 것이고, 그것으로 인해 무언가를 얻고 누리기보다는 아무것도 없었던 것에서 무언가를 만들고 체계가 세워지고 그것이 번듯한 나라의 모양새를 갖춰가는데 보람을 느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 그저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만으로 국정을 행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피땀 흘려 만든 그 나라를 자신의 아들에게 ‘누리라고’ 넘겨주는 것이 아님을 누구보다 더 절실하게 느꼈을 것이기에 적임자를 찾아 헤매었을 것이다.



이제 청와대를 나오는 문재인 대통령을 나는 그다지 개인적으로 좋아하지 않는다. 노무현 대통령이 그를 변호사의 동료로 만났고 그를 측근으로 청와대에 불러 자신의 일을 돕게 하면서도 노 전 대통령은 문재인 대통령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당신은 대통령 할 사람이 못되니까 대통령은 하지 마.”


문재인 대통령이 박근혜에게 당시로서는 근소한 차이로 국민들에게 선택되지 못하였을 때, 그는 쓸쓸히 승복 선언을 하고 다시 고향으로 발길을 돌려야만 했다. 물론 그가 권토중래(捲土重來)를 다짐하며 절치부심(切齒腐心)했을지에 대해서는 미지수이다.


하지만, 문재인 대통령이 대통령이 되기 전보다 얼굴이 훤해지거나 마음이 편해서 피둥피둥 살이 올라 편안해 보이는 얼굴을 나는 본 기억이 없어 보인다. 그가 박근혜에게 당시로서는 근소한 차이로 인해 선거에 패배했을 때에도 허망한 결과에 마음도 몸도 무기력해진 이들을 위해 프리허그라도 해주겠다며 이벤트를 벌인 이도 있긴 했다.

그만큼 그 결과에 분노하고 억울해한 이들이 많았다. 결국 한참이 지나서야 당시 국가기관을 통해 대놓고 인터넷 언론전을 주도했다는 사실이 나중에 드러났다. 이명박과 박근혜는 이미 서로 경선을 통해 서로 간의 치부를 치고받았고 그들의 입에서 나온 증거들이 사실로 인정되어 끝내 감옥에 들어갔다.


그들은 대통령이 되었지만, 그들이 저지른 과오로 인해 결국 감옥을 갔다. 쿠데타를 일으켜 국민에게 총부리를 겨누었던 군바리 두 대통령도 똑같이 감옥으로 갔다.


누구든 과오가 있다면 새로 당선된 그가 입이 닳도록 말하지 않더라도 역사는 그에게 그 대가를 물을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천하를 소유하고서도 관여치 않을 수 있겠는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