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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Mar 18. 2022

성폭행을 당하고도 피의자로 몰려 감옥까지 가야 했지만,

듣는 이들의 심금을 울리는 전설의 목소리로 자기 삶을 노래하다.

189번째 대가의 이야기.


1915년,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필라델피아의 슬럼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유랑악단의 기타리스트였는데, 그녀가 태어나기도 전에 그녀의 어머니를 버렸다. 그녀가 태어날 당시 아버지는 16세, 어머니는 13세였다. 어머니는 슬럼가 거리의 창녀였으며, 그녀 역시 그러한 어린 나이에 창부의 삶을 살 수밖에 없는 환경에 처했다. 본명이 일리노어 페이건(Eleanora Fagan)인데, 페이건(Fagan)이란 성은 어머니를 따른 것이다.

딸을 양육할 능력이 없던 어머니는 일리노어를 친정에 맡겼다. 일찌감치 양쪽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일리노어는 외가에서 외로움과 학대 속에서 자라며 불행한 유년기를 보냈다. 그리고 열 살이 되자 돈벌이에 나서야만 했다. 일리노어는 이때부터 노래 듣기를 좋아해서 축음기가 있는 집으로 일 나가는 것을 좋아했다.


일리노어는 열 살 나이에 일하러 나간 집에서 백인 남성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성폭행을 당했을 때, 상대는 40대의 백인이었고 그녀는 10살이었다. 그러나 경찰은 백인을 처벌하지 않고 오히려 흑인인 그녀를 불량소녀로 몰아서 감호소에 집어넣었다. 감호소에서 몸과 마음에 상처를 입고 풀려나온 그녀는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다른 흑인 남자에게 또다시 성폭행을 당했다. 


결국 살던 곳에서 나온 그녀는 어머니와 함께 뉴욕의 할렘 가로 갔지만,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창부의 일뿐이었다. 15살까지 할렘가에서 창부로 일하던 그녀는 성행위를 강요하던 흑인의 말을 듣지 않다가 매춘 행위로 고발되어 다시 감옥으로 들어가게 된다.


당시 미국은 경제 대공황을 맞고 있었다. 1929년부터 몰아닥친 사상 최대의 경제공황은 각종 경제활동을 마비시키며 미국인들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 감옥에서 나온 이후, 창부의 생활을 접은 채 백인의 집에서 하녀 생활을 하던 그녀와 그녀의 어머니는 곧 찾아온 미국의 대공황 속에 다시 일자리를 잃었다. 


각박한 현실은 나이 어린 흑인 창녀의 삶 하나도 제대로 유지시켜주지 못했다. 몸을 팔아봤자 일리노어가 벌어들일 수 있는 돈은 푼돈에 불과했다. 입에 풀칠하는 것도 어려운 날이 늘어만 갔다. 수시로 경찰에 잡혀 유치장을 들락거려야 했던 일리노어는 마침내 살던 집에서도 쫓겨날 지경에 이르렀다.

미국의 재즈 가수로 사라 본, 엘라 피츠제럴드와 함께 재즈 3대 디바로 전 세계의 심금을 울리는 목소리로 기억되는, 우리에게는 빌리 홀리데이(Billie Holiday)로 더 유명한, 본명 엘리노라 고프 해리스(Eleanora Gough Harris)의 이야기이다.


음악적 동료인 레스터 영이 지어준 ‘Lady Day’라는 별명을 갖고 있으며, 재즈 역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보컬로 평가받는다. 억양과 템포를 조절하는 새로운 보컬 형식을 창조하였으며, 무엇보다 자신의 현실을 노래에 이입하여 진심 어린 감정을 표현하였다. 이에 대해 평론가 존 부시는 ‘미국의 팝 보컬의 예술을 영원히 바꿔놓았다.’라고 평하였다.

일리노어는 급박한 심경으로 ‘포즈와 제리즈(Pod`s & Jerr's)’라는 나이트클럽에 댄서로 응모했다. 가난 속에서 초등학교 5학년까지 다닌 것이 전부인 데다가 무대에서 어떻게 하는 것인지조차 본 적도 없었던 일리노어는 당연히 떨어졌다.


그렇게 떨어지고 눈물을 떨구며 가게를 나서려던 그때였다. 나이트클럽 주인의 면박을 받으며 힘없이 돌아서던 일리노어에게 피아노 연주자가 장난 삼아 노래나 한번 불러보라고 권한 것이다. 피아니스트는 ‘Trav`lin All Alone’이란 곡을 연주했다. 일리노어가 매번 들어서 잘 아는 노래였다. 평소 노래를 좋아했던 일리노어는 반주에 맞춰 노래를 시작했다. 일리노어의 노래는 그녀가 댄스 오디션을 보는 내내 눈길조차 주지 않던 시끌벅적한 홀 안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듣고 있는 사람의 가슴 깊은 곳까지 파고드는, 온몸을 전율하게 하며 심금을 울리는 처절한 비명과도 같은 음색의 노래였다. 그 당시 그 자리에 있던 사람은 그 광경을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뒤늦게 그 같은 분위기를 감지했다. 홀 전체가 숨을 죽이고 있었다. 만약 누가 핀이라도 하나 떨어뜨렸다면 그것은 마치 폭탄이 터지는 소리 같았을 것이다.”


마치 영화 속의 한 장면처럼, 홀 안의 사람들은 그녀의 노랫소리에 일제히 하던 일을 멈추고 조용히 노래를 듣기 시작했다. 노래가 끝났는데도 꿈같은 정적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어느 자리에서는 술잔을 앞에 놓고 소리 없이 눈물만 흘리는 사람도 있었다. 노래를 마친 그녀가 꿈에서 깨어난 듯 눈을 뜨기가 무섭게 우렁찬 박수소리가 홀 안을 가득 채웠다. 그녀가 부른 것은 노래였지만, 사람들은 가슴을 울리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감동에 젖어들었다. 그날 밤 피아니스트와 반으로 나눈 그녀의 팁은 무려 57달러나 되었다.

그 노래 한 곡으로 흑인 창녀 일리노어 페이건은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가수 빌리 홀리데이로 다시 태어났다. 주급 18달러짜리 나이트클럽 가수로 무대에 서게 된 그녀는 어린 시절 우상이었던 영화배우 ‘빌리 도브(Billie Dove)’의 이름과 자신의 아버지의 성을 따 ‘빌리 홀리데이’라는 예명을 지었다. 


그녀의 아버지 클라렌스 홀리데이는 당시 빅밴드 플레처 핸더슨 악단의 벤조 연주자로 알려져 있었는데, 처음엔 빌리 홀리데이를 자신의 딸로 인정하지 않았으나 그녀가 명성을 얻고 돈을 벌기 시작하자 아버지임을 자처하며 돈을 뜯어가기 시작했다.


언제나 머리에 새하얀 치자꽃을 달고, 목소리가 아니라 온몸으로 노래하는 가수 빌리 홀리데이는 단번에 재즈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녀는 그렇게 극적인 인생 역전의 과정을 통해 역경 속에서 뉴욕의 클럽에서 그 노래를 인정받기 시작했으며, 1933년 클라리넷 연주자이자 지휘자로 악단을 이끌며 당시 ‘스윙의 왕’이라 불리던 베니 굿맨(Benny Goodman), 평론가 존 해먼드와의 만남을 시작으로 18세의 나이에 음반을 내고 본격적으로 재즈 가수로서의 성공가도를 달리기 시작한다. 팬들이 그녀의 음색에서 가장 먼저 얻을 수 있는 것은 말기 감성을 쥐어짜는 그녀의 우울한 감성이지만, 초기에는 듀크 엘링턴, 카운트 베이시와 같은 스윙밴드의 보컬로 많은 인기를 얻었다.

꼿꼿이 허리를 펴고 무대 위에 선 그녀의 자태는 몹시 품위 있고 우아한 데다 기품이 넘쳐 ‘레이디 데이(Lady Day)’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기품 있는 숙녀 빌리 홀리데이'라는 의미의 이 별명은 시련과 고난 속에서도 담담히 예술혼을 펼치던 그녀를 위한 찬사와도 같은 것이었다.


그녀가 전 미국적인 관심을 받은 것은 1939년 뉴욕의 클럽인 카페 소사이어티에서 <이상한 열매(Strange Fruit)>를 부르면서였다. 카페 소사이어티는 흑인과 백인이 함께 즐기는 공연장이었다. 쇼의 맨 마지막 순서에 등장한 빌리 홀리데이는 슬프고도 처절한 목소리로 흑인들의 아픔을 노래했다.

<이상한 열매(Strange Fruit)>이라는 곡은 1939년 폐렴에 걸렸음에도 흑인이라는 이유로 병원 치료도 제대로 받지 못한 자신의 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만든 노래였다. 루이스 앨런의 시에 노래를 붙인 이 곡은, 흑인들이 백인에게 폭력을 당한 다음 나무 위에 목이 매달린 풍경을 묘사한 곡이다. 이후 이 노래는 여성 작가 릴리언 스미스에 의해 소설로 발표, 1944년 미국 최고의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으며, 빌리 역시 이 곡으로 1944년 에스콰이어 재즈 보컬상을 수상한다.

빌리 홀리데이는 처음에는 그 노래의 의미를 몰랐고, 노래에 몰입하지도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는 어느 순간 이 노래를 부르면서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20세기 초 흑인으로 미국에 살고 있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고 또한 일상처럼 겪었던 인종차별의 아픔을 그대로 전하는 노래였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빌리는 이 노래 <이상한 열매>를 부를 때마다 더욱 혼신의 힘을 다했고, 사람들은 그녀의 노래를 통해 인종차별의 잔인함에 대해 각성할 수 있었다. 실제로 카페 소사이어티에서 그녀가 이 노래를 시작할 때면 클럽은 모든 조명을 끄고, 오직 빌리를 비추는 작은 조명만이 그녀의 얼굴 위로 흘러내려 그녀의 호소력 짙은 목소리에 힘을 더해주었다고 한다. 

유년 시절의 불행한 개인사를 넘어 흑인 전체의 억압과 불행을 노래한 이 노래로 빌리 홀리데이는 미국 사회에 인종차별에 대한 반성과 경각심을 불러일으켰고, <타임(Time)>지에 사진이 실리는 최초의 흑인이 되었다.


무대 위의 빌리 홀리데이는 모든 사람의 사랑을 받는 가수였다. 그러나 무대 아래로 내려오면 가혹한 인종 차별 속에서 빌리 홀리데이 역시 더러운 검둥이에 지나지 않았다. 그녀는 무대에 오르기 전 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뒷문으로 클럽을 드나들어야 했으며, 무대 위의 그녀를 보며 연호하던 백인 재즈 팬들도 무대 아래의 그녀에겐 싸늘한 시선을 보냈다.


그녀가 활동하던 시절에는 경쾌한 리듬의 백인 빅 밴드나 스윙 재즈가 유행하던 시절이었다. 함께 연주하던 백인 빅 밴드들이 순회공연을 끝내고 따뜻한 호텔방에서 피로를 풀 동안, 메인 보컬인 빌리 홀리데이는 추운 밤거리로 나가 잠자리를 찾아 헤매기가 일쑤였다. 흑인을 재울 수 없다는 호텔의 방침 때문이었다.

이런 비참한 현실 속에서 빌리 홀리데이는 외로움과 쓸쓸함을 녹여 보려고 성급히 결혼을 한다. 1941년 첫 번째 남편 제임스 먼로와 결혼했지만 심한 마약 중독자라서 이혼하게 되는데 오히려 그녀가 마약 중독자의 굴레에 빠져들었다. 


두 번째 남편 존 래비는 사랑보다는 그녀의 돈만을 갈취하는 쓰레기 인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 이혼하고 만다. 세 번째 남편 역시 마약과 무기 혐의 소지 때문에 여러 번 옥살이를 거듭한 범죄자로 홀리데이를 괴롭혔던 나머지 견디지 못해 이혼했다. 


그 외에도 그녀는 베니 굿맨, 오슨 웰스 등과 연애를 했지만 그다지 오래가지 못했고, 결론적으로 그녀는 자신의 일생 가운데 제대로 된 사랑을 단 한 번도 하지 못한 불행으로 가득 찬 삶을 산 여자였다.


재즈 가수로서 성공은 했지만 인종 차별이 워낙 극심했던 시절이라 알게 모르게 차별을 많이 당했으며 극심한 알코올과 마약 중독 때문에 가난에 시달렸고 나중엔 듀크 엘링턴이나 마일스 데이비스에게 약값을 빌리는 지경에 이르기도 했다. 그래서 보다 못한 마일스는 마약 중독 치료를 권할 정도였다.

1950년에 들어서는 그녀의 이러한 마약과 알코올 중독이 그녀의 삶을 완전히 갉아먹기 시작했다. 게다가 마약 중독 이후로 그녀의 목소리는 천천히 망가졌다. 하지만 현재까지도 수많은 팬들 가운데는 마약에 중독돼서 갈라진 목소리로 부르는 노래를 오히려 더 좋아하는 사람들도 많다. 한층 더 호소력이 있는 목소리로 느껴지게 된 것이다.


그렇게 그녀는 금단과 중독을 계속해서 왔다 갔다 하며 스스로를 괴롭히며 처참하게 망가져갔다. 삶의 마지막까지 녹음을 했으며 1959년 5월 맨해튼에 위치한 자신의 아파트에서 쓰러진 이후 뉴욕 메트로폴리탄 병원에 입원했다. 마약에 찌들은 중년의 여인을 아무도 빌리 홀리데이라고 알아보지 못했다. 본명 일리노어 페이건이라는 이름표가 붙은 딱딱하고 차디찬 병상에서 빌리 홀리데이는 역시 외로운 마지막을 맞이했다. 44세의 이른 나이였다. 진료 기록에는 ‘병명 마약 중독 말기, 치료 방법 없음’이라고 쓰여 있었을 정도였다.

재즈 역사상 가장 위대한 목소리로 일컬어지는 빌리 홀리데이. 그녀는 영감에 넘치는 목소리는 끊임없이 차별 없는 자유를 염원했고, 그녀의 곡 해석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것이었다. 


그녀가 그런 목소리와 그런 곡 해석 능력을 갖게 된 것은 그녀가 철이 들기도 전에 겪었던 인생역정이 준 등가교환의 법칙에 의거한 일종의 대가와도 같은 것이었다. 빌리 홀리데이의 노래 속에는 그녀의 처절한 삶이 있었다.


냉정하게 재즈 3대 여성 싱어로 꼽히는 다른 가수들과 비교해보면, 그녀의 가창력과 정교함은 엘라 피츠제럴드의 그것에는 달하지 못하였고, 사라 본의 아름답고도 풍부한 음색과 비교하더라도 비교 자체가 어렵다고 할 정도로 부족하다는 것이 중평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3대 여성 재즈 보컬로 당당히 언제나 빌리를 먼저 꼽는 이유는 하나이다. 그녀의 노래에서는 가창력과 음색 같은 정량치의 그것들을 초월하는 듣는 이의 마음을 울리는 무언가가 있다는, 모든 사람들의 공통된 느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노래는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영혼의 노래이다.

대체적으로 그녀의 삶이 워낙에 비극적인 요소들로 가득 점철되어 있다 보니, 재즈 보컬 가운데 가장 감성을 극대화시키는 보컬리스트로 알려져 있다. 물론 엘라 피츠제럴드나 세라 본, 카멘 맥레이, 에비 링컨과 같은 동시대의 여성 재즈 보컬리스트들 역시 그다지 순탄한 삶을 산건 아니지만 빌리 홀리데이의 삶과 비교하면 그 어느 누구도 그녀보다 더 굴곡진 삶을 살았다고 자처할 수는 없을 것이다.


시대적으로 어찌 보면 20세기 초반의 미국 흑인 여성으로서의 일반적인(?) 불우한 삶을 살다가 간 마약 중독자의 비극적인 삶을 이야기하려고 오늘 재즈 보컬 레전드인 그녀를 소개하는 것이 아니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세상은 등가교환의 법칙으로 이루어진다. 그녀가 흑인이었고 불우한 가정사를 가지고 있으며 제대로 된 부모를 갖지 못하고 비참한 세월을 내내 살았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등가교환 법칙에 의거하여 그녀는 그 굴곡진 삶이 그대로 녹아들어 간 목소리와 그것을 표현하는 능력을 이미 10대에 갖추게 되었다. 그녀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인 말년에 그녀는 마약으로 이미 목소리가 갈라지고 막장인 컨디션이었지만, 그때까지도 녹음된 곡을 들어보면 그녀의 목소리는 더 깊이 있게 듣는 이들의 심장을 긁어대는 마력을 구사하고 있다. 그것은 그녀의 고통으로 아로새겨지며 얻어진 목소리이고 그녀가 그 고통들을 대가로 지불하고 악마에게 얻어낸 것들인 듯 들린다.

대부분의 불우한 환경을 딛고 스타가 될 경우에는, 어느 정도 전성기에는 삶이 윤택하고 행복하며 뭔가 여유로워져야만 한다. 하지만, 오늘 살펴본 것과 마찬가지로 그녀의 삶은, 결혼을 세 번이나 하고 그 안에 안주하고 싶어 발버둥을 치던 어리고 가난하며 정에 굶주렸던 한 흑인 소녀가 계속 유리병 안에 갇혀 있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오히려 그녀는 그저 그녀의 목소리로 노래할 때만이 진정 살아 있는 사람이고 그 노래를 표현할 때만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사랑에 결코 교만하거나 그것을 온전한 자신의 것으로 누리지도 못했다.


농담처럼 사람들은 이야기한다. 천상의 목소리를 갖게 된다면 외모가 그다지 예쁘지 못한 경우가 많은데, 그것은 하늘이 공평하다는 증거라고. 돈이 많은 부자에게는 아무런 고민이나 걱정이 없을 것이라고 부러워하는 이는 돈이 없기 때문에, 그 돈 때문에 자신이 불행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마음을 먹는다. 자신이 뚱뚱하고 못생긴 사람은 예쁘고 날씬한 아이돌이나 배우를 보며 자신은 왜 저렇게 생기지 못했는지에 대해 부모를 원망하고 하늘을 원망한다. 

하지만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운동해서 살을 빼고 건강한 몸을 만들고 자신을 가꿔서 아이돌로 데뷔하거나 배우로 유명해진 경우도 있다. 즉, 자신이 부족하거나 없다고 생각하는 것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결핍이 지금의 불행을 가져온 원인이라고 착각을 한다.


내가 실패하고 사람들이 나를 무시하는 것 같고, 내가 자격지심에 늘 나가던 모임에도 나가지 못하게 되는 것은 나 때문이지 결코 그들 때문이 아니다. 나만 실패하는 것 같고, 나만 잘 못 나가는 것 같다고 생각하지만, 행복해 보이는 어느 가정이나 어떤 사람이나 힘겨운 고민거리는 모두 있다. 짜증 나고 힘겹고 고통스러운 것은 결코 당신에게만 찾아오는 불행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려고 빌리의 삶을 오늘 당신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그저 우연히 빌리 홀리데이의 호소력 짙은 목소리가 얻어졌을 것이라 생각하고, 그녀의 곡 해석 능력이 천부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것이라고 착각하며 레전드를 그저 칭송하고 부러워하기만 했던 당신에게, 인생은 그런 것이 아니라는 일깨움을 주기 위해 그녀의 이 비참하기 그지없는 삶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녀는 끊임없이 자신의 결핍을 벗어나고자 발버둥 쳤지만, 결국 그렇게 하지 못했다. 남편이 마약중독자라는 것을 알고서 이혼했지만, 이미 그를 통해 마약에 깊이 중독된 터였고, 자신의 유명세를 등에 업고 돈만 뜯어가던, 자신을 버린 아버지와 두 번째 남편에게서 벗어나고자 했지만, 결국 자신이 그렇게 고생했던 경제를 관리하지 못해서 파멸로 치달았다. 


만약 그녀가 그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면, 그녀는 새로운 삶을 살았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녀의 곁에 그녀가 알지 못한 것을 일깨워주고 이제 과거의 굴곡진 삶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이끌어준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었더라면 그녀의 삶이 그렇게 비참하게 마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가장 이상적인 것은 자신이 그것을 깨닫고 과거의 실수에서 벗어날 수 있는 노력을 경주하는 것이다. 그녀는 그것을 배울 겨를도 없었고, 그저 자신이 그 힘겹고 비극적인 삶의 대가로 얻은 노래하는 능력을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 몰랐을 뿐이다. 그녀가 그저 단순히 운이 없어서 그런 남편들을 만나고 불행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 아니다. 


그녀가 살아오며 배운 선택의 범위는 그녀가 보고 듣고 배운 정도를 벗어나지 못했을 뿐이다. 어려서부터 사창가에서 자라며 제대로 배우지도 못하고 더 나은 삶을 위한 고민 따위는 할 겨를조차 없이 치이며 살아온 흑인 소녀에게 그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신은 다르지 않은가? 시대가 변했고, 당신은 배우지 못한 것도 아니고, 시대가 당신의 인종을 차별하며 당신이 무언가를 할 수 없게 가로막고 있지도 않단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온통 세상의 불행을 혼자서 짊어지고 있는 듯이 좌절하고 어둠 속으로 기어들어가 빛이 쏟아지는 곳으로 나오길 꺼려한다면, 그것은 결국 당신이 자초한 파멸이고 결국 당신의 인생이 고작 그것밖에 안된다는 것을 스스로 자인하는 꼴밖에 되지 않는다.

당신이 더 배우고, 익히고, 경험하고, 듣고, 깨닫게 된 것들이 많아질수록 그리고 그것들을 통해 당신을 성장시키고 다시 시작하고 올라가려는 노력을 하는 동안, 당신은 등가교환 법칙에 의해 성공을 얻게 되고, 안정감을 얻게 되며, 보다 넓은 시각으로 세상을 보는 안목을 갖추게 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 필요한 것은 단 하나이다. 당신이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기 위한 의지를 가지고 있는가이다. 실패할 수 있다. 두려워서 더 세상으로 나가는 것이 싫어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신의 인생을 망치고 문을 닫고 스스로 그 안에 갇혀 지낼 것인가? 지방대나 나와 가방끈이 길지 못하다고? 경력 단절의 주부라고? 집안이 한미 하여 밀어줄 빽도 없고 기댈 언덕도 없다고?


아니다.


당신보다 더 못한 환경에서 당신보다 더 큰 실패로 도저히 일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모두가 손가락질했던 환경에서도, 당신보다 훨씬 더 나이 먹어 그 나이에 뭘 할 수 있겠느냐며 비아냥을 듣던 이들도 다시 일어나 보란 듯이 해냈단 말이다.


당신이 이제까지 겪은 실패, 불행, 어려움들은 그저 버려진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등가교환 법칙에 의해 당신에게 무언가를 분명히 주었을 것이다. 당신이 인지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당신만 모르고 있을 뿐, 당신은 생각보다 가지고 있는 것이 많은 사람이다.


그대로 좌절하고 포기하지만 마라.

그러면 길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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