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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Mar 21. 2022

귀족 신분으로 식모 따위나 하겠느냐는 시선을 받았지만,

전쟁터를 휘저으며 간호사라는 세계를 새롭게 창조해내다.

190번째 대가의 이야기.


1820년 이탈리아 피렌체의 별장에서 부유한 영국 상류층의 딸로 태어났다. 영국인이지만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피렌체’(Firenze)를 영어식으로 그대로 불러 ‘플로렌스’(Florence)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녀의 언니 파세노프 역시 나폴리에서 지내는 기간 중에 태어났다고 하여 나폴리의 그리스식 이름인 ‘파세노프’라는 이름을 붙였다. 자매의 출생지가 영국이 아닌 데다가 각각 다른 것은 플로렌스의 부모님이 결혼식을 마치고 나서 무려 3년간에 걸친, 세계일주급의 신혼여행을 떠났기 때문이다.


고향인 영국으로 돌아와 부유한 상류층 가정에서 자란 그녀는 17살이 되었을 때,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돌보는 일에 평생을 바치겠다고 선언하여 가족들은 물론 주변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하지만 그녀는 간호사가 되어 병들고 다친 이들을 돌봐주는 것을 자신의 인생의 신앙적 사명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가족과 주변에서 경악했던 이유는, 이 시절의 간호사에 대한 사회적 지위 때문이었다. 간호사는 당시 상당히 하대 받는 직업이었으며, 요양원에서 잡일을 하는 청소부·잔심부름꾼에 가까운 이미지가 있었기에 당연히 명문가의 딸이 간호사가 되는 경우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전례였다. 


당시만 해도 일부 병원을 제외하고 병원이라는 공간마저도 지금과는 상당히 판이한, 그다지 좋은 인상이 아니었다. 예컨대, 부잣집은 병원에 가느니 아예 실력 좋은 의사를 찾아 직접 주치의로 고용하여 병원이라는 곳을 기피했을 정도였고, 사실 실력이 좋다면 이런 식으로 개인에게 고용되는 게 의사에게도 병원에 들어가는 것보다 여러모로 이득이던 시대였다. 


또한, 지금과는 달리 당시에는 낮은 임금을 주기 위해 그다지 배우지 못한 여성들을 주로 고용했기 때문에 간호사들의 직업의식이나 능력도 매우 떨어지는 편이라 전문 직업으로 인정도 받지 못했다.


나이팅게일의 아버지는 상당한 부호이자 지역 시의원을 지낸 인물론(비록 낙선하긴 했지만) 주지사 선거까지 출마했을 정도로 지역의 유지였는데, 그의 귀한 막내딸인 플로렌스가 가족들에게 ‘간호사가 되라는 하느님의 계시를 받았다.’라며 사회에서 멸시받는 간호사가 되겠다고 선언하니 집안은 발칵 뒤집혔다. 


플로렌스의 간호사 일을 막기 위해 아버지는 강제적으로 혼사를 여러 번 준비했으나 플로렌스는 모두 거절했다고 한다. 구혼자 중 유명한 이들도 제법 있었는데, 귀족 출신의 시인 겸 정치인 리처드 밀네스 역시 그중 하나였는데, 그는 장장 9년 동안이나 나이팅게일에게 구애했으나 그녀는 끝내 청혼을 받아주지 않았다.

영국의 간호사이자 현대 간호학의 창시자로 칭송받는 이른바 ‘백의의 천사’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플로렌스 나이팅게일(Florence Nightingale)의 이야기이다.


그녀는 크림 전쟁 당시 38명의 성공회 수녀와 함께 오스만 제국의 수도 코스탄티니예에서 간호사로 활동한 것으로 유명세를 날리기 시작했으며, 그 유명세를 이용해 현대 간호의 기틀을 잡고 발전시켰기에 흔히들 ‘간호학의 대모(大母)’로 불린다.


게다가 통계학자, 사회 개혁가로도 활동하며 통계 자료의 시각화에 공헌한 것으로 평가되며, 통계 관련 서적에서도 적지 않게 언급되는데, 특히, 크림전쟁에서 영국군 사망 원인에 관한 도표로 상당히 유명하다. 그 업적들을 인정받아 영국 왕립통계학회의 첫 여성 회원이 되기도 하였고, 미국통계학회의 명예 회원이 되기도 했다.

최초의 시도가 좌절된 이후, 플로렌스는 여러 차례 청혼을 거절해 가면서 조용히 때를 기다렸다. 집에 있을 때에는 의학 및 병원 관계 문헌을 입수해서 읽었고, 가족을 따라 국내외 여행을 할 때에는 혼자 인근의 병원과 요양소, 빈민 수용소 등을 견학했다.


31세 때인 1851년에는 이집트 여행 중에 다시 한번 자신의 소명을 확신했고, 33세 때인 1853년에는 드디어 런던에 있는 소규모 자선 요양소의 책임자가 되었다.


그러던 중, 1854년에 흑해 북부 크림반도에서 러시아와 오스만 제국 (및 동맹국) 간의 전쟁이 벌어졌다. 표면적인 원인은 종교 갈등이었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러시아의 남하 정책과 이에 대한 다른 유럽 각국의 견제였다. 군인이며 전쟁사가인 버나드 몽고메리는 “크림 전쟁은 ‘이렇게 전쟁을 해서는 안 된다’는 부정적 교훈을 남겼다”라고 평가한다. 


이유는 지극히 간단했다. 전략과 병참 모두가 지극히 비효율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져 사상자의 비율이 상상 이상으로 높았던 까닭이었다. 오스만 측을 지원한 영국군의 경우에도 전사자가 5천 명이었던 반면, 전염병으로 인한 병사자가 1만 5천 명으로 무려 세 배에 달했다. 이에 영국에서는 뒤늦게야 부상병 간호를 위한 자원 봉사대가 조직되어 급파되었는데, 플로렌스 나이팅게일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전쟁이 몇 년 일찍 발발했다면 그녀는 그러한 일을 하기에는 지식, 그리고 아마도 능력이 부족했을 것이다. 반대로 몇 년 늦게 발발했다면 그녀는 십중팔구 자신이 종사하던 업무의 일정에 매여 있었을 것이며, 게다가 나이가 더 들어 있었을 것이다.”


그녀의 전기를 쓴 작가 리튼 스트레이치의 평가처럼 크림 전쟁은 나이팅게일의 인생에서 그야말로 적시의 기회가 아닐 수 없었다. 마침 그녀의 친구인 시드니 허버트가 육군성 고위직으로 근무하고 있어서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었으며, 그는 나중까지도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의 가장 큰 동지이며 후원자가 된다.

 

1854년 11월 4일, 나이팅게일은 38명의 간호사와 함께 전쟁터인 보스포루스 해협 인근의 스쿠타리(위스퀴다르)에 도착해서 영국군 야전병원에서 근무를 시작한다. 당시 전쟁에서는 총 맞아 죽는 병사보다 죽지 않을 정도의 부상을 치유하지 못해서 사망하거나, 병사(病舍) 내 전염병이 돌아 사망하는 경우가 훨씬 많았다. 심각한 위생상태와 맞물려 작은 상처가 아물기 전에 감염이 된다든지, 파상풍에 걸린다든지 하는 문제는 일상다반사로 전사자보다 부상으로 인해 전투 후 사망하는 사람이 더 많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나이팅게일은 군 위생(軍 衛生)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는 한편, 열악한 보건위생 때문에 병사들이 죽어가고 있으니 지원을 해달라는 내용의 편지를 각종 통계자료를 만들어 제시하며 끊임없이 보냈으며, 결국 영국의 지원을 받아낸다. 


그렇게 전쟁에서 처음으로 위생병의 개념이 탄생하게 된다. 이미 1600년대부터 위생의 개념이 있었고 1800년대 초중기에 위생법 등이 발효되긴 하였으나, 실제로 현장에서 실행에 옮겨진 것은 그녀의 제안으로 인한 이 경우가 최초였다. 나이팅게일이 등장한 지 6개월 만인 1855년 봄부터 야전병원의 운영은 훨씬 원활해졌고, 철저한 위생 관리 덕분에 환자의 사망률은 42퍼센트에서 2퍼센트로 뚝 떨어졌다.


오늘날은 ‘간호사’의 대명사인 나이팅게일이지만, 사실 크림 전쟁에서 그녀가 한 일은 지금과 같은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간호’와는 적잖이 거리가 있었다. 약품은 고사하고 침대와 이불조차 부족한 상황에서는, 치료에 앞서 청소와 세탁과 조리 같은 허드렛일부터 처리해야 했다. 


나이팅게일은 혼란의 와중에서 야전병원의 체계를 하나하나 세워나가는 일에 돌입했다. 어느 여성 자원봉사자가 “어서 가서 저 불쌍한 병사들을 ‘간호’해야겠다”라고 비장한 어조로 말하자, 나이팅게일은 “지금 제일 필요한 일은 ‘빨래’를 하는 것뿐”이라고 냉정하게 일침을 가했다.


전쟁이 끝나가면서 나이팅게일이 영국군의 사망률을 눈에 띄게 감소시킨 점, 그리고 밤마다 등을 켜고 병사들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돌아다녔던 모습 등의 이미지가 합쳐지면서 그녀는 ‘등불을 든 여인(The Lady with the Lamp)’이라는 이름으로 각종 언론에서 앞다투어 보도되면서 유명세를 타게 된다.

1856년 2월에 파리 협정이 체결됨으로써 3년여 만에 전쟁이 끝나자, 그해 7월에 나이팅게일은 드디어 스쿠타리를 떠나 영국으로 돌아온다. 당시 그녀의 나이 36세였다. 전쟁 중 나이팅게일은 지역 풍토병에 걸려, 이후 죽을 때까지 고생하게 된다.


“나는 그런 두뇌를 가지고 있는 그녀가 육군성에서 근무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빅토리아 여왕은 나이팅게일을 직접 만나고 나서 이렇게 그녀를 평가했다. 물론 당시로선 여자가 육군성에 근무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대신 나이팅게일은 크림 반도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군 의료 체계의 대대적인 개선을 제안했고, 이를 실천에 옮기기 위한 행동에 돌입했다. 

정부와 군부 곳곳에서 갖가지 반발과 핑계가 나왔지만, 그녀는 길고도 꾸준한 싸움으로 하나하나 승리를 쟁취해 갔다. 필요하다면 개인적 명성에 호소하기도 했고, 영향력 있는 친구나 친지까지 인맥을 총동원했으며, 때로는 크림 반도에서 보고 들은 영국군 야전 병원의 끔찍스러운 실태를 대중 앞에 폭로하겠다며 군부 고위층에 협박까지도 불사했다.


1859년, 그녀의 친구이자 후원자인 시드니 허버트가 육군성 장관이 되면서 군 의료 개혁은 본격적인 궤도에 오른다. 불과 2년여 뒤에 허버트가 갑자기 사망함으로써 나이팅게일은 정계에서 강력한 후원자를 잃어버렸지만, 이때부터는 가난과 질병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증대하면서 전반적으로 의료 및 위생 수준이 향상되었다. 


나이팅게일은 크림 전쟁 당시에 영국에서 조성된 ‘나이팅게일 기금’을 이용해서 1859년에는 세인트 토머스 병원에 최초의 근대식 간호학교인 ‘나이팅게일 간호학교’를 설립했고, 이후 여러 곳에서 유사한 간호사 양성 기관이 설립되었다.


같은 해에 펴낸 <간호론>은 비록 일반 독자를 위한 저술이지만 오늘날은 간호학의 고전으로 손꼽힌다. 1869년에 나이팅게일은 영국 최초의 여자 의사인 엘리자베스 블랙웰과 함께 ‘여성 의과대학’을 설립했다.


비록 정규 교육을 받지는 못했지만 나이팅게일은 고전어와 외국어를 독학해 상당한 실력을 쌓았다. 그런가 하면 본인의 신앙을 해설하기 위한 신학 서적도 집필했는데, 그녀가 피력한 신비주의 사상은 그 당시의 주류 기독교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던 것으로 평가된다.


앞서 잠깐 언급했던 바와 같이 나이팅게일의 또 한 가지 주목할 만한 업적은 통계 분야에서 이루어졌으니, 본인이 크림전쟁에서 조사한 영국군 사망 원인에 관한 자료를 도표로 정리한, 이른바 ‘장미 도표(Rose diagram)’라고 불리는 자료로 유명해진 것이다. 

이 도표에서는 사망자의 수를 면적으로 표시하고 사망 원인을 색깔로 표시하여 파란색으로 표시된 질병 사망자의 수가 다른 모든 사인으로 인한 사망자의 수보다 훨씬 많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 그래프의 모양이 활짝 핀 장미꽃을 연상시키기 때문에 그런 별명이 지어졌다. 


나이팅게일의 장미 도표는 통계 자료를 분석하고 관계자에게 설명할 때 정보를 직관적으로 시각화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나타내는 대표적인 사례로 인정받아, 1859년에 여성 최초로 왕립 통계학회 회원이 되기도 했다.

이후 말년에는 자신의 제자인 에셀 고든 펜위크(Ethel Gordon Fenwick)와 간호사 면허 제도 때문에 아주 오랫동안 싸웠다. 나이팅게일이 간호학이라는 학문의 시초인 이유는 간호사 제도를 확립했기 때문이라기보다 현대적인 간호 철학을 확립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서 펜위크는 현대 간호사의 제도적인 부분에 많은 발전을 가지고 온 인물로, 물론 나이팅게일의 제자이긴 했지만, 이후 영국간호사협회의 창립자이자 ICN(International Conference of Nursing, 국제간호사협회)의 초대 회장까지 지낼 정도로 능력이 있는 인물이었다. 


둘의 다툼이 갖는 핵심은 간호사의 면허제도 문제였다. 나이팅게일은 간호란 사명 정신, 사랑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하여 면허제도에 거부감을 가졌으나, 펜위크는 간호사의 전문성을 강조하면서 면허제도를 주장하였다.


결국 나이팅게일이 숨진 뒤부터, 그 세력은 힘을 잃었다. 1919년 영국에서 간호사 면허시험이 시작되었고, 이때부터 간호사가 되려면 면허시험을 봐야 했다. 결과적으로 간호사들이 전문직으로 대우받는데 큰 기여를 했기 때문에, 현대 간호학자들의 입장은 나이팅게일과 펜위크 둘 다 상당한 기여를 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나이팅게일은 1910년 8월 13일에 향년 90세로 삶을 마감했다. 그녀의 공적을 기려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장례식이 거행되었는데, 정부에서는 생전의 공적을 인정해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매장하자고 제안했지만, 친척들의 사양으로 햄프셔의 이스트 웰로에 있는 교회 묘지에 매장되었다.

 

그녀가 남긴 업적과 행적을 모두 보면 현장에서만 뛰며 근무를 하기보단 간호관리자로서의 역할이 크다. 실제로 그녀가 전장 속에서 백의의 천사로 뛰어다녔던 기간은 그녀의 90년 인생에서 불과 2년밖에 되지 않는다. 즉, 그녀가 이루어낸 대부분의 성과는 그 2년 이외의 수많은 세월에 있음에도 마치 2년에 집중되어 있고, 환자의 일반 생활을 돌보는 일에 치중하고 그 환경을 시스템적으로 개선해야 한다고 정책적으로 싸운 것이 훨씬 더 큰 업적임에도 마치 현대의 시각으로 간호의 역할을 한 것으로 왜곡(?) 축소된 경향이 없지 않다.


그녀의 성격은 역시 온화하고 부드러운 귀족 여인이라기보다는 여러모로 강단 있는 모습을 보였다. 배짱도 좋고 집안도 좋은 그녀가 단호히 개혁의 칼날을 휘둘렀기에, 그전까지의 전근대적 병원 행정과 간호사의 지위가 진일보할 수 있었다. 불과 2년이라고는 했지만 크림 전쟁의 전쟁 영웅으로 대우받고 주목받게 된 것으로 그녀는 자신이 원하던 일을 시작하고 완성할 수 있었다. 


그녀가 정말로 미천한 신분이었다면 꿈도 꿀 수 없을 일들이 그녀로 인해 이루어질 수 있었다. 그녀는 인맥도 넓었고 꾸준히 주장한 덕에 동조자들 및 조력자들을 쉽게 모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조력자들을 통해 자신의 주장 근거를 더욱 확충하고 논리를 보강할 수 있었고, 중간에 그녀의 제안에 호의적인 자유당이 선거에서 패하는 악재가 터지는 바람에 원안대로 추진하지는 못했지만 결국 자신의 제안을 통과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는 영국에서 1911년에 실시될 국민보험법과 1946년 시행된 전 국민 의료복지의 선구적 조치로 평가되고 있다.

“나는 일생을 의롭게 살며 전문 간호직에 최선을 다할 것을, 하느님과 여러분 앞에 선서합니다.”

의사에게 ‘히포크라테스 선서’가 있다면 간호사에게는 위의 문구로 시작하는 ‘나이팅게일 선서(Nightingale Pledge)’가 있다. 물론 이것은 나이팅게일이 직접 지은 것은 아니고, 1893년에 미국 디트로이트의 한 간호학교에서 처음 제정한 것이다. 또한 나이팅게일의 생일인 5월 12일은 매년 ‘세계 간호사의 날’로 기념하고 있다.

오늘 그녀의 삶을 돋보기로 촘촘하게 들여다보여주는 것은 이제까지 막연히 알고 있는 ‘백의의 천사’로 그녀가 간호사라고 착각하는 어린이 위인전을 읽은 스테레오 타입적 지식만을 가진 이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녀가 무엇을 실패했느냐고 의아해하며 왜 이 시리즈에 나오는 거냐고 묻는다면 그녀의 어머니가 한 말부터 들려주마.


“우리는 오리인데 어쩌다가 야생 백조를 낳았을까.”


플로렌스의 어머니는 언젠가 친구들 앞에서 울먹이며 이렇게 한탄했다고 전한다. 하지만 전기 작가 리튼 스트레이치는 그 일화에 대해 이렇게 일침을 날린다.

“그 가련한 부인의 생각은 틀렸다. 그들이 낳은 것은 백조가 아니라 독수리였으니까.”


게다가 열일곱에 간호사로 일하고 싶다고 그녀가 발언했을 때의 상황에 대한 가족들의 반응에 대해 그녀는 이후 이렇게 서술했다.


“마치 내가 식모가 되겠다고 말한 것 같은 반응이 나왔다.”


또한 그녀가 겪은 실패들은 정작 그녀가 이룬 그 수많은 업적들의 바로 앞에 널려 있었다. 앞서 간단히 언급하고 넘어갔지만, 그녀가 영국 정부의 지원을 얻어내기까지 겪은 수많은 실패들은 그녀가 나중에 친구의 정치적 영향력까지 동원하여 성공하면서 다 덮였다. 


하지만,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 그녀가 그러한 업적들을 단 2년 만의 전쟁 참여를 통한 유명세로 프리패스처럼 이뤄냈을 거라고 안일하게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이후 전쟁이 끝나고 나서도 간호의 개념을 현장에 적용하고 간호사들을 양성하는 학교를 세우는 그 하나하나의 과정들이 결코 그녀에게는 순탄하지 않았다. 


당시 사회적 분위기는 물론, 특히 영국에서는 그녀를 정치적인 프로파간다로 활용하고자 했을 뿐, 그녀의 실질적인 활동에 힘을 실어주거나 통 큰 기부를 하는 귀족이나 정치인들은 없었다. 그 한 푼 한 푼을 모아가며 아쉬운 소리를 하고 강단 있는 성격으로 밀어붙이는 힘이 없었더라면 결코 이룰 수 없는 꿈들이었단 말이다.


간호원에서 간호사로 이름이 바뀐 지 수년이 지났지만, 한국에서의 간호사가 갖는 직업적인 위상이 결코 의사와 동일 선상에 보지도 않고 특히나 일반인들의 인식은 간호사의 가족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전문직이라고 인정해주지 않는다. 지금도 그러한데, 당시 영국에서 그 신분의 일을 멀쩡한 귀족 가문의 아가씨가 하겠다고 한다면 그야말로 귀족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들만한 뉴스가 아닌가? 


그 모든 사회적 파장을 감안하고서도 자신이 정치가가 되겠다는 꿍꿍이를 가진 것도 아니고 온 평생을 ‘간호’와 ‘위생’의 제대로 된 시스템을 갖추는 것에 바치는 것이 쉬운 일이었을 것이라 생각하기 어렵다.


당신이 매번 투덜거리는, 당신은 재벌 가문은 고사하고 중산층 그 이상도 되지 못해, 넉넉하게 지원을 받지도 못했다는 비겁한 투덜거림을 그녀의 삶에 비춰보라. 아무리 귀족이라고 했지만, 당시 영국의 여성은 정식으로 대학을 가거나 교육을 받을 수도 없는 사회적 지위였다. 그럼에도 그녀는 자신이 독학으로 필요한 것들을 익혀나갔고, 한 번도 전문교육을 받기는커녕, 하녀들의 수발을 받던 입장에서 스스로 그 지저분한 피고름이 날리는 부상자와 사망자들의 옷과 이불을 빠는 일을 솔선수범하며 진두지휘해나갔다. 

그것이 쉬운 일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나? 당신처럼 흙수저가 투덜거리며 금수저처럼 지원받지 못해서 뭘 못했느니 투덜거리는 동안, 금수저가 아니라 다이아몬드 수저였음에도, 자신이 필요한 것을 자신이 알아서 공부하고 모두가 비천하다고 하는 직업을, 그 일에 뛰어들었던 그녀의 삶이 어찌 녹록했겠는가?


힘들었을 것이다. 매번 그만두고 싶고, 다시 돌아가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사는 귀족 친구들이나 지인들의 삶과 비교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당신이 매번 강남을 지나며 우러러보는 강남 아파트를 가진 사람들, 코로나 정국에도 새 외제차를 뽑고 타고 다니는 그 부러워 쳐다보는 사람들을 보며 배가 아픈 것도 아니라면서 매번 비교하며 상대적 좌절감이니 뭐니 떠들어대는 동안 정작 모든 것을 가진 그녀가 스스로 낮은 곳에 처해 그 지인들에게 기부와 지원을 요청하러 다니는 것이 아무렇지 않았을 리가 없단 말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것을 해냈고, 그렇게 자신의 90 평생 삶으로 그녀의 사람을 증명해냈다.


당신이라고 못할 것 없지 않은가? 발상의 전환까지도 필요 없다. 당신이 그렇게 부러워하는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도 자신이 가진 기득권을 포기하고 더 힘겨운 사람을 위해, 사회의 부족한 부분을 메우기 위해 자신의 의지로 그 강렬한 삶을 불살라갔다. 그런데 지금 고작 돈 더 벌어서 서울의 아파트조차 한 채 사지도 못하는 수준이면서 돈돈하면서 당신의 삶을 그 수준으로 전락시켜버릴 텐가? 


당신이 원하던 사람이, 꿈꾸던 삶이 고작 그렇게 세속적이고 작고 보잘것없는 것이던가? 그나마 조금 힘들다고, 실패 좀 했다고 주저앉아 술잔이나 기울이며 더 돈 많은 부모가 있었더라면, 어쩌고 하면서 건강한 신체로 세상에 내어주신 부모님까지 욕보일 텐가?

당신이 오리가 될지, 야생 백조가 될지, 독수리가 될지는 결국 당신이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당신의 삶이 역사에 남을 수준이 되든 안되든 그건 중요하지 않다. 결국 당신이 눈감는 그날이 되면 최소한 하늘과 당신은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생, 그거 어찌 보면 대단한 것, 아니다. 한 번 사는 인생에 당신의 삶을 태어나서 살아볼 만한 가치 있는 삶으로 만들어나가는 것은 당신의 마음가짐 하나로 달라진다.


지금부터의 사람이 지금까지의 삶과 확연히 다른 삶이길, 당신에게 지금 이 글을 읽는 순간, 뜨거운 변환점이 시작되길 기대하고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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