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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Mar 17. 2022

잘못된 세상을 바꿔보겠다고 10년이나 일터를 떠났지만,

인류의 편안한 삶을 구축하겠다는 꿈을 건축으로 펼쳐 보이다.

188번째 대가의 이야기.


1887년 스위스 쥐라 산맥 부근의 뇌샤텔 주 라 쇼드퐁(La Chaux-de-Fonds)에서 태어났다. 그의 고향, 쇼드퐁은 스위스 시계 산업의 중심지였고, 그의 아버지 또한 시계 만드는 일에 종사했다. 그의 본명은 샤를 에두아르 잔느레(Charles Edouard Jeanneret)였는데, 사람들에게 알려진 현재의 이름은 나중에 그가 파리로 이주한 뒤 개명한 것이다.


잔느레는 어려서부터 조용하고 완고하고 다소 폐쇄적으로까지 보이는 성격이었다고 한다. 그는 주로 혼자 그림을 그렸는데, 산을 좋아하던 아버지 덕분에 자주 산에 올라가 눈 덮인 쥐라 숲의 나무와 동식물을 마음껏 그렸다. 그런데 주변 풍경이나 사물을 정밀하게 스케치하는 게 아니라 그것들을 추상화해서 자신만의 특징으로 유형화하는 독특한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그의 어머니는 피아노 선생이었고, 그녀는 아들에게 “하고자 마음먹은 것은 끝까지 해내거라!”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고 한다. 13세 때 시계 장식미술을 가르치는 라 쇼드퐁 장식미술학교에 응시한다. 입학시험 작품에 3일의 시간이 주어졌지만 그는 첫날 저녁에 작품을 제출하고 당당히 합격한다.

<고양이와 여인 그리고 차 주전자>

장식미술학교에서도 그의 그림 실력은 다른 학생들에 비해 월등했다. 그의 재능을 눈여겨본 스승 샤를 레플라토니에(Charles L'Eplattenier)는 잔느레가 시계 장식 일만 하기에는 너무 아깝다고 생각했다.


레플라토니에가 그렇게 생각한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유럽에 불어 닥친 산업화의 바람은 스위스의 그 작은 마을에까지 밀려왔다. 그와 함께 사람이 하던 일을 기계가 대신하면서 대량생산이 가능해졌다. 쇼드퐁의 시계 산업도 점차 기계 생산으로 바뀌어가던 중이었다. 레플라토니에는 잔느레에게 이렇게 말했다.


“넌 반드시 다른 일을 하게 될 거야. 건축가 말이야.”


그러나 잔느레는 선생님의 말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건축은 공부한 적도 없을 뿐 아니라, 평소에 재미도 멋도 없는 분야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스위스 태생의 프랑스에서 활동한 건축가. ‘모더니즘 건축의 아버지’라 불리는 인물로, 현대 건축의 기초를 다졌다고 평가되며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건축가로 뽑히는 사람이자, 현대적인 아파트 단지의 방식을 확립한 사람으로도 유명한 본명, 샤를 에두아르 잔레그리(Charles-Édouard Jeanneret-Gris)보다 필명으로 우리에게는 훨씬 더 유명한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의 이야기이다.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라는 필명은 1920년에 외할아버지의 이름(Le corbésier)을 약간 변형해 만든 필명인데 당시는 이렇게 필명이나 예명을 만드는 것이 흔했던 일종의 유행이었다고 한다.


20세기를 대표하는 건축가로서 유네스코에서도 가치를 인정받아서 국립 서양 미술관 같은 코르뷔지에의 건축물이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그의 꿈은 오직 화가가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레플라토니에는 꾸준히 그에게 건축가가 되라고 부추겼다. 처음에 그는 건축가가 되려는 생각이 없었고, 아버지의 가업을 이어 시계 장인이 되려고 하였다. 그러나 시계를 대량 생산하는 나라가 등장하고, 시계를 다루는 일로 안정적인 수입을 얻기 힘들다 판단하게 되면서 자연스레 스승이 추천했던 건축가의 길을 가기로 마음먹게 된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은사 레플라토니에가 소개해준 젊은 건축가 샤팔라(R. Chapallaz) 밑에서 건축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가 워낙 미술에 탁월한 소질을 가지고 있었던 탓에 건축설계 기술을 터득하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렇게 그는 열일곱 살에 첫 작품으로 팔레 주택을 설계했다.


팔레 주택에는 주변의 전나무에서 영감을 얻은 패턴을 사용했고, 발코니의 철제 난간과 창틀에도 똑같은 패턴을 사용했다. 그러나 그 주택을 건축가로서 그의 첫 작품이라 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는데, 당시 건설 작업의 일부분만 담당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팔레 주택의 설계에서 제자가 담당해서 구현화한 부분을 본 레플라토니에는 다시 한번 제자의 천재성에 감탄하며 자신의 안목을 확신했고, 그의 재능에 비해 이 마을이 너무 좁다고 판단했다. 어느 날 스승은 제자를 불러 유럽 여행을 제안하게 된다. 잔느레도 이번에는 스승의 의견에 동의했다. 그래서 팔레 주택을 설계하고 받은 이른바 첫 수입으로 첫 유럽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그 여행은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게 될 경험을 선사하게 된다.

베를린에서 출발해 프라하, 빈, 부다페스트, 이스탄불, 아테네, 폼페이 등을 방문하는 이 여행길에서 그는 위대한 고(古) 건축들을 관찰하며 많은 것을 배운다. 소피아 대성당과 모스크에서는 단순한 기하학이 가진 강렬한 힘을 경험했고, 발칸 반도의 민중예술과 토속 건축의 자연스러움에 감탄했다. 이런 것들로 인해 그는 유럽 장식예술을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특히 그는 르네상스 시대의 건축과 조각을 보면서 인생의 방향이 결정될 정도로 깊은 감동을 받았다. 무엇보다도 파르테논 신전이 있는 아크로폴리스에서 그가 평생 추구할 투명한 빛 아래의 하얀 도시의 이미지가 형성된다. 자신이 지금까지 해왔던 장식미술이 우물 안 개구리처럼 느껴진 것이다.


그는 여행을 하면서 보고 느낀 것들을 글로 쓰고 그림으로 정리했다. 그 과정을 통해 인간과 건축에 대한 생각도 어느 정도 구체화되었다. 이탈리아의 한 수도원에서는 개인적인 거주 공간과 공동 구역의 조화를 보며 다세대 주택의 이상형을 떠올렸고, 후기 르네상스 기법으로 건설된 이탈리아의 안드레아 궁전과 그리스 유적지에서는 고전적 건축 양식을 배웠다.


또한 지중해와 발칸 반도의 건축물에서는 주변 경관과의 조화를 최우선으로 치는 건축 양식과 자연광 활용법을 접했다. 그는 이후 1923년 발행한 잡지 <에스프리 누보>에 게재한 <건축을 향하여>이라는 글을 통해 이때의 소감을 이렇게 밝히고 있다.

“그 건축물들은 형태에서는 자연의 모습을 엿볼 수 없으나 빛과 대리석의 질감 덕분에 자연스럽게 하늘과 땅에 연결된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바다’나 ‘산’처럼 자연 그대로의 인상을 자아낸다. 인간의 창조물 가운데 어느 것이 이 단계에 도달할 수 있을까?”
파리 유학 갔을 당시의 르 코르뷔지에

유럽의 건축물에서 삶의 방향을 발견한 그는 본격적으로 건축설계를 배우기로 결심하고 파리로 가서 건축가 오귀스트 페레(Auguste Perret)의 사무실에 취직했다. 오귀스트 페레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철근 콘크리트 공법을 건축에 도입한 주목받던 젊은 건축가였다.


20세기 초, 세상은 엄청난 변화를 겪고 있었다. 기존의 생각과 질서를 뒤집는 일련의 사건들이 연이어 발생했다. 문학에서는 생소한 ‘의식의 흐름’ 기법이 실험적으로 사용되었고, 의학에서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이론이 등장했으며, 예술에서는 원근법과 명암법을 무시한 피카소의 입체주의가 나왔고, 과학에서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등장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건축계에서도 기존의 것과는 다른 새로운 변화를 시도해야 한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때까지 집은 돌이나 벽돌을 쌓아 올리는 조적식(組積式) 공법으로만 지어졌다. 그런 가운데 프랑스의 토니 가르니에(Tony Garnier)와 오귀스트 페레가 과거의 건축양식에서 벗어나 철근콘크리트 공법을 들고 나왔다. 건물의 틀이 간단할수록 건축하기가 쉽고, 비용도 줄어든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그러면서 단순하면서도 기하학적이고 규칙적인 형태의 건축을 제안했다. 코르뷔지에 역시 모든 분야에서 새로운 시대가 왔다는 것을 인지하고, 낡은 것과 낡은 생각을 버리고 새로운 시대 흐름에 따라야 한다고 믿으면서 자신이 앞으로 해야 할 일들에 확신을 가졌다.


그는 스위스로 돌아와 모교에서 건축학을 강의하면서 현대적 기술을 이용한 건축 이론을 연구했다. 그 결과로 나온 것이 ‘돔-이노(Dom-Inno) 시스템’으로 불리는 이론이었다. 이 아이디어는 최소한의 숫자의 얇은 철근 콘크리트 기둥들이 모서리에서 지지하는 단순한 구조이다. 그러나 이 단순한 구조는 유럽의 건축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건물의 주요 기능들을 구획하는 벽체와 지붕은 구조체와 분리하여 모든 하중을 기둥이 지탱하되, 내부의 입면이나 평면은 자유롭게 구성하게 된다.’는 것이 도미노 구조 이론의 핵심이다.


이 시스템을 이용하면 일단 벽이 필요 없다. 벽은 물론이고 창문도 지붕도 바닥도 마음대로 할 수 있다. 그때까지의 유럽 건축은 벽으로 무게를 지탱했기 때문에 두꺼운 벽이 많이 필요했고, 따라서 창문도 엄청나게 작게, 혹은 위아래로 길게 내야 했었다.


이 이론은 그의 건축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것으로, 그는 이후 10년간 대부분 이 이론을 토대로 건축설계를 했다. 그런데 혁신적 건축가로 활동하기에는 지방적 색채가 강한 스위스는 너무 좁았다. 모교에서 건축학을 강의하던 그는 아예 완전한 이주를 결심하고 파리로 돌아갔다. 그때 그의 나이 서른이었다. 그의 양친과 스승 레플라토니에의 집을 포함해서 스위스에서 이미 일곱 건을 설계한 뒤였다.


코르뷔지에는 자신의 이론을 바탕으로 아래와 같은 ‘현대 건축의 5원칙’을 제창한다. 이는 건축가마다 공법과 미의 기준이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달라 통일되지 못하였던 과거의 건축을 선진화되고 정형화된 건축으로 옮겨놓는데 핵심적이고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1. 철근 콘크리트 기둥인 필로티(pilotis)로 무게를 지탱하고 건축 구조의 대부분을 땅에서 들어 올려 지표면(1층)을 자유롭게 이용하도록 만든다.

2. 건축가가 원하는 대로 설계할 수 있도록 구조 기능을 갖지 않는 벽체로 ‘자유로운 입면(façade)’을 만든다.

3. 훨씬 채광 효과가 좋은 길고 낮은 ‘띠 유리창’을 사용한다.

4. 지지벽이 필요 없이 바닥 공간이 방들로 자유롭게 배열된 ‘열린 평면’을 만든다.

5. 건물이 서기 전에 있던 녹지를 대체하기 위해 옥상 위에 ‘옥상 정원’을 만든다.

파리에서 그는 화가이자 디자이너인 아메데 오장팡(Amédée Ozenfant)을 만나게 된다. 그는 오장팡에게 순수주의(Purism)를 배웠는데, 순수주의는 당시 유행하던 큐비즘에 대항하던 양식이었다. 순수주의는 추상적이고 비합리적이며 현실과 동떨어진 큐비즘 대신 이성적이고 질서 정연하며 구조적인 방식을 추구했다.


또 추상적 표현을 거부하고 일상생활에서 볼 수 있는 사물을 단조롭고 순수한 도형으로 표현했다. 그는 오장팡과 함께 순수주의 잡지 <에스프리 누보(Esprit Nouveau)>를 창간했다. 그렇게 그는 잡지를 통해 이러한 자신의 이론과 생각을 전 세계 건축가들을 향해 공표하게 된다.


이때부터 잔느레 대신 ‘르 코르뷔지에’라는 필명을 사용했다. 이 필명은 그의 외할아버지 이름인 ‘르 코르베지에(Le corbésier)’를 변형한 것이었다.


외할아버지는 스위스의 이름 없는 건축가였는데, 이렇게 이름을 바꾼 데에는 건축가로 새로 태어나려는 그의 의지가 담겨 있었다. 프랑스어로 '코르뷔'는 ‘까마귀’라는 뜻인데, 그를 좋아하던 사람이든 미워하던 사람이든 모두 그가 까마귀와 비슷하게 생겼다고 생각했다.

이 잡지를 통해 그는 ‘순수주의(Purism)’를 주장하였다. 그의 순수주의를 적용한 건축 프로젝트로는 시트로앙 주택이 있다. 이 이름은 프랑스 자동차 시트로엥을 갖고 한 말장난으로, 건축 또한 자동차를 만들듯이 현대 산업의 방식을 이용하자는 의도를 반영한 것이었다.


공장 제작 부품을 이용하고 규격화하면 효율적으로 양질의 주택을 공급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집 역시 자동차처럼 건축 또한 기능에 충실하고 사용하기 편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건축을 당시 첨단 기술로 탄생한 기계와 맞물려 생각했다.


이 생각은 ‘집은 살기 위한 기계다(A house is a machine for living in)’라는 그의 명언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의 주택들은 새롭게 바뀐 생활 방식과 기술을 표현하였다. 그의 대표작인 사보아 주택에 이러한 원칙과 사상이 잘 나타나 있다.

사보아 저택, 통칭 빌라 사보아(vila savoye). 상술한 5가지 원칙이 모두 포함되어 시공되었다. 사보아 부부의 교외 별장으로서 의뢰받아 설계 시공된 건물로, 2차 대전에는 독일군이 점령하는 수모를 겪었다. 이후 재개발 붐에 밀려 철거될 뻔했다가 당시 코르뷔지에의 광팬이던 프랑스 장관의 비호를 받아 간신히 보존에 성공하여 지금에 이어지고 있다. 설계도면 등 중요 자료는 저택 지하에 있다가 모조리 침수, 소실되며 자료가 많이 남아 있지 않다.


당시 유럽의 도시들은 수많은 사람들이 좁아터지고 열악한 저층 공동주택에 살며, 거리는 더럽고 혼잡했다. 산업혁명으로 인한 도시화와 인구의 집중은 극심해졌는데 건물들은 중세시대의 그것과 별반 다를 게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그가 지내던 프랑스 파리는 산업화로 계속 늘어가는 도시 빈민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하지만 정부에서는 적절한 대응책을 내놓지 못했다. 코르뷔지에는 빈민들의 삶의 질을 끌어올릴 공동 주택을 기획했고, 거기서 그치지 않고 도시 전체로 눈을 돌려 300만 명이 살 수 있는 ‘현대 도시’ 계획안을 내놓았다. ‘르 코르뷔지에 파리 계획안’이라 불린 이 해법은 현대적인 재개발의 시초라 볼 수 있을 만큼 당시에는 매우 충격적인 해법이었다.

면적을 넓히는 방식이 아닌, 위로 고층빌딩을 세워 위아래로 재개발한다는 것이 이 계획안의 요지였다. 이 고층빌딩들은 넓은 직사각형 녹지 안에 있다. 한가운데는 거대한 교통 센터가 설치된다. 그 센터의 각 층에 기차역과 버스터미널, 교차로가 있고 맨 위에는 공항이 위치한다. (그는 여객기가 거대한 고층건물들 사이로 이착륙할 수 있다는 비현실적인 생각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고층건물들 밖에는 지그재그 모양의 집합 주택들이 녹지 중앙에 배치된다.


300만 명의 주민을 위한 현대 도시 계획안으로, 여기서 건물이 지어지는 부분은 5%에 불과하다. 나머지 90%는 녹지로 채움으로써 편리하고 쾌적한 삶을 유도하겠다는 안이다.


코르뷔지에의 도시계획은 교통수단으로써의 자동차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자동차가 인간을 거리의 제약에서 자유롭게 한다는 생각으로 교통체계를 높은 위계에 두고, 주거 지역과 사무 지역을 널찍하니 떨어뜨려 구분하여 최대한 쾌적한 생활을 하도록 꿈꾸었다.


프랑스 정치인과 기업인들은 이 발상 자체에는 찬성했지만, 그 계획안에는 비판적이었다. 도시의 비좁고 불결한 환경을 해결할 구체적 방안이 없다고 본 것이다. 코르뷔지에는 실질적인 도시 계획안에는 실패했지만, 도시계획의 범위를 확장ㆍ재정립해서 <빛나는 도시>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간했다.

하지만 구 도심지역의 재개발만 거부되었을 뿐, 르 코르뷔지에의 계획은 빠른 전후 복구 및 경제성장 과정에서 늘어나는 주택수요를 충당하기에는 최적의 대안이었기 때문에 정책가들에게 널리 받아들여져서 대도시 외곽지역과 신도시 지역에다가 아파트를 대량 건축하는 식으로 계획을 실현시켰다.


우선 소련, 동독, 유고슬라비아,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루마니아, 불가리아를 비롯한 동유럽권에서는 주택부족 문제를 빠르게 해결하기 위해서 신도시와 외곽지역을 중심으로 대량의 아파트를 건축한 결과, 모스크바와 샹트페테르부르크, 부다페스트, 프라하, 베오그라드, 동베를린 외곽과 신시가지 지역은 그야말로 아파트 천국이 되었으며, 서구권 국가들 역시 교외 신도시 지역을 중심으로 르 코르뷔지에가 주창한 도시계획을 실현한 경우도 있었다.


또한 아시아와 중남미권 개발도상국들도 이러한 제안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특히 1970년대 이후 만든 한국의 계획도시, 신도시들은 이 개념을 받아들여 자동차를 중심으로, 업무지구와 주거지구를 나누며, 넓은 녹지를 두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기존 도시의 재개발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살고 있는 아파트 역시 모두 그의 이론과 계획안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도시에 대한 비전은 현대 도시의 혁신적인 장점을 생겨나게 하였고, 수많은 사람들을 주택 부족에서 구원해주고 더 효율적이고 쾌적한 도시생활을 가능하게 하였다.


그러나 코르뷔지에의 건축은 다시 한번 극적인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30년대를 기점으로 전기 코르뷔지에와 후기 코르뷔지에는 같은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다른 건축을 선보인다. 코르뷔지에는 고층 공동 주택을 설계하면서 표준 모듈러(Modulor) 이론을 만들었다.

모듈러(Modulor) 이론이란 아름다움의 근간인 인간 신체의 척도와 비율을 기초로 황금분할을 찾아내서 그것을 건축학적으로 수치화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최소한의 공간 속에서 사람이 팔을 벌리고 움직일 때 불편함이 없도록 건축물을 지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런 황금비율을 모듈러 시스템에 적용했고, 이를 다양하게 조합해서 건축 재료의 기준 수치로 삼았다. 롱샹에 세워진 노트르담 교회(롱샹 교회)는 이런 모듈러 이론의 정수를 보여준다.

그동안 만들어내던 표준적이고 규격화된 건축이 아닌, 대지의 특별한 조건 아래 형성된 특별한 모양의 건축인 것이다. 롱샹 성당은 준공되자마자 전 세계의 모든 건축잡지가 기사로 써 낼 정도로 주목했고, 롱샹은 한순간에 혁신의 기수가 되었다. 기능성과 효율을 중시하던 철두철미한 건축가가 자신의 엄격한 법칙을 버리고 감성적이고 숭고한 느낌을 주는 성당을 만들었던 것이다.


어떻게 이런 극적인 전환이 일어났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코르뷔지에는 롱샹 성당을 짓기 전 10년 동안 건축 작업을 전혀 할 수 없을 정도의 침묵기를 보냈다. 그동안 그는 프랑스 정치에 참여하여 우파 진영에서 정치 활동을 벌였고, 심지어 베니토 무솔리니의 초대를 받아 강의를 하기도 했다.


이 긴 기간 동안 공동체를 위한 건축을 꿈꾸며 국제연맹 궁, 국제연합본부 등을 연구하고 세계적 공동체의 실현을 기대했지만 10년 동안 실망을 거듭했다. 이러한 점에선 코르뷔지에의 건축적 관심이 ‘현실적 삶의 개선’이라는 명제에서 벗어나 현실을 초월한 감정적인 숭고함으로 변했다고도 볼 수 있다.


1950년 이후 코르뷔지에는 자신의 도시계획 이론을 프랑스 밖에서도 실현할 기회를 잡았다. 1951년 인도 정부가 펀자브(Punjab) 주의 찬디가르(Chandigarh) 시를 행정 주도로 설계할 건축 고문으로 그를 발탁한 것이다. 여기서 그는 법무부 청사와 국회의사당, 총리 관저 등을 직접 디자인했을 뿐 아니라 찬디가르 시가 대도시로 성장할 구체적인 도시 계획안을 만들기도 했다.

1965년 8월 27일, 코르뷔지에는 프랑스 남부 로크브륀카프마르탱(Roquebrune-Cap-Martin)에 마련한 별장 ‘카바농 드 바캉스(Cabanon de vacances)’에서 여름을 보내고 있었다. 몸이 매우 노쇠한 상황에서 의사의 충고를 무시하고 수영을 하러 물에 들어가자 곧 심장마비가 찾아왔다. 얼마 후 근처에서 그의 시신을 발견했다. 향년 78세였다.


코르뷔지에의 장례식은 루브르궁 안마당에서 치러졌다. 국내외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조의를 표했고, 당시 미국 대통령 린든 B. 존슨은 ‘그의 영향은 전 세계적이고 그의 작품들은 우리 역사상 매우 적은 예술가들만이 갖고 있는 영원한 특성들을 갖고 만들어졌다.’고 추모했다. 그리고 소련은 ‘현대 건축은 가장 위대한 거장을 잃었다.’라고 그의 업적을 기렸다. 냉전 시기인데도 양측에서 동일한 찬사를 받았음을 생각하면 그의 위상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20세기에 기능적이고 위생적이며 편안한 생활공간이 나타나게 된 것은 그의 설계와 이론이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물론 그의 건축이 찬사만 받은 것은 아니었다. 코르뷔지에의 여러 사상과 이론 부분에서 기능 만능주의로, 비인간적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했다고 비판받는다.


하지만, 이것은 건축사와 당시 역사와 사회적 배경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한 무식한 자들이 일면만 보고 떠들어대는 무식한 말에 불과하다. 오늘 내가 당신에게 코르뷔지에의 인생을 소개하는 이유이다.


전술했던 바와 같이 그가 그려낸 건축 세계가 전기와 후기로 나뉘어 너무도 다른 모습을 보인다고 읽는 이들 역시 그의 삶의 자취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한 피상적인 지식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그는 그의 건축세계 후기 걸작으로 칭송받는 롱샹 성당을 건축하기 전 10년의 침묵기를 갖는다.


그렇게 왕성하게 이론과 실제를 구현하던 건축가가 10년이나 침묵한 것에 대한 행간을 읽지 못하고서 10년의 침묵을 깨며 세상에 내놓은 작품이 이전과 완전히 다르다고만 설명하는 것처럼 어리석고 단순 무식한 평론은 없다. 위에 간단히 언급했지만, 그의 인생에서 전기와 후기를 가를 만한 격변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

그의 인생과 목표는 오직 하나였다. 오로지 ‘인간의 현실적인 편안한 생활을 위하여’라는 모토였다. 그가 침묵했던 10년은 침묵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모토를 통해 현실을 변화시키고 싶어 했다. 그는 현실정치에 투신하여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했다. 사람들이 가장 편안하게 살 수 있게 만드는 것. 하지만 그는 실패했다.


내가 그의 건축과 그의 사상을 좋아하는 이유는, 바로 그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것을 가지고 삐뚤어지고 썩어가던 사회를 바꾸려고 10년이나 노력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에게 그리 녹록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가 그 실패를 통해 다시 건축가로 돌아와 인간들에게 그 사회에게 던지는 치유의 한 마디가 바로 롱샹 성당인 것이다.


건축가로서 앞만 보고 달렸던 그는 현실을 바꿔보겠다고 10년을 모든 것을 집중하여 투신하였고, 그것을 통해 여러 실패를 통해 자신의 건축을 돌아보게 되었고, 사람들에게 진정한 안식과 편안함을 줄 수 있는 새로운 비전으로 롱샹 성당을 세상에 내놓은 것이다.


이미 도시가 포화 상태에 이른 시점에서도 많은 건축가들이 단순히 많은 건물들을 싸고 편하게 짓기 위해 그의 이론과 양식을 이용해서 건물을 지었고 결국 오늘날 현대 도시가 갖고 있는 무미건조하고 딱딱한 이미지가 형성되었다는 것이 비난받는 것일 뿐, 오늘 그의 인생을 촘촘히 들여다보고 나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더 나은 생활환경을 만들어주기 위한 코르뷔지에의 이상 자체를 비난하는 자가 있을 리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의 생각과 사상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그가 아내와 말년을 보냈던 4평짜리 카바농 별장만 보더라도 충분히 알 수 있다. 당신이 세계적인 건축가라면 4평짜리 통나무집이 가장 편하다며 거기서 살았을까? 공부하지 않고 그저 비판을 위한 비판을 하려는 세속적인 호사가들의 같잖은 말로 대가를 모욕하지 마라. 코르뷔지에가 추방하고자 했던 것은 낡고 지저분하며 장식만 번드르르한 유럽의 후진적인 도시 환경이었을 뿐이다.


당신은 어떠한가? 당신이 가진 전공과 기술을 어디에 사용하고 있는가? 먹고 사는데? 집 한 칸 마련하는데? 외제차 할부로 사는데?

코르뷔지에의 삶과 이상을 보고, 당신이 자신도 모르게 부끄러워지고 나는 세상을 바꾸려고 노력해보았나? 아니, 세상까지도 필요 없다. 내가 속한 조직이나 하다 못해 나 하나만이라도 잘못된 것을 바꾸려고 노력하고 그렇게 살지 않으려고 거대악들에게 부합하거나 그들의 부조리를 그저 눈감고 지나치거나 하지는 않았는가 자문해보라.


한국인의 절대 주거환경 1위에 해당하는 아파트는 그의 이상에서 나온 산물이다. 그 아파트에 살고 있는 당신에게 이 글을 읽는 오늘 하루만이라도 그의 이상이던 ‘인간의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위해’ 낡고 지저분하고 잘못된 그 썩은 것들을 날려 보내려고 10년이나 노력했지만 실패했던 대가의 인생 자취를 통해 지금 당신의 삶에 무엇이 부족한지 반성하는 시간을 갖길 바라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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