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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Mar 16. 2022

발명하고 나서 대중들 반응이 별로라고 오판하고 말았지만

에디슨의 발명보다 훨씬 더 나은 형태의 영사기로, 영화의 아버지라 불리다

187번째 대가의 이야기.


형제의 아버지 앙투안 뤼미에르(Antoine Lumière)는 원래 직업은 초상화를 그리는 화가였다. 그러다가 사진의 출현으로 일거리가 줄어들자 1861년에 프랑스 중부 지방의 브장송에 이사하면서 자신의 스튜디오를 열고 사진사로 직업을 바꾸었다. 이후 리용에서 활동하고 있는 사진가들과 다양한 교류를 했으며 파리와 비엔나에서 열린 사진전에서 수상하기도 했다. 뤼미에르 부부는 행복한 결혼 생활을 누렸으며, 여섯 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그들의 큰아들인 오귀스트는 1862년에, 둘째 아들인 루이는 1864년에 태어났다.


1870년에는 프랑스와 프로이센 사이에 전쟁이 발발했다. 프로이센 군대가 프랑스 국경을 넘어 브장송 근방까지 진격해 오는 바람에 뤼미에르 가족은 리옹으로 피난했다. 거기서 앙투안은 다른 사진사와 함께 스튜디오를 차렸다. 사진사로서 벌이는 괜찮은 편이었고, 뤼미에르 스튜디오는 계속해서 번창했다.


뤼미에르 형제는 모두 과학 과목에서 뛰어난 성적을 냈다. 형제는 모두 아버지 앙투안이 가지고 있는 예술적 감수성과 과학적 호기심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둘 다 유기 화학에 대해 흥미를 느꼈는데, 그중에서 오귀스트는 생화학과 의학 분야를 좋아했고 동생인 루이는 물리학에 관심을 가졌다.

발명가이자 영화감독.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영화의 형태를 만든 형제로, 기계 제작자인 동시에 제작・흥행・배급 등 현재의 영화 제작 보급 형태의 선구적 역할을 한 영화의 시조 격으로 불리는 일명 뤼미에르 형제, 형인 오귀스트 마리 루이 니콜라 뤼미에르(Auguste Marie Louis Nicholas Lumière)와 동생 루이 장 뤼미에르(Louis Jean Lumière)의 이야기이다.


그들은 획기적인 발명품인 시네마토그래프를 발명하여 이를 이용하여 처음으로 영화를 찍었다. 주요 작품으로는 《리옹의 뤼미에르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들(Sortie des Usines Lumière à Lyon)》 , 《열차의 도착(L'Arrivée d'un Train en Gare de la Ciotat)》 등이 있다.

뤼미에르 형제는 리옹에서 가장 큰 기술학교인 라 마르티니에르(La Martiniere)를 다녔으며, 학창 시절에 줄곧 우수한 성적을 보였다. 형제는 광학, 화학, 물리학을 비롯한 과학 분야에 관심이 많았고, 새로운 정보와 지식을 받아들이는 데에도 적극적인 자세를 보였다. 또한 아버지를 따라 사진에도 상당한 취미를 가지고 있었다. 휴일이 되면 바닷가를 찾아가 사진을 찍고 현상하는 것을 즐겼다.


당시 사진술은 급속히 발전하고 있었다. 특히, 1878년에는 건판 기법(dry-plate process)이 실용화되어 기존의 습판 기법을 대체하기 시작했다. 습판 기법에서는 사진을 찍기 전에 별도의 감광 처리를 해야 했지만, 이미 감광제를 얇게 입힌 건판의 경우에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아버지 앙투안은 감광성이 뛰어난 감광액을 개발해 건판 기법을 개선하는 데 도전했다.


오귀스트와 루이는 대학을 마친 후에 아버지의 연구를 도와 드렸다. 그들은 대학에서 배운 과학적 원리와 방법을 도입해 조직적인 실험을 추진했다. 루이는 마티니에르 기술학교에 다니던 1880년 사진 원판 개선 작업을 시작, ‘블루 레이블’로 알려진 사진 건판(photographic plate)의 더 나은 형태를 개발하기도 했다. 1881년에는 오귀스트가 군대에 입대하는 바람에 루이가 연구를 주도했다. 루이는 감광성이 뛰어난 젤라틴 감광액을 개발해 사진 원판 개선 작업을 시작, ‘블루 레이블(blue label)’로 알려진 사진 건판(photographic plate)의 더 나은 형태를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이러한 발명을 바탕으로 뤼미에르 가족은 1882년에 리옹의 몽플레지르에 있는 창고를 인수하여 건판 공장을 차렸다. 처음에는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지만 오귀스트가 합세하면서 사업은 안정적인 궤도에 올랐다. 뤼미에르 가족의 건판 공장은 근처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고용할 정도로 규모가 커졌다. 뤼미에르 형제와 아버지 앙투안은 자신들이 개발한 기술을 이용한 공장을 세워 사진 건판 관련 유럽 최대 회사로 키웠다.     

1890년에 이르러 사진산업은 흑백에서 컬러로 바꾸는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또 미국과 유럽 대륙 양쪽에서 모두 움직이는 사진 기술 개발 경쟁이 시작됐다. 그러던 어느 날, 앙투안 뤼미에르는 두 아들에게 가장자리에 구멍이 뚫린 말랑말랑한 사진 필름을 보여 주었다. 그것은 낱장으로 되어 있는 딱딱한 사진 건판과는 완전히 달랐다. 그 필름은 미국의 발명가이자 사업가인 조지 이스트먼(George Eastman)이 활동사진 영사기에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이었다. 앙투안은 그 필름을 더욱 저렴하게 만들어 보자고 두 아들에게 제안했다.


당시에 활동사진은 사람들 사이에 상당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특히 1891년에 토머스 에디슨(Thomas Edison)이 윌리엄 딕슨(William Dickson)과 함께 발명한 키네토스코프(kinetoscope)는 미국은 물론 유럽에서도 큰 인기를 누렸다. 1894년 파리에서는 키네토스코프로 활동사진을 보기 위해 관람객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훗날 오귀스트는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기계 속에서 행진하는 작은 활동사진들을 보고 나는 홀딱 반했다. 만약 이 사진들을 대형 화면 위에 비추어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본다면 얼마나 대단할까 하고 나는 상상했다. 그리고 즉시 이 문제에 매달리기로 결심했다.”


오귀스트는 활동사진을 대형 화면 위에서 보기 위해 필요한 장비의 목록을 적어 내려갔다. ① 긴 롤필름, ② 초당 최소한 16장 이상의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고속 카메라, ③ 필름을 카메라에 통과시키며 끌어내는 구동장치(이것은 사진을 한 장 한 장 찍을 때마다 잠깐씩 멈출 수 있어야 한다), ④ 적절하게 작동하는 영사기, 그리고 사진을 대형 화면에 비추기 위한 렌즈와 광원.


롤필름으로는 이스트먼이 개발한 셀룰로이드 필름을 사용할 수 있었다. 그것은 튼튼하고 얇으면서 투명했으며, 롤 모양으로 말 수 있었다. 당시에 활동사진을 연구했던 사람들은 셀룰로이드 필름이 연속적으로 빠르게 많은 사진들을 찍는 데 이상적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오귀스트는 석 달 동안 연구를 거듭한 끝에 그럴싸한 구동장치를 만들었다. 구동장치의 속에 있는 스프로켓(필름의 구멍이 걸리는 톱니바퀴)이 돌면서 그 톱니바퀴에 필름의 구멍이 물려 필름을 부드럽게 끌어당겼다. 그러나 그 장치는 필름을 끌어당기기만 할 뿐 사진을 찍거나 영사를 하는 순간에 멈추는 기능이 충분하지 못했다.


뤼미에르 형제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구동 메커니즘에 대한 연구에 몰두했다. 1894년 어느 날 저녁, 루이는 재봉틀을 보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었다. 재봉틀을 돌리게 하는 노루발을 보고, 필름을 일정하게 돌릴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냈던 것이다.


'회전하는 바퀴와 한 쌍의 쐐기가 작은 갈고리들을 움직이게 하면, 그 갈고리들이 필름에 뚫린 구멍들에 꼭 들어맞아 필름을 끌고 가다가 풀어 준다. 그리고 갈고리들이 원래의 출발 위치로 돌아가는 동안 필름은 정지 상태에 놓이고 그 사이에 사진을 찍거나 영사를 할 수 있다.'


이러한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루이는 ‘시네마토그라프(cinématographe)’라는 기계를 설계했다. 그것은 카메라인 동시에 영사기도 되는 기계로 각 사진이 초당 16장의 속도로 화면에 비춰지도록 되어 있었다. 시네마토그라프의 제작은 몽플레지르 공장에서 “최고의 기계공”이란 찬사를 받고 있었던 샤를 무아송(Charles Moisson)이 맡았다. 결국 1895년 2월 13일에는 뤼미에르 형제의 이름으로 시네마토그라프에 대한 특허가 등록되었다. 영화를 뜻하는 ‘시네마(cinema)’라는 단어도 시네마토그라프에서 비롯된 것이다.  


뤼미에르 형제의 시네마토그라프는 에디슨의 키네토스코프를 넘어섰다. 키네토스코프는 순간적인 영상을 틈이 난 구멍으로 들여다보는 장치였지만, 시네마토그라프는 필름을 연속적으로 영사하여 스크린을 통해 볼 수 있는 장치였다. 또한 키네토스코프의 경우에는 웬만한 방 하나는 가득 채울 정도의 크기를 가지고 있어서 야외 촬영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이에 반해 시네마토그라프는 이동이 가능한 크기를 가지고 있었고 전기가 없어도 수동으로 작동시킬 수 있어서 야외 촬영에도 적합했다. 더 나아가 키네토스코프로는 한 사람씩 영상을 들여다볼 수 있었던 반면, 시네마토그라프의 경우에는 많은 대중이 함께 영화를 관람할 수 있었다. 뤼미에르 형제에게 '영화의 아버지'라는 호칭을 부여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1895년 3월 19일에 뤼미에르 형제는 몽플레지르 공장 근처에 있는 한 저택에 시네마토그라프를 설치했다. 실내 온도도 19℃로 셀룰로이드 필름에 안성맞춤이었다. 12시가 되자 공장의 정문이 열리더니 노동자들이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루이는 시네마토그라프의 손잡이를 돌렸다. 세계 최초의 활동사진인 <리옹의 뤼미에르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들>이 촬영되는 순간이었다. 시간은 50초가 걸렸으며, 800개의 프레임이 소요되었다.


뤼미에르 가족은 활동사진이 큰 성공을 거둘 것으로 확신했다. 그들은 프랑스 산업발전협회로 가서 최초의 활동사진을 상영했고, 사진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도 시네마토그라프를 선보였다. 1895년 6월 11일에는 리옹에서 사진가 회의가 열렸다. 그 회의에서 뤼미에르 형제는 10편의 활동사진을 보여 주었다. <리옹의 뤼미에르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들> 이외에도 <정원사 골탕 먹이기>,  <아기 우유 먹이기>, <바다> 등이 상영되었다. 그중 마지막에 상영된 <바다>는 회의 전 날에 루이가 배로 여행하는 사람들의 활동사진을 찍어 밤에 현상한 다음, 바로 공개한 것이다.


전문가 집단이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자 뤼미에르 가족은 대중을 상대로 한 행사를 계획했다. 아버지 앙투안은 파리로 가서 장소를 물색했다. 카퓌신 가의 그랑 카페(Grand Café) 주인이 지하실을 빌려주기로 했다. 앙투안은 건물 주인에게 총관람료의 20%를 주겠다고 제안했지만, 건물 주인은 그 제안을 거절하면서 하루에 30프랑씩 지불하라고 했다. 그는 나중에 자신의 판단을 크게 후회했다.      


1894년 2월 13일, 뤼미에르 형제는 시네마토그라프 특허를 획득한 뒤 그 해 여름, 루이는 노동자가 공장을 떠나는 장면을 시네마토그라프로 촬영했다. 드디어 1895년 12월 28일 오후 9시에 뤼미에르 형제는 파리 그랑 카페에서 영화 상영회를 가졌다. 그것이 바로 <라 시오타 역으로 들어오는 기차>인데, 보통 <기차의 도착>으로 불린다. 상영 시간은 3분, 입장료는 1프랑, 관객은 33명이었다. 첫날에 올린 수입은 33프랑에 불과했지만, 3주 뒤에는 하루 수입이 2,000프랑을 넘어섰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시네마토그라프를 보면서 놀라움과 감탄을 금치 못했던 것이다. 첫 상영회에서는 <뤼미에르 공장의 출구>, <기차의 도착>, <물 뿌리는 정원사> 등 모두 10편의 활동사진이 상영됐다.

세계 최초의 대중적인 영화는 1895년 12월 28일 오후 9시에 상영되었다. 그것이 바로 「라 시오타 역으로 들어오는 기차」인데, 보통 「기차의 도착」으로 불린다. 상영 시간은 3분, 입장료는 1프랑, 관객은 33명이었다. 첫날에 올린 수입은 33프랑에 불과했지만, 3주 뒤에는 하루 수입이 2,000프랑을 넘어섰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시네마토그라프를 보면서 놀라움과 감탄을 금치 못했던 것이다.

관람객 중에는 당대의 유명한 마술사이자 사진사인 멜리에즈(Georges Méliès)도 있었다. 그는 당시 영화를 처음 본 소감을 이렇게 표현했다.


“다른 관객과 함께 나는 자그마한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죠. 잠시 후 리옹에 있는 벨쿠르 광장의 정지 영상이 나타났지요. 나는 옆 사람에게 이렇게 속삭였습니다. ‘설마 저런 사진을 보여주려고 우릴 이곳에 오게 하지는 않았겠죠. 저런 사진은 나도 10년 이상 찍어 왔어요.’ 그때, 말이 짐수레를 끌며 우리 앞으로 다가오기 시작했고, 또 다른 기차들과 사람들이 그 뒤를 이어오는 것을 보고 나는 입을 다물었습니다. 곧 거리 전체가 살아 움직이고 있었어요. 우리는 모두 깜짝 놀라 입을 벌린 채 거기에 앉아 있었지요.”  

시네마토그라프는 대성공이었다. 수많은 도시에서 수요가 빗발치는 바람에 뤼미에르 형제는 행복한 비명을 질렀다. 그들은 100여 명의 사람들에게 시네마토그라프의 사용법을 훈련시킨 다음, 세계의 각 지역으로 보내 활동사진을 촬영해 오도록 했다. 1896년에는 프랑스에서 셀룰로이드 필름을 만드는 회사인 플랑숑 사와 동업자 관계를 맺었고, 영국의 런던에서도 시네마토그라프가 문을 열었다. 몇 년이 되지 않아 유럽은 물론 인도, 미국, 러시아, 중국에까지 시네마토그라프가 진출했다.


그러나 다른 발명가들과 사업가들이 발 빠르게 뤼미에르 형제의 발명을 모방하기 시작했다. 프랑스 경제계의 거물인 파테(Charles Pathé)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뤼미에르 형제의 경쟁자로 나섰다. 파테는 1896년에 영화사를 설립했으며, 그것은 20세기 초반에 세계 최대의 영화사로 성장했다. 뤼미에르 형제가 1918년에 시네마토그라프의 특허권을 넘긴 사람도 파테였다.


1900년은 파리에서는 세계박람회가 개최되었는데 그 자리에서 뤼미에르 형제는 초대형 스크린에 영화를 상영하는 행사를 벌여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었다. 공식적으로는 그 행사를 끝으로 뤼미에르 형제는 영화 사업의 일선에서 물러났다. 당시에 루이는 '영화는 미래가 없는 발명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사업가로서는 성공하기 어렵다는 것이 뤼미에르 형제의 판단이었던 모양이다.


1900년 이후에 뤼미에르 형제는 서로 다른 길을 걸었다. 루이는 영화에서 사진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는 1904년에 ‘뤼미에르 오토 크롬(Lumière autochrome)’이라는 컬러 사진용 건판을 발명하여 컬러 사진의 시대를 여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어 1920년에는 스테레오 초상화 시스템을, 1930년에는 스테레오 필름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오귀스트는 의학 공부에 매진해 결핵과 암을 연구하는 데 일생을 보냈다. 그는 1928년에  <인생, 질병 그리고 죽음>이란 책을 펴내기도 했다. 오귀스트는 레종도네르 상을 수상했으며 루이는 프랑스 과학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됐다. 동생 루이는 1948년에 83세의 나이로, 형 오귀스트는 1954년에 9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들은 1909년에 영화를 발명한 공로로 미국의 프랭클린 연구소가 수여하는 엘리엇 크레슨 메달(Elliott Cresson Medal)을 수상했다.      

굳이 지금의 영화사업을 생각하지 않더라도 영화가 생기기 시작해서 지금까지 거쳐온 과정과 역사를 생각하면 영화가 돈이 안 되는 사업이라는 판단은 분명히 오판이고 오해였다. 심지어 가문의 사업처럼 여겨져 두 형제는 세계의 주목을 한눈에 받았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들은 그것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 못하고 다른 사람만 좋은 일을 시키고 만 꼴이 되고 말았다.


가장 큰 패착은 정작 영화가 단순히 유행에 그칠 것이라고 잘못 판단해 영화에 대한 특허를 취득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들은 결국 결국 영화 산업에는 제대로 끼어들지 못하고 파테에게 찍었던 영화 필름마저도 모두 매각하고 말았다.


그들은 분명히 확신했다. 영화는 제 모습을 상영해 보여주기도 전인 1894년 2월 13일 특허부터 획득했다. 특허 획득 이후 영화에 대한 폭발적인 관심은 뤼미에르 형제의 사업적 예견력을 확인해 주었다. 최초의 영화 상영회를 가진 지 불과 몇 달 뒤인 1896년, 뤼미에르 형제는 런던과 뉴욕을 방문 시네마토그라프 상영회를 가졌다. 이어 이들의 발명품은 폭발적인 관심을 일으키며, 벨기에, 독일, 네덜란드에서 시연회를 가지는 등의 놀라운 성과를 일궈냈다.

 

또 이 해 7월 7일에는 인도 봄베이 왓슨 호텔에서 시사회를 가졌으며, 노벨티 극장에서 7월 18일까지 영화를 정기적으로 공개하기도 했다. 1897년에 이르자 이미 전 세계에 수백 개에 이르는 시네마토그라프가 팔려나갔다. 이 때는 이미 750편에 이르는 영화 카탈로그가 있었다. 1900년에 열린 파리 세계박람회의 주인공은 단연 시네마토그라프였다. 박람회 대형 스크린에 영화가 상영되는 행사가 열렸으며, 뤼미에르 형제와 시네마토그라프는 집중적인 조명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 마지막 한 단계인 사업화와 대중화를 넘어서지 못하고 말았다.

그들의 전체 인생과 영사기의 발명과정을 보면, 당연히 아쉬워하고 그들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그리고 왜 그제대로 사업화하지 못했는지 답답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당신이 지금의 흐름에서 그것이 다 지나고 난 뒤에 그들의 실패와 실수와 오판을 전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 이 두 형제의 아쉬운 실패 아닌 실패를 돋보기로 들여다보고 소개하는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


두 형제의 경우 말고서도 정작 평생을 바친 고생 끝에 만든 특허나 제품 등이 발명을 한 당사자가 아닌 그것을 사업화하거나 유통에 성공시킨 사람이 독식하며 엉뚱하게 돈을 벌어다준 경우를 우리는 180회가 넘는 대가들의 삶을 하나하나 들여다보면서 너무도 많이 봐왔다. 왜 그런 일이 생겼을까? 어리석은 것 같아 보이지만 그 역사는 반복되었고 결코 똑똑하지 않은 이들이 아니었는데 그들은 성공의 문턱 바로 앞에서 좌절하거나 발길을 돌리는 아쉬움을 겪어야만 했다.


당신은, 당신의 삶은 그렇지 않다고 장담할 수 있는가? 누구나 끝난 바둑을 복기하면서 어디가 패인이었는지 왜 거기서 좀 더 참고 기다리지 못했는지 왜 더 노력하여 완성시키지 못하고 버티지 못했는지 평을 내놓을 수 있다. 하지만 평론가는 결코 기발한 소설을 써낼 능력이 없다. 그에게 그럴 능력이 있었다면 그는 다른 사람의 작품을 읽어내는 직업이 아닌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작가라는 직업을 가졌을 것이다. 당신도 그리고 당신의 삶도 크게 다르지 않다. 당신이 모두 끝난 다른 사람의 과거 인생을 조망할 때는 모두 보이는 것이 당장 당신의 내일조차도 보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래서 우리는 역사공부를 한다. 역사는 반복되고, 인간이 그렇게 발달된 과학의 산실 위에서 산다고 하지만 어리석은 실수는 시대와 상관없이 반복되기 때문이다.

당신의 노력이 다른 질시하는 이의 공작과 모함에 의해 가려지거나 세상이 아직 당신의 기발함과 선견지명을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에 대중들이 그것을 소화하는 데 걸리는 시간을 당신의 속도로 기다리지 못하고 숨이 넘어가버리는 것처럼 아쉽고 답답한 일은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간의 당신이 했던 피와 땀이 어린 노력이 어디로 날아가버리지 않는다. 결과는 산출되었고 그것은 온전히 당신만의 것이다. 그것이 엄청난 돈이 된다고 판단한 이들이 침을 흘리고 어떤 식으로든 그것에 편승하고 싶어 하는 흐름이 혹은 그들의 여러 가지 공작과 포함이 당신을 좌절시키거나 당신에게 모든 것을 포기하고 편하게 모든 것을 넘겨버리고 지내자는 속삭임을 건넬 수도 있다.


그러지 마라. 당신의 노력을, 당신의 예지력을, 당신의 꿈을 그렇게 안일한 방식으로 싸구려 포장하여 팔아버리지 마라. 당신은 당신의 노력과 고생에 대한 충분한 보답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다. 다만 그것이 지금 즉각적으로 반응이 오지 않는다고 해서 바로 포기하는 오판은 평생을 두고 당신을 후회하게 만들 수 있다. 그저 무식하게 버티라는 말이 아니다. 당신은 여러 어리석은 판단을 하고 후회했을 전 세대 선배들의 전철을 보고 익혔다. 그렇다면 최소한 똑같은 실수를 반복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당신의 노력을 알아주는 사람들이 없어도 방법을 강구하고 노력해야 할 판에, 이미 다른 이들에게 충분한 가능성과 반응을 확인하고서도 그것이 당장 즉각적인 반응을 통한 돈이 되지 않는다고 접어버리는 실수를 당신은 하지 말라고 뤼미에르 형제는 외치고 싶을 것이다.


당신의 노력을 세상이 알아주는 날은, 바로 내일일지도 모르는데, 당신이 오늘 오후에 그것을 포기해버린다면 그것처럼 아쉽고 가슴 아픈 일은 없을 것이다.


동트기 전의 어둠이 가장 짙다.

잊지 마라.

그리고 결코 포기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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