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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Mar 15. 2022

전재산인 비행기를 날려먹고, 사고로 죽을 뻔도 했지만,

글쓰기를 사랑하고 하늘을 나는 것을 좋아하는 어린 왕자로 기억되다.

185번째 대가의 이야기.

 

1900년, 프랑스 리옹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귀족 출신으로 하사 받은 성이 있는 성주였기에 그는 성(城)에서 세 명의 누이 및 남동생과 함께 목가적인 어린 시절을 보냈다. 어릴 적부터 연극 대본 등을 구상하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처음으로 하늘을 난 것은 1912년 12살 때였다. 조종사 베드린이 모는 비행기를 타고 앙베리외 공항에서 처음 이륙하는 짜릿한 경험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 경험은 평생 그를 사로잡게 된다.


학교 성적은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어서 1917년에 보쉬에 고등학교와 생루이 고등학교에서 해군 사관학교에 지원하였으나 1차 필기에도 통과하지 못하고 불합격했다. 그 후 파리에 있는 국립 미술학교 에콜 데 보자르(Ecole nationale superieure des Beaux-Arts) 건축학과에 비학위과정 청강생으로 입학했으나 학업보다는 대학가 카페와 세느 강변의 한 호텔방을 오가는 한량에 가까운 생활을 즐겼다.


1921년 4월 프랑스 육군 이등병으로 징집되어 프랑스 육군 제2항공연대 항공정비병으로 근무했다. 1921년 6월에 남프랑스 이스트르에서 자비로 민간항공기 조종훈련을 1시간 20분만 받는 것으로 민간 조종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1922년 1월 육군 상등병으로 진급과 동시에 군용기 조종 면허장을 취득했다. 1922년 4월 파리에 있는 육군 사관후보생 EOS 과정에 입교, 예비군 소위로 임관했다. 1922년 8월 모로코 카사블랑카에 있는 육군 제37항공연대 배치되었으나, 프랑스 본토 근무를 희망하여 1922년 10월 프랑스 파리 르 부르제에 있는 육군 제34항 공연대로 전근을 가게 되었다.


1923년 후일 유명 소설가, 시인, 언론인이 된 루이스 드 빌 모랭과 약혼했다. 이후 항공기 추락사고로 두개골이 골절되어 의병 전역했다.


프랑스 육군 항공의 선구자인 에두아르 바레스 장군의 권유에 따라 재입대를 할 계획이었지만 약혼녀와 가족들의 반대로 포기하고, 보 알롱 타일제조회사의 제품 검사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1923년 9월 약혼녀와 파혼했다.

 

1924년 Allier and Creuse 트럭회사의 Saurer 자동차 판매 대리점 영업사원으로 이직했으나 1년 6개월간 단지 1대의 트럭을 판매하고 일이 도저히 적성에 맞지 않아 힘들다며 사직했다.


본격적으로 작가 수업을 한 것은 1923년부터였다.

이후 몇몇 산문과 시를 집필하기 시작, 1926년 첫 저서인 <비행사(L'aviateur)>를 발표하였다. 같은 해 라테코에르 항공사에 취업하여, 프랑스령 서아프리카의 지배 하에 있었던 현 모로코의 카사블랑카와 현 세네갈의 다카르 간의 정기 항공우편 조종사로 근무했다. 다카르 항로상의 아프리카 기항지인 모로코 남부 캅 쥐비의 항공기지 착륙장 지점장으로 18개월 간 일하기도 했다.


이듬해인 1927년에는 야간 항공우편 비행을 시작했으며, 불시착 항공기 수리 업무와 조난 비행사 구조 업무도 함께 병행했다. 같은 해 <남방 우편기(Courrier Sud)>를 집필하여 작가로 데뷔하였고, 3년 뒤인 1930년 갈리마르 출판사에서 이를 출간했다. 그해 6월에는 <야간 비행(Vol de Nuit)>를 집필하였다.


이듬해인 1931년 1월에 고메즈 까리요라는 과테말라 출신 신문 기자의 미망인 콘수엘로 슁생과 결혼하였고, 12월에 <야간 비행>으로 페미나 문학상을 받았다.

프랑스의 작가이자 공군 장교였으며 전 세계에 공식적으로 8천만 부 이상의 책이 판매된 베스트셀러 <어린 왕자>의 작가로 알려진 우리에게는 ‘생텍쥐페리’라는 이름으로 익숙한, 본명, 앙투안 마리 장 바티스트 로제 드 생텍쥐페리(Antoine Marie Jean-Baptiste Roger de Saint-Exupéry)의 이야기이다.

하지만 생활이 어려워지자 다시 우편 비행 회사에서 일을 시작했다. 1934년에는 에어프랑스사에 입사해 사이공에서 활약했고 1935년 생텍쥐페리는 비행기 엔지니어와 함께 코드로사(Société des avions Caudron)에 의뢰해서 개인 전용기 ‘Caudron C.630 Simoun’를 주문하게 된다.


당해 11월 파리 - 사이공 구간의 비행시간을 단축하기 위한 장거리 비행을 47시간 내에 완수하면 보상금을 주겠다는 제의에 비행기를 몰았다. 시합 도중 기체결함으로 리비아 사막에 불시착하여 5일 만에 다행히 지나가던 베두인 상인에게 발견되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물론 애써 주문한 전용기도 모두 부서져버렸다. 1938년 과테말라 상공에서 항공기 엔진 폭발로 불시착하여 두개골과 좌측 쇄골이 파열되는 사고가 있었다.

이듬해 1939년에는 <인간의 대지>가 출간됐고 같은 해 6월 미국에서 <바람과 모래와 별>이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되어 ‘이달의 책’으로 선정되고 아카데미 프랑세즈 소설 대상을 수상하는 등, 작가로서 최고 전성기를 맞이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을 앞둔 1939년 9월 3일 예비군 동원령으로 민항기 조종 경력을 인정받아 공군 대위 계급을 부여받고, 프랑스 공군 제33정찰 비행대대 2비행대(Groupe de reconnaissance II/33e escadre de reconnaissance)에 동원 지정되어 공군 정찰기 조종사로 근무를 하게 되었다. 1940년 5월 10일 독일의 프랑스 침공으로 전쟁이 시작되었다.


5월 23일 블로흐 174 정찰기로 정찰비행 중 독일 전차부대를 발견한 직후 대공화기에 피격되었으나 무사히 귀환하여 정찰비행 사진을 제공했다. 1940년 6월 2일 이 일로 훈장을 받았다. 1년 뒤인 1940년 <성채(Citadelle)>의 집필을 시작하였으나 제2차 세계 대전 때문에 프랑스가 나치 독일에 함락되어 다 완성하지 못하고 12월에 미국 망명을 위해 뉴욕으로 출발하였다.


그리하여 1개월 뒤인 1941년 1월 뉴욕에 도착하여 <전시 조종사(Pilote de Guerre)>를 집필하였으며, 2년 뒤인 1943년 4월에 그 유명한 <어린 왕자>를 출간하였다.

비시 프랑스 정부가 생텍쥐페리를 일방적으로 정부 요직에 임명하고, 자유 프랑스 정부의 샤를 드골 장군은 생택쥐페리를 친독일 인사라고 공개적으로 암시하는 등 정치적인 색깔논쟁에 휘말린 생택쥐페리는 자유 프랑스군에 재입대하기 위해 5월 4일 프랑스령 알제리에 도착했다.


당시 프랑스 공군은 최신형 미제 항공기 조종사 연령을 만 35세 이하로 제한했는데, 당시 43세였던 그는 연령제한을 8년 초과한 데다, 잦은 추락사고로 인한 부상 후유증으로 비행복을 스스로 입을 수도 없었고, 왼쪽으로는 고개를 돌릴 수도 없어서 후방의 적 항공기를 확인할 수 없을 지경이었기 때문에 조종사 복무 부적합 판정을 받았지만, 이미 유명인사로 자유 프랑스군 사령부 고위 장교들과 친분이 있었던 그는 예비군 공군 소령 계급을 달고, 조종사로 복무하게 되었다.

다만, 매우 정교한 미제 최첨단 고성능 장거리 정찰기인 F-5B-1-LO 라이트닝 정찰기를 조종하기 위해서는 7주간의 기종전환 훈련을 받아야 했다. 1943년 7월 21일 튀니지 부근의 라 마르사 기지에 위치한 미 제7군 소속 자유 프랑스 공군 제33정찰 비행대대 2 비행대에 배치되었다.


그러나, 2번째 출격 후 착륙하는 과정에서 조종 미숙으로 항공기를 고장 내는 바람에 비행대장은 그를 비행 부적합자로 분류하여, 지상근무를 명령하였다. 이후 8달에 걸친 지루한 지상근무를 견디다 못한 그는 개인적으로 지중해 지역 연합 공군사령관 Ira C. Eaker 미 육군 중장을 만나 비행을 할 수 있도록 청탁을 넣어, 1944년 5월 16일, 사르데뉴 섬의 알게로 기지에서 비행대로 복귀하였다.


비행대로 복귀한 후 그는 위험을 무릅쓰고 평소 취미였던 조종 중 독서와 조종 중 글쓰기를 재개했다. 전쟁 중에도 문학에 대한 열정은 완전히 그를 사로잡고 있어서 전시에도 그에게 가장 중요한 건 문학이었고, 군 복무는 둘째였다. 그는 비행에 필수적인 절차인 비행 전 점검이나 엔진 예열 등의 필수 점검을 하지 않고 그 시간에 혼자 독서를 하는 특유의 행동을 계속했다.


한 번은 정찰 임무를 마치고 복귀하는데, 비행 중 읽던 소설책을 다 읽지 못해 지상 병력이 그의 착륙을 기다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기지 상공을 1시간 동안 빙빙 선회하며 소설책을 다 읽은 다음에 착륙을 하기도 했다.

그는 친독일이냐 반독일이냐 하는 정치적 색깔 논쟁에 휘말려 우울증이 왔고, 이 때문에 전쟁 중 술을 마시기 시작해 폭음을 하곤 했다. 이 때문에 그의 정신적, 육체적 건강 상태를 악화일로에 있었다. 1944년 6월 29일에는 출격 순서가 아님에도 자신이 잘 아는 사부아 지역에 대한 정찰이라는 이유를 들어 비행을 지원했고, 안시 상공에서 엔진 고장이 일어나 실수로 방향을 잘못 잡아 적 점령지인 이탈리아 제노아 상공에 진입하여 격추 위기에 몰리기도 했다.


1944년 7월 17일 그의 비행대는 코르시카 바스티아 인근 Borgo로 기지를 이동하여, 8월 15일로 예정된 남프랑스 상륙작전(용기병 작전)을 위한 상륙지역 지도제작용 항공사진 촬영 임무를 수행하기 시작했다. 운명의 7월 31일 오전 8시 25분 그는 일상적인 정찰비행을 위해 비무장으로 6시간 분의 연료를 탑재한 정찰기를 몰고 이륙했으나 6시간이 지나도록 기지로 돌아오지 않았고, 이륙 8시간 30분 뒤 실종 보고가 들어왔다.

독일 전투기들의 관측과 공격에 완전히 노출될 수밖에 없는 맑은 날씨. 생텍쥐페리의 정찰기는 정오가 조금 지난 시각 니스 서쪽 상공에서 저공비행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바다 쪽으로 선회하여 해안선 저 너머로 사라졌다. 사라지기 전 그의 비행기는 안전 고도인 6천 미터보다 낮게 그리고 예정된 항로를 벗어나 비행하고 있었다.


그를 존경하는 부대원들은 그가 그렇게 흔적 없이 사라진 것에 놀랐다. 그의 실종 소식은 국제뉴스에 헤드라인으로 올라갔다. 정찰기는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 인근에 추락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전시 상황이라 추락지역에 대한 조사나 사고 원인은 조사되지 못했다. 공식적으로 실종처리가 되었으나 사망으로 추정되어 1948년 전쟁 중 결국 사망이 인정되었다.

사실 실종 한 달 전인 6월 29일의 비행에서도 생텍쥐페리는 지시받은 항로에서 벗어나 자신의 어린 시절의 추억을 상기시키는 안시 호수 상공을 비행했다는 이유로 주의조치를 받은 적이 있었다. 7월 31일의 비행에서도 그는 어느 곳보다도 자신이 좋아하는 프로방스 지방으로 들어서자 정상적인 귀환 항로에서 서쪽으로 벗어났던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그의 나이 44살이었다.


그가 하늘로 사라져 버렸다고 말하던 각종 실종설이 많았던 시기를 지난 그로부터 53년이 지난, 1998년 4월 마르세이유 남동쪽 해저에서 어부 장 클로드 비앙코가 우연히 그물로 그의 이름이 적힌 팔찌를 건져 올림으로써 그의 행방이 드디어 밝혀졌다. 수중탐사장비로 바다 깊숙이 가라앉은 라이트닝 정찰기를 발견함으로써 그의 최후가 확인되었다.

그의 초상화

하지만 신기했던 것은, 그간 제기되어 온 독일군에게서 격추당했으리라는 짐작과 달리 비행기 겉에는 총탄 자국이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정비불량이나 아니면 일부러 마지막 비행에서 스스로 추락한 것이 아닌가 하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그런데 2008년 3월의 헤르만 괴링 공군 원수에게서 훈장도 받은 공군 에이스 조종사인 호르스트 리페르트(Horst Rippert. 1922-2013)가 생텍쥐페리를 격추했다고 주장하며 화제 된 사실이 있었다.


최근 자료에 따르면서 독일 전투기에 격추되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해졌다. P-38의 우측엔진에 피탄으로 인한 윤활유 누유 흔적이 발견되었기 때문인데, 기습공격을 받아 엔진 하나가 망가진 상태로 그대로 추락해 버렸다는 게 유력하다.


당시 생텍쥐페리가 우울증을 앓았기 때문에 자살했다는 주장도 있었다. 실제로 생텍쥐페리의 친한 친구들도 그가 마지막 얼마 전까지 굉장히 말이 없었고 우울했었다는 증언을 했으며 죽기 하루 전인 7월 30일 비행 전에 친구들과 같이 바닷가를 거닐다가 얼굴도 잘 모르는 여인에게 “나와 함께 수영하지 않을래요? 내일이 되면 난 여기에 없을지도 몰라요.”라며 쓴웃음 짓는 바람에 친구들이 불길한 농담 말라고 했던 일화까지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자신과 매우 가까운 사이였던 친구인 기요메가 격추당해 죽은 것도 생 택쥐페리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기요메의 죽음을 이야기한 편지에서도 ‘죽음 속에서, 안데스 산맥을 걸어서 빠져나온 그 친구도 결국 격추당해 죽음을 피할 수 없었네.... 나도 그럴까?’라는 글귀가 남아있어 그가 상당한 충격을 받았던 것도 사실이다.

아내 콘수엘로와 함께

게다가 그는 엘살바도르 출신 여성으로 이미 나이 27살에 전 남편들과 2번이나 사별한 과부였던 아내인 콘수엘로와의 결혼을 감행했다. 남프랑스 지방 귀족 출신으로 보수적이었던 생텍쥐페리 집안은 그녀를 며느리로 인정하지 않아서 1931년 결혼하고 13년 동안 그녀를 무시했다고 한다. 둘의 관계도 상당히 미묘해서 서로 사랑하고 사이도 좋았지만 두 사람 모두 불같은 열정을 보이다가도 갑자기 식어버린 듯 갈등하며 별거하는 듯하더니 다시 합치는 일이 잦았다고 한다.


<어린 왕자>를 쓴 작가라는 이유로 마냥 순수했을 것이라는 선입견과는 다르게 그는 굉장히 열정적이었다고 주변에서는 말한다. 주변에 여자들도 많았는데, 넬리 드보귀에라는 유부녀와는 불륜 관계였다는 사실이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넬리는 나중에 피에르 슈브리에라는 필명으로 콘수엘로를 음해하는 저서까지 냈던 인물인데, 정작 생텍쥐페리가 실종되고 나서 그의 집안에서 콘수엘로를 내쫓아버려 그녀는 <어린 왕자>의 유명세와 달리 잊혔다.


그가 책을 집필하게 된 계기도 그의 인생이나 그의 성격처럼 우연과 운명의 한가운데쯤의 느낌으로 다가왔다.

그저 책을 읽고 짧은 글을 쓰는 것에 익숙해있던 그가, ‘휴머니즘’이라는 하나의 주제로 짧은 글을 여러 편 쓰곤 했다. 그런데 마침 그가 쓴 글을 읽어본 앙드레 지드가 그것들을 한데 모아 장편소설로 발전시키라고 강하게 독려하였고, 10여 년이라는 세월이 지난 후 <인간의 대지>(1939)라는 작품으로 재탄생하게 되었다.


아카데미 프랑세즈 그랑프리의 영예를 안겨 주기도 했던 이 작품에는 1935년 1월 30일에 파리-사이공 간 비행시간 신기록을 수립하던 중 리비아의 사막에 추락한 후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던 경험도 생생하게 담겨 있다. 이 작품은 같은 비행기 마니아였던 미야자키 하야오가 사랑하는 작품 중에 하나로 꼽히기도 하였다.


그를 세계인들에게 각인시킨 <어린 왕자>의 탄생일화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1942년 초 뉴욕의 어느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있던 생텍쥐페리는 흰 냅킨에 장난 삼아 그림을 그렸다. 식당 종업원이 옆에서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함께 식사하던 출판업자 커티스 히치콕이 생텍쥐페리에게 뭘 그리는 것인지 물었다. 생텍쥐페리가 답했다.


“별거 아닙니다. 마음에 담아 가지고 다니는 한 어린 녀석이지요.”


히치콕이 그림을 살펴보며 말했다.


“이 어린 녀석 말입니다. 이 아이에 관한 이야기를 써보시면 어떨까요. 어린이용 이야기로 말이지요. 올해 성탄절 전에 책을 낼 수 있으면 참 좋겠는데 말입니다.”

며칠 뒤 생텍쥐페리는 친구 레옹 윈체슬라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날 보고 어린이 책을 써보라는데, 날 문방구에 좀 데려다주시오. 색연필을 사야 하니 말입니다.”


생텍쥐페리는 자신의 착상을 색연필로 그려보았지만 신통치 못하다고 생각했고, <전시 조종사>의 삽화를 그린 베르나르 라모트의 도움을 요청했지만 라모트의 데생에도 만족하지 못했다. 그렇게 적당한 그림을 만나지 못했던 생텍쥐페리는 점점 더 이 일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1942년 여름 생텍쥐페리 부부는 뉴욕에서 기차로 45분 거리에 있는 롱아일랜드 노스포트 근처 이튼 네크에서 식민지풍의 하얀 삼층집을 세내어 살았다. 이 집에서 <어린 왕자>는 드디어 탄생하게 되는데, 1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후 레이널 앤 히치콕(Reynal & Hitchcock) 출판사에서 영어와 불어로 출간되었다.


이튿날부터 배포된 영어판 초판은 3만 부, 불어판 초판은 7천 부였다. 나중에 갈리마르 출판사가 레이널 앤 히치콕 출판사를 고소했고(생텍쥐페리는 자신의 모든 저작에 관한 출판권을 갈리마르와 계약해둔 터였다.), 프랑스에서는 1945년 11월에야 책이 나왔다. 그러나 전후 인쇄용지 품귀 탓에 실제로 본격적으로 서점에 배포된 것은 1946년 4월이었다. (1948년 레이널 앤 히치콕 출판사는 하코트 브레이스 앤 컴퍼니에 인수되었다.)

나 역시 동화 작품을 쓰고 그림을 맡기고 싶어 수많은 일러스트레이터와 화가들을 만나며 그림을 부탁하고 오디션 아닌 오디션을 본 적이 있다. 하지만 결국 모두 마음에 안 들어 직접 1년이나 들여 그림을 그린 경험이 있다. 자신이 쓴 글에 가장 맞는 이미지는 그릴 수만 있다면 자신이 가장 잘 그릴 수 있는 적임자라는 사실을 체험을 통해 알게 되었다. 작곡을 하면서 작사를 직접 하는 것이 가장 그 음감에 맞는 가사를 탄생시킬 수 있다는 논리와 비슷한 셈이었다.


오늘 굳이 생텍쥐베리의 인생을 당신에게 소개하는 것은 그의 인생이 좌충우돌의 실패와 실수를 통해 <어린 왕자>로 순수의 화신이 되어 있을 그의 적나라한 인생으로 당신의 환상을 깨부수려고 함이 아니다.


물론 그는 지방이긴 하지만 한 나라의 귀족 가문 출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열정을 따라 다른 나라 출신의 과부와 결혼했고 그 결혼생활도 단란하기보다는 또 다른 유부녀와 바람을 피우는 것으로 안정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심지어 그는 자신의 인생이 마지막이 되었던 비행마저도 규칙을 잘 지키지 않고 생명과 연관되어 있던 비행기의 정비를 제대로 하지 않고서 정해진 항로를 벗어나 결국 독일군에게 저격되어 인생을 마감했다.


그런데, 참 그 다운 죽음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가 과연 그의 선택이나 그런 보헤미안 기질을 가지고 비행을 하다가 연료통이 구멍 나서 기름이 새는 비행기로 추락하면서 후회하거나 두려워했을까?

그가 비행기를 몰았던 시대의 비행기 조종사는 앞서 전술했던 바와 같이 굳이 적군에게 저격되어 추락하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죽음을 담보로 한 위험한 일이었다. 돈이 없어 비행이 우편일을 하면서도 사고로 인해 전재산에 가까운 비행기가 다 없어져버리고 사고로 두개골이 골절되었고 심지어 마지막 즈음에는 몸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을 정도의 장애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굳이 자신의 유명세를 이용하여 정찰기를 몰면서까지 그는 하늘을 날 때, 그 하늘에서 위험하게 스리 자신이 읽던 책을 읽고서 착륙할 정도로 하늘에 있을 때 자신의 영혼이 살아 있음을 느끼는 사람이었다.


그에게 하늘을 나는 것과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 그리고 사랑을 하는 것은 그의 인생 전부였고, 전쟁 때문에 절친을 잃고, 하루하루 사는 것이 다음날이 보이지 않는 암울한 우울을 겪으면서도 그는 하늘을 날면서 자신이 읽고 싶은 책을 읽고 그 마음들을 글로 옮기는 ‘어린 왕자’였음에 틀림없다.

당신의 삶은 현실이다. 마냥 낭만적인 것만을 꿈꾸며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 당신의 낭만적인 마음이나 글이 당신에게 밥이나 고기를 대령하지 않을 것이고 먹고 살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면 당신이 사랑이라고 믿었던 사람에게 핍박과 힐난을 받게 될 것이다.


그 모든 것들을 무시하며 당신의 낭만을 찾고 당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은 지극히 무책임한 일이고 권장할만한 일이 아니다. 만에 하나 당신에게 당신이 챙겨야 할 사랑은 물론이고 아이까지 있다면 그것은 방관을 넘어선 일일 수도 있다.


그래서 당신은 현실에 맞춰 웃고 싶어 주지 않은 이들에게 고개를 숙이고 웃음을 띄우고 매일 아침 힘겨운 발걸음을 직장으로 옮기고 늦은 시간까지 혹은 주말까지 반납하며 그 현실을 살아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현실 속에서 당신이 단 한 숨, 그 숨 한 덩이를 낭만으로 바꾸어 살 수 있다면 당신의 삶은 약간의 여유가 생길지도 모른다. 언제 한가하게 소설책을, 시집을 읽느냐며 한심스러워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당신의 사람이 그저 현실적인 것에 이리저리 치여 당신의 삶을 그저 배터리 소진시키듯 방전시켜버리는 삶으로 삭막하게 황폐화시키지 않았으면 좋겠다.

당신이 한 때 문학을 꿈꾸던 소년소녀였든 그렇지 않았다 하더라도 당신의 삶은 분명히 낭만과 문학과 철학을 자양분으로 하여 촉촉했던 때가 있었고, 그 촉촉함은 당신의 삶이 너무 팍팍하지 않게 메말라 갈라 터져버리지 않게 해 주었을 것이다.


당신의 영혼이 너무 힘겨워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사멸하기 전에, 당신이 당신의 삶이 현실에 치여 어쩔 수 없이 살아간다는 생각까지 치닫지 않도록 당신의 영혼에 당신의 사랑에 촉촉한 봄비 같은 자양분을 전해주길 바란다. 한 권의 책이, 그림 하나가, 음악 한 곡이, 당신의 영혼이 돌아서 쉴 수 있는 여유를 만들어 줄 수 있다면,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 현실을 방해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시간이 없고, 여유가 없다는 핑계로 당신의 영혼을 메말라 비틀어질 지경으로 만들지 마라.


당신이 가족을 위해 끼니조차 제대로 챙길 틈 없이 뛰어다니고, 아이의 기저귀를 갈고 돌아서면 가족들의 밥상을 챙기고 설거지하느라고 여유 있게 커피 한 잔 마실 시간조차 없다고 해서 당신의 삶을, 메말라가는 당신의 영혼을 그대로 방치하지 마라. 당신을 챙길 사람은 결국 당신밖에 없다. 당신에게 어린 왕자가 말한다.


“널 길들이는 건 현실이 아니야. 바로 너 자신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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