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3년, 독일 북부 도시 함부르크(Hamburg)에서 스웨덴 출신 아버지와 독일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함부르크에서 커다란 연유 제조회사를 운영했던 부친 덕에 비교적 여유로운 어린 시절을 보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라거펠트의 삶을 집요하게 추적해 저서를 남긴 알리시아 드레이크(Alicia Drake)에 의하면, 그는 어려서부터 그림 실력이 상당히 뛰어났고 친구들과 어울리기보다 혼자 책을 읽고 공상을 즐겼으며 예술과 옷에 지대한 관심을 드러냈다고 한다.
전설 같은 이야기 중 하나는, 그가 3살 때부터 이미 옷을 만지는 것만으로도 언제 만들어진 옷감인지 파악할 수 있는 신기에 가까운 능력을 선보였다는 과장스러운 설도 있다.
20살 때인 1953년에 어머니와 함께 파리로 이주하였으며, 파리 패션계에서 처음에는 삽화가로 일했다. 그러던 중 21살 때인 1954년에 국제 양모 사무국(International Wool Secretariat)이 주최한 신인 디자이너 경연대회에서 울코트 부문 1등 상을 수상하며 패션계에 화려하게 데뷔하였다.
그 후 세계적인 명품 브랜드 발망을 시작한 디자이너 피에르 발망(Pierre Balmain) 밑에서 3년 반 동안 조수로서 일했고, 1958년부터는 쟝 파투(Jean Patou)로 자리는 옮겨 5년 간 쿠튀르 컬렉션을 진행하였다.
1961년 자신의 쿠튀르 하우스를 설립하게 된 이브 생 로랑과 달리 그는 파리 패션계의 아웃사이더로서 마리오 발렌티노(Mario Valentino), 크리지아(Krizia), 찰스 주르당(Charles Jourdan), 슈퍼마켓 체인점 모노프리(Monoprix) 등 다양한 브랜드를 위해 온갖 디자인을 제공하면서 디자이너로서 자신의 가능성을 모색하였다.
그러나 그는 보수적이고 느린 변화를 추구하는 파리 쿠튀르의 세계에 점차 염증을 느꼈고, 결국 1963년 프리랜서 디자이너로서 독립해 자신의 비즈니스를 시작하였다. 이는 같은 경연대회에서 드레스 부문 1등을 차지하며 비슷한 시기에 쿠튀르에 입문해 디오르의 천재적 계승자로 부상한 이브 생 로랑과는 완전히 대조적인 행보였다.
그렇게 그는 그보다 3살이 어렸던 이브 생 로랑과 함께 파리에서 수많은 디자인의 의상을 선보이면서 젊고 전도유망한 디자이너로서 강력한 경쟁관계를 형성하였다.
독일 출신의 패션 디자이너로 일명 패션계의 ‘살아있는 신화’로 불리며, 현대 하이패션의 아이콘 격인 인물을 자처 자신의 이름으로 레이블을 가지고 있던 칼 라거펠트(Karl Lagerfeld)의 이야기이다.
그는 2~3년을 버티기 힘든 패션 디자이너 업계에서 54년간 펜디의 수장으로 있었고 동시에 80년대 망하기 일보직전이던 샤넬의 수석 디자이너가 되어 37년간이나 이끌며 전설을 만들어냈다. 오랜 기간 두 최고급 명품 브랜드의 수장으로 있으며 전 세계 패션 트렌드를 이끈 것 자체만으로 도 패션 디자이너로서 쌓은 아성은 누구도 쉽게 따라잡지 못한다고 인정받는 전설에 해당하는 인물이다.
그러던 중, 1964년 프랑스 브랜드 끌로에(Chloé)에 합류해 수석 디자이너로서 브랜드를 성공적으로 이끌었고 잘 팔리는 컬렉션을 만드는 디자이너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1972년 무렵 끌로에 컬렉션은 패션 미디어의 헤드라인을 장식하게 되고 라거펠트는 패션을 이끌어가는 디자이너로서 국제적 명성을 얻게 되었다. 끌로에와 라거펠트의 관계는 그가 샤넬로 옮기기 전까지 20년간 지속되었고, 9년 간의 공백 후 1992년부터 1997년에도 이어졌다.
1965년 시작된 이탈리아 패션 하우스 펜디(Fendi)와 관계 또한 칼 라거펠트의 명성을 확립하는 데 큰 기반이 되었다. 1925년 로마에서 탄생한 펜디는 숙련된 모피 가공 기술로 유명했으나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브랜드 혁신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펜디에 합류한 라거펠트는 펜디 가(家)의 자매들과 함께 펜디의 상징이 된 ‘더블 F’ 로고를 창조해 브랜드의 정체성을 뚜렷이 가시화하는 한편, 무겁고 둔탁한 모피를 가볍고 세련된 패션으로 변화시키는 작업을 진행하였다.
전통적으로 부와 사치의 상징이었던 모피는 구멍이 뚫리고, 조각나고, 주름 잡히고, 니트처럼 짜이는 등 해체와 재조합의 실험 과정을 통해 젊고 현대적인 디자인으로 거듭났다. 1969년에는 프레타 포르테 컬렉션이 시작되었고 펜디는 명실공히 모피, 가죽 트렌드를 이끌어가는 세계적인 브랜드로 부상하였다. 펜디는 1977년 기성복 라인을 출시하고, 1984년 넥타이, 선글라스 등 액세서리 컬렉션을 추가하며 세계적인 토털 패션 브랜드로 거듭났고 칼 라거펠트와의 협력관계를 오랜 기간 이어나갔다.
그러던 와중에도 1974년에는 독일에 자기 이름으로 칼 라거펠트 임프레션이라는 회사를 만들었다. 끌로에와 펜디와의 성공적인 협력관계를 통해 칼 라거펠트는 브랜드의 정체성을 꿰뚫어 보는 정확한 판단력과 시대 변화에 신속하게 적응하는 그의 능력을 증명해내었다. 1978년 WWD(Woman's Wear Daily)와의 인터뷰에서 아래와 같이 자신의 작업을 설명한다.
“…나는 변화를 지지한다. 내가 하는 작업은 나의 관점에서 세상의 변화를 창조하는 것이다.”
창립자 가브리엘 샤넬이 1971년 사망한 뒤 침체를 겪던 브랜드 샤넬에서 1982년 9월 칼 라거펠트의 샤넬 영입을 공식 선언되었다. 독일인이자 기성복 디자이너라는 라거펠트의 정체성과 경력이 거센 반발과 논란을 불러일으켰으나 그 정도 소문과 질시는 그의 샤넬 입성을 막지는 못했다.
백여 년 간 패션의 변화를 이끌어 온 파리 쿠튀르의 파워와 위상은 1970년대를 거치며 수익과 트렌드 영향력의 측면 모두에서 크게 약해졌고, 쿠튀르 하우스들은 생존을 위해 세상의 변화를 받아들여야 했다. 샤넬의 소유주들은 샤넬 하우스에도 새로운 시대에 어울리는 적극적인 변화와 혁신이 필요함을 직시했고 칼 라거펠트를 적임자로 판단했다. 그는 수년간 파리 쿠튀르에서 훈련받은 경험이 있었고 치열한 기성복 세계에서 노하우를 갈고닦으며 성공을 입증해 왔기에 샤넬의 변화와 혁신을 이끌 최적임자로 선택되었다.
라거펠트의 손을 통해 샤넬의 상징과도 같던 우아한 트위드 재킷은 젊은 층까지 사로잡는 경쾌한 스타일로 변신했고, 하위문화의 상징이던 데님, 가죽 등의 소재로 만든 재킷 등도 인기를 끌었다. ‘C’ 두 개가 겹쳐 있는 샤넬의 트레이드마크를 의상이나 가방에 사용하기 시작한 것 역시 라거펠트였다.
1983년 1월 샤넬 오트 쿠튀르 컬렉션 데뷔 무대를 통해 칼 라거펠트는 죽은 샤넬을 환생시켰다는 평가를 이끌어내며 쿠튀르의 세계에 회귀했다. 끌로에와의 계약이 종료된 직후 1984년부터는 샤넬의 프레타 포르테까지 감독하며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서 샤넬 제국의 건설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라거펠트는 샤넬의 시그니처 트위드 슈트, 샤넬 로고, 샤넬을 상징하는 까밀리아(Camellia), 리틀 블랙 드레스와 클래식 트윈 세트, 샤넬 퀼팅 백, 커스텀 주얼리, 샤넬의 낭만주의 시기인 1930년대 이브닝드레스에 이르기까지 샤넬의 역사 전반을 검토하고 샤넬 하우스의 핵심 디자인 요소들을 재정비했다.
또한 샤넬의 근본정신을 계승하되 동시대의 새로운 취향을 가미하여 샤넬에 새로운 생명력을 부여하였다. 라거펠트에 의해 샤넬의 오랜 클래식 아이템들은 대중적인 거리 문화 요소들과 섞여 젊고 캐주얼하게 변화되었다.
1991년 가을/겨울 컬렉션에서 칼 라거펠트는 샤넬의 퀼팅 백을 연상시키는 검정 가죽 퀼팅 재킷과 부츠, 우아하고 여성스러운 실크 드레스를 조합했다. 라거펠트는 고급문화와 스트리트 문화의 자유분방한 요소들을 혼합함으로써 20세기 초 시대의 변화를 주도했던 샤넬의 정신을 되살리는 동시에, 20세기 말 부상한 포스트모더니즘의 절충주의 미학과 연결했다.
패션계 일각에서는 칼 라거펠트가 상업적 성공만을 위해 샤넬 하우스의 고상함과 순수성을 훼손했다고 비난했지만 그는 결국 샤넬을 젊은 세대가 열광하는 브랜드로 변신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뿐만 아니라 영민하게도 라거펠트는 샤넬 이미지의 젊은 변신과 별개로 최고급 럭셔리 브랜드로서 샤넬의 명성을 구축하는 데에도 힘을 기울였다.
오직 샤넬을 위해 특별히 제작된 값비싼 소재들, 깃털 공방 르마리에(LEMARIE), 자수 공방 르사주(LESAGE), 단추 공방 데뤼(DESRUES), 구두 공방 마사로(MASSARO) 등 최고의 프랑스 수공예 공방의 기술을 사용해 제작한 샤넬 쿠튀르는 패션의 오랜 전통이 소멸되어 가는 시기에 범접할 수 없는 샤넬의 위상을 확립하였고, 샤넬 제국 명성의 굳건한 기반이 되었다.
샤넬의 화려한 부활과 더불어 그의 이름에는 파리 패션의 귀족, 제왕이라는 수식어가 따르게 되었고 라거펠트의 역사는 새로운 시대가 요구하는 창조적 디자이너의 상을 설명하기 위한 대표적인 사례가 되었다.
칼 라거펠트는 1984년 Karl Lagerfeld, 1998년 Lagerfeld Gallery 론칭을 이어가며 자신의 브랜드 또한 전개해왔다. 그러나 라거펠트는 끌로에, 펜디, 샤넬 등 기존 브랜드를 혁신하고 재창조하는 데 더 큰 능력을 발휘해왔으며 특히 샤넬과의 작업은 그의 작품 세계의 특징을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라거펠트는 샤넬의 역사를 참조했지만 존경을 표하기보다 가볍고 위트 있게 변형시키는 데에 관심을 두었고, 하이패션과 거리 패션, 과거 역사와 현대 문화의 요소들을 자유롭게 혼합해 샤넬 브랜드에 동시대의 가치, 즉 재미와 자유를 부여하였다. 유희적 절충주의, 역사주의와 혼성모방, 해체주의 태도와 관련된 라거펠트의 작업들은, 앤드류 볼튼(Andrew Bolton, 2005)에 따르면 포스트 모더니티 시대의 특성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
유머와 위트를 사랑한 라거펠트는 샤넬의 라이벌이었던 엘사 스키아파렐리(Elsa Schiaparelli)의 초현실주의적 디자인으로부터 창조적 영감을 얻었다. 1981년 끌로에 컬렉션에서 기타 드레스를 선보였던 라거펠트는 1983년 샤넬 데뷔 무대에서 실크 크레이프 드레스에 르사주 공방의 자수로 샤넬 백의 길트 체인 무늬를 가미해 흡사 벨트가 늘어진 것 같은 트롱프뢰유(Trompe l’oeil) 효과를 선보이며 샤넬의 새로운 가능성을 실험했다.
라거펠트의 초현실주의적 디자인들은 1984년 케이크 모자, 1985년 소파 형태의 모자, 1986년 옷의 앞 뒷면을 바꿔 디자인 한 백워드 슈트(Backward suit) 등으로 이어졌고, 이것들은 1980년대 후반 그의 주요 디자인 목록으로 남았다. 라거펠트는 샤넬과 마찬가지로 단순함을 추구하는 시대에 액세서리가 줄 수 있는 극적 효과에 주목했고, ‘액세서리는 재미있어야 한다. 유머가 필수다. 나는 언제나 나를 즐겁게 만드는 액세서리들을 만든다’고 말했다. 1991년 그의 봄/여름 컬렉션에는 해마 모양의 귀걸이도 등장하였다.
라거펠트는 보수적인 샤넬 클래식의 전통을 해체시키는 과정에서, 역설적이게도 젊은 시절 샤넬이 가졌던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모더니티의 정신을 되살릴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샤넬 슈트의 구조를 해체시키고 재조합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창조의 가능성을 찾았다. 다양한 모양과 재료의 브레이드 장식이 샤넬 슈트에 덧붙여졌고 클래식 샤넬 슈트는 샤넬이 경멸했던 미니 스타일로 대담하게 변형되었다.
1992 가을/겨울 컬렉션에서 라거펠트는 바이커 족 스타일의 퀼트 가죽 재킷과 아름다운 실크 타페타 드레스를 결합시켰고, 이로써 엘리트 문화와 대중문화, 남성 문화와 여성 문화, 기성 문화와 반 문화 사이의 질서에 도전했던 젊은 샤넬의 정신을 새롭게 과시했다.
격식을 갖춘 상류층 패션이었던 샤넬 슈트는 라거펠트에 의해 재킷으로 따로 분리되어 레깅스, 데님 등과 함께 입혀졌고 샤넬의 로고와 까밀리아는 과시적인 장식과 액세서리로 부각되어 샤넬 브랜드를 대대적으로 홍보하는데 이용되었다.
씨엘과 함께
라거펠트는 1920, 30년대의 샤넬 작품들을 연구해 1930년대 샤넬의 로맨틱한 이브닝드레스 또한 부활시켰고, 샤넬과 자신의 관점에서 역사주의라는 새로운 트렌드의 탐구 또한 진행하였다.
<타임> 지는 2012년 그를 역사상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한 100명의 패션 아이콘들 중 한 명으로 선정하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2019년 2월 프랑스 파리에서 향년 85세로 사망했다. 사인은 췌장암으로 밝혀졌다. 베르나르 아르노 LVMH 회장은 ‘그는 파리를 세계 패션의 수도로, 펜디를 가장 혁신적인 이탈리아 브랜드 중 하나로 만드는 데 공헌을 한 창조적 천재였다.’고 하며 그를 추모했다. 유산 상속자 중 하나로 그의 고양이를 지목할 정도로 그의 반려묘에 대한 사랑이 지극했던 사실도 세상을 놀라게 했다.
칼 라거펠트의 이미지는 오랫동안 검은 안경과 백발의 포니테일 뒤에 가려져 신비주의로 포장되어 온 것이 사실이었다. 실제로 그에 대해 추적해온 작가와 기자들의 취재에 의하면, 그는 휴가도 잘 즐기지 않는 일중독자이자 열정적으로 지적 탐구를 끊임없이 경주했던 인물로 더욱 유명하다.
그는 출판업자이자 서점 ‘7L’의 소유주가 되었고, 자택에 20만 권 이상의 수많은 장서를 보유하고 했다. 뿐만 아니라 1987년 우연한 계기로 샤넬의 첫 번째 프레스 키트(press kit: 기자회견 자료집)를 촬영한 이후 사진의 세계에 빠져들어 자신의 광고 캠페인을 직접 촬영하고 유명 패션 잡지의 화보 촬영을 진행했었다.
G.D와 함께
칼 라거펠트의 오랜 성공은 패션을 넘어 문화, 예술 전반에 걸쳐 광범위하게 구축되어 온 그의 지적 토대와 탁월한 언어 능력, 그리고 무엇보다 ‘끊임없이 자신을 재창조해야 한다.’라는 그의 굳은 믿음에서 비롯되었다. 2000년 그는 에디 슬리먼(Hedi Slimane)이 디자인한 디올 옴므(Dior Homme) 슈트를 입기 위해 13개월 동안 다이어트를 진행해 무려 42kg을 감량했는데, 이는 젊음과 변신에 대한 그의 욕망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이었다.
여기서도 간과해서는 안될 진실이 한 가지 숨어있다. 그가 그렇게 피나는 다이어트까지 해가면서 입으려 했던 슈트를 디자인 했던 디올의 디자이너 에디 슬리먼은 정식 패션을 공부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홍보직원 출신의 파격적인 디자이너 데뷔 역사를 가진 새로운 인물이었다. 왜 이것이 주목할만한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는가?
대부분의 패션 디자이너들이 시장에 가서 고무줄 바지를 사서 입지 않는 사실을 논외로 하더라도 전설의 패션 디자이너가 자신이 인정하지도 않는 패션 공부를 정통으로 하지 않은 인물의 옷을 입을 리 없다는 편견을 그는 과감하게 부숴버렸기 때문이다. 물론 디올에서도 에디를 발탁한 것이 그가 가진 감각과 그의 천재성 때문이었다고는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패션계는 자신들만의 아성을 구축하고 그것에 도전하는 이들에 대해 굉장히 차갑고 높은 성벽을 쌓는 분야로 유명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에디가 디자인한 슈트를 입기 위해 전설 칼 라커펠트가 피나는 다이어트를 했다는 것은 그가 가진 평상시 패션 디자인 철학을 여실히 증명해 보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 그의 인생을 쭉 살펴보면서 도대체 어디가 그의 실패냐고 또 이해를 못 하고 딴지를 걸 사람이 있을 듯하다. 그는 독일인이다. 독일인을 패션 디자이너로 프랑스와 이태리의 디자인 명가에서 초빙하는 것은 유럽의 문화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것 자체만으로 얼마나 큰 장애인지에 대해서 알만한 사람은 다 안다.
대회에서 수상을 하고 디자이너를 시작하기는 했지만 그가 견습 디자이너를 통해 대가들의 패턴과 유럽 패션계의 흐름을 모두 익히고 그가 독립하는 데까지 걸린 시간은 10년 가까이 걸렸다. 위에서 간략하게 설명하였지만, 당시 라이벌로 경쟁구도로 여겨지던 이브 생 로랑이 한 브랜드에서 주목을 받으며 일찌감치 자신의 유명세를 키워나갔고 편하게 정점까지 오른 것에 비해 10년이 되는 기간 동안 자신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습득하고 완전히 몸에 배이게 하는데 그는 10년에 가까운 시간을 묵묵히 참고 견뎠다.
그리고 난 후, 그가 바로 인정을 받았던가? 아니다. 그는 그가 10여 년에 걸쳐 수행한 기술과 자신이 여러 가지 구상했던 것들을 다양한 브랜드를 걸치면서 실험하고 또 새로운 형태로 시험하였다. 특히 그가 기성복 디자이너로 일했던 것에 대해 폄하하며 어떻게 명품 브랜드의 수석 디자이너로 영입할 수 있느냐고 반대 여론이 들끓을 때도 그는 웃으며 그들의 비아냥을 실력으로 입증했다.
너무 장기 집권하여 ‘샤넬의 집사’라는 별명으로까지 불렸던 그가 샤넬에 들어가 내놓은 제품들은 상상 이상으로 기발한 것들이 많았다. 예를 들어 옷을 만들 때 콘크리트를 박아 넣어 예상치 못한 패턴을 짜넣는다던지, 14FW컬렉션에는 종이 용기에 가방을 넣고 랩핑을 해서 마트 정육점에서 산 고기 1팩을 연상시키는 가방까지 내놓던지, 레스토랑 메뉴판을 클러치백으로 내놓는다던지 한 것들이 바로 그 사례이다.
이것은 그를 기성복 디자이너라며 비난하던 자들에게 던지는 일침에 다름 아니었다. 그가 기서복까지 두루 섭렵하지 않았다면 읽을 수 없는 시장의 정서와 젊은이들의 요구와 흐름은 그만이 읽어낼 수 있는 것으로 인정되어 그는 죽어가던 브랜드를 부활시켜 전성기 이상의 것으로 끌어올렸다.
그는 끊임없이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었고, 나이와 직업 상관없이 많은 이들과 어울리며 정보와 감각을 읽는 것에 주저하지 않았다. 그가 패션모델을 비롯하여 할리우드 스타들은 물론이고 지 드래곤이나 제니 등의 한류 스타들과도 가깝게 교류했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그저 늙고 나이 먹은 할아버지가 젊고 어린애들에게 관심을 보인 정도로 폄하되어서는 안 되는 그만의 정보 수집과 분석의 과정이었고 노력의 일환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그가 여든이 넘는 나이가 되도록 현역에서 인정받고 진두지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정년이라는 것이 없어져버렸다. 월급을 많이 주는 대기업에서는 능력과 상관없이 오십이 넘는 순간 책상을 빼버린다는 것이 공식화될 정도의 흐름이 되어가고 있다고 한다. 물론 자본주의 시대에서 돈이 전부라고 여기는 기업에서 그런 행동을 보이는 것이 이상할 것도 없다. 하지만, 돈이 전부라고 여기는 영리 추구 사업체에서는 그들에게 돈을 만들어주는 능력자를 나이가 많다고 내치지 않는다.
즉, 사오정의 공식은 일반적인 이들에게만 적용된다는 것이다. 조금 냉정하게 말하자면, 오십이 넘으면서 관리자 자리에 가게 되면, 그들은 3,40대에 전성기를 지나 자신의 능력을 보이기보다는 적당히 안주하고 더 많은 월급과 성과급을 가져가는 월급 파먹는 쥐로 회사에 비친다는 논리가 성립되는 것이다.
젊은이들의 감각이 중시되는 하루가 달라지는 패션계에서 여든이 넘도록 현역에서 전설로 인정받으며 일할 수 있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뼈를 깎는 노력이 선행되어야 하는지 일반인들은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참고로 그는 디자이너의 영역을 뛰어넘어 사진을 직접 찍는다던가 명품 브랜드들의 광고를 직접 기획한다던가 하는 과감함을 보였다. 그것은 그가 능력도 되지 않는데 단순히 그의 이름만 걸는 식의 작업이 아니었다. 그가 가지고 있던 천성적인 완벽주의에서 그따위 이름 팔기 허례허식은 용납될 리도 없었다.
당신이 나이를 먹었다고 해서 회사에서 당신의 책상을 빼버릴까 봐 두려워할 시간이 있다면, 당신의 능력을 회사에 보이기 위해 노력하라고 일러주고 싶다. 어떤 회사도 자신의 회사에 이익을 가져오는 인물이 여든이 넘었다고 해서 책상을 빼지는 않는다는 기본적인 사실을 다시 한번 주지하고 싶다. 당신도 이미 알고 있다.
당신이 새롭게 거듭나는 노력을 통해 트렌드에 맞춰 회사에 이익을 가져올 수 있는 인물이라는 것이 인지되는 이상, 회사는 당신이 다른 회사로 나갈까 봐를 걱정하지 당신의 책상을 빼버릴 엄두는 내지도 못한다.
나이 든 이들의 이야기뿐인 듯싶은가? 그저 위에서 시키는 일만 하고, 그나마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대학에서는 그런 거 배운 적이 없다고 투덜거리며 제대로 일은 못하면서 회사의 험담이나 하는 철딱서니 없는 2,30대는 뭐가 다를 것 같은가? 회사는 자선 경영업체가 아니다. 누가 월급을 줘가면서 일을 가르친단 말인가? 그렇다면 그들의 입장에서는 나이 들어 일을 하지 않으면서 많은 월급을 퍼가는 월급 도둑놈과 그 2,30대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여든이 넘는 평생에 걸쳐 자신의 어제는 오늘과 다르고 그 오늘은 또 내일이 되면 다르다고 당당히 말했던 칼 라거펠트의 말을 전하며 그것이 썩어 빠져 자신의 게으름과 뻔뻔함을 깨닫지 못하고 주변만 탓하는 당신의 정수리에 쏟아지는 얼음물이 되길 바란다.
제가 말한 것들은, 제가 말한 그때에만 유효합니다. 제가 말한 것을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마세요. 지금 제가 말하는 것도, 내일이 되면 아마 기억 못 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내일 저는 어제와는 다른 인간이 되어있을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