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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Mar 23. 2022

제대로 못 배운 평민 출신에 배우로 잘 나가지 못했어도

극작가로 변신하여 영문학의 초석을 다진 영국의 문호로 추앙받다.

192번째 대가의 이야기.  


1564년, 영국의 스트라트포드-어폰-에이븐(Stratford-upon-Avon)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꽤 성공한 장갑 제조업자였는데 아내인 메리와의 사이에서 총 여덟 명의 자식을 두었고, 그는 셋째였지만, 첫째 딸과 둘째 딸이 모두 어려서 죽는 바람에 장남으로 성장하게 된다. 워낙 그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는 것이 없어 베일에 쌓은 인물이기 때문에 그에 대한 생애를 추적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그가 여자였고 그 신분을 감추고 글을 썼을 것이라는 추정의 영화까지도 만들어진 배경에 한몫한 바 있다.


그는 지금으로 치면 중학교 정도에 해당하는 당시 'grammar school'이라는 기관에서 교육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집에서 불과 몇 백 미터 떨어진 곳에 그 기관에 해당하는 'The King Edward VI School at Stratford'라는 학교가 있었는데, 아마도 이 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너무 오래되어서 학교에 입학 기록이나 졸업 기록은 남아 있지 않아 정확한 고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후, 그나마 그가 그 이상의 교육을 받았다는 기록조차도 남아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18세가 되던 1582년 11월, 여덟 살 연상인 앤 해서웨이(Anne Hathaway)와 결혼한다. 평민이자 성공한 사업가였던 그의 집안과 비교적 부유한 자영농 집안인 해서웨이 집안간의 결합을 의미하는 결혼이었다. 1583년 5월에 첫딸 수자나가 태어났고, 1685년에는 이란성 쌍둥이인 햄닛(Hamnet)과 쥬디스(Judith)가 태어났다.


1580년대에 극단에 들어가서 1594년 <시종 장관 극단>의 일원이 되었으며, 1599년에는 글로브 극장(Globe Theatre)을 세워 공동 소유주가 되었다.


쌍둥이 남매에 대한 세례 기록(1585년 2월) 이후 1592년까지 그에 대한 기록은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아 그 자취를 찾아볼 수 없다. 7년 가까이 되는 기간 동안 그가 홀연히 공식 기록의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고 사라져 버린 것이다. 1585년부터 시작해서 1592년 동시대 극작가였던 Robert Greene의 글에서 그의 이름이 다시 등장할 때까지의 총 7년의 기간을 연구자들은 '잃어버린 시간(lost years)'이라고 부른다.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이자, 이 베일에 싸인 신비한 인물은 바로, 배우가 되려고 하였으나 전공을 바꾸어 극작가가 되어 희·비극을 포함한 38편의 희곡과 여러 권의 시집 및 소네트 집을 낸  영국이 낳은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가장 영향력 있는 극작가로 불리는 윌리엄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이다.

이 시기의 셰익스피어에 대한 공식 기록은 남아있지 않지만, 이 기간 동안 몇 가지 합리적인 추정이 가능한 사안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셰익스피어는 가족들을 고향에 남겨놓고 런던으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거주한 것으로 보인다. 둘째, 연극배우로서 제법 유명세를 누리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몇몇 셰익스피어 연구가들은 그가 이 시기부터 희곡을 틈틈이 습작하기 시작했다고 추정하기도 한다. 셋째, 몇몇 연구가들은 셰익스피어가 생계를 위해 교사로 재직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하고, 엘리자베스 여왕의 왕립 극단의 배우로 활동했을 것이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1592년 이후로는 상당히 성공적인 배우이자 극작가로서의 삶을 살아갑니다. 넵... 셰익스피어의 첫 번째 직업은 극작가가 아니고 배우였습니다. 그것도 제법 유명한 배우였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1592년 이후 주로 역사극(<헨리 6세>, <리처드 3세>, <리처드 2세>, <존 왕>)이나 희극(<말괄량이 길들이기>, <한여름 밤의 꿈>, <사랑의 헛수고>) 등을 집필했다. 물론 <로미오와 줄리엣> 같은 애절한 비극도 집필하긴 했지만, 주로 역사극과 희극을 집필하는 극작가였다.


1596년, 아들 햄닛이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나게 된다. 아들의 사망 당시 셰익스피어는 런던에 거주하고 있어서 아들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한 것으로 추정된다. 런던에서 북서쪽으로 약 160km 떨어진 스트래트포드 어폰 에이븐은 지금이라면 자동차로 2시간이면 도착할 만큼 가까운 거리지만 당시에는 마차를 타고 며칠을 달려야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달려올 수 없었다고 한다.


그 이후 1601년에 그 유명한 <햄릿>을 발표하기 전까지 <헨리 4세>, <뜻대로 하세요>, <십이야>, <윈저의 즐거운 아낙네들>, <줄리어스 시저> 등 유명한 작품을 왕성하게 집필해내기 시작한다.

정확한 시기를 특정하기는 어렵지만, 셰익스피어 4대 비극이라 일컬어지는 작품들은 1601년 이후 약 5년간의 기간 동안 탄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햄릿>(1601), <오셀로>(1603), <리어왕>(1605), <맥베스>(1606)이 대부분 이 시기에 완성되었다. 물론, 워낙 오래 전의 기록들에 의존한 것들이라 정확한 연도에 대해서는 학계에서도 적지 않은 논란이 있기는 한 부분이다.  

 

이 시기는 정치적으로도, 셰익스피어 개인적으로도 많은 일이 벌어진 시기였다. 일단, 아버지가 1601년에 사망했고, 엘리자베스 여왕이 후손을 남기지 않고 사망한 것은 1603년이었다. 정치적으로도, 셰익스피어 개인적으로도 불안하고 어려운 시기였다.

 

그렇게 그는 1613년까지 꾸준히 집필활동을 이어나간다. 일부 셰익스피어 연구자들은 1611년에 발표된 <Tempest>가 셰익스피어가 발표한 마지막 작품이라고 주장한다. <Tempest>의 맨 마지막 부분 에필로그에 등장하는 주인공 Prospero의 독백이 마치 셰익스피어가 관객들에게 고하는 마지막 작별 인사처럼 보인다는 게 가장 큰 이유인데, 근거치곤 조금 박약한 점이 없지 않아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또 일군의 연구자들은, 그가 1613년경까지 John Fletcher와 함께 The Two Noble Kinsmen을 공동 집필했다고 주장한다. 그렇게 셰익스피어는 1616년, 4월 23일에 사망하였다고 언급되는데, 딸 쥬디스가 결혼한 지 불과 2개월이 지나던 시점이자 50을 넘긴 지 얼마 되지 않는 53세의 나이였다.

셰익스피어가 사망한 지 7년 만인 1623년에 글로브 극장 시절 동료 배우이자 오랜 친구였던 존 헤밍과 헨리 콘델이 그의 희곡 가운데 18편을 모아서 출간했는데, 이것이 바로 <초판 2절판>(퍼스트 폴리오) 작품집이다. 물론 그 이전에도 셰익스피어의 희곡이 간행된 적은 있었지만, <초판 2절판>은 그때까지의 여러 가지 판본을 비교함으로써 오류를 최대한 바로잡은 최초의 비판본이라는 의의를 지닌다. 그렇게 셰익스피어 희곡작품들이 세상에 출판되었고, 같은 해(1623년)에 부인 앤 해서웨이도 세상을 떠나게 된다. 공식적으로 셰익스피어의 최초 작품집은 그가 죽은 지 400년 만에 발견되었다.

1623년 초판 2절판

영국을 대표하는 대문호라고 인정되고 수많은 연구자들이 수많은 연구논저를 아직까지도 내놓고 있는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작가와 문단의 혹평은 적지 않았다. 볼테르와 톨스토이도 셰익스피어를 깎아내렸으며, 현대의 저명한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셰익스피어는 다른 사람이 이미 쓴 내용을 뒤따라 썼을 때에만 진정으로 훌륭한 극작가'라고 비아냥거린 바 있다. 그들이 그의 작품에 대한 공부를 하고 난 뒤에 이런 비판을 쏟아낸 것은 그만한 사실적 근거가 있다.


실제로 셰익스피어의 희곡 가운데 순수한 창작은 몇 편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대개는 당대에 널리 알려진 여러 소설이나 희곡을 각색한 내용이었고, 때로는 남의 작품에서 특정 구절을 그대로 베낀 경우도 있었다. 그러니 셰익스피어가 당대에도 종종 ‘표절 작가’로 비난을 받았던 것도 무리는 아니다.


이것에 대해 당시 풍토가 그랬다는 식으로 변호하는 이들도 적지 않은데, 나는 그 말에 동의할 수 없다. 오히려 나는 그러한 그의 작품적 성향 때문에 그가 인정받아야만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오늘 당신에게 그의 인생을 가지고 온 이유도 바로 그 원이 크다. 그리고 소재와 이야깃거리도 그렇지만, 그것과 별론으로 셰익스피어의 희곡이 지닌 독보적인 예술적 가치를 깡그리 무시할 수 있는 자는 그 어디에도 없다.


셰익스피어의 위대함이 어디에 있는지를 묻는다면 나는 그가 대중들에게 익숙한 이야기를 그 트렌드에 맞게 바로 내놓는 센스에 있었다고 본다. 지금으로 치면 뻔한 진부하기 그지없는 스토리의 막장드라마와 같은 것을 그는 써냈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그의 희곡이 오늘날은 대중과 멀어진 채 상아탑에서 일종의 ‘고전극의 바이블’처럼 취급되는 것은 그가 살아 있었다면 기가 차서 웃을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또 한 가지 주목해야 할 것은 그의 언어구사 능력과 그것을 작품 속에서 어떻게 구현했는가 하는 것이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그의 이야기는 원형이 있다. 당시 '구술'이라는 형태로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던 이야기를 글로, 그것도 공연용으로 적당하게 구현해내는 것은 그리 쉬운 일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당시 시대적 배경을 조금 알아야 이해하기가 쉽다.

셰익스피어 당시에만 해도 영국에서는 공문서나 학술서를 라틴어로 작성했고, 심지어 최초의 ‘영어 문법책’조차도 라틴어로 되어 있었다. 그러한 배경에서 보면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1611년에 간행된 <흠정역 성서(킹 제임스 성서)>와 함께 영어의 위상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


또 셰익스피어는 그러한 역사적 배경에 의거하여 ‘신조어’를 최초로 창초하여 구사한 작가로도 영문학이 자리를 잡는데 큰 공헌을 한 작가이기도 했다. 그의 작품에 사용된 단어는 약 2만 개인데 그중 신조어가 약 2천 개에 달한다.

빌 브라이슨은 다음과 같은 한 마디 경탄으로 셰익스피어의 언어적 천재성을 한 마디로 요약한다.


“가령 우리가 입만 열었다 하면 열 마디 가운데 한 마디는 신조어라고 생각해 보라.”


셰익스피어가 만들어낸 갖가지 표현은 오늘날 영어에서 관용어구로 자리 잡았다. 가령 '살과 피'(flesh and blood;혈육), '마음의 눈'(in the mind's eye; 기억), '더러운 행실'(foul play; 반칙) 등이 그렇고, 아예 이후 작가들의 소설 제목으로 사용된 주옥같은 문구들이 그렇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지나간 것들의 기억’(remembrance of things past)>(영어 제목은 프랑스어 원제에 더 가까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In search of lost time)>)과 윌리엄 포크너의 ‘소리와 분노(sound and fury)’와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brave new world)’등이  소설 제목으로 사용되면서 더더욱 유명해졌다.


셰익스피어의 재가공 과정에서 도드라진 것은 그것만이 아니다. 중세의 연극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평면적이고 진부한 캐릭터 대신 햄릿, 폴 스태프, 이아고, 맥베스 같은 입체적이고 사실적인 인물을 창조함으로써 그의 이전과 이후의 일대 혁신을 이루었다. 그 인물들의 사실성은 물론 소설의 개연성을 능가하는 당시 사람들이 어디선가 있었던 이야기들이 구술로 다시 재편집되어 다듬어지고 살이 붙은 것을 문학적으로 그가 탈바꿈시킨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그 다양한 이야기들을 섭력하게 되면서 셰익스피어는 희극과 비극 모두에서 비교적 고르게 걸작을 남겼다는 점에서 역대의 어느 극작가와도 다르다. 배우로 이미 기본기를 닦아 어느 경지에 올랐던 셰익스피어의 희곡은 당연히 기본적으로 무대 공연을 위한 것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단순히 이야기가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던 구전되던 이야기에서 시작되었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완성되었는가에 따라 완전히 달라질 수 있었음을 그는 완성형으로 보여준다. 그의 작품들이 현대에도 다양한 해석과 시도로 재구성되거나 영상화되는 것은 그것을 반증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최근 넷플릭스에서 리메이크된 헨리5세 이야기

셰익스피어 원작 영화도 수백 편에 달한다. 그중에서도 로렌스 올리비에 주연의 <헨리 5세>(1944)와 <햄릿>(1948), 프랭크 제피렐리 감독의 <로미오와 줄리엣>(1968) 등은 영화계에서도 걸작으로 사람들의 뇌리에 강하게 남아 있다.


그가 낡은 진부함에서 새로움을 완성했다는 점은 시인으로서 그가 남긴 소네트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잉글랜드의 르네상스 초기에 이탈리아의 시형식 칸초네가 토머스 와이엇(Thomas Wyatt)에 의해서 잉글랜드로 들어왔다. 그 뒤로 14 행시 5 음보(Pentameter) 정형시인 소네트가 잉글랜드의 모든 작가들에 의해 쓰이면서 소네트는 곧 문학이라는 공식이 성립하기 시작했고, 시드니(P. Sidney), 스펜서(E. Spenser) 같은 위대한 작가를 배출하게 된다.


이때 들어온 소네트의 형식은 이탈리아의 시인인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가 정립한 것이어서 ‘페트라르카식 소네트(Petrarcan sonnet)’라고 부른다. 페트라르카식 소네트는 그 시작부터가 사랑하는 연인에 대한 찬양에 가까운 찬미였기에, 100년 이상 시간이 지나면서 온갖 클리셰가 난무하게 되었고, 1590년대 후반 인기가 식었다.

그런데 셰익스피어가 이 진부해진 소네트 형식으로 참신한 내용을 담아내면서 다시 인기를 끌기 시작한 것이다. 셰익스피어는 종전의 소네트와는 다른 내용을 담아내기 위해 자신만의 소네트 형식을 만들어낸다. 페트라르카식 소네트는 1개의 옥텟(octet, 8행의 묶음)과 1개의 섹스텟(sextet, 6행의 묶음)으로 구성되어있으며, 8행에서 볼타(volta)라 하여 시상의 전환이 일어나고, ABBA ABBA CDC CDC의 각운 구조(Rhyme Scheme)를 따른다.


그러나 셰익스피어의 소네트는 3개의 콰텟(quartet, 4행의 묶음)과 하나의 커플릿(couplet, 2행의 묶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ABAB CDCD EFEF GG의 각운 구조를 따른다. 그래서 이런 소네트들을 따로 분류하여 셰익스피어(식) 소네트(Shakespearean Sonnet)라고 한다. 그야말로 그의 이름이 장르가 되는 수준까지 이른 것이다.


이것은 그가 극작가로서 보여준 주변에서 들었음직한 이야기들을 자신만의 것으로 재창조하는 글쓰기 기술에서 확장된 형태라 할 수 있다.


셰익스피어가 이렇게 새로운 형식을 창조한 것은 기존의 페트라르카 소네트 형식으로는 자신이 쓰고자 하는 내용을 담아내기에 적절치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전술했듯이, 페트라르카 소네트의 내용은 연인에 대한 맹목적인 찬양과 찬미이다.


셰익스피어의 소네트도 연인에 대한 찬미가 주된 내용을 이루기는 하나, 페트라르칸 소네트와의 차별점은 어느 정도의 논리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맹목적으로 연인의 아름다움을 찬미하기만 했던 페트라르카식의 소네트와는 달리, 셰익스피어는 연인의 아름다움을 찬미하거나, 연인의 아름다움을 영원화(永遠化)하는 데 있어서, 일종의 변증법을 사용한다.


전술했듯이, 셰익스피어식 소네트는 3개의 콰텟과 하나의 커플릿으로 이루어지는 데 이 중 앞의 두 개의 콰텟(즉, 앞의 8줄)이 정명제 (thesis)의 역할을 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콰텟 (다음 4줄)이 반명제 (antithesis)의 역할을 하며, 두 명제의 대립이 커플릿 (마지막 2줄)에서 종합(synthesize)되어 합명제 (synthesis)로 결론을 맺는다.

각운 구조 또한 이러한 변증법적 구조를 뒷받침한다. ABAB CDCD EFEF GG. 앞의 12줄에서 마치 변증법에서 정명제와 반명제가 서로 대화를 하듯 서로 다른 각운이 번갈아서 등장하던 것이, 정과 반의 합이 일어나는 커플릿에서는 하나의 각운으로 통일된다.


셰익스피어에 관해 논할 때면 늘 회자되곤 하는 음모론이 하나 있다. 바로 셰익스피어의 ‘정체’를 둘러싼 구구한 추측이다. 물론 오늘날 셰익스피어를 연구하는 전문가들은 ‘윌리엄 셰익스피어’라는 극작가 겸 배우가 16세기 중후반에 영국에서 살았다는, 그리고 오늘날 전해지는 유명한 희곡 및 소네트의 작가라는 데에 대부분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


그러나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사실은 당대의 다른 인물의 필명에 불과하다는 식의 이야기는 오래전부터 지금까지 끈질기게 떠돌아다녔다.


그 배경에는 앞에서 말했듯이 셰익스피어에 관해 오늘날 우리가 아는 바가 극히 적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막대한 명성을 생각해 보면 셰익스피어에 대한 기록이 그토록 드물다는 것이야말로 정말 수수께끼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가 살았던 16세기까지만 해도 영국 내에서는 지금처럼 체계적인 기록 보존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셰익스피어 전문가인 스탠리 웰스는 셰익스피어의 ‘진짜 정체’를 둘러싼 구구한 주장들이 하나같이 속물근성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따끔하게 지적한다. 즉 오늘날의 기준으로는 결코 대단한 이력이나 학력을 지니지 못한 시골 출신의 일개 극작가가 그런 걸작을 줄줄이 써냈다고는 믿을 수 없다는 오만함이 그 배경에 깔려 있다는 것이다.


이 헛소리 음모론은 19세기 초에, 영문학 및 역사학을 공부하지 않은 미국인의 입에서 처음 나온 것이다. 즉 셰익스피어 사망 후 200년이 지난 후에 유럽에서 한참 떨어진 미국에서 나온 음모론에 불과하며, 그 전까진 셰익스피어가 가상의 존재일 가능성을 제시하는 사람 자체가 없었다.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그가 다녔다는 학교가 지금의 중학교 수준밖에 안되었다고는 하지만 중세 이후에 세워진 이러한 형태의 학교에서는 당대 지식의 기반을 이루는 라틴어와 고대 그리스어의 문법, 운문 기술법을 포함한 ‘자유 과목(Liberal arts)’의 기초를 가르쳤다.


즉, 그가 배워야 할 기본은 그는 이미 학교에서 모두 배웠고 그 이후는 자신의 노력에 의한 독학으로 완성형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특히, 그가 집중적으로 불과 50이 갓 넘을 나이까지 양산해낸 작품수로 보더라도 그 시기의 다른 작가의 몇 배나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게다가 그 작품들의 수준 역시 균일할 정도로 모두 수준 높다는 것은 모든 영문학자들에게 있어 군말 없이 인정할만한 대가라는 것이다.


그래서 실제로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보게 되면, 그리스-로마의 고전 희곡에서 많은 설정을 차용했다. 문학 외 법학, 의학, 박물학에 관심이 지대했고 궁중 지식도 많았으며 프랑스어와 이탈리아어까지 구사할 줄 알았다는 것을 확인할 만한 구석들이 툭툭 나오기도 한다. 도저히 무명 연극배우 출신이 이런 대작들을 썼다고 상상하기 힘들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작품을 쓰고, 셰익스피어는 이름만 빌려줬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그만한 노력을 기울여본 적이 없는 이들의 음모론일 뿐이다.


전 세계를 통틀어 영국이 문화의 선봉에 섰던 16세기 전후의 최고봉, 그리고 현대에도 어느 누가 읽더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문호(文豪)’라는 칭호를 받게 되기까지 그의 글쓰기는 부단하게 변화를 추구했고, 꾸준했다. 자신의 아들이 죽는 아픔을 겪은 그즈음부터 글쓰기가 박차를 가해지는 것을 보게 되면, 그가 글쓰기를 통해 그 시련을 극복해내는 모습이 눈에 선할 정도이다. 대단한 귀족 가문도 아닌 평민 출신에 많은 공부를 하지도 못했지만, 그는 다양한 새로운 글쓰기를 시도했고, 꾸준한 글쓰기로 수많은 걸작들을 쏟아냈다.

실수하고 실패하고 본인이 의도하지 않은 슬픔과 상실을 겪고 난 뒤에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털어내고 일어설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 사람은 살아내야 하기 때문에 일어선다. 그럴 경우 훨씬 더 강한 모습으로 마음을 다지고 다시 벌떡 일어나는 모습을 보이는 사람들에게 그것이 계기가 되는 경우가 많다. 이전과 판이하게 달라지는 삶을 살기 시작하는 것이다.


일기조차 벽한 문장으로 제대로 쓰지 못하는 당신에게 감히 셰익스피어와 같은 삶을 살라고 다짜고짜 이야기한다면 당혹스러울 수 있을 것이다. 글쟁이가 되라는 뜻이 아니다. 배우가 되고 싶었지만, 어느 선에서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였고, 무대에 올릴 작품을 썼지만, 당대에는 그렇게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50이 넘어 몇 년 보내지도 못하고 죽음을 맞이하기까지 끊임없이 자신의 좌절과 실패와 고난을 이겨내면서 가열하게 글을 썼고, 그 글에서 수많은 인생 굴곡들을 그려내 사람들을 웃기고 울렸다. 그것이 자신의 오리지널 스토리가 아니었다고는 하지만, 라틴어가 아닌 평민들이 쓰는 영어라는 말을 정식 희곡에 담아내며 영문학이라는 장르의 최선봉에 섰고 실제 그의 이름과 작품이 영문학을 대표하는 장르가 되어버렸다.


당신에게 그럴 수 있는 용기와 힘이 있기를 바란다. 그 힘과 용기는 갑자기 어디선가 마법처럼 생기는 것이 아니다. 하루하루를 꾸준한 노력으로 살아내는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이다. 별것 아니라고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처음엔 200자 원고지 한 장 채우는 것도 힘들던 사람이 매일 꾸준히 A4 한 장씩 쓰게 되면, 나중에 두꺼운 장편소설 한 권을 써내는 것이 큰일이 아니게 되는 순간이 온다. 그것은 꾸준한 노력을 해온 사람만이 경험할 수 있는 일상의 기적이다.


당신이 슬픔을, 시련을, 그 실패를 새로운 노력으로 극복해내기 위한 돌파구를 끊임없이 찾아내려는 과정에서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당신은 대가가 되어 있을는지도 모른다. 이래서 힘들고, 저래서 지치고, 이것 때문에 저것을 할 수 없다고 투덜거리고 주저앉아있는 사람보다 당신이 훨씬 더 단단해져 오래 멀리 날 수 있는 새가 될 수 있단 말이다.

지금 당장 당신의 노력이 무언가 성과로 이어지지 않는다고 조급하게 생각하지 마라.


결국 그 매일매일의 노력과 인내가 돌아보지 않는 사이에 천군만마가 되어 내 뒤를 지켜주고 있음을 당신은 어느 순간 느끼게 될 것이다,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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