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발검무적 Mar 25. 2022

전업주부로 남편이 바람만 피우다가 자살해버린 상황에서도

전설적인 언론계의 대모로 미국 언론의 상징이 되다.

194번째 대가의 이야기.


1917년 미국의 뉴욕시에서 넷째로 태어났다. 아버지 유진 메이어(Eugene Meyer)는 유태계 이민자로서 캐서린이 태어날 당시 투자 전문회사의 사주로 성공적인 투자를 통해 막대한 부를 이루었고 미국 정계와도 인연을 맺고 있었다.


이후 그는 연방준비제도 이사장, 세계은행 초대 총재를 지낸 부호였다. 어머니 애그네스는 독일계로 5개 국어에 능통한 저술가이자 전위 예술가였다. 이른바 금수저로 태어난 그녀는 부유하고 문화적인 분위기 속에서 캐서린은 무탈하게 자라 명문 여자대학인 바사대학에 진학했다가 시카고 대학으로 편입했다.


대학을 졸업 한 뒤 그녀는 부모가 있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서부의 샌프란시스코로 가서 기자생활을 시작했다. 그보다 앞서 1933년 그의 아버지 유진 메이어는 파산 직전의 신문사였던 <워싱턴포스트> 지를 경매로 헐값에 사들였다. 아버지는 그녀에게 <워싱턴포스트>지에서 일해 줄 것을 요구했지만, 그녀는 과감하게 혼자서 자신의 삶을 개척해보겠다며 거절했다.


그녀는 부모로부터 떨어져 나와 독립적인 삶을 추구하고자 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기자생활을 하면서 그녀는 이전까지 부잣집 영양(令孃)으로 자라면서 경험하지 못했던 사회의 부조리와 하층민들의 삶을 접했다. 그녀는 부두 노동자들과 어울리며 그들과 독한 싸구려 술을 나눠 마시고 부두 노조를 취재해 신문에 기사로 실었다.

이 시기 그녀는 지지하는 정당도 민주당으로 바꾸는데 이전에는 부모를 따라 막연히 공화당을 지지했다고 한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생활은 온실 속 화초였던 캐서린에게 많은 사회적 경험과 독립심, 자기 판단력, 배짱을 키워준 기간이었다. 그러나 이 기간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아버지의 거듭되는 권유로 그녀는 동부로 돌아와 <워싱턴포스트>지에 입사했다. 하지만, <워싱턴포스트> 지는 당시 워싱턴에 존재하던 다섯 개 신문 가운데 가장 빈약한 신문이었다. 그나마도 그녀가 처음 맡은 파트는 ‘독자란’이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진정한 기자로서 현장에서 취재하고 취재원을 만나는 듯의 역동적인 일은 결코 일상에 없었다.

미국 <워싱턴 포스트>와 <뉴스위크>의 발행인이자, 출판인. 워터게이트 사건을 취재·보도하도록 함으로써 <워싱턴 포스트>를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매체 가운데 하나로 성장시킨 전설적인 ‘언론계의 대모’로 불리는 캐서린 그레이엄(Katharine Graham)의 이야기이다.

그녀가 막 신문사 일에 뛰어든 194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여성의 사회활동은 극히 제한적이었고 캐서린도 부모의 그늘 아래에서 이에 순응했다. 그리고 그녀는 아버지가 점찍어둔 훌륭한 집안의 하버드 법대를 나온 변호사였던 청년 필립 그레이엄(Philip Graham)을 만나 사랑에 빠지고 결혼했다. 그녀의 남편은 나중에 대통령이 되는 존 F. 케네디와 친구 사이였을 정도의 인맥을 갖춘 사람이었다. 그렇게 그녀는 캐서린 메이어에서 캐서린 그레이엄이 되었다.

결혼 후 그레이엄은 장인이 주인인 <워싱턴포스트>에서 일을 하기 시작했다. 1946년 장인이 신설된 세계은행 총재로 부임하자 그레이엄은 <워싱턴포스트>의 발행인 자리를 떠맡게 된다. 그레이엄은 시사 주간지 <뉴스위크>를 합병하고 여러 개의 텔레비전 방송국도 매입하는 등 <워싱턴포스트> 사를 대대적으로 확대했다.


그녀는 결혼하면서 너무도 당연한 당시 사회분위기에 맞춰(?) 집안에 들어앉아 전업주부로서 남편의 내조에 헌신한다. 결혼 이후, 그녀는 한 남자의 아내로 네 아이의 어머니로 주부로 열심히 살았다. 정계 진출을 꿈꾸는 남편을 보필했고, 아버지가 남편에게 <워싱턴포스트> 지를 물려주었을 때 남편이 신문사를 일개 지역신문에서 영향력 있는 언론사로 키워 갈 수 있도록 내조했다.


그레이엄은 영향력이 큰 여러 정치인들과도 인맥을 형성해나갔다. 그러나 부인 캐서린과의 관계는 원만하지 못했습니다. 그레이엄은 부인 캐서린의 존재를 아무렇지도 않게 무시하는가 하면 젊은 여기자와 염문을 뿌리기도 했다. 그러던 중 그레이엄은 우울증을 겪게 되고 끝내 1963년 자살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4명의 자녀를 두었던 캐서린 그레이엄은 졸지에 과부가 되어 아이들을 키우면서 남편 대신 신문사를 운영해야만 했다. 캐서린은 가정주부로 20여 년이라는 긴 시간을 보내 그 어려운 일을 어떻게 해 나갈지 걱정으로 가득했다. 다만, 그녀는 아들이 커서 신문사를 떠맡을 수 있을 때까지 버텨야겠다는 마음뿐이었다.

자서전에서 캐서린 그레이엄은 그때 3가지 가능성을 생각했다고 한다. 이대로 신문사를 팔아버리고 그저 돈 많은 미망인으로 남는 방법, 누군가에게 경영을 맡기고 외면하는 방법, 자신이 직접 경영일선에 나서는 방법. 이전까지 주부로 20여 년을 조용히 살아온 사람이라면 대부분 앞의 두 가지 방법 중 하나를 택했을 것이다. 그러나 캐서린 그레이엄은 용감하고 과감하게 그동안 그녀의 조용한 삶이 다 무엇이었느냐는 듯, 신문사 경영 일선에 나섰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인생에서 내린 결정 중 이것이 가장 잘 한 결정이었다고 훗날 회고했다.


원래 <워싱턴포스트> 지는 1877년에 창간된 역사 깊은 신문사였지만, 경영권이 이리저리 바뀌면서 재정난에 시달리다 1933년 캐서린 그레이엄의 아버지 유진 메이어가 사들일 즈음에는 선정주의적 기사와 지나친 백악관 입장의 기사로 명성이 실추되어 거의 팔리지 않는 신문으로 파산위기에 처해 있었다. <워싱턴포스트> 지를 사들인 후 유진 메이어는 신문의 독립성을 추구하면서 정확한 보도와 함께 예리한 시사풍자만화를 실어 이전에 실추된 명예를 회복하고 어느 정도 독자층을 확보하였다. 그러나 아직까지 지역신문이라는 한계를 넘어서지는 못하고 있었다.

<워싱턴포스트>지의 급격한 성장은 캐서린 그레이엄의 남편인 필립 그레이엄이 장인 유진 메이어로부터 경영권을 넘겨받으면서부터 시작되었다. 필립 그레이엄은 유능한 편집장을 영입하여 신문의 질을 확실히 높였다. 그 결과 <워싱턴포스트> 지는 미국의 유력지가 되었으며 이를 발판으로 1954년 3월에는 <워싱턴 타임스 헤럴드(Washington Times-Herald)>를 합병하였고, 1961년에는 <뉴스위크(Newsweek)>를 인수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상태에서 1963년 남편의 뒤를 이어 캐서린 그레이엄이 신문 발행인으로 경영 일선에 서게 된 것이다. 그녀의 언론사 경력이라곤 20여 년 전 짧게 한 기자 경력이 전부였다.


그녀는 누구든 자신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람은 남녀노소를 불구하고 스승으로 삼았다. 자서전에서 그녀는 이 시기를 ‘눈을 감고 시작했는데, 닥치는 대로 일 하다가 어느 날 눈을 떠보니 그런대로 발이 땅에 닿아 있었다.’고 회고했다.

워터게이트사건 당시 <워싱턴포스트>의 편집장이었던 벤자민 브레들리

캐서린 그레이엄은 자신의 인생에서 두 번째로 잘 한 결정으로 벤자민 브래들리를 편집장으로 영입한 것이었다고 회고했다. 벤자민 브래들리는 1971년부터 1974년까지 <워싱턴포스트>지가 닉슨 정부의 비리를 폭로하면서 혼란의 한가운데 있을 때 캐서린 그레이엄이 옳은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눈이 되어 준 동지였고 정론직필을 실행한 언론인이었다.


처음 문제의 발단은 1971년 미 국방부 펜타곤이 작성한 기밀문서(이른바 ‘펜타곤 페이퍼(Pentagon Papers)’)였다. 문서에는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군사개입을 강화하는 구실로 삼았던 통킹 만 사건이 조작이었다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원래 이 기밀문서의 내용을 밝힌 것은 당시 라이벌 회사였던 <뉴욕타임스>였다.

 

<워싱턴포스트> 지는 한발 늦었지만, <뉴욕타임스>보다 더 자세하고 열렬하게 기밀문서에 대한 기사를 쏟아냈다. 닉슨 정부는 국가기밀 누설 혐의로 두 신문사를 제소하여 1심에서 보도 정지 판결을 이끌어 냈다. 두 신문사는 즉각 대법원에 항소했다. 하지만 법적인 판결 나지 않는 상태에서 보도를 계속하는 것은 여러 가지 위험이 따랐다.

<워싱턴포스트>지의 법률 고문팀은 대법원 판결까지 보도 유보를 권했다. 반면, 기자들은 지금 당장 보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신문사의 존폐가 걸린 문제였다. 대법원에서 닉슨 정부의 편을 들 경우 신문사는 꼼짝없이 국가 기밀을 누설한 간첩죄를 뒤집어쓸 판이었다.


캐서린 그레이엄은 자신의 판단 하나만을 기다리며 언제든 펜을 들고 뛰쳐나갈 준비가 된 기자들의 편이 되었다. 그녀는 간단하게 ‘계속합시다(go ahead)’라는 말로 밀어붙였다. 이 말은 모든 책임은 발행인인 자신이 지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발행인의 용기에 기자들은 과감한 보도에 힘을 쏟아냈다. 기자들의 취재와 보도가 계속되는 가운데 미국 내에서는 언론사를 지지하고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분위기가 펴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대법원은 언론의 자유를 주장하는 신문사의 편을 들어주었다. 국민들의 알 권리를 위해 뛰는 언론의 승리였고 기자들의 승리였으며 캐서린 그레이엄의 승리였다.


이 사건에 대해서는 몇 년 전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 <더 포스트>에서 메릴 스트립의 명연기를 통해 자세하게 그려져 있다.

그리고 운명의 사건은 1년 뒤에 일어났다. 1972년 6월 워싱턴 워터게이트 건물에서는 사소한 절도 사건이 일어났다. 처음엔 참으로 사소해 보이는 사건이었다. 3명의 쿠바인과 2명의 백인이 민주당전국위원회가 임대한 방의 문을 열고 들어가려다 경비원에게 붙잡힌 것이다.


흔한 잡범이라고 넘어가려는 순간, 당시 경찰 담당기자였던 <워싱턴포스트>지의 우드워드와 번스타인은 범인들이 가진 물건이 흉기가 아니라 도청장치인 것에 대해 의구심을 품었다. 그리고 침입 장소가 민주당전국위원회라는 것도 이상했다. 우드워드는 범인 중 한 사람이 닉슨 대통령의 보좌관과 연결되어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사건은 조사하면 할수록 이상했다.


결국 우드워드는 범인들이 민주당전국위원회에 설치했던 도청장치가 고장 나 이를 교체하기 위해 침입한 것이고 도청을 하던 주체가 닉슨 대통령 측이란 것을 알아냈다.


캐서린 그레이엄의 허락 하에 <워싱턴포스트> 지는 이를 즉각적으로 보도했고 이는 결국 닉슨 정부와 <워싱턴포스트>지, 나아가 정부와 언론 간의 3년에 걸친 지난한 싸움으로 이어졌다. 그동안 닉슨 정부는 <워싱턴포스트>지에 대해 각종 비열한 압박을 서슴지 않았고, 심지어 닉슨의 측근으로부터는 캐서린 그레이엄의 가슴을 세탁기에 넣어 쥐어짜겠다는 폭언을 듣기도 하였다.

그야말로 회사가 곧 문을 닫아야 할지도 모를 급박한 위기 속에서 캐서린 그레이엄은 오히려 배짱을 보였다. 이미 되돌아갈 수 없기 때문에 앞으로 갈 수밖에 없다면서 기자들을 독려했다.


결과는 닉슨의 목소리가 담긴 녹음테이프가 발견되고 공개되면서 언론의 승리로 끝이 났다. 최초로 워터게이트 사건을 보도하고 정부의 비리를 밝히는데 앞장섰던 <워싱턴포스트>는 퓰리쳐상을 받게 된다.


이 사건으로 <워싱턴포스트> 지는 미국을 넘어 세계적인 언론사로 우뚝 서게 되었다. 언론의 기본을 지키고 어떤 외압에도 굴하지 않는 가장 이상적인 발행인의 태도를 보여준 캐서린 그레이엄의 공도 높게 평가되었다.


이런 사건들로 캐서린 그레이엄은 신문 발행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가장 중요한 지도자라는 명성을 얻게 된다. 워싱턴포스트 사는 포스트 외에 다른 주에서도 신문을 발행했고, 6개 지역 TV 방송국, 19개 주에 방송망을 가진 케이블 방송, 뉴스위크 등 여러 잡지, 교육 자회사 카플란, 인터넷 자회사 등을 갖는 대기업으로 발전했다.

닉슨 대통령과 함께

캐서린 그레이엄은 <Fortune 500>에 들어가는 기업체의 최초 여성 총수가 됐다. 캐서린 그레이엄은 신문이 살아야 공익도 있다고 믿는 여성이었다. 그러면서도 언론이 제대로 기능을 하려면 사업적인 측면도 무시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그녀의 생각은 다음의 말에 잘 녹아 있다.


“언론사의 사주는 편집자에게 무엇을 하라, 하지 말라를 명령하는 자가 돼서는 안 된다. 다만, 신문이 정확하고 공정하며 언론의 정도를 걸음으로써 경쟁력을 가질 수 있도록 지원하는 책임을 수행해야 한다”


정치권과 기업으로부터의 독립을 주장하면서도 그녀는 정재계 및 문화계의 명사들과의 친분도 돈독히 쌓았다. 그녀는 자신의 집에서 종종 라운드테이블 만찬이라는 이름의 파티를 열곤 했는데 12명 정도의 명사들을 초청하여 기록하지 않는다는 전제조건을 달고 속내를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을 기회를 주기도 하였다. 그녀의 이 라운드테이블 만찬에는 미국의 대통령들은 반드시 거쳐갔으며, 심지어 그녀의 만찬에 초청받지 못하면 진정한 명사가 아니라는 말까지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캐서린 그레이엄은 자신이 회사를 이끈 지 30년 만이던 1991년 아들 도널드 그레이엄에게 <워싱턴포스트> 사의 최고 경영인이자 발행인 자리를 넘겨주고 일선에서 물러난다. 물러날 당시 <워싱턴포스트>의 자산규모는 20억 달러에 육박할 정도였다. 그녀가 처음 경영에 참여하였을 때 규모가 1억 달러가 채 되지 않았던 것을 감안하면 그녀가 왜 전설이라고 불리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나이 80세가 됐을 때 캐서린 그레이엄은 자서전 <개인의 역사’(Personal History)>를 펴냈다. 전통적인 가정주부에서 막강한 힘을 가진 자리에 나갈 때까지 겪는 어려움과 그것을 극복한 이야기 등을 솔직하게 묘사한 자서전으로 평가받아, 공전의 베스트셀러로 등극하며 1998년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캐서린 그레이엄은 84세 때인 2001년 7월에 향년 8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장례식에는 정부 고위 관리, 기업계 지도자 등 3천 명이 넘는 조문객이 참석했다. 여러 대통령을 포함한 각계의 거물들을 친구로 두고 있지만, 거만하지 않고 겸손했던 그녀가 타계하자 워싱턴 D.C. 곳곳에는 조기까지 걸렸다.




경단녀. 결혼과 출산으로 인해 경력이 단절된 여성을 말하는 사회적 용어이다. 그런데 이 용어를 잘못 이해하고 자신을 변호하거나 비겁한 변명 따위로 사용하는 여성들이 너무 많이 눈에 띄어 오늘 캐러린의 삶을 가지고 왔다.


오늘 살펴본 캐서린의 삶은 그녀가 처음 사회에 짧지만 기자로 발을 내디뎠던 1940년대는 물론이고 1960년대를 감안한다면 지금의 시대보다 더 권위적이고 더 힘겨웠을 시대라는 사실에 이견을 달 사람은 없을 것이고 에 20여 년간 4명의 아이들을 낳아 기른 르며 제대로 경영교육은 고사하고 언론사의 시스템이라고는 하나도 알지 못했고, 언론사의 사주였던 남편은 회사의 여기자와 바람이 나서 추문이나 뿌리고 그녀를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전업주부라고 무시만 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무려 1960년대에 벌어진 일이다. 그녀는 20여 년을 네 명이나 되는 아이들의 엄마로, 언론사 사주인 남편의 아내로 하루하루를 정신없이 보냈던 전업주부였다.


하지만 그녀는 결심했고, 일어섰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보다 더 잘 알고 있는 전문가를 찾아 그들에게 머리를 숙이고 스승으로 삼아 배우기를 청했다. 그녀보다 열 살도 더 어린 워런 버핏도 그때 그녀가 찾은 스승 중에 한 명이었다. 그녀는 워런 버핏을 그때부터 알아보고 그의 투자 전략에 귀를 기울이고 배워나가며 인연을 쌓았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여기저기 물어 전문가들을 배치하고 자신은 뒤에서 뒷짐 지고 있거나 여기저기 알력에 휘둘리며 상승세에 있던 기업체를 말아먹는 미망인이나 재벌가의 영양은 널리고 널렸다. 하지만, 그녀는 달랐다. 그녀는 전문가를 초빙하되 끊임없이 다양한 방식으로 검증했고, 자신이 검증을 확신하고 난 뒤에는 그에 대한 어떤 뒷말이 나오더라도 그를 믿고 지지해주었다.

쉬운 이야기인 것 같지만, 최고 경영인들이 가장 하기 어려운 일을 20년 차 전업주부였던 그녀가 해낸 것이다. 그녀가 그렇게 될 것을 알고 미리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 전혀 아님을 우리는 그녀의 삶의 자취를 통해 이미 확인하였다.


당신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느라 돈을 버는 것보다, 경력을 유지하는 것보다 아이의 소중한 시간을 부모가 직접 키워주는 공을 들여야 한다고 판단한 것은 지극히 숭고한 판단이다. 워킹맘입네 하면서 아이는 아이대로 남의 손에 맡겨 엉망이 되고, 대단한 경력도 아닌 고작 푼돈 벌겠다고 나가서 커리어우먼 행사를 하고 싶어 하는 여자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많아진 시대이다.


하지만, 진정한 워킹맘은, 일하는 ‘엄마’이다. 방점이 뒤에 있는 것이지, ‘워킹’에 있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캐서린이 네 아이의 엄마로서 과부가 되어 경영 전반에 나서서 배울 것이 넘쳐났을 때 그녀가 네 명의 아이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맡기고 내팽개쳐줬을 것 같은가? 그녀의 자서전을 다시 읽어보라.

당신이 시간이 없다고, 힘들다고, 아이를 키우면서 집안일을 하면서 회사일을 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줄 아냐고 울부짖을 수 있다. 하지만, 어느 즈음에서부터 인가 남자도 육아휴직을 하고 아이들을 키우고 집안일을 한다. 그러면 그만큼 여성도 남성만큼의 가치를 입증해 보였던가?


남녀평등을 부르짖던 페미니스트라는 사람이 세미나가 끝나고 짐 정리를 하는데, 자신은 여자라 힘이 없으니 남자들이 치워달라며 먼저 자리를 내빼는 모습을 보고 어이가 없었던 기억이 있다. 그건 페미니즘이 아니다. 그런 여자들이 출세나 밥벌이의 수단으로 삼으라고 페미니즘이 있는 게 아니란 말이다.


남편이 자신을 무시하고, 자신이 공부도 하지 않고 사회활동도 하지 않으면서 퇴보된다고 생각했던 전업주부 캐서린은 자신이 원하지도 않던 상황에 덩그러니 혼자 남겨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하나씩 차근차근 자신을 다져나가며 30년에 걸쳐 앞서 비어있던 20년 동안 사회생활을 해왔다는 그 어떤 여자들보다 가장 높은 곳에 가장 굳건한 모습으로 기치를 날렸다.


중요한 것은 당신이 아이에게 사랑을 쏟기 위해 숭고한 시간과 노력을 할애하는 것이 아무런 의미 없는 시간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경력단절’이라는 물리적인 시간과 사람들의 질시가 결코 당신의 꿈을 막을 수도 없을뿐더러 당신이 가려는 길이 확고하다면 얼마든지 당신은 20여 년을 뒤늦게 출발해도 그들을 모두 추월할 수 있는 능력과 의지를 가지고 있다.


당신이 아이의 기저귀를 갈고, 아이의 학원과 학교에 픽업을 가는 시간들이 의미 없고 누가 해도 똑같은 일을 왜 당신 같은 고급인력이 현장이 아닌 집안에서 혹은 자동차 안에서 그렇게 소일해야 하는지 회의감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신의 노동과 헌신을 숭고하게 만드는 것은 당신의 의지와 행동이지, 결코 똑같은 판에 박인 가사활동이 아니다.

캐서린이 기자가 되길 갈망했지만, 집에 갇혀 있었던 것도 아니고 내내 집을 뛰어나갈 생각으로 언론사에 대한 공부를 하고 사회문제 스터디를 했던 것도 아니라는 것은 오늘 당신이 확인하대로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상황이 왔을 때, 그 상황에 맞는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고, 그녀의 노력은 집약적으로 그녀를 성공으로 이끌었고, 전설로 만들었다.


당신이라고 그러지 못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당신이 결혼하면서 아이를 낳고 아이를 키우는 동안 당신이 무뎌졌다고 생각하는 것들은 결국 당신의 안에 모두 내재되어 있고, 당신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은 결국 다시 현장에서 수많은 단련과 학습을 통해 쟁취할 수 있는 것이다. 그저 커피나 사 들고 커리어우먼 행사를 하며 내일 뭘 입고 출근할까 업무시간에 인터넷 쇼핑몰을 뒤지며 시간을 소일하는 가짜 워킹맘들이 판을 치는 이 시대라면 당신의 지금 시간이 결코 단절된 시간이라고 할 수 없다.


당신이 아이와 가정에 쏟은 그 정성과 마음가짐이라면 당신은 언제 어디서도 다시 당신이 원하는 성공적인 삶을 꿈꿀 자격이 있고, 그것을 구체화할 수 있는 능력과 자질을 갖추고 있음을 잊지 마라.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당신은 훨씬 더 강하다. 당신이 지금 그 소중한 에너지를 쏟아붓고 있는 엄마라는 사실이 그것을 증명한다.

언제 다시 달릴 생각을 하든, 그리고 지금 다시 달리기를 시작했든 다소 힘들고 적응하기 어렵고 단절되었던 것 같은 시간들이 발목을 잡는다고 느낄 수 있다. 이해한다. 하지만, 그것은 오래가지 않는다. 당신의 열정과 노력은 그것들을 녹여 휘발시켜버리기에 충분히 뜨겁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