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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Mar 28. 2022

회계장부나 쓰던 고졸의 회사원으로 시작했지만

전 세계를 통틀어 그보다 돈이 많은 부자는 없었다는 기록을 만들다.

195번째 대가의 이야기.


캘리포니아에서 금광이 발견되어 이주민들이 몰려들던 이른바 '골드러시'가 일어나던 서부 시대의 개막 10년 전인 1839년 뉴욕 북부 리치포드에서 부자도 가난하지도 않은 평범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전기에서 보면, '나처럼 전혀 가진 것 없이 시작했던 사람이 또 있을까?'라고 굉장히 가난한 상황의 입지전적인 성공을 이룬 사람인 것처럼 코스프레하고 있으나 이는 그 자신의 기적 같은 성공을 더욱 포장하기 위한 수사적 표현이었을 실제로 그의 집안은 흙수저라고 하기엔 꽤 사는 집안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나름 유복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

그의 아버지

그의 아버지는 여러 직업을 전전하다가 나중에는 의사를 사칭하며 이상한 약장사까지 했던 사기꾼 소리를 듣던 사람이었고, 설상가상으로 집을 오랫동안 비우는 행동이 잦은 탕아였다. 본처가 살아있을 때도 가정부랑 바람을 펴서 사생아를 두 명씩이나 뒀고, 본처가 세상을 떠나자 아직 어린아이들을 버리고 가명을 쓰고 캐나다로 도주해 젊은 여자랑 재혼해서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래도 아버지가 사기꾼 겸 장사치라서 애들한테 장사 수완 등의 교육은 혹독하게 시켰다고 한다.


예를 들면 용돈을 주는 대신에 파리를 잡으면 3센트, 쥐를 잡으면 5센트씩 주는 식으로 용돈벌이를 하게 시켰으며, 어머니의 직장에서 일손을 거드는 식으로 노동의 과정에서 경제관념을 익히게 하였다. 이 과정에서 그는 어린 나이부터 수입 장부를 만들어 돈 버는 재미를 익혔다. 심지어 아버지는 성인이 된 그에게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았으며, 아버지의 새 집에 들어가는 대가로 집세를 내라고 할 정도로 교육이라고 보이겐 철저하기 그지없는 계산적인 방식으로 키웠다.


하루는 높은 곳에서 떨어지면 자기가 받아준다는 아버지의 말에 그는 의심 없이 아버지 품으로 떨어졌으나, 아버지는 받아주지 않았다. 그러고 나서 죽을 뻔한 아들에게 했던 말이 '아무도 믿지 말거라. 심지어 아버지인 나조차도.'였다고 한다. 이런 아버지의 교육방식 때문에 그는 일생을 불안감에 가까운 철두철미함을 가지게 되었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엄청난 거부가 된 후에도 여전히 아들을 포함한 가족과의 화합을 거부한 채 평생 야인으로 미국 전역을 떠도는 삶을 살다 95세의 나이로 천수를 누리고 갔다.


고등학교 졸업시험을 한 달 앞둔 1855년 5월에 고등학교를 그만두고 사업에 투신하였는데 일자리를 찾을 때에도 '작은 기업은 거들떠보지 않았다. 뭔가 큰 규모를 갖춘 업체에만 관심이 있었다.'라는 당시 자신만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취업에 임하게 된다.


그렇게 처음으로 휴잇 & 터틀사의 경리 직원으로 입사해 회계장부를 기입하는 일을 맡게 된다. 그가 고등학교를 졸업한 것은 남북전쟁이 일어나기 고작 몇 년 전이었는데, 직후 대통령이 되는 에이브러햄 링컨도 오늘날로 치면 초등학교 중퇴고 부통령은 장가가기 전까지 문맹이었으니 고졸학력이라고는 해도 당시 사회에선 나름 괜찮은 학력이었다.

미국 역사상 최고의 부자로 꼽히는 기업가이자 석유 산업에서 이름을 떨쳐 '석유왕'으로 불리기도 한 인물로 앤드루 카네기와 함께 대공황 이전 시대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미국의 기업가, 우리에게는 록펠러라는 이름으로 유명한 풀네임, 존 데이비슨 라커펠러(John Davison Rockefeller)의 이야기이다.


1937년도 사망 당시 공식적인 그의 유산인 14억 달러를 지금의 가치로 환산하면 2020년 기준 4,090억 달러(한화로 환산 시 약 488조 4,200억 원)에 달하는 엄청난 금액이라고 한다. 참고로 대한민국 정부 1년 예산이 2020년 기준 512조 인 것을 감안하면 얼마나 엄청난 부자였는지 알 수 있다. 당시보다 훨씬 경제 규모가 커진 2020년 기준 전 세계 부자 순위 1위로 언론에서 자주 거론된 제프 베이조스 아마존 창업자의 재산이 약 2,117억 달러(약 256조 3,300억 원)고, 2021년 기준 전 세계 부자 1위인 일론 머스크의 재산도 3,110억 달러(약 377조 1,000억 원)인 것을 보면 그의 유산에  4분의 3에 불과할 정도였으니 그가 쌓은 부가 어느 정도였는지 가늠이 안될 정도일 것이다.

  

1858년 연봉협상에 회사가 미적지근한 태도를 보이자, 그는 대뜸 사업 파트너를 구해 자신들의 사업을 꾸려 나가기로 하는데, 이 당시 회사를 만들기 위한 자본금이 부족했던 그는, 은행에서 닥치는 대로 엄청난 돈을 빌려서 큰 자본금을 만들어 사업에 투자하고, 이득이 나더라도 바로 돈을 갚는 것보다는 재투자로 돌려서 더 큰 이득이 나온 다음에야 마지막에 갚는 방식을 철저하게 고수했다.


한마디로 수익률이 이자율보다 한참 높아야 가능한 무모한 짓이었지만, 결과적으로 그의 사업은 성공했고, 생각보다 준수한 실적을 올리기 시작했다. 물론 록펠러가 본격적으로 거상이 되는 건 이후 닥친 남북전쟁과 이른바 재건 시기에 기회를 포착하고 빠르게 사업을 확장한 덕분이 컸다.

 

남북전쟁 당시 모건-록펠러-듀폰 커넥션의 일원이던 록펠러는 전쟁 이후 록펠러의 삶을 바꿔놓은 중대한 사건을 맞이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최초의 유전을 발견한 사건이었다. 그 당시 석유는 별로 가치가 없었던 물건이었으나, 곧 연료로서의 가치가 재조명되고 결과적으로 그 유전지대는 번성 일로에 올라서게 된다.


유전이 발견된 초기만 하더라도 록펠러는 이쪽 관련 사업에는 별 관심이 없었으나, 어느 순간 사람들이 석유 채굴에 눈을 돌리지만 진짜 돈이 되는 사업은 석유를 정제하는 정유사업이라는 걸 깨닫고 '이거다!'라는 느낌을 받아 정유업에 온 힘을 쏟기 시작했다. 석유업계에 발을 딛기 시작할 무렵, 그는 동업자였던 모리스 클라크 외에 새뮤얼 앤드류스까지 끌어들여 사업의 규모를 확장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점점 시간이 흐르는 와중에 록펠러는 사업 확장에 별 뜻을 보이지 않는 동업자인 클라크를 못 미더워했고, 결국 앤드류스와 손을 잡고 기업을 통째로 사기로 결정한다. 이때의 일화도 그의 전설을 설명하는 데는 필수적인 요소로 들어간다.


경매는 1865년 2월 2일에 열렸고, 록펠러는 앤드류스와 손을 잡고 클라크에게 맞섰다. 클라크가 500달러부터 입찰을 시작하자, 록펠러가 바로 1,000달러를 불렀다. 가격은 계속 올라가서 4만, 5만, 6만 달러가 되었다. 어느 쪽도 양보하려 하지 않는 동안 가격은 어느덧 7만 달러를 넘어섰다. 그리고 긴 침묵이 흘렀다.

"72,000달러."

절망적인 목소리로, 모리스 클라크가 말했다.

"72,500달러."

록펠러가 주저 없이 대답했다.

클라크는 이미 기세에서 밀려 있었다. 어쩔 수 없이 그는 록펠러와의 경쟁에서 항복을 선언한다.

"이제 이 회사는 자네 것일세."  


록펠러가 스스로는 말하기를, 이날이 살아갈 길이 정해진 날이라고 표현했다. 이때부터 그의 인생 목표는 세계에서 가장 강력하고 부유한 사람이 되는 것으로 정해졌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만한 사실은, 당시 그가 불과 26살에 불과했음에도 상기된 7만 달러 이상의 회사 매입자금을 신용 하나로 대출할 수 있을 정도로 클리블랜드 금융가에서 이미 명성을 갖추고 있었다는 점이다.

 

당시 회사의 부채는 10만 달러가 넘어갔지만, 록펠러가 주장한 대로 당시는 긴축이 아니라 확장을 해야 성공할 수 있는 시대였고, 당해 연간 수입은 100만 달러였고 이듬해에는 200만 달러로 늘었다.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록펠러는 자기의 회사가 얼마만큼 성장할 것인지에 대한 명확한 비전이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그와 같이 일했던 그 누구도 그렇게까지 회사가 성장할 것은 몰랐다. 그의 기세에 따라 상당히 운이 따르기도 했는다. 그것은, 존 록펠러의 바로 아래 동생인 윌리엄 록펠러가 형을 보고 자신도 뉴욕에서 석유 사업을 하며 꽤 규모를 키운 뒤에 형의 회사에 인수되는 방식으로 합병을 해주며 몸집을 키워준 것이었다. 그의 동생, 윌리엄 록펠러는 이외에도 여러 사업을 하며 엄청난 돈을 벌어서 그것을 스탠더드 오일에 투자하는 든든한 자금줄이 된다.

 

당시 그가 살던 클리블랜드는 대량의 석유가 매장되어 있었다. 클리블랜드 자체는 인구 5만 정도의 소도시였는데, 당시 철도업계의 1인자였던 코르넬리우스 밴더빌트가 석유 운송을 장악할 요량으로 클리블랜드에 진출한다. 이는 그에게 둘도 없는 기회가 된다.


일단 석유를 생산하면 유통을 할 수 있어야 했는데 이를 해결해 줄 사람을 만나게 된 것이다. 다큐멘터리 <미국을 일으킨 거인들>에 의하면 밴더빌트를 만나러 가는 길에 마차가 고장 나서 아침 기차를 놓쳤고 그 기차가 다리 아래로 추락하는 사고가 생기자 이를 신의 뜻으로 이해하고 이후의 사업에서 무자비한 행보를 이어가게 되었다고 한다.


서서히 그의 사업이 확장되는 와중에 록펠러는 재계에서 악명 높은 방식을 스스로 개발해 내는데, 리베이트 시스템의 도입으로 인해 비단 정유업뿐만 아니라 철도 운송에도 손아귀를 뻗치기 시작한다.  이것이 그가 처음으로 여론의 비난을 받을 빌미를 제공하는 사건으로 이어지게 된다.


비난여론의 형성과는 상관없이 회사의 거대한 규모로 인해, 록펠러는 철도업계에 일정하고 높은 수준의 수송량을 제공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고, 이것을 바탕으로 록펠러는 리베이트 계약을 통해 막대한 수익을 얻기 시작한다. 이를 바탕으로 1870년, 록펠러는 100만 달러의 자본금을 가진 '스탠더드 오일'을 창설하게 된다.

압도적인 생산량에서 나오는 단가 절감뿐만 아니라, 리베이트 시스템으로 인한 운송비 절감에 힘입어 스탠더드 오일의 힘은 점점 강해져만 갔고, 그 영향력은 다른 업계에까지 미쳐, 철도왕 코르넬리우스 밴더빌트, 그리고 밴더빌트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 톰 스콧에게 가장 큰 물량을 제공하는 고객으로서, 리베이트를 점점 올려가며 운송요금을 후려치는 다소 악랄하다고 여겨질 정도의 방법을 고수해나갔다.

 

사업 규모가 하루가 다르게 커지고 매출이 늘어만 갔지만, 그의 절약과 검소함에 대한 신앙에 가까운 자세는 전혀 변함이 없었다. 그가 고등학교를 갓 졸업하고 취직했을 때부터 그것은 일관되어왔던 그의 신념이자 생활습관이었다. 당시 매주 그는 싸구려 하숙집의 집세로 1달러를 지불하는 것 외에도 소액기부 모임에 75센트를, 그리고 이리 스트리트 침례교회의 주일학교에 5센트, 빈민구제 활동에 10센트, 해외선교 활동에 10센트를 헌금했다. 


그는 4달러 주급 시절부터 기독교 정신의 핵심인 십일조, 즉 자신의 수입의 10%를 헌금으로 평생을 낸 독실한 신자였다. 또한 미국 사회에 엄청난 기부금을 선사한 자선사업가이기도 했다.  


이후 부자가 되고서도 그의 신념에 의한 생활패턴이 바뀌지 않은 대표적인 일화가 있다.

스탠더드 오일 창설 직후, 본인 소유의 정제소를 시찰하던 중 록펠러는 회사의 원유 운송용 나무통의 땜질이, 총 40번에 걸쳐 이루어지는 것을 보게 되었다. 휘하 직원에게, 38번으로 해보라고 지시했고, 확인한 결과, 38번의 땜질을 거친 나무통 중에는 새는 것이 있었지만, 39번의 땜질을 거친 나무통은 새지 않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39번의 땜질 지시가 담긴 공문이 전 지사 및 사원에게 회람되게 된다. 이후 왜 그런 일을 벌이게 되었는지 인터뷰에서 관련 질문을 받은 그는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그걸로 꽤 많이 아꼈지."라고 대답을 대신했다.

 

집에서도 아이들에게 자전거를 하나만 사주고 공유하게 하였고, 옷이 해지기 전에는 절대 새 옷을 사주지 않았다고 한다. 또 아이들에게 집에서 알바도 시켰는데 다른 일꾼들과 똑같은 인건비를 주었다고 한다.

이런 점을 볼 때 분명 무리한 독과점으로 세간에서 욕도 많이 먹었지만, 그것은 단순히 부를 축적하기 위한 악덕 업주의 마인드였다기보다는 다른 사람은 물론 심지어 국가나 법률도 믿지 않고 그냥 자기 신념대로 일을 처리한 사람이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이러한 그의 삶의 방식은 석유 산업을 수직 계열화하여 빠른 속도로 전 세계에 자리 잡도록 한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회사 이름이 STANDARD인 이유도, 당시 등유 품질이 나빠 등불을 켜놓고 자다가 폭발로 화재가 나는 등 불순물이 많은 저질 등유가 많았는데 우수한 기본 품질을 유지하는 인상을 주려고 한 것이었으며, 땅에 파이프만 꽂으면 석유가 나오는 당시 미국 펜실베이니아에 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석유 개발과 정유업에 뛰어들어 블랙홀로 빠질 수도 있는 석유 산업을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초기에 쓸어버려 빨리 정착하게 한 인물임은 분명하다.


1880년대 들어서 전 세계 원유 공급의 90%가량이 스탠더드 오일이 필라델피아를 통해 공급하고 있었고, 이를 본 다른 국가에서도 산유지를 찾아 원유를 채굴하기 시작한다. 즉, 석유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록펠러는 이미 43세에 미국 최고의 부자가 되었고, 얼마 뒤에는 미국의 경제 중심지인 뉴욕으로 사업의 중심을 옮기며 순식간에 뉴욕 재계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이때 그는 철강 산업에 상당히 관심을 보이며 메사비 대광산을 매입하는 것을 필두로 철강 사업에도 발을 담그기 시작했는데, 그쪽에는 본좌라고 할만한 강철왕 앤드루 카네기가 버티고 있었고 둘은 치열한 신경전을 벌였지만, 결과적으로 아쉬울 게 없는 록펠러 쪽에서 철강 산업에 대한 관심이 식어가면서, 마침 카네기의 사업을 인수한 존 피어폰트 모건에게 스탠더드 오일 측에서 보유하고 있던 대광산 채굴권을 '적절한 조건과 대우'를 받고 넘김으로써 록펠러 측에서는 모건의 철광산업 트러스트 형성에 큰 도움을 주게 된다.


그렇게 그는 다른 업종과 전투 중에도 본업인 석유 사업을 꾸준히 성장시키며 53세에는 그 어느 누구도 넘보지 못할 확고한 위치를 다지게 된다.


이후 미국의 주마다 있는 스탠더드 오일 사의 지점을 쪼개 새로운 법인을 만들고, 규제가 강한 뉴욕주보다 맨해튼에서 가깝고 규제도 상대적으로 약한 뉴저지주의 스탠더드 오일사를 지주회사로 전환하며 어떻게든 유지해보려고 했으나, 1911년 결국 스탠더드 오일은 반독점법 위반으로 인해 해산 명령을 받게 되며 34개의 회사로 분리된다.

이때 지주회사인 뉴저지주 스탠더드 오일사(Esso: 스탠더드 오일 (SO) 오브 뉴저지)가 지금 석유회사인 엑슨, 뉴욕주의 스탠더드 오일사(Socony: 스탠더드 오일 오브 뉴욕)가 모빌, 그리고 캘리포니아 주의 스탠더드 오일사(Socal: 스탠더드 오일 오브 캘리포니아)가 쉐브론이다.

 

그런데 이 해체 결정은 묘한 여운을 남긴다. 이렇게 분리된 스탠더드 오일 계열사가 주식시장에 상장되자마자 주식 가격이 최소 2배 이상 뛰어버리는 결과를 낳은 것이다. 이에 따라 원래 스탠더드 오일 전체 지분의 25%를 소유하고 있었던 록펠러는 새로 탄생한 34개 사의 지분을 골고루 소유하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스탠더드 오일이 존속했을 경우보다 더 엄청난 부를 축적하게 되는 어부지리의 결과를 얻게 된다.  


그래서 심지어 록펠러는 이런 사태가 일어날 것을 이미 예측하고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기업을 해체될 즈음 같이 골프를 치던 친한 목사님에게 돈 벌고 싶으면 스탠더드 오일 주식을 사두라는 얘기를 했다는 카더라식의 소문이 그 근거였다.

 

그래도 이렇게 쪼개버린 덕에 유럽계 석유회사들은 쾌재를 부르게 되었고, 쪼개진 스탠더드 오일사의 일부를 인수하기 위해 인수전에 뛰어들기도 했다. 실제 해산되기 전 스탠더드 오일은 거의 전 세계 석유시장을 독점한 상태였다. 스탠더드 오일은 미국을 장악한 이후 유럽의 로스차일드 가문이 최대주주인 로열 더치 쉘, 알프레드 노벨 일가가 운영하는 러시아의 노벨 브라더스와 경쟁했고, 결국 승리했는데 이후 세계 석유시장은 스탠더드 오일이 해체되기 전까지 그야말로 한 기업이 독점했던 셈이었다. 이런 록펠러 시대의 스탠더드 오일은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나오기 힘들 사례였다.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미국의 반독점규제법은 이러한 상황을 막기 위해 오로지 록펠러 때문에 제정된 것이다.   

어머니와 록펠러

록펠러는 '알로 페시아(alopecia)'라는 탈모증과 비슷한 암에 걸려 1년 시한부 인생을 통고받았다. (표지의 사진과 본문에 게재된 사진을 비교할 때 멋으로 삼아 기르던 콧수염이 없어진 것은 바로 이 병에 걸리고 난 뒤에 찍은 사진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록펠러의 어머니는 아들이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자 이렇게 말한다.


"아들아, 곧 세상을 떠날 텐데 네 마음껏 하나님께 바치고, 자선 사업이나 하고 가렴."


사실 50대 중반부터 이미 록펠러는 과도한 다툼과 경쟁 때문인지 스트레스성 소화불량 및 우울증 증상을 보이고 있었는데, 때문에 록펠러 본인도 50대 이후부턴 동생들과 아들한테 사업을 넘기고 그냥 가진 돈 가지고 편하게 살고 싶어 했다.


실제 20세기 들어 록펠러는 사실상 경영 일선에서 은퇴한 상태였고, 가문과 기업의 실질적인 지휘는 아들인 록펠러 주니어가 하고 있었다. 그러다 1914년, 월급을 올려달라는 광부들의 파업 현장에 회사가 고용한 경비원들과 주지사가 파병한 주 방위군이 총격전까지 벌이며 25명이 사망하고 수십 명이 다치는 '러들로 학살 사태'가 일어난다. 이때 당시 대통령이었던 우드로 윌슨이 미 연방군을 파견해 이를 해결하려 했으며, 이때 75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이런저런 여파로 우울증이 심해지던 록펠러는 혜성처럼 등장한 프레드릭 테일러 게이츠라는 교회 목사에게 '이제 모든 것을 내려놓으시지요.'라는 말을 듣게 되고, 목사는 그의 재산을 자선사업에 유용하게 쓸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게이츠 목사는 록펠러 이름을 딴 자선단체를 설립하고, 미국 최초의 의학 연구소인 록펠러 의학 연구소(손자에 의해 훗날 록펠러 대학으로 개편), 교육사업 등을 통하여 실추된 이미지의 록펠러를 자비로운 자선사업가의 모습으로 대중에게 부각해 주었다. 97년을 살다 간 만년의 록펠러는, 그를 증오하던 세대가 하나 둘 세상을 떠나면서, 새로운 이미지로 미국의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다.

게리츠 목사

한편 게이츠 목사는 탁월한 사업 감각으로 록펠러의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면서도 당시 카네기가 주도권을 쥐고 있는 철강사업에도 손을 뻗어 재산을 늘렸다. 록펠러에게는 정말 신이 내려준 존재와 같은 인물이었다. 그가 사람 쓰는 법은 '내가 바라는 것을 해낼 수 있는 사람을 찾아내서 모든 것을 맡겨라.'였다. 게이츠 목사 이외에도 그를 비방하던 많은 적들이 록펠러 밑으로 들어와 가장 충직한 사업가로서 활동했다.


그는 거의 100년 동안 돈을 벌었고, 평생 동안 많은 재산을 사회에 기부했다. 록펠러는 1937년 5월 23일에 97세를 일기로 눈을 감을 때까지 부에 관한 한 개인이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정점을 보여주었다.

장례식은 25일에 리버사이드 교회에서 치렀다. 이 장엄한 날, 전 세계의 스탠더드 오일 계열사에서 5분간 일손을 놓고 20세기에 누구보다도 활활 타올랐던 석유 왕을 추모하였다. 죽기 얼마 전에 그는 간신히 입술에서 새어 나오는 힘든 목소리로 “스탠더드 오일에게 축복을, 우리 모두에게도”라고 말했다.  

클리블랜드의 레이크 뷰 묘지에 위치한 록펠러의 묘   

이후 록펠러의 기업과 재산은 그의 아들 존 D. 록펠러 주니어에게 상속되었고 그의 가문은 재력을 바탕으로 유력가로 거듭나게 된다. 정치계에 입문한 후손도 나왔는데 뉴욕 주지사에 4번 당선되고 제럴드 포드 대통령 때 부통령이 된 손자 넬슨 록펠러가 대표적이다. 록펠러 가문의 당주는 1915년생인 데이비드 록펠러며 그는 2017년 3월 20일 101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뒤를 이은 당주는 데이비드 록펠러의 장남이자 록펠러 재단 이사회 일원인 1941년생 데이비드 록펠러 주니어(David Rockefeller Junior)이다.


록펠러가 20세기 초 ‘미국의 석유 왕’이라고 불리기 전까지 그의 행보는 현대의 어떤 기업들도 흉내내기 힘든 대단한 사건들의 연속이었다. 그는 1878년 4월, 미국 전체의 정유 능력에 해당하는 연간 360만 배럴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렇게 1881년 록펠러는 미국에서 생산되는 석유의 95%를 손에 쥐고 있었다. 당시 상황에 대해 학자들은 이렇게 언급한다.

“신대륙이 개척되기 시작했을 때, 영국 여왕이 개인에게 독점 사업권을 하사했던 때를 제외하곤, 이 땅에 이런 절대적인 독점은 존재하지 않았다.”  
록펠러 센터

이후에 다루게 되겠지만, 강철왕 카네기와 J.P 모건도 그를 능가하지는 못했다. 너무 세월이 오래 흘러 그저 석유왕으로만 알고 있을 그의 일생을 오늘 당신에게 소개하는 것은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전무후무한 역사적인 부자에 대한 존경심을 보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그가 대단한 집안의 부잣집 자제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에서 입지전적으로 일어난 자수성가형 인물이라고도 보기 어렵다. 즉, 그는 그저 평범한 중산층에서 태어난 평범한 인물이었다.


그런 평범한 인물이 어떻게 전 세계의 역사를 통틀어 부자가 될 수 있었는지에 대해 생각해보면, 그 한 사람 때문에 반독점 규제법이 생길 정도로 악랄하고 가차 없는 다른 기업을 흡수하거나 말살시켜버리는 잔혹한 방식을 추구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결국 그가 그렇게 엄청난 부를 쌓았어도 현재 그의 이후 세대가 6세대까지 내려왔지만, 그들은 그 부를 유지하고 있지 못하다.(물론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것이지, 지금 그 자손들이 준 재벌 이상의 부를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즉, 아무리 선조가 어마어마한 부를 쌓아 놓았다 하더라도 그것을 유지하거나 더 키워나갈 수 있는 자식들에 대한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부는 언제든 날아가버리는 것이라는 점을 또한 록펠러 가문을 통해 알 수 있다.


록펠러의 아버지가 도덕적으로는 비난받을 인물일지언정 록펠러의 경제관을 확고하게 만든 것은 사실이며, 록펠러가 가혹한 방식으로 석유왕이 되어 초 거대 재벌이 되긴 하였지만, 그를 비난하는 이들이 먼저 죽어버리고 기부를 통해 그의 이미지가 존경받는 미국을 세운 인물로 변화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당신이 오늘 주목하여 읽었으면 하는 그의 삶의 대목은 그가 1년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았던 그 시점 이후의 삶이다. 결과적으로 의학적 미스였는지 우연이었는지 아니면 정말로 하늘로부터 기적이 일어났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는 1년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고 인생이 바뀌었고, 그 이후 40여 년이라는 세월이 더 살았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그는 새로운 삶을 부여받고 제2의 인생을 산 셈이다.

당신에게도 그런 계기가 있을 것이다. 굳이 시한부 인생 운운하지 않더라도 당신의 삶이 완전히 바뀌거나 어떤 하나의 목표로 확고하게 새로이 설정하게 되는 그 계기가 말이다. 그것은 록펠러의 경우처럼 극적인 죽음일 수도 있겠으나 실제로 죽지 않더라도 죽을 뻔한 사고라던가 가까운 이의 죽음, 혹은 여러 가지 형태로 당신에게 찾아온다.


새로운 인연의 만남일 수도 있을 것이고, 몸 바쳐 일하던 회사에서 쫓겨나는 사건이 될 수도 있다. 그것이 그저 불행이나 실패라고 각인되는 이들에게 그것은 결코 새로운 계기로 작동하지 않는다.


내가 감히 짐작컨대, 록펠러가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꾸준함과 근검한 삶의 방식과 하나로 일관되어 있던 그의 신념 때문이었을 것이라 생각해본다. 누가 당신에게 뭐라 시키지 않아도 당신이 꾸준히 해나가는 그 무언가는 당신의 능력과 당신의 심성과 당신의 운명을 바꿔놓는다.

당장 그것이 당신의 삶이나 돈이 되지 않더라도 그것은 당신이 보이지 않는 부분의 그 무언가를 성장시키고 강하게 강화시켜주며 운명의 거센 파도를 극복할 수 있는 힘을 길러준다. 이른바 사람들이 어려움이라고, 실패라고, 좌절이라고 부르는 것을 당신이 만났을 때 당신은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자신도 모르게 가지고 운명의 계기로 바꿔나갈 수 있게 된단 말이다.


당신이 지금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하는 당신의 루틴이 당신의 미래를 만든다. 당신이 정말로 작가로 불릴 자격을 갖추고 싶다면 꾸준히 하루에 A4 단 한 장이라도 정성 들여 쓰는 연습을 하면 된다. 단돈 4달러를 받아서 그것을 기부까지 하면서 가계부를 쓰던 인물은 석유왕이라는 희대의 재벌이 되어 한 나라가 아니라 세계의 석유시장을 장악할 정도의 인물이 되었다.


당신에게 찾아올 이 그 계기가 어떤 것인지는 당신과 하늘만이 안다. 하지만, 루틴을 통해 자신을 단련하고 노력하지 않는 자는 그 계기를 알아차리지 못할뿐더러 계기가 오기 전에 좌절이나 실패에 쉽게 무릎 꿇고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고서는 나이 탓을 하고 환경 탓을 하고 자신이 흙수저인 부모탓까지 한다. 그런 자가 성공했다는 말을 나는 단 한 번도 동서고금의 기록에서 발견한 적이 없다.


성공하는 것은 실패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실패를 극복해낸 자만이 성공을 입에 담을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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