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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Mar 29. 2022

광산 감독관이나 하라고 광산학교까지 졸업했지만,

탐험을 시작하고 과학자와 철학자를 뛰어넘은 세기의 학자로 인정받다.

196번째 대가의 이야기.


1769년, 베를린에서 프로이센 귀족인 아버지와 상당한 자산가의 딸이었던 어머니의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형은 저 유명한 훔볼트 대학을 창립한 위대한 언어학자인 빌헬름 폰 훔볼트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후 1779년부터 교육을 받기 시작했는데 그와 그의 형 모두  1789년까지 가정교사에게서만 교육을 받았다.


유년 시절에 읽은 최초의 책은 <젊은 로빈슨>과 <아메리카의 발견>이었다. 이러한 모험과 탐험류의 책에 감명을 받은 그는 더 강도가 높은 탐험기인 제임스 쿡(James Cook)의 항해기와 라 콩다민(La Condamine)의 남아메리카 내륙 여행기와 같은 책에 빠져들었다.


그의 어머니는 그가 고급관료가 되길 희망했지만, 훔볼트는 이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베를린에서 식물학을 공부한 후 1780년 형이 다니고 있는 괴팅겐 대학에 입학한다. 그곳에서 그는 제임스 쿡 선장의 2차 항해에 박물학자로 참가해 이미 유명해진 탐험가 게오르크 포르스타(George Forster)와 만나 절친한 친구가 되었고, 1790년 게오르그와 함께 영국과 프랑스를 여행한다. 그렇게 유럽여행을 하게 된 것이 그에게 세계 탐험 여행을 떠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1791년에 광산 감독관이 되기 위해 세계 최고의 역사를 자랑하는 프라이베르크 광과(鑛科) 대학에 입학하여 2년 후에 졸업했다. 자연과학에 대한 자신의 관심과 고급관료가 되길 원하는 어머니의 바람을 모두 충족시킬 수 있는 길을 마련한 것이다. 그 이듬해 프로이센 정부의 광산 관리국에 자리를 얻어 일하던 그는 귀족 출신 관료로서 장관까지도 될 수 있는 신분과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언젠가 공직에서 물러나 과학 탐험 여행을 떠나겠다는 꿈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1792년부터 1797년까지는 중부 유럽의 여러 국가에 있는 암염 광산 지역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1796년, 그의 어머니의 죽음은 탐험가로서의 그의 인생에 결정적인 전환점이 된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몇 달 뒤 그는 공직에서 물러나고 자산가인 어머니로부터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게 되는데, 그 유산으로 탐험의 꿈을 이루게 된다. 실제로 그가 5년이 넘는 장기간의 남아메리카 탐험의 비용을 유산으로 충당하고도 많은 돈이 남았다고 하니 그 액수가 어마어마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독일의 지리학자, 자연과학자, 박물학자, 탐험가로 근대 지리학의 금자탑, 대작인 <코스모스(Kosmos)>의 저자로 유명한 칼 리터와 함께 근대 지리학의 시조라 불리는 프리드리히 빌헬름 하인리히 알렉산더 폰 훔볼트(Friedrich Wilhelm Heinrich Alexander Freiherr von Humboldt)의 이야기이다.


훔볼트라고 하면 대개 알렉산더의 형인 빌헬름을 먼저 떠올리는 사람들도 많은데, 독일의 교육부 장관, 내무장관이며 언어학자였던 빌헬름 폰 훔볼트가 그의 친형이다. 하지만, 그의 명성이나 입지에 대한 유럽에서의 영향력은 <브리태니커 사전>에는 그에 대해 소개하는 다음과 같은 짧지만 강렬한 문구로 명확하게 알 수 있다.


“19세기의 유럽 사회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은 나폴레옹이고, 다음가는 사람은 훔볼트이다.”

훔볼트는 식물학자 아이메 봉플랑(Aimé Bonpland)과 함께 본인의 탐사대를 직접 꾸리기로 결심한다. 훔볼트와 봉플랑의 만남은 이들이 어느 유럽인들도 도달하지 못했던 세계를 탐험하고 연구했다는 점에서 유럽 탐험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제 귀족 청년 훔볼트는 그 안락하고 성공이 보장된 자신의 생활을 벗어던지고 장엄하지만 거친 대자연의 품으로 뛰어들게 된다.


그렇게 훔볼트는 본격적인 탐구 조사에 착수, 스페인 총리의 후원을 받아 당시 스페인령 아메리카로 향하게 되었다. 카나리아 제도의 테네리페 섬에서 유성우 관측을 수행했고, 그가 당시에 했던 그 주기의 연구는 오늘날의 천체 관측의 기초가 되었다.


그들은 새로운 대륙에서 유럽과는 전혀 다른 자연환경을 탐험하고 조사할 수 있다는 데에 몹시 흥분했다. “벌거벗은 인디언들, 전기뱀장어, 앵무새, 원숭이, 아르마딜로, 악어, 놀라운 식물들, 그리고 밤에 금성을 겨냥하고 있는 나의 육분의...” 남미 여행을 통해 훔볼트는 온갖 신기한 동식물들을 보았으며, 그 과정에서 몇 번은 목숨을 잃을 뻔한 경우도 있었다. 그는 생전 처음 보는 새와 곤충종을 기록했으며, 동굴의 생태계를 탐사하고, 생전 처음 지진을 경험했다. 그리고 자연뿐 아니라 그 지역의 언어와 문화까지 세밀한 관찰기록을 남겼다.

훔볼트는 학창 시절부터 유달리 실험하는 것을 좋아했는데, 그가 직접 행한 실험이 무려 4,000여 가지나 된다고 한다. 그중 재미있는 일화는 ‘동물 전기’라는 것에 관심을 가진 그가 이를 입증하기 위해 스스로의 몸에 직접 전극을 연결하여 실험을 했다는 것이다.


1800년 2월 그는 남미 내륙 쪽을 여행하면서 드디어 이 동물 전기에 대한 호기심을 충족시킬 기회를 갖게 된다. 바로 전기뱀장어를 직접 잡아 연구한 것이다. 훔볼트와 봉플랑은 전기뱀장어를 잡기 위해 말이나 노새를 미끼로 몰아넣어 뱀장어들이 650 볼트의 전기를 다 방출해 버릴 때까지 기다렸다가, 물에 들어가 네 시간 동안 직접 전기 충격을 받아가며 신나게 실험과 해부를 했다. 그리고 다음날까지 관절통과 전신 근육통을 경험했다고 한다. 훔볼트는 그가 모르는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라면 몸을 사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쿠마나에서 카라카스로, 그리고 내륙 고원지대 탐험을 마친 훔볼트 일행은 오리노코 강의 지도를 그리겠다는 야심 찬 계획을 세우고 2,400킬로미터에 달하는 강 탐사에 나섰다. 그들은 거대한 오리노코 강과 아마존 강을 잇는 카시퀴어레 강을 직접 보고 정확한 지도를 작성했을 뿐 아니라 1만 2천 종의 표본을 모았는데, 이 중에는 학계에 처음 보고되는 식물 종들이나 인간의 뼈도 있었다.


각종 특수 장비와 과학 기술이 뒷받침되는 현재의 오지 탐험도 결코 쉬운 작업이 아닐 진데, 19세기 초의 훔볼트에게 이 남미 오지 탐사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힘겨운 작업이었을 것이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을 보트를 타거나 이고 갔으며, 먹을 것이 없어 개미를 먹으며 버티고, 견디기 힘들 정도로 곤충에 물리고, 진흙을 먹고 마약을 하는 부족들과 어울리는 등 본래의 모습을 버리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했다.


지금은 흥미와 재미, 경험의 일환으로 오지 탐험이란 것이 상품화되어 있지만, 훔볼트에게 오지 탐험이란 일생과 목숨을 건, 본인의 학문적 탐구열을 위해 반드시 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1802년 훔볼트 일행은 키토에 도착하여 그 지역의 화산들을 조사하며 6개월을 보낸다. 피친차 산 등반을 시도한 훔볼트는 고산증으로(당시에는 고도가 인체에 미치는 영향이 연구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증상의 원인을 찾지 못했다) 심한 구역질과 실신 등을 경험하며 우여곡절을 끝에 결국 산 정상에 도달한다.


뒤이어 훔볼트와 봉플랑은 당시까지 세계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로 알려져 있던 침보라소 산을 해발 5,878미터까지 등반하는데, 이는 당시의 최고 기록으로 이후 30년 동안 훔볼트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을 오른 사람으로 기록되었다. 말년에 가서야 히말라야 산이 가장 높은 산으로 측량되면서 훔볼트의 세계기록은 안타깝게도 깨지게 된다.


훔볼트는 계속되는 탐험 동안, 마주치는 모든 것을 꼼꼼히 기록하고 관찰했다. 그가 태평양 해안의 트루히요로 가는 길에 기록한 자기장 측정치들은 그 후 50년 동안 모든 지자기학 연구의 자료로 활용되었다. 또한 페루 해안에서 시작하여 기록한 해수 온도 수치들은 그 지역 해류를 파악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고, 조사된 해류에 그의 이름을 붙여 ‘훔볼트 해류(페루 해류라고 불리기도 함)’라고 명명했다.

하바나를 거쳐 필라델피아로 간 훔볼트는 미국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을 만나 탐험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으며 1804년 프랑스 보르도로 향하면서 5년 간의 대장정을 마친다. 여행에서 돌아온 훔볼트는 나폴레옹에 의해 승인받은 연금으로 그 후 파리에서 생활하며 자신의 관찰기록과 분석 결과들을 글로 정리하고 출판하는데 30년의 세월을 투자한다.


그리고 그 와중에도 탐험 열정은 계속되어 60세의 나이에도 러시아를 탐험하며 지리학적 연구를 계속했으며, 그곳에서 자기장과 기상을 관측하는 네트워크를 조직하여 영국을 비롯한 유럽과 미국에 영향을 주어 전 세계적 기상관측 네트워크를 조직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훔볼트는 자연과 인간, 그리고 세계를 분리된 것이 아닌 통합된 하나의 세계로 파악하려고 했다. 이러한 그의 원대한 포부가 담긴 저서가 바로 미처 완성하지 못한 필생의 역작 <코스모스>였다.


이 책은 과학과 자연에 대해 알려진 모든 것을 모으고 기록하려고 했던 방대한 작업이었다. 총 25년이 걸려서 훔볼트가 76세였던 1845년 첫 번째 권이 나왔고, 세 번째 책이 그가 81세 때 출간되었으며, 그가 90세로 생을 마감했을 때 5권과 마지막 권이 반 정도 완성되어 있었다.

한국에서는 <코스모스>라는 책제목을 사용하지 않았다.

이 책은 과학자로서의 연구성과만이 아닌, 현대에 와서야 지평이 확장된 우주를 포함한 훔볼트의 철학적 욕구까지 담긴 역작으로 손꼽힌다. 그의 이러한 시도가 가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18세기 유럽의 사상적 흐름이 큰 역할을 해주었다. 우선 영국과 프랑스에서는 경험주의와 합리주의의 토대 위에 계몽주의 사상이 발달해 자연뿐 아니라 인간의 심성과 행동까지도 자연과학적으로 이해하려는 경향이 강했다.


반면에 독일에서는 칸트, 피히테, 셸링, 헤르더, 괴테로 이어지는 관념론적 자연철학이 여전히 강세를 보이고 있었다. 훔볼트가 속해 있던 후자의 독일 학계에서는 특히 과학주의의 한계를 지적하고, 자연과 인간 정신을 고유한 내적 법칙에 의해 변화하는 존재로 인식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기계론적인 자연관이 아닌 전체론적 자연관을 주장했다. 그의 저서는 이러한 흐름에서 배태된 것이다.


훔볼트는 베이컨의 과학적 전통을 수용하는 자연과학자임과 동시에 괴테, 쉴러, 피히테 등과 막연한 친분을 교류하며 헤르더의 관념론적 철학에 큰 영향을 받아 철학적 수준도 상당한 경지에 이르면서 ‘통섭’이 가능한 학자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훔볼트가 단순한 과학자보다 훨씬 더 우위에 선 업적과 행보를 선보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는 경험주의적 실험과 정확한 과학적 탐구 및 관찰방법에 독일의 철학적 관심을 접목시켰다. 실증주의적 과학의 단점을 극복하고, 인간의 감성과 창조성의 의미를 투철하게 인식하여 양자를 결합한 보편 과학을 구상했던 것이다.

따라서 훔볼트는 수많은 종들을 수집하고 연구했지만 동시대의 자연과학자들처럼 그것을 분류하고 전시하는 것에는 전혀 흥미가 없었다. 그의 궁극적인 목표는 자연 세계에 내재한 통일적 관련성을 이해하고 집대성하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그의 생각과 평생의 경험이 농축되어 저술된 것이 다로 <코스모스>이다. 그의 논지는 과학이란 마음 자체가 사물을 취하는 데서 출발하며, 경험적 인식을 합리적 이해로 승화시키는 것이었다.


그에게 있어 과학은 자연의 일부인 인간이 자연을 이해하는 방식이었다. 따라서 지리학계에서는 훔볼트의 세계관이 ‘우주를 살아있는 하나의 전체로 보고 자연의 구성요소들을 상호작용하는 관계로 파악하여, 어떠한 현상에 대한 인과관계를 도출하는 과학적 방법론’에 근거하고 있다고 분석한다.


남미에서 돌아온 후, 훔볼트는 이탈리아의 베수비오 화산을 조사하고 연구를 하여 1807년 베를린에서 <자연의 풍경>을 발간했으며, 지금까지의 연구 성과를 정리하기 위해서 파리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 무렵에 그의 명성이 앞서 <브리태니커 사전>에 언급된 유럽 전역을 흔들어 나폴레옹 다음으로 유명한 인물이라는 말이 나온 시기이다.

이미 1794년까지 훔볼트는 모든 생명체의 형태와 자연 환경과의 관계를 이야기하는 <세계의 자연>을 생각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열대 아메리카 산맥의 조사를 통해 자연지리학, 지구물리학의 기초를 닦았다. 훔볼트는 지형, 기상, 지자기 연구에 각종 화학 설비를 이용하여 식물과 환경과의 관계를 조사하고 6만 종에 이르는 방대한 표본을 수집했지만, 그 안에는 수천 종에 이르는 새로운 종 및 속에 포함되어 있었다.


훔볼트의 도표 기록이 과학 분야에 큰 진전을 가져온 것 또한 간과해서는 안될 업적이다. <등온 곡선 만들기>(1817년)에서 그는 여러 나라의 기후 조건을 비교할 생각과 방법을 보여주고, 또 처음 해발 고도 증가에 따른 기온의 감소율을 밝혀내서 열대성 폭풍우의 원인을 찾고, 고위도에서 대기의 안정을 지배하는 복잡한 법칙을 발견하는 단서를 얻었다.


또한 식물학에 관한 그의 논문은 유기체의 분포가 다른 자연조건에 영향을 받는다는 당시로서는 전혀 새로운 아이디어에 근거한 것이었다. 또한 지구의 자력의 힘이 극에서 적도를 향해 감소하는 것을 발견한 것도 훔볼트였다.


그 후 남아메리카·중앙아시아 등을 여행하고 그 경험을 정리하여, 1829년 빈 대학교에서 자연지리학을 가르쳤다. 또한 국제적인 지자기 관측소를 만들었으며 프로이센에 기상학 연구소를 세웠다. 그 외에도 동식물, 천문, 기후, 광물, 해양 등의 분야에 큰 업적을 쌓았다. <신대륙 적도 지역 여행기>는 1805년부터 1834년까지 23권으로 출간되었는데, 훔볼트의 광범위한 관심 분야를 잘 보여준다. 4권은 천문학적 관측이 실려있고, 7권은 훔볼트와 봉플랑이 여행 중에 발견한 식물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3권은 뉴스 페인 왕국에 관한 정치적 수필이다.


그는 1859년 90세의 나이에 사망했으며 장례식이 국장으로 거행되었다.




매번 같은 의문이겠지만, 집안도 출중하고 형까지 장관에 대학자로 이름을 날리고 본인까지 이렇게 잘 나간 사람이 무슨 실패한 대가라고 이 시리즈에 이름을 올리냐고 물을 수 있겠다. 대강 읽지 말고 당신의 일생이라고 생각하고 다시 찬찬히 그의 인생 과정의 전환기를 살펴봐라. 그의 인생은 그의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완전히 뒤바뀐다.


굳이 선후를 따지자면 그는 형보다 나은 동생은 못되었다. 그래서 대학을 졸업하고서도 어머니가 원한대로 광산 감독관이라는 일을 찾아 2년제 광산 학교까지 다니고 졸업했다. 이후의 행보를 봐서도 알겠지만, 그것은 그가 원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가 형처럼 특출 난 재주를 가지고 있어 학교에 남아 학교에서 주목받는 학자로서의 자질을 보인 것도 아니었는데 바로 현실적인 직업으로 방향을 튼 것이 바로 광산 감독관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귀족 명문가의 신분에 어울리는 직업을 원하시던 어머니의 죽음을 계기로 그는 더 이상 자신을 옭아매던 족쇄에서 풀려난다. 혹자는 위에 기술한 것처럼 그가 탐험을 하려고 해도 실탄이 없었기 때문에 그 막대한 유산이 들어오면서 그 일을 벌일 수 있었던 것이 아니겠느냐고 말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선후가 잘못된 것이다.


무언가를 하고자 했으나 돈이 없어서 못했다면 그 말이 맞겠으나 그에게는 돈보다 어머니의 희망을 짓밟고 자신의 뜻을 펼칠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것이 맞았다. 그것은 이후 그가 보인 행보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당시 탐험가들의 가장 큰 목적은, 새로운 땅의 발견이거나 탐험을 통한 더 많은 돈이 되는 일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하지만, 훔볼트는 달랐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날리거나 일확천금을 받거나 하는 일에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여느 과학자나 탐험가들과는 전혀 다른 면모를 선보인 새로운 지평을 연 인물이었다. 지금도 여기저기서 떠들고는 있지만, 진정한 ‘통섭(統攝; consilience)’이 가능한 학자는 그리 많지 않다.


진정한 통섭(通涉)은 학제 간 접근을 넘어선 초학문적 혹은 범학문적 접근을 지향한다. 즉, 혼류(混流)로서 서로 이질적인 것들이 섞여 새로운 지식을 창출해 내는 다이내믹한 과정이다. 단순한 지식의 혼합만으로도 어려운 일인데 18세기에 이 지향점을 향해 자신의 모든 경험과 지식을 융합시켰다는 학자가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하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을 이뤄 90세가 될 때까지도 학자로서 그 꿈을 이뤄내기 위해 결국 완성하지 못한 책을 써 내려가던 그의 신나 하는 얼굴이 눈앞에 선하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고 싶었던 것을 하지 못하고 현실적인 벽에 가로막혀 광산 학교에 가서 광산 감독관으로서의 길을 밟아야만 했다. 부모의 기대, 주변의 시선 등등에 가로막혀 자신이 하고자 하려는 것을 하지 못하고 다른 삶을 살아야만 하는 이들은 우리 주변만 해도 수없이 많다. 하지만 그들은 결코 행복하다고 말하지 못하는 삶을 산다.

괴테와 함께한 훔볼트

당신도 현실에 영합하는 삶을 살면서 어떻게 자신이 원하는 것을 다 하면서 살 수 있느냐는 자조적인 말을 내뱉으며 하루하루 살아가는지 모르겠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하고 싶은 것을 다 하고 살라는 말이 아니다. 훔볼트는 단순히 자신이 하고 싶었던 것을 하는 것을 넘어 자신의 90 평생을 시간이 부족하다며 정력적인 탐험과 그 경험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실질적인 지식으로 제자들을 양성하였고 더 많은 이들에게 그것을 공유하고자 저술활동에 힘을 쏟았다. 그가 원하던 것을 감히 짐작하건대 그는 세상을 바꾸고자 했던 사람이었다.


당신이 그저 노래를 부르고 싶다거나 그저 유명해지고 싶다거나 자동차에 빠져 카레이서가 되고 싶다거나 그저 하고 싶은 것과 그것이 평생의 숙제로 당신이 이뤄낼 목표가 있는 것은 완전히 다른 얘기이다. 아이들이 원하는 것을 부모들이 다 들어주지 않는 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하지만, 아이가 정말로 원하는 것이 있을 때 들어주는 부모만이 그 아이가 대성할 수 있게 만드는 육아를 하는 것이라는 점은 사소한 듯 하지만 아주 큰 차이를 만든다.


당신의 삶 역시 마찬가지이다. 당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한다고 하지만, 금세 싫증을 내거나 당신이 원한대로 풀리지 않아 실패하거나 말아먹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바로 다른 일로 갈아타거나 꼬리를 말고 도망가는 삶의 방식은 결코 당신의 삶을 윤택하게 만들어주지 않는다. 탐험가이면서 과학자이고 동시에 철학자였던 사람은 훔볼트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었다. 그런데 그것은 그가 일부러 만든 것이 아니라, 그의 자연스러운 성장과정에서 녹아든 것이었고, 자신의 노력으로 완성형에 이르게 된 것이었다.

탐험에 크게든 작게든 실패하는 일도 많았고, 그를 그저 시대의 흐름을 타고 제국주의와 유럽세의 흐름에 편승하여 성공했다는 식으로 비난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그런 실패에 좌절하지 않았고 그런 비난에 무너지지 않았다. 그는 그저 그의 길을 걸어 나갔다.


당신의 삶을 완성형으로 만드는데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잘 생각해보라. 실패가 당신을 더 강하게 만들 것이며 비난이 당신이 이를 더 악물게 만들 것이며, 새로운 것을 배워나가는 것과 동시에 당신은 당신의 한계를 뛰어넘어 지평을 확장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려면 당신이 해야 할 것은 끊임없는 공부와 노력, 그리고 결코 시련에 굴하지 않고 도전하려는 의지인 것이다.


말은 쉽지만 결코 아무나 할 수 없는 일, 그것은 오늘 하루를 살아내는 당신의 모습에 담겨 있다. 당신의 오늘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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