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발검무적 Mar 30. 2022

환관의 신분으로 궁궐생활을 시작하였지만

문명의 발전을 가져다준 종이를 만들어 문화를 연 장본인이 되다.

197번째 대가의 이야기.


A.D 50년경에 중국 계양() 후난성()에서 태어나 18세의 나이에 후한()의 2대 황제인 명제 때 환관()으로 황실에 들어갔다고 한다. 그는 액정(掖庭;후궁)에서 일을 했는데, 천성이 총명하고, 생각이 깊었다. 건초(한장제(漢章帝)의 연호) 시기에 승급되어, 황문시랑(黃門侍郞)이 된다. 이는 황제를 가장 측근에서 모시는 근시(近侍)의 벼슬이다. 업무의 특성상 당연히 황궁의 고위층 사이에서 잘 나가는 인물로 꼽히게 된다.


한장제의 황후 두황후(窦皇后)는 황자를 낳지 못했다. 한장제는 송귀인의 아들인 유경(劉慶)을 태자로 앉힌다. 한장제의 또 다른 총비였던 양귀인(梁貴人)에게도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그의 이름이 유조(劉肇)였다. 두황후는 질투심에 이 두 여자를 아주 미워했다. 그중에서도 송귀인에 대한 미움이 더 심했는데, 그녀가 황태후가 될 것이라는 생각이 이를 갈며 갖은 방법을 다 사용하여 송귀인을 없애고자 한다.

어느 날 송귀인이 병들었는데, 두황후는 그녀가 자신을 무고지술을 행하였다고 모함한다. 얼마 후 송귀인은 한을 품고 자살하고 만다. 그 일로 유경은 태자에서 폐위되어 청하왕으로 내려앉게 된다. 양귀인도 겁을 먹고 자신의 아들 유조를 두황후에게 양자로 보내게 된다.


나중에 두황후는 양귀인의 가족도 그냥 놔두지 않았다. 총애를 잃게 된 양귀인은 또 그렇게 억울하게 죽어갔다. 이때부터 두황후의 지위가 공고해지고, 후궁의 총애를 모두 독차지하게 된다. 이 모든 권력 투쟁 과정에서 그는 두황후의 배후에서 브레인 역할로 적극 참여하게 된다.


한장제가 병사한 후, 양귀인의 친아들이자 두황후의 양자였던 유조가 즉위하게 된다. 그가 바로 후한의 4대 황제인 화제(和帝)이다. 당시 유조는 나이가 너무 어렸기 때문에 두태후가 조정을 대리하는 수렴청정을 하게 되는데, 두황후의 브레인 역할을 했던 환관으로 그는 승승장구하며 중상시(中常侍))를 거쳐 상방령(尙方令)의 자리에까지 오르며 승진 가도를 달리게 된다.


유조는 성인이 되면서 수렴청정을 거둬내며 점점 권력을 장악하기 시작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두황후에서 화제로 권력의 흐름을 갈아타면서 재능과 학문이 모두 우수하고 직무를 잘 수행한다고 인정받아 더욱 높은 신임을 얻게 된다. 심지어 여러 번 황제의 뜻을 거슬러가며 득실의 이치를 설명한 것으로 더욱 신임을 얻게 되고  상방령(尙方令)으로 오르게 된 것이다.


'상방령(尙方令)'이라는 벼슬자리는 황실의 칼이나 무기를 제작 감독하거나 황실에서 필요로 하는 물건을 제작하고 기술을 확립하는 부서의 책임자였다. 당시 문헌에 의하면, 권력투쟁과는 별론으로 하더라도 성실한 인품에 학문을 좋아하며 물건 만들기에 재능을 가지고 결백하게 행동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특히 이 자리는 그가 제지술을 연구하는데 좋은 토대를 마련하는 계기가 된다.

인류의 발전을 가져왔다는 나침반 화약 등과 함께 중국의 4대 발명품으로 간주되는 종이를 발명한 사람으로 널리 알려진 중국 후한 중기의 환관으로, 자는 경중(敬仲)으로 불렸던 채륜(蔡倫)의 이야기이다.


<후한서> ‘채륜전’에는 "채륜이 나무껍질, 넝마 섬유, 포, 어망 등을 사용하여 종이를 만들어 원흥 원년(元興元年, 105년)에 황제에게 바쳤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따라서 채륜은 제지법을 발명했다기보다는 기존의 제지기술을 개량하여 널리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데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채륜이 발전시킨 제지법은 동아시아에 확산되어 학문이나 예술의 발달에 큰 영향을 끼쳤다.

채륜은 화제로부터 두터운 신뢰를 받아 유악이라는 국가 기획기관에 참가하여 정책 입안에도 참여하였고 왕의 곁에서 자주 간언을 올리는 위치에 올랐다. 더불어 그는 고전의 교정 작업도 감독하는 등 학자 관리로서의 면모도 보여주었다. 그는 105년 기존의 포장지 개념이었던 종이를 개량하여 글을 쓸 수 있는 종이를 개발하였다.

 

고대 서적은 대부분 죽간이나 비단 혹은 베에 적었다. 하지만 죽간은 너무 무거웠고, 비단은 너무 비쌌기 때문에  일반인들이 사용할 수가 없었다. 또 대나무 조각이나 나무 조각은 많은 양의 글을 기록하기 어려웠고, 무게가 무거워 운반하기도 힘들었기 때문에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서 105년 채륜은 나무껍질, 삼베 조각, 헌 헝겊, 낡은 그물 따위를 사용하여 종이를 만들었다. 채륜이 발명한 제지술은 나무껍질(꾸지나무의 섬유라고 분석되었다)·마설(헌 어망이라고 분석되었다)·넝마(비단·마의 직물류로 분석되었다) 등을 돌 절구통에 짓이겨 물을 이용하여 종이를 초조하는 원리였는데, 이것은 현대의 초지법(抄紙法)과 같다.


당시는 역사적으로 한(漢) 나라가 재건된 후 50여 년이 지났기 때문에 통일왕조로서 기초가 다져진 때였으므로, 정치적·문화적 필요에 따라 기록을 위한 재료가 많이 쓰이고 있었다. 궁중에서 채륜의 업무가 바로 수공품을 원활히 조달하는 것이었으므로 그는 비능률적인 재래 방법에 대하여 연구를 거듭하였으며, 그 결과 제지술을 발명하였다.

이 발명으로 인해 저렴한 재료로 가볍고 질기며 문자를 기록할 수 있는 매끄러운 종이가 탄생하였다. 지금 종이를 뜻하는 한자 지()는 당시에는 비단을 만들고 남은 재료로 만들어진 천을 가리키는 말이었기 때문에 채륜이 만든 종이는 채후지(蔡侯紙, 채륜이 만든 종이란 뜻)란 말로 높여 불렸다.  


이 채후지는 당대 중국에 존재하던 제지 기술을 개량하고 체계화하여 실용적인 목적으로 생산한 종이로써, 당대에 높이 평가받았다. 그 뒤 백서, 주간, 목간 등과 함께 사용되다가, 남북조 시대에 이르러 널리 쓰이게 된다. 채륜이 정립한 제지법은 후대에 종이를 만드는 표준 방법이 되었고, 한나라에서 세계 각지로 전해졌다


그가 만든 종이는 학문발전에 있어 일대의 혁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이전에 문자 기록은 무겁고 부피가 큰 대나무나 나무판자 혹은 고가의 비단을 이용해야만 했기에 많은 한계가 있었지만 채륜이 글을 쓸 수 있는 가볍고 저렴한 종이를 개발함으로써 문자의 기록과 학문 전달은 이전과는 획기적으로 다른 차원의 세계를 맞게 된다. 이는 오늘날과 비교하자면 컴퓨터 개발 이상의 지적 혁명이었을 것이다.

한화제는 젊어서 요절하였고, 아들이 없었다. 결국 송귀인의 손자였던 유호가 황제에 오르는데 그것이 바로 한안제(漢安帝)이다. 즉, 태자가 취소되었던 유경의 아들이었다. 유호의 즉위는 채륜의 운명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게 된다. 한화제시대에 채륜은 일찍이 등수(鄧綏)를 보좌하여 황후로 올리고 등수의 총신이 되는 방식으로 다시 권력의 수면 위로 떠오른다.


원초(한안제의 연호)원년 등태후는 114년 채륜은 '용정후(龍亭侯)'에까지 봉하고 아들 상제가 죽고 난 후 어린 안제를 황제로 봉하고 계속 섭정하였기 때문에 채륜도 그와 함께 승승장구하였다. 채륜은 그렇게 장락태복(長樂太僕)의 벼슬까지 오르게 된다. 이는 태후의 궁내 근시를 의미하는 벼슬자리였다. 그야말로 그는 오를 수 있는 최고의 자리에 올라 권력을 모두 손에 쥔 듯했다. 나중에 채륜은 다시 황국내 각종 전적 문서의 교정을 감독하는 일까지 맡으며 전성기를 구가한다.

그러나 채륜의 권세는 121년 등태후가 사망하고 안제가 친정을 시작하면서 저물기 시작하였다. 안제는 3대 장제의 아들로 황태자 자리에 있다가 두태후에 의해 축출된 유경의 아들이었다. 그는 등태후와 그 외척에게 빼앗긴 권력을 되찾기 위해 자신의 아버지 유경이 황태자 자리에 있다가 쫓겨나게 된 경위를 조사하게 하였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조모였던 송귀인(장제의 후궁)이 두태후의 중상모략에 의해 무고하게 자살로 내몰렸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때 송귀인을 모함하는 두태후에게 힘을 보탠 것이 다름 아닌 채륜이었다는 사실도 당연히 알게 된다.


그렇게 채륜은 즉시로 형장으로 끌려 나올 처지가 되었다. 그러나 당시 사대부에게는 형을 내리지 않는다는 원칙이 있었기에 형벌은 대개 자살로 마무리되었다. 채륜은 자신에게 형장으로 출두하라는 칙명을 가지고 온 사자가 내민 독약을 먹고 자살하는 것으로 그의 영욕의 삶을 마감하게 된다.

 

채륜 이후에도 종이의 개량은 계속되어 제자 좌백이 '좌백지'라는 좀 더 개량된 형태의 종이를 개발하였다. 종이의 보급으로 후한 이후 중국에서는 학문이 매우 발전하였고 이 종이의 제지술은 3~4세기경 고구려와 백제 신라에 최초로 전해졌다. 백제의 왕인과 고구려의 담징이 일본으로 건너가 제지술을 전파하면서 종이는 바다 건너 일본에까지 전해져 중국과 동아시아는 일찌감치 종이 문명의 세례를 받았다.

한편 종이는 8세기경 중국 당나라 시기 이슬람을 거쳐 서양에도 전해져 서양의 학문 문화의 발전에 큰 공헌을 하게 된다. 문자를 기록할 수 있는 종이를 개발한 채륜은 중국에서는 종이의 수호신으로 추앙받고 있으며 중국 섬서성에는 채륜 박물관이 있어 오늘날에도 채후지가 복원 제조되고 있다고 한다.


일반인들이 대체로 채륜을 '종이의 발명가'로 알고 있으나 그는 종이 자체를 발명한 인물이라기보다는 '문자를 기록할 수 있는 종이의 개발자'라고 불리는 것이 좀 더 정확한 표현이다. 왜냐하면 종이는 채륜이 개발한 종이의 형태가 나오기 200년 전으로 추측되는 시기의 유적에서도 종종 발견되기 때문이다.


1986년과 2002년, 중국 고고학 발굴 팀은 간쑤 성 천수방마탄(天水放馬灘)과 둔황 지역에서 대량의 종이를 발견했다. 고증 결과 놀랍게도 가장 빠른 연대는 한 고조 유방 때의 것으로 밝혀졌다. 채륜이 앞서의 경험을 종합해 종이를 만들었다는 『후한서』의 기록은 그래서 절반만 맞는 것이다.

 『후한서』가 알고 싶어 했던 ‘앞선 경험’의 실체가 드러난 것이다. 종이 제조 기술은 채륜보다 약 300년 이른 시기부터 축적되어온 것이었다. 다만, 이때의 종이들은 풀솜이나 마를 펴서 만든 것으로 하나같이 동경(구리거울) 등을 싸는 포장지의 개념으로 문자를 기록할 수 있는 종이는 아니었다.

 

채륜의 종이 개발 이전에 문자는 대개 대나무를 쪼개어 이은 것이나 나무판자 아니면 고가의 비단 등에 쓰였다. 이는 보관과 이동, 가격의 면에서 모두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다. 학문 지식은 이들 기록물을 가질 수 있는 상류층들에게만 국한되었고 그로 인해 학문의 발전은 지체되었다.


다시 말해, 그가 종이 자체를 처음 발명한 것은 아니었지만, 지금 사용하는 종이의 용도에 맞는 기록이 가능한 재료로서의 종이를 만들어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얼핏 그의 인생과 후한의 역사를 살펴본 당신이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았던 권력욕이 득시글거리는 인물로 채륜을 인식할 수도 있을 법하다. 하지만, 조금 차분하게 그의 인생을 꼼꼼히 들여다보게 되면, 그가 권력욕만을 가지고 있었던 인물이었다면 굳이 종이를 개발하거나 궁중의 문서를 교정하는 일등에 그렇게 열성을 가지고 노력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모순을 쉽게 발견하게 될 것이다.

흔히 중국의 역사에서 가장 존경받을만한 환관(내시)을 꼽을 때, 본래 환관은 아니었지만 본의 아니게 권력투쟁의 희생양이 되어 거세당하고서 <사기>를 저술한 사마천과 용정후를 언급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용정후가 바로 이 '채륜'의 벼슬이었기에 그를 높여 부르는 것이다. 이는 다시 말해, 온전히 성년이 되기 전에 거세가 된 형태로 환관이 되어 궁에 들어와 활약을 보였던 인물은 채륜이 유일하다는 말이다.

  

기존에 이미 종이의 형태가 있었지만 온전한 기록 용도를 발휘할 수 있는 물건으로 발명하는 과정을 진두지휘하고 연구를 쏟은 것은 채륜의 공이고 업적이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그가 단순히 권력욕을 가진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이 기생할 수 있는 지주가 될만한 사람을 갈아탔어야만 하는 현실을 감안해주지 않을 수 없다. 그의 최후가 이전의 그러한 과정의 대가로 내려진 처형이라는 점에서 그 현실은 정말 아프고 아리다.


그의 인생은 그렇게 실패로 마감되었지만, 전체적으로 보자면, 그는 그의 일생을 아주 성공적으로 살았고, 무엇보다 인류에게 남을만한 큰 선물을 발명하고 떠난 삶을 살았다.


당신에게도 현실은 있을 것이다. 아무리 당신 혼자서 깨끗하다고 생각하더라도 도저히 그것이 관철될 수 없는 지저분한 현실은 있을 수 있다. 오늘 채륜의 실패를 통해서 당신이 깨달을 수 있는 것은, 그러한 현실 속에서도 당신이 추구하는 바는 올곧게 이루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후한시대뿐만이 아니라 십상시라던가 정치에 관여하여 몹쓸 짓을 했던 이들은 많았다. 하지만 자신의 출세와 부와 명예를 위해 발버둥 친 이들만 있을 뿐, 자신이 해야 할 도리를 다 하고 자신이 맡은 벼슬자리에서 그 임무를 수행했던 환관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그래서 모든 중국인들이 그를 존경하는 인물로 꼽는 것이다.


당신의 처지가, 당신의 위치가, 그리고 당신의 과거가 내세울 것 없이 초라하거나 오히려 창피하다고 느껴질 수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지방대 출신이라서, 검정고시 출신이라서, 이혼녀라서, 파산하고 사장이나 대표가 아닌 월급을 받으며 근근이 생활하는 사람이라서, 약간의 장애가 있어서 등등 당신이 핑계를 대고 현실에서 적당한 동정이나 적당한 변명거리로 넘어가 줬으면 좋겠다는 식의 언사를 꺼낼 것들은 찾아보면 수도 없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서 어쨌다는 건가?

그것이 당신이 제대로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는 면제부라도 된다는 것인가? 혹은 당신이 그렇게 열심히 하지 않는 자세가 용서가 된다는 말인가? 아니다. 그 어떤 것도 당신이 당신의 삶에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것에 대한 변명이나 핑계가 되어줄 수는 없다.


성공이라는 고지에 장악하고 자신의 삶을 오롯이 자신의 것으로 만든 이들의 공통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할 도리를,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해내는 것이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제 200여 명이 채 남지 않은 매일같이 당신이 살펴본 대가들이라고 불린 이들이 실패를 극복해온 한 가지 방법이었다.


당신이 당신보다 못한 사람을 보면서 마음의 안도를 느끼거나 그럴지도 모르겠다. 다른 사람의 더 큰 실패를 보면서, 나는 저 정도는 아니지, 라며 안도를 느끼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 당신이 겪고 있는 실패는 당신만의 것이며 그것을 이겨내고 극복하여 툴툴 털고 다시 일어날 기운을 낼 수 있는 것은 그 어느 누구도 도와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실패도, 성공도, 그리고 더 올라가는 것도 그렇지 못하고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도 모두 당신이 결정하고 당신이 마음먹기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은, 만고의 진리인 것이다.


이제 당신이 선택할 차례이다.

어쩌겠는가?      


매거진의 이전글 광산 감독관이나 하라고 광산학교까지 졸업했지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