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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Mar 31. 2022

나이가 어리다고 군입대를 거부당하고, 전쟁까지 패배해도

나라를 위한 마음으로 일어섰고, 나라를 세운 국부로 존경받다.

198번째 대가의 이야기.


1881년 현재 그리스 테살로니키에 해당하는 당시 오스만 제국이던 셀랴니크(Selânik)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집은 20년 임차계약으로 세를 내서 살던 집인데, 오스만 제국 당시에는 튀르크 인들이 많이 살던 곳이었으며, 현재에도 이 거리 끝에 터키 영사관이 위치해 있다.


사실 그의 정확한 출생일에 대한 기록은 명확하진 않다. 1912년 발칸 전쟁 당시 셀랴니크가 그리스에 점령되는 와중에 당시의 공문서들이 상당수 소실되었고, 그 과정에서 그의 호적 또한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그의 어머니는 종교에 의존적이고 가정적이며 전근대적 여성이었지만, 아버지는 굉장히 서구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의 회고록에서도, 셀랴니크에 처음으로 가스등이 들어오던 시절 그의 아버지는 아들과 함께 밤나들이를 나가며 과학의 중요성에 대해 가르쳐주었다고 한다. 유럽으로 향하는 국제항구이자 오스만 제국에서 가장 서구적인 지역이었던 셀랴니크의 풍토 또한 그의 성장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환경적 영향으로 크게 기여했다.


사진에서 알 수 있듯, 그의 푸른 눈, 하얀 피부는 그리스 지역 출생으로 전통적인 동양계 튀르크족의 외모와는 거리가 있고 순혈 튀르크인이 아니라는 혼혈 논란도 있었다. 그도 그런 외모에 대한 점은 인정했으나 워낙 다인종이 섞인 터키의 특성상 터키인을 ‘터키어를 쓰고 터키 문화로 살아가는 사람’으로 정의했고 평생 터키를 위해 살았다.

오스만 제국 육군의 장군이자 갈리폴리 전투와 터키 독립전쟁의 참전영웅으로 터키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어, 터키의 국부(國父)로 칭송받고 있는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غازی مصطفى كمال ; Mustafa Kemal Atatürk)의 이야기이다.


그의 성씨인 아타튀르크는 본래의 의미가 ‘튀르크인의 아버지’라는 뜻으로 결국 그는 그 이름의 확장판인 인생을 살았다.


특히 이슬람 문화의 영향을 짙게 받은 오스만 제국 출신임에도 정교분리, 세속주의를 추구했으며, 유럽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서구화를 단행하였다. 그 덕분에 오늘날의 터키는 국민 대다수가 무슬림임에도 불구하고 세속주의 국가를 유지하고 있다. 법체계 면에서도 이슬람 율법인 샤리아가 아닌 대륙법을 따르는 공화제를 유지하고 있다. 그래서 이슬람 근본주의자들과 이슬람 학자들은 그에 대해 상당히 부정적인 비판을 쏟아내기도 했다.

7살 때 아버지가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어머니는 무역상과 재혼했다. 계부는 좋은 사람이었지만 아들이 자신이 일하는 무역업체에서 후계자처럼 따르길 바랐고 군인이 되려던 무스타파와 충돌을 빚었다. 친부가 본래 군인이었고 퇴역하여 세관원이었던 것과도 무관하지 않은 선택이었다. 


결국 군인의 길을 걷겠다고 결심한 그는 부모에게 아무 말없이 1893년 육군 유년학교에 응시하여 합격하자 기숙사로 들어갔다. 그리고 3년 뒤에 육군군사고등학교로 들어가서 공부하고 육군사관학교를 거쳤다.


당시 오스만 제국은 이미 1826년에 구시대의 상징적 군대였던 예니체리가 해체된 지 수십 년이 지난 상태로, 꾸준히 유럽의 군사제도를 도입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특히 1880년대와 90년대에는 오스만과 친밀하던 독일 육군사령관 콜마어 폰데어골츠 남작(Wilhelm Leopold Colmar Freiherr von der Goltz)에 의해 오스만의 군사제도가 재정비된 상태였고, 아타튀르크는 운 좋게 당대 최고의 군사강국인 독일식의 군사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세대 중 한 명이었다.


아타튀르크가 육군 소위로 임관된 것은 1905년의 일이었다. 그의 장교 임관이 늦었던 이유는 1902년에 소위로 임관될 것을 마다하고 다시 왕립 육군사관학교에서 전문사관학교를 재학하면서 더 배우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소위 임관은 늦었지만 재학생 및 성적 우수 특혜로 곧 중위로 진급했다. 아타튀르크가 공부했던 왕립육군사관학교(Mekteb-i Harbiye-i Şahane)는 현재 화려하고 다채로운 컬랙션을 자랑하는 터키 군사박물관이 되어 있으며 아타튀르크가 수업했던 교실도 보존되어 있다.

아타튀르크의 소위 임관 당시 기념으로 찍은 사진, 왼쪽부터 아타튀르크의 여동생 마크불레, 어머니 쥐베이데 하늠, 오른쪽이 청년기의 아타튀르크.

시리아 주둔 부대로 들어갔던 아타튀르크는 진보적인 태도를 보여서 보수적인 상관들에게 찍히기도 했다. 그러나 굴하지 않고 ‘조국과 자유(Vatan ve Hürriyet)’라는 비밀 단체에 가입한다. 이 단체는 술탄 압뒬하미트 2세의 보수정책 (범이슬람주의 및 전제 군주정)에 반대하는 젊은 군인들이 대거 가입했는데 동기인 이스마일 엔베르도 여기 가입하여 알게 된다.


1908년에 대위로 진급하였으며 당시 오스만 제국령인 리비아 주둔 부대로 전속되었고 1910년에 리비아로 쳐들어온 이탈리아 왕국군과 오스만 제국군의 전쟁에도 참여했다. 소령으로 진급한 아타튀르크는 1911년 리비아 투브루크 전투에서 2백 명의 오스만 군을 거느리고 2천 명이 넘는 이탈리아군을 물리치면서 훈장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오스만 제국이 리비아를 넘겨주고 전쟁을 끝내버리자 아타튀르크는 크게 분노했다. 곧이어 터진 발칸 전쟁에 참전하여 1913년 불가리아 왕국군을 물리쳤고 이 공로로 중령까지 진급했다. 아타튀르크는 1914년 불가리아 주둔 주재무관으로 임명되어 불가리아에서 지내게 되었다.

소피아 주재무관 시절에 예니체리 복장을 하고 파티에 나갔을 때 찍은 사진 (1914년)

아타튀르크는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당시 오스만 제국이 참전하는 것을 반대했다. 하지만 결국 오스만 제국은 전쟁에 참전하고 아타튀르크도 어쩔 수 없이 전선에 나선다. 대령으로 진급한 아타튀르크는 영국군이 갈리폴리 상륙작전을 실행해 오스만 제국을 공격하려고 하자 이를 성공적으로 막아내는 전공을 세우고 군 지휘관으로서 명성을 떨쳤다. 


이 공로로 그는 장군이 되었다. 갈리폴리 상륙 작전은 1차 세계 대전 최악의 작전 중 하나로 꼽히며, 영국군은 대규모의 함대와 병력을 투입하고도 피해가 막심했다. 갈리폴리 전투는 풍전등화의 투르크를 구했을 뿐 아니라, 수백 년 동안 서구 열강에게 패배만 거듭해 온 이 나라에 실로 오랜만에 값진 승리를 안겨주었다. 이 놀라운 승리를 거둔 주역, 케말에게는 지도자를 의미하는 ‘파샤’ 칭호가 자연히 따라붙게 된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준장이 된 그는 에디르네 방어전에서 협상국을 막아내면서 소장으로 진급했고 캅카스 전역에서 러시아 제국군을 물리치면서 중장으로 진급하면서 겨우 3년 만에 쾌속 진급으로 36살 나이로 오스만 제국 육군 7 군단장까지 올랐다. 그러나 그 혼자 힘으로 전쟁 전체의 승패를 뒤집을 수는 없었다.


1918년 10월에 투르크는 항복했고, 엔베르 등 정부 수뇌들은 외국으로 달아나 버렸다. 1920년 8월에 맺어진 세브르 조약에서 투르크는 이스탄불 일대와 아나톨리아 반도를 제외한 대부분의 영토를 잃고 일약 소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1차 대전이 끝나고, 협상국은 동맹국이었던 오스만 제국을 해체하려 시도했다. 연합국은 옛 투르크 영토를 나눠가지고는 투르크의 국정에 개입하며 장차 아나톨리아까지 차지하려는 욕심을 감추지 않았다. 또한 동쪽에서는 아르메니아가, 서쪽에서는 동로마 제국의 부활을 외치는 그리스가 소아시아로 진군해왔기 때문에 터키는 멸망의 위기를 맞게 되었다.


1919년 5월, 무스타파 케말 에펜디 중장은 술탄의 명령으로 흑해 연안에 있는 항구도시 삼순(Samsun)항으로 오게 된다. 아타튀르크가 맡은 임무는 술탄에게 거역하며 소규모 저항을 벌이던 군대의 진압 및 민족주의 단체의 해산이었다. 


그러나 삼순에 도착한 아타튀르크는 되려 휘하 병력을 이끌고 토벌하려던 군대와 합류했다. 이 와중에 아타튀르크의 뒤를 이어 대통령이 되는 이스메트 이뇌뉘 대령을 만나게 되는데 이뇌뉘도 그의 부대에 합류하게 된다.

술탄 메흐메트 6세 바히데틴(Altıncı Mehmet Vahidettin)은 그의 배신(?)에 경악했다. 궐석재판을 열어서 케말에게 사형을 선고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여론과 많은 군대들은 앞다퉈 그에게 합류하게 된다. 7월 8일 그는 이제 자신이 오스만 제국의 군인이 아닌 터키 민주공화국의 군인임을 선언했고 에르주룸(Erzurum)에서 공화국 대표자 회의를 가졌으며 8월에는 시와스(Sivas)에서 항전 결의를 한다.


1920년 4월 23일(이날이 바로 터키 공화국 건국기념일이다.) 케말 장군은 군사 요충지인 앙카라에서 국민회의를 주최하고, 자신의 명성과 국민 정부의 명분을 바탕으로 군의 지지를 확보했다. 케말 장군은 우선 산발적인 전투로 소아시아 해안의 그리스 군을 괴롭혔고, 이에 시달린 그리스 군은 케말 정부를 전복시키기 위해 소아시아 내륙으로 진공했다. 그러나 이는 그리스 군의 역량 한도를 벗어나는 무리한 작전이었다.


당시 그리스 국왕 콘스탄디노스 1세는 승리만을 추구하고자 무리한 작전을 고집했고 13만에 달하는 그리스 군이 파병됐으나 무리하게 전선을 넓히면서 제대로 보급도 이루어지지 못했다. 터키인들은 곳곳에서 게릴라전을 벌이며 그리스 군을 괴롭혔고 그의 뜻에 맞춰 많은 군대와 민병대가 손을 잡고 아르메니아 및 프랑스 같은 다른 점령군들과 전투를 벌였다. 


한편 터키 동남부의 도시인 아이은탑(Ayıntab)에선 프랑스 육군이 1년이나 압도적으로 공격을 퍼부었지만 샤힌 베이(Şahin bey)가 이끄는 300여 민병대가 11개월에 걸친 항쟁 끝에 자신들보다 12배가 많은 프랑스 육군을 물리치면서 많은 피해를 입고 보급책도 제대로 이뤄지지 못한 프랑스 육군이 물러서기도 했다.


하지만 프랑스 육군은 다시 장비와 병력을 새로 보강하여 여길 재공격했고 결국 압도적으로 밀린 상황에서 샤힌 베이와 부하들은 모두 물러서지 않고 끝까지 싸우다가 전원 장렬하게 전사했다. 그가 군인이 아닌 민간인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이 활약은 그야말로 눈부신 활약이라고 할 수 있다. 뒤에 케말은 아이은탑(현지어로는 ‘안텝’이라고 불렸다)을 찬양하면서 수호자라는 뜻을 가진 가지(Gazi)를 붙여서 지금의 가지안텝시가 된다.


아르메니아군도 유수프 베야즈오을루(Yusuf Beyazoğlu)가 이끄는 민병. 군부대에게 숫적 우세임에도 크게 밀려서 되려 아르메니아군이 민병대의 공격을 받고 후퇴해야 했고 차례로 점령지를 다시 빼앗기고 물러나야 했다. 옛 아르메니아 수도 아니를 탈환하려던 아르메니아군은 베야즈오을루가 이끄는 부대에게 역습당해 2천 명이 넘는 아르메니아군이 죽었는데 당시 아르메니아군 군이 1만 6천 명이었던 걸 생각하면 이 피해는 심각한 것이었다. 


결국 아르메니아와 프랑스는 연전연패 속에 물러나야 했고 서쪽 카르스 지방을 지배하던 러시아군도 무사 캬즘 카라베키르(Musa Kâzım Karabekir)가 이끄는 민병대와 군인들에게 고전하면서 오스만에서 물러서고 있었다. 결국 홀로 남아서 끈질기게 싸우던 게 바로 그리스 군이었다. 이렇게 다른 부대가 맹활약한 가운데 케말은 그리스 군과 총력을 다한 전투를 벌인다.


1921년 8월 23일부터 9월 13일까지 무려 3주일 동안 밤낮없이 양군이 계속 전투를 벌인 사카리아 전투(Sakarya savaşı)에서 총사령관으로 참전한 케말은 그리스 군을 물리치게 된다. 그리스는 이 패배로 많은 전사자를 내고 사기도 떨어지면서 차례로 점령지에서 물러나야 했다. 이런 연전연패 속에 협상국은 케말에게 전령을 보내 세브르 조약을 재수정하여 코스탄티니예와 타우르스 산맥 사이의 아시아 터키를 보장할 테니 군대를 물러나게 하라고 했으나 당연히 케말이 그 말을 들을 리가 없었다. 그는 전령에게 세브르 조약의 전면 무효가 아니라면 제의 같은 건 집어치우라고 일갈한다.

1922년 8월 퀴타햐(Kütahya) 근처의 둠루프나르(Dumlupınar)에서 그리스 군의 대패하는 전투가 벌어졌다. 니콜라오스 트리쿠피스(Νικόλαος Τρικούπης) 중장이 이끄는 그리스 군 19만 6천 명에 아타튀르크가 이끄는 18만 군 및 민병대가 맞붙은 이 전투에서 오스만 군은 2300여 명이 전사한 반면에 그리스 군은 1만 명이 넘는 전사자와 2천 명이 넘는 실종자를 내고 대패를 기록하게 된다. 


이날은 터키에서 ‘승리의 날(Zafer bayramı)’이라 불리며 한국의 광복절과 비슷한 위상을 갖는 국경일로 지정되었다. 이후 국민회의 군은 퇴각하는 그리스 군을 추격한 끝에 그리스 군의 본거지인 이즈미르 근처까지 진격한다. 9월 이즈미르에서 거주하던 튀르크 인들이 대거 저항하면서 그리스계와 튀르크계의 충돌이 벌어졌고 그리스 군의 학살로 많은 튀르크 인들이 학살당하자 케말과 이뇌뉘는 이것을 세계에 알린다. 이 학살로 그리스의 아나톨리아 점령은 정당성을 잃게 되었고 역습으로 오스만 전역에서 그리스계들이 보복 살해당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1922년 11월 21일 스위스 로잔에서 새로운 회의가 열렸고 이젠 케말 장군과 국민회의 측은 정당한 정부로서 이 회의에 참석할 자격을 얻게 되었다. 더불어 케말 장군은 술탄을 추방했으며 오스만 제국을 무혈로 무너뜨리게 된다.


로잔 회의가 열리면서 전투는 일시 휴전되었다. 세브르 조약 완전 무효를 요구하는 케말과 국민회의 측 주장에 그리스는 반발했으나 프랑스와 아르메니아는 받아들이면서 물러서려고 했고 영국과 러시아를 비롯한 다른 연합국도 오스만 내에서 물러날 기회만 보고 있었다. 


그리스는 트라브존을 비롯한 일부 지역으로 점령지를 줄인다고 물러났으나 케말은 일절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리고 1923년 2월 다시 전투를 재개한다. 이미 그리스 군은 사기를 잃고 점령지를 겨우 지키거나 아니면 물러서는 소극적 자세로 나섰고 반대로 사기가 충천한 국민회의 군은 계속 그리스 군의 점령지를 하나둘 탈환했다. 


결국 아나톨리아의 그리스 군 거점이던 이즈미르를 탈환하고 그리스가 세브르 조약으로 얻은 땅을 포기하겠다고 선언하면서 1923년 7월 24일 마침내 세브르 조약을 파기하고 로잔 조약을 새롭게 맺으며 전쟁은 끝났다.


이 전쟁의 승리로 터키의 본토인 아나톨리아는 대부분 사수해 낼 수 있었다. 여기까지만 해도 그야말로 나라를 구한 영웅이었다.

1923년 3월 24일에 발간된 타임지에 화제의 인물로 선정되기도 했다.

그는 마침내 1923년 10월 29일 터키 공화국 수립과 같이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새로 성립된 터키 공화국에서 케말은 공화인민당을 창당하고, 강력한 정교분리, 세속주의 정책을 펼치기 시작했다. 1924년에는 1300여 년간 지속된 칼리파 제도를 없앴고, 미국인 교육 개혁자인 존 듀이를 초빙해 자문을 얻고 여성교육 및 근대교육 정착에 힘썼다.


1925년에는 모자 및 복식법을 통과시켜 구시대의 상징인 페스와 히잡의 착용을 금지시켰으며, 가족법을 통과시켜 스위스식 민법을 도용했고, 달력법을 통과시켜 그동안 사용되었던 달력 대신 그레고리력을 도입했고, 1926년에는 샤리아를 금지했고, 1928년 11월 3일에는 복잡한 아랍 문자 대신에 알파벳을 쓰는 라틴문자를 채택하는 언어 개혁법을 통과시켰다. 그리고 서구식 정부 제도를 받아들였다.


<어린 왕자>에서 어린 왕자가 살던 B612 소행성을 발견한 터키인 천문학자 이야기는 바로 이 아타튀르크 개혁 제도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쓰게 된 것이다. 터키 전통 복식으로 나와 소행성 발견을 국제 천문학자 회의에 나가 말하던 것을 무시당한 그 학자가 11년 뒤 양복을 강요하는 터키 독재자 때문에 서구풍 양복을 입고 같은 자리에 나와 이야기하자 다들 믿어주었다는 이야기인데, 어린 왕자에서는 옷차림 따위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을 풍자하는 내용이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케말이 서구화 개혁을 밀어붙인 이유 중 하나를 설득력 있게 보여주는 방증이었던 셈이기도 하다.


그 결과 케말의 서구화 정책은 터키를 이슬람권에서 가장 세속주의적(?) 나라로 만들었다. 이런 과정에서 그리고 그 이후에도 공화파와 이슬람 세력 간에 충돌이 있었고 그 와중에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터키의 노벨문학상 작가인 오르한 파묵의 작품 <눈>이 이 갈등을 표현한 대표적인 작품이다.


이러한 아타튀르크의 세속주의와 민족주의 정책에 반발한 이슬람 학자들 입장에서 아타튀르크야말로 이슬람을 파괴하고 서구의 세속주의를 받아들이고, 터키의 이교도적 문화를 부흥시키려 한 악마라며 비난을 서슴지 않았다.


그는 러시아로부터 카르스, 아르다한, 베숨주를 돌려받았고 1930년에는 여성 참정권을 인정했다.

새로운 터키어 문자를 시연하는 아타튀르크 (1928년)

터키어에 라틴문자가 도입된 것은 아랍 문자라서 문제이고, 라틴문자가 좋다는 문제가 아닌, 터키어를 표기하는 합리적인 문자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후의 이란이나 이라크, 리비아, 레바논, 시리아 등에서 아랍문자를 썼음에도 문맹을 퇴치한 사례나 글자 수가 많은 한자를 쓰고 있음에도 문맹률이 10% 이하인 중국, 대만, 일본, 홍콩의 사례를 볼 때 터키어도 아랍문자를 계속 써도 문맹퇴치는 되었을 것이나, 이 당시에 초등교육도 제대로 보급되지 않을 정도로 학교시설의 부족이 매우 심각한 문제였기 때문에 익히는데 시간이 걸리는 아랍문자 대신에 단기간에 빠르게 배울 수 있는 라틴문자를 채택한 것이다.


터키어는 고대에는 초기 돌궐 문자로, 중세에는 위구르 문자로 기록되었는데, 13세기부터는 몽골어 어휘와 페르시아어 어휘가 터키어에 유입되었다. 여기에 이슬람의 영향을 받은 오스만 제국 시대에는 공용어인 오스만어에 아랍어, 페르시아어 요소를 많이 받아들였고 표기 문자 역시 아랍 문자로 갈아탔다. 하지만 아랍 문자는 자음 문자에 비해 모음 표기 문자가 적었기 때문에 터키어 표기에는 적절치 않았고 그 결과 불필요한 자음 표기는 너무 많고, 터키어에 필수적인 모음 표기는 터무니없이 부족한 상황이 벌어졌다. 이 때문에 1927년 조사에 의하면 당시 터키인 중에서 아랍 문자를 읽고 쓸 수 있는 사람은 전체의 7%에 불과했다.


이런 상황에서 케말 파샤는 아랍 문자 29자, 페르시아 문자 4자를 폐기하고 라틴문자를 도입하는 언어 개혁을 벌인 것이다. 그리고 구어(口語)에서도 기존 오스만어에서 아랍어와 페르시아어에서 차용한 일상적인 단어를 기존 튀르크 계통의 고어와 방언에서 대체하여서 서구식 어휘를 차용해서 새로운 터키어의 기본을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아랍, 페르시아 계통의 외래어를 없애고 터키 고어를 샅샅이 조사해서 복원했다. 


그리고 이 문자를 교육시키기 위해서 초등학교를 만들었고, 성인에게도 4개월간 강습을 받게 하였으며, 학교가 없는 마을에는 순회학교까지 개설했다. 그리고 케말 자신이 순회학교에 나가서 순회학교 일일교사가 되어 문자 교육까지 하는 노력도 보였다. 이런 노력의 결과 1935년의 조사에서 읽고 쓸 수 있는 사람의 숫자는 200만 명이 넘게 되었다.

아타튀르크는 전통술인 라크와 담배를 좋아해 대통령 시절 내내 둘을 입에 달고 살다시피 했고, 때문에 1937년 경부터 몸에 이상의 신호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잠시 휴가를 다녀온 후에는 상태가 조금 나아졌으나 휴가를 마치자마자 지방 시찰을 다녀온 이후 다시 건강이 나빠졌다. 


이스탄불로 돌아가서 검진을 받아보니 간경변이라는 판정을 받았다. 그 후 아타튀르크는 간경변 치료 및 요양을 위해 이스탄불에 머물면서 집무를 봤는데, 몸을 추슬러야 할 시기에 정상적으로 집무를 보면서 격무에 시달리는 바람에 건강이 급속도로 나빠졌고, 결국 1938년 11월 10일 돌마바흐체 궁전에서 운명했다. 향년 57세로 환갑도 채우지 못한 젊은 나이였다. 터키에서는 매년 11월 10일 오전 9시가 되면 5분간 묵념을 한다.


그의 재산은 극히 일부를 여동생에게 물려주고 나머지는 모두 국가에 기부했다.


터키에서 아타튀르크에 대한 국민들의 존경과 사랑은 그야말로 ‘종교’에 가까울 만큼 열성적이다. 어려운 문자를 없애고 쉬운 문자로 정리하는 수준이었으니 한국으로 치면 세종대왕의 역할부터 외세의 침략에 직접 장군의 입장으로 전쟁영웅이었으니 이순신에 준하는 인물이었으며 나라를 수립하는 그 과정까지 모두 완수하였으니 김구나 이승만에 필적할만한 업적까지 갖춘 셈이다. 하지만 내가 오늘 그를 당신에게 소개하는 것은 그가 그 모든 것을 이루고 난 뒤의 행실에 대해 보여주고자 함이다.


우리도 박정희에서 시작해서 전두환, 노태우로 이어지는 화려한 군바리 대통령의 치욕적인 역사를 가지고 있다. 표현 자체를 치욕이라고 한 것은 그들이 권좌에 오르기까지의 지저분한 총질도 총질이지만, 앉고 나서 그들이 보인 지저분한 마지막이 오늘 살펴본 터키의 국부와는 너무도 다르기 때문이다. 전투에는 승리했지만 전쟁에 패배하고 나이를 속이고 입대하려다가 적발되어 입대하지 못했던 그의 수많은 실패 속에서도 그는 끝내 승리하고 성공을 거두었다. 


자식을 두지 않고 양자를 8명만 두었던 것도, 자신을 사랑하는 적지 않은 여자들과 나라를 위해 이혼한다면서 했던 그의 마음가짐을 다시 새기기라는 의미에서 그의 삶을 가져왔다.


그는 자신의 자손들이 권력욕에 나라를 망가뜨리는 것을 원천 봉쇄하기 위해 결혼을 지속하거나 직계 자손을 두지 않는다고 당당히 말했던 ‘진정한 군인’이었다. 문자를 만들면서 여러 가지 자신의 아이디어를 내놓고 시도했지만 실패했고, 실패한 것에 개의하지 않고 더 나은 것을 빨리 찾아 개선하고자 노력했을 뿐이다.


그래서 지금도 터키에 가면 길거리 노점상도 아타튀르크 초상화를 자기 노점에 걸어두는가 하면 대부분의 터키 회사들은 아타튀르크 사진이나 어록을 벽에 걸어두고 있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아타튀르크가 남긴 어록 중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것 중 하나는 바로 ‘Hâkimiyet kayıtsız şartsız milletindir.(주권은 조건 없이, 제한 없이 인민의 것이다)’라는 말이다. 이러한 이유로 모든 터키 화폐에는 앞면에 아타튀르크를 도안으로 하고 있을 정도로 그에 대한 절대적 국민들의 존경과 사랑은 그가 죽은 지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국민들 어느 하나 원하지 않았지만 군바리 출신의 대통령을 세 명이나 가지고 있는 부끄러운 치욕의 역사를 가진 우리 입장에서는 부럽지 않을 수 없는 터키의 국부이다. 그가 조금 더 자기 관리를 신경 쓰고 건강을 챙겨 10년만 더 살았더라도 터키의 위상은 지금보다 훨씬 더 높아졌을지도 모를 것이라 모든 역사학자와 국제학자들은 입을 모은다.


당신의 삶이 위인전의 위인처럼 바뀌어야 한다고 이 시리즈를 연재하는 것이 아님은 몇 번이나 이야기했으니 이미 알아들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당신이 위인의 삶은 아닐지라도 이 세상을 떠나는 그날에 당신 스스로가 생각했을 때 부끄럽지 않은 당당하고 노력하는 삶을 살았다고 자부할 수 있는 삶을 살라는 것이다. 


다른 누군가에게 인정받는 삶을 사는 것은 대단해 보일 수는 있지만, 대부분의 위인들은 나중에 자신이 위인전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겠다며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삶을 목표로 살지는 않는다.


자신의 신념에 맞게,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하면 설사 중간에 실패하고 제대로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그대로 좌절하지는 않는다. 목표가 명확한 사람일수록 실패에 강하다.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목표가 명확하기 때문에 그것을 달성하기 전에는 결코 쉽게 무릎을 꿇고 좌절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당신에게도 그 목표가 있고, 지켜야 할 존재들이 있다면 지금 그렇게 쉽게 ‘좌절’이라는 말을 입에 담지 마라. 


아직 가야 할 길이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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