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창동의 거대한 집들 사이에 유독 문 앞부터 정원과 집안까지 경비로 보이는 체격이 좋은 남자들이 왔다 갔다 하는 집이 가느다란 달빛에 비쳤다.
“김 팀장. 고생이 많다. 상황은 좀 어때?”
프랑스에서 용병으로 활동하다 고국이 어떤 곳인지 그립다고 돌아온 정웅이 교대 근무자, 상훈에게 음료수를 건네며 말을 건넸다.
“상황은 무슨. 뭐 별거 있나? 그러고 보니 벌써 교대시간이네? 첨엔 시간이 안 간다고 할 때는 지겹더니만 이제 여기도 벌써 3일째 근무하다 보니 익숙해졌나 보네. 이런 꿀보직이 없네그려.”
목이 말랐던 탓인지 음료수를 받자마자 들이키며 상훈이 말했다.
“이 정도 집에 살 정도면 도대체 얼마나 돈을 긁어모은 건가?”
“이 사람이 외국에만 있어서 그런가 겁이 없네그려? 누가 듣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런 말을 함부로 해?”
“아 한국에서는 이런 말도 함부로 해서는 안 되는 건가? 안 되는 게 참 많은 나라군.”
다들 쉬쉬하라고 했지만 두 사람을 비롯해서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집주인의 정체는 전직 총리였다. 물론 십수 년 전의 일이라고는 하지만, 그는 대한민국의 정치를 총괄하여 진두지휘하는 자리에 있었던 정계의 거물이었다.
“하긴, 무슨 돈이 남아돈다고 특별경비를 세워 세우길? 우리야 일이 들어와 좋긴 하지만...”
상훈이 허가받은 총기와 무전기를 정웅에게 건네며 한 마디 보탰다.
“그런데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지? 한국은 총기를 허가하는 것도 아니고 경찰의 치안력으로 충분할 텐데 우리 같은 비싼 다국적 용병회사를 고용할 정도로 심각한 일이라도 있는 건가?”
“자네가 한국에 들어온 지 얼마 안돼서 잘 모르나 본대. 한국에선 높은 지위에 올랐던 돈 많은 양반들은 뭐든 할 수 있다네. 그리고 우리 같은 사람들은 모르는 비밀이 많지. 요즘 사실 좀 많이 시끄러웠나?”
“응?”
“자네는 뉴스도 안 봐?”
“뉴스?”
정웅이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의아한 얼굴로 상훈을 쳐다봤다.
“그래. 내가 가끔씩 잊는다니까. 자네가 워낙 한국어를 잘하니까 자네가 겉만 한국 사람이지 프랑스 사람이라는 걸 이렇게 잊는다니까. 그 왜 전직 고위층들 집만 노리고 완전히 털어가고 그들이 어떻게 그런 부를 쌓았는지 인터넷에 올려버린다는 그...”
“아 일종의 로빈훗 같은 건가?”
“로빈훗은 무슨. 그 뉴스에 나온 거 보면 각시탈*이라고 하는데, 이게 무슨 허영만 만화도 아니고...”
“이강토가 주인공인 그 만화?”
“어라? 이강토를 다 알아? 어떻게 그 만화는 또 알아?”
“내가 프랑스에 입양될 때 내 몇 개 안 되는 짐에 넣어있던 만화책이거든.”
치이 이익-
그때였다. 갑자기 귀에 걸친 레시버를 통해 이상한 잡음이 들어오며 말소리가 조그맣게 들렸다.
“뭐야?”
“팀장님. 여기... 좀, 우욱!”
“뭐야? 알파! 알파! 전체 비상! 알파 브라보 찰리 모두 제 위치 확보하고 보고한다. 침입이다.”
본능적으로 정웅이 빠르게 총을 꺼내 들고 방금 무선이 끊겨버린 집 후면 쪽으로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막 교대하고 나가려던 상훈도 함께였다.
정원을 통과하고 빠르게 집의 뒤쪽으로 달려가고 있는데 이번에 집안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아아아악!”
타탕~!
여자의 비명과 함께 총소리가 들렸다.
정원의 뒤쪽을 통해 주방으로 이어진 뒷문으로 들어간 상훈과 정웅의 눈앞에 입에 천이 자갈처럼 묶여 공중에 매달려 대롱거리는 알파 팀원 두 명이 보였다.
방금까지 아무런 이상이 없던 용병급 요원들이 아무런 저항도 못해보고 귀신에게 당한 것처럼 그저 매달려 있다는 것이 이해가 안 되었다. 총구의 안전장치를 풀고 정웅이 앞으로 먼저 나갈 테니 엄호하라는 수신호를 상훈에게 보냈다. 상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앞뒤 움직임을 살폈다.
“꼼짝 마!”
막 달려 들어가며 총을 앞으로 겨누었을 때, 화약냄새를 풍기며 긴 라이플을 들고 있던 늙은 집주인이 넋이 나간 듯 서있었고, 그의 아내가 남편을 붙잡고 부들부들 떨며 뒤에서 달려든 정웅의 모습을 보며 털썩 주저앉았다. 정웅의 눈앞으로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위로 뭔가 덜렁거리는 것이 보였다.
“괜찮으십니까?”
경호대상인 집주인 부부에게 다가서던 정웅은 넋이 나간 늙은 전 총리의 표정이 향한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뒤따라온 상훈이 거실의 불을 켰다. 2층 계단으로 올라가는 계단 쪽에 펄럭거리던 것은 커다란 천이었다. 천을 고정하고 있는 곳에 걸려 흔들거리던 것은 각시탈이었다. 그리고 그 천에는 힘찬 필체의 붓글씨 써 내려간 경고문 같은 것이 적혀 있었다.
너의 아버지의 아버지대부터 일제에 충성하며 백성들에게 갈취한 부는 다시 백성들의 몫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그 시답잖게 쌓인 허상과 같은 명예는 역사의 진상과 함께 전 언론사와 인터넷에 뿌려질 테니 평생을 참회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라. 활빈당
뉴스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어제는 황구연 전 총리의 집에 활빈당이라고 하는 도둑이 또 들었습니다. 집안의 모든 귀금속과 상당한 금액으로 알려진 외화 및 금괴가 모두 도난당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는데, 경찰에서는 피해금액이나 규모가 알려진 것보다 훨씬 클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한편, 같은 시간 언론사에 뿌려진 정체모를 활빈당 측이라고 밝힌 이들이 보내온 자료에 의하면 황구연 전 총리의 할아버지가 일제 강점기 경찰로 근무하며 밀고하여 죽음을 맞이했던 독립투사들에 대한 기록과 당시 밀고하여 특진하였다는 일본 경찰 측의 고문서 사본 등이 일체 정리되어 제보되었습니다. 이번 사건으로 활빈당이라고 자신들의 정체를 밝힌 이들에게서 전재산에 해당하는 돈을 도난당한 피해자들은 모두 4명으로 늘어났습니다. 경찰에서는 그들에 대한 단서를 전혀 잡지 못한 상황이며, 이번 사건도 이전 3건과 마찬가지로 인터넷에 언론사에 보내온 자료가 상세히 정리된 유령 사이트에 모두 공개되었고, 지난번 전 국회의원 강 모씨, 전직 외교부 장관 허모씨, 전직 대법관까지 그들이 가지고 있던 차명계좌는 물론이고 해외 계좌까지 모두 도난당했음을 그들의 자료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활빈당이라고 자신들을 지칭한 그들을 복수인 ‘그들’이라고 저희가 보도하는 이유는, 그들이 자신들의 존재를 표방할 때 ‘우리’라는 복수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경찰청장은 이번 사건을 공개 사건으로 돌리기로 하였다고 하며....
거실 전면을 차지한 거대한 화면의 뉴스 화면을 묵음으로 돌리며 회장이 핸드폰을 들었다.
“보고 있나?”
거두절미하고 그가 질문을 던졌다. 수화기 너머의 상대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 네. 일이 참 재미있게 돌아가고 있는 듯합니다.”
“짐작하고 있을 거라 생각하지만, 그들이다.”
“그런데 어떻게 그들이 움직이기 시작할 거라는 걸 알고.... 아아!”
“으음.”
“제가 또 까먹고 있었군요. 어떻게 아셨느냐는 질문 자체가 의미가 없는 분인걸.”
“즐기고 있을 때가 아니다. 저건 옳은 방식이 아냐.”
“뉴스에 나오진 않았지만, 강력부 쪽에 확인해본 결과, 거액의 기부금이 위안부 할머니들과 여러 단체 및 고아원 등에 동시에 입금되었다고 합니다. 입금자는....”
“각시탈이었겠지.”
“예. 알고 계셨군요, 거기까지.”
“우리 회사가 그냥 게임회사는 아니니까...”
“잊을뻔했군요. 우리나라 통신 기반 시설 시스템을 설계한 분이시라는 걸...”
“그들이 더 큰 문제를 일으키고 주목을 받기 전에 막아야 한다. 필요 없는 희생이나 오해를 살 필요가 없음을 그들에게 알려줘야 해.”
“글쎄요. 선생님 의도는 알겠습니다만, 상대는 전혀 거침이 없습니다. 게다가 어느 사건에서도 단 한 명도 사망자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 흔한 부상조차 없습니다. 찰과상 정도가 다라고 합니다.”
“대상과 맞닥뜨린 자들의 증언은?”
“없습니다. 다들 각시탈을 본 것까지는 기억하지만, 대상이 누구인지 상대가 몇 명인지 어떻게 한꺼번에 그렇게 털렸는지 그 어떤 정보도 없습니다. 마치 집단최면이라도 당한 사람들처럼 기억이 없는 것도 아니고, 대상에 대한 기억만 부분적으로 삭제된 듯하다고 합니다.”
“알겠다. 미안하지만, 이런 일로 이쪽에서 움직이기가 그러니 자네가 그들의 꼬리를 잡아줬으면 좋겠다만....”
“그냥 시키시면 되지, 뭘 그렇게 어렵게 말씀하십니까? 알겠습니다. 저 역시 각시탈이 어떤 얼굴인지 한 번 보고 싶던 참이었습니다.”
“그래. 또 연락하기로 하지.”
전화를 끊으며 회장의 얼굴이 여전히 어두운 채 여러 개의 채널이 동시에 나오는 거대한 화면을 응시했다. 그중의 한 화면에 최근 눈에 띄게 많이 나와 일반인들에게도 익숙한 예쁜 외모의 여자 정신과 의사가 그 사건에 대한 분석을 토론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회장은 시선을 화면에서 멀찍이 보이는 정원의 소나무로 옮겼다.
“그러니까 교수님 말씀은 이게 단순한 의적 로빈훗을 모방한 범죄 같은 것은 아니라는 뜻인가요?”
사회자가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다시 물었다.
“그렇습니다. 아마도 경찰에서도 그렇고 언론사에서도 그렇지만, 사건을 보도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단서를 그들이 밝히고 있지 않다는 것이 제 분석의 결과입니다. 그것이 경찰에서 숨긴 것인지, 아니면 언론사에서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동조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중요한 것은 그들이 남긴 메시지는 저것이 다가 아닐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