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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Mar 28. 2022

옳은 말을 하는 것은 쉽지만 실천하는 것은 쉽지 않다.

패배의 원인은 밖에 있지 않다, 내부가 썩은 것이다.

子見齊衰者·冕衣裳者與瞽者, 見之, 雖少必作, 過之必趨.
공자께서는 齊衰(상복)를 입은 자와 관을 쓰고 衣裳을 차려입은 자와 봉사(장님)를 보시면 그들이 비록 나이가 적더라도 반드시 일어나셨고, 그 곁을 지나실 때에는 반드시 종종걸음을 하셨다.

이 장에서는 공자의 평상시 행동거지를 묘사하는 것이 전부이다. 그런 행동들이 어떤 의미를 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물론’ 생략되어 있다. 때문에 그 행동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들을 의미하는지를 명확하게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 세 가지 경우에 해당하는 이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먼저 생소한 용어들이 있어 몇 가지 정리할 필요가 있겠다.


첫 번째 경우에 해당하는 이를 표현하며 나온 齊衰(자최)라는 것은, ‘단이나 깃을 꿰매지 않고 풀어헤친 상복’으로 3개월 이상 근친상을 복하는 슬픈 자들이 입는 것이다. 본래 禮에서는 가까운 사람의 상일수록 더 거친 베옷을 입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齊(자; 독음에 유의할 것)는 옷의 아랫자락을 의미하는 상복이고, 衰(최)는 감쇄(일정 비율로 줄임)한 것을 의미하는 상복이다. 그래서 위의 해석에서는 통틀어 이해하기 쉽도록 상복이라고 풀었다.

두 번째 경우에 해당하는 ‘衣裳을 차려입은 자’라는 의미는 衣는 상의에 해당하는 것을 의미하고 裳은 하의에 해당하는 것을 의미하는 복식인데, 윗도리와 아랫도리를 누가 안 입겠느냐 생각하겠으나 이 경우에는 정장으로 차려입은 것을 의미하며, 그 정장은 관복(대례복)이나 귀한 옷임을 의미하는 것으로 고위관직을 의미한다.


세 번째 경우는 눈이 보이지 않는 장님을 의미한 것이니 따로 풀어 해설할 것은 없을 듯하다. 그런 세 가지 경우에 해당하는 이들을 보면 종종걸음으로 지나셨다는 설명이다.


여기서 ‘종종걸음’이라고 풀어쓴 ‘趨(추)’라는 단어의 의미는 발의 보폭을 좁게 하여 빨리 걸어가는 모양을 나타낸 것이다. 빨리 걷는다고 표현하였지만, 이것은 상대에 대한 존경이자 존중의 의미로 사용되는 고어(古語)이다. 즉, 상대에게 자신이 여유 있게 걸어가는 모습 대신 종종걸음으로 빨리 지나가는 의도를 다분히 드러내 존중과 삼감을 드러낸 용어인 것이다.


그렇다면 그 세 가지 경우에 해당하는 이들을 보며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명확하게 정리할 필요가 있겠다. 이에 대해 범씨(范氏)는 다음과 같이 그 의도를 새기고 있다.


“성인의 마음은 상이 있는 이를 슬퍼하고, 관직이 있는 이를 높이고 불구자를 가엾게 여기신다. 그러므로 앉아 있다가 일어나고, 종종걸음 하신 것은 그렇게 하기를 기약하지 않아도 저절로 그렇게 되신 것이다.”


두 번째의 경우, 혹여 현대적인 관점에서 보면, 관직이 높은 자에게 굽신거리다는 오독이 있을까 싶긴 하지만, 공자가 고위 관직의 인물을 높였다고 한 것은 앞의 상을 당해 슬퍼하고 있는 이에 대한 마음을 보인 것이나, 뒤의 눈이 보이지 않은 사람에 대해 측은지심을 보인 것과 마찬가지로 그가 존중해야 하는 위치에 있기 때문이지, 그에게 잘 보이기 위함도 아니고 그가 그런 위치에 있다는 것을 존중해줌으로써 사회질서를 확립해야 한다는 의미로 그런 행동을 먼저 보인 것이다.


범 씨가 이 주석에서 강조한 것은,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는 그 당연한 행동의 이유가 아니라 그 행동이 의도적으로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함에 있다. 다시 말해, 상에 당한 사람을 보고 저 사람이 보이는 곳에서 슬퍼해야 한다거나 관직이 높아 보이는 복식을 하고 있는 사람에게 존중의 뜻을 표해야지 의도하여 그것을 준비한 행동으로 드러난 것이 아니라는 의미에 방점을 두었다는 뜻이다.


평상시 공자가 가르침을 주었던 행동에 대해 공자가 실생활에서 보여주기 위함이 아닌 자연스럽게 몸에 배어 가르침대로 실천에 옮겼던 모습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윤 씨(尹氏)는 다음과 같은 한 문장으로 이 장의 핵심을 정리한다.


“이것은 성인의 성실한 마음이 내외가 한결같은 것이다.”


공자는 상복 입은 이에게 애도를, 벼슬하는 이에게 존경을, 장애 있는 이에게 동정을 표시했다. 다산(정약용)은 그 세 가지를 모두 敬(경)의 태도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풀이했다. 喪服 입은 이를 공경하는 것은 나의 효도를 미루어 행하는 일, 公服 입은 이를 공경하는 것은 나의 충성심을 미루어 행하는 일, 앞 못 보는 이를 공경하는 것은 나의 진심을 미루어 행하는 일이라는 의미로 사용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윤 씨의 마지막 주석에서 말하는 誠心(성실한 마음)을 안팎 구별 없이 유지하는 것은 곧 ‘敬’이라는 개념으로 수렴된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이 뻔하고 간단한 내용을 굳이 이렇게까지 한 장으로 나누어 언급할 정도의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의아하다. 물론 당신과 같은 생각을 가진 수많은 현대 <논어> 해설서의 저자들은 이 장에 대한 가르침을 그저 공자의 평상시 행동쯤으로 해석하고 넘어가고 말았다.


심한 자들은 평상시 예절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초점을 맞춘 얼토당토 한 해설을 하고 있다. 아니다. 이 장의 핵심은 그 간단하고 기본적인 것을 자연스럽게 몸소 실천하는 것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내용이다. 그것이 뭐가 그렇게 어려운 것이냐고?



최순실의 딸이 말도 안 되는 과정을 통해 별 대단하지도 않은 SKY도 아닌 그 아래 수많은 대학보다도 수준이 떨어지는 E여대에 입학했고, 심지어 수업을 제대로 듣지 않고서도 성적까지도 교수들을 통해 조절했다며 당시 SNS로 집중포화를 날렸던 조국이라는 서울대 법대 교수가 있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그는 콩국수(공지영, 조국, 이외수)라는 별칭에 해당하며 바른말을 하는 SNS 스타로 군림했었다. 수많은 사람들은 그의 사이다 같은 발언에 열광했다. 무엇보다 그는 가난하고 가투(거리투쟁)에 나가 화염병을 던져댔던 운동권 출신도 아니고 대한민국 최고의 대학 최고의 학과 출신의 수재에, 외모도 칠하여 아줌마들이 좋아할 법한 스타일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대학 그 학과의 교수로 현직 재직 중인, 이른바 기득권 중의 기득권이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었기에 그 파급력은 강했다.


그래서 그는 SNS로 대중적인 인지도를 차근차근 쌓아갔고, 마침(?) 터진 국정농단 사태에 저명한 서울대 법대 교수로서는 조금 심하지 않느냐는 우려 섞인 걱정(?)을 들을 정도로 강하고 신랄한 비판을 쏟아냈다.


최순실의 딸은 어차피 그 허접한 대학, 엄마가 감방에 들어가고 모든 것이 세상에 까발려진 판에 당연히 대학을 그만두겠다고 몇 번이나 밝혔다. 하지만 언론과 세상은 그렇게 쉽게 그녀가 명예롭게(?) 도망치도록 놔두지 않았다.

여론재판이 이미 인민재판 수준의 죽창처럼 찔러 그 대학에서 그녀의 성적을 알아서 올려주고 알랑거렸던 교수가 목이 날아갔고, 그녀는 입학 취소 결정이 이루어졌다. 그렇게 조국 교수는 새 정부 출범의 공신(功臣)이 되어 이전 정부까지 복마전으로 불리던 민정수석 자리에 올라 상징적인 문재인 정부의 자유로운 분위기를 연출하며 승승장구하는 듯했다.


박근혜에게 국정농단의 칼잡이로 등장하여 그간의 인생 부진을 씻었던 뚱뚱한 검사는 중앙지검장을 거쳐 파격적으로 서열까지 모두 무너뜨리고 검찰총장직까지 올랐다. 그때까지도 조국 교수는 자신에게 불어닥칠 부메랑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는 그 검찰총장의 인사를 검증해야 하는 자리에 있었던 자였다. 하지만 당시 그 검찰총장이 문제가 있다며 욕설에 언성을 높여가던 빨간당의 공격에 대해 ‘선배님께서는 훌륭하게 그 임무를 처리할 것이라 믿는다’라고 실드를 쳐주며 함께 나아가자고 임명식 자리에 나온 김건희 씨에게 축하를 건넸다.


망진자(亡者)는 호야(胡也)라.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시황은 위의 점괘를 믿고 오랑캐가 자신의 왕국을 무너뜨릴 것을 우려하여 집착을 보이며 만리장성이라는 어마어마한 사업까지 벌였지만, 결국 그의 왕국을 무너뜨린 것은 호(胡)라는 이름을 가진 자신의 자식이었다.


모두가 알다시피 그렇게 법무부 장관으로 파격 발탁이 되어 가는가 싶더니 청문회 과정에서 자녀의 입시비리 문제로 얼룩져 장렬하게 무너지기 시작했다. <맹자(孟子)> ‘양혜왕(梁惠王) 하편’에 나오는 ‘출호이자반호이(出乎爾者反乎爾; 너에게서 나온 것은 너에게로 돌아온다.)’의 진리에 의거한 수순이었다.


억지 강행했던 한 달짜리 법무부 장관의 낙마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입시 부정을 진두지휘했던 서울대 영문과 출신의 그의 아내가 기소되어 징역형을 받는 일까지 벌어지며 집안이 풍비박산이 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억지로 집어넣은 딸이 겨우 낙제까지 하며 버텨 학업을 마친 의전원의 졸업을 앞둔 시점이었다. 그다음은 모두가 알다시피 그의 아내는 이미 실형이 확정되어 감옥에 있고, 그 역시 재판을 받고 있으며 열흘쯤 후에 그의 딸이 다녔던 학교 자체에서 입학 취소를 앞두고 있다.


이것을 감히 없는 일을 꾸며 멀쩡한 사람을 탄압한다고 할 수 있는가?


정권이 바뀌고서 이전 권력자들이 실권하여 반격을 받은 것도 아니고 정권의 한가운데 그가 민정수석 자리에 있을 때 벌어진 일이다. 그리고 사실관계에 대해서는 이미 밝혀졌고, 그것은 터져 나오기 시작한 이후 어떻게 덕지덕지 장판 테이프로 부칠 수 없는 지경이 되어버렸단 말이다.


무엇보다 그가 최순실의 딸에게 보였던 가혹할 정도의 도덕적 기준이 그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그는 할 말이 없어야 맞다. 그런데도 그는 연일 책을 내면서 그것과 자신이 추구하려던 것은 다르다고, 이렇게 매도되어서는 안 된다고 항변한다. 그게 과연 이전의 그가 질끔거리며 썼던 SNS만큼 설득력을 가질 수 있을까? 나는 잘 알지 못하겠다.


빨간당은 뭐 워낙 그런 사람들만을 모아 놓은 곳이니 더 말할 필요도 없겠으나, ‘망진자(亡者)는 호야(胡也)라.’로 장렬히 전사하여 현재 구치소에 들어가 있는 사람이 있다. 이전 정부에서 초대 민정수석(이라 쓰고 ‘복마전’이라 해석한다.)을 지낸 곽상도가 그 인물이다.

연일 문재인 정부가 출범하자마자 대통령 자녀의 저격수라며 아들과 딸, 심지어는 사위까지 들먹이며 작은 문제들까지 침소봉대(針小棒大)하며 어떻게 자식들의 일에 대해서 대통령 이전에 아버지로서 그 일을 모를 수가 있느냐며 침을 따발총처럼 쏘아대며 광화문에 나가서 떠드는 이들의 후방 지원군으로까지 불려졌다.


그런 그에게도 자업자득의 공식은 그의 국회의원 임기를 절반도 넘기기 전에 찾아왔다. 그나마도 허접하기 그지없는 스펙을 가진 아들이 부정축재를 한 회사에 들어가서 퇴직하면서 무려 50억(물론 세금을 빼 달라고 항변 아닌 항변을 하긴 하더라)이나 되는 돈을 받은 것이 문제가 되었다. 그는 그 후안무치한 얼굴을 버젓이 카메라 앞에 들이밀며 ‘아들이 받은 퇴직금을 아버지가 알 바가 있나? 그 회사가 줄만 하니까 준 것 아닌가?’라는 그때까지 대통령과 그의 자녀를 공격할 때와는 다른 유체이탈 화법을 구사했다.

물론 그 법비에 그 후배들이라고, 당장 증거인멸이 우려되는 범죄임에도 후배들은 아름아름 그의 구속영장을 한번 기각시키고 검찰에서 어떤 내용으로 기소할 것인지 정보를 모두 공유하고 난 뒤, 여론에 밀려 마지못해 구속시키는 짜고 치는 코미디를 연기했다.


조국 아들의 허위 인턴을 조작한 혐의로 1심에서 이미 징역형에 해당하는 집행유예를 받은 최강욱은 항소심 마지막 재판에서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며 ‘검찰에서 입시비리를 수사하려던 목적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의 본질적인 속성은 전직 검찰총장의 정치적 욕심에 의해 비롯된 기획 수사이자 검찰권 남용’이라며 궤변을 펼쳤다.

1심의 판결은 사실관계에 의거한 것이었다. 기소 때부터 문제의 핵심은 하나였다. ‘조국의 아들이 그의 변호사 사무실에서 인턴을 제대로 했는가 하지 않았는가?’ 현직 장군까지 날려버렸다는 전설의 법무관으로 사법고시도 패스하지 않고 10년 이상 근무를 인정받아 변호사로 수년간 경력을 쌓은 그라면 충분히 알만한 일이었다. 내가 내 눈을 의심했던 것은 검찰에서 제시한 그의 마지막 변명 아닌 변명이었다.


“이러한 사건으로 국회의원직을 상실하는 것은 가혹하다는 변론을 하고 있다.”


그 수사를 지휘했던 이제 대통령 자리에 오르려는 자나 검찰이 정의구현을 제대로 하는 자들이라고 나는 눈곱만치도 지지하거나 믿지 않는다. 그들은 그들의 이익을 위해 언제든 이전 사례는 무시해버리고 전횡을 할 자들이다. 하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강욱의 변명은 구차하기 그지없다. 그의 논리에 따르자면, 그들이 자신을 눈엣가시로 여기기 때문에 어떤 것이든 걸려고 기획수사를 했다는 것이고, 지인(그것도 서울대 교수 출신으로 민정수석에 법무부 장관까지 오른 자)의 아들에게 인턴 활동 확인서 정도 그냥 떼준 것이 뭐 이렇게까지 할 일인가?라는 주장이다.


이게 말인가? 독립운동을 하는 독립투사는 식당에 들어가서 밥 먹고 돈 좀 안 내고 나와도 되고, 친일파 순사 놈들을 죽이는 과정에서 다른 사람을 상해 입히거나 그의 차를 망가뜨려도 죄가 안된다는 논리와 무엇이 다른가?


왜 복잡한 정치 얘기를 또 하느냐고 한 마디 하고 싶은가? 정치 얘기가 아니다. 그들은 정치를 하기 전에 아이들의 아버지라는 가장 기본적인 역할을 맡고 있었다. 자기 자식이 술 먹고 운전하고 집행유예기간 중에 그런 짓을 벌여 판결을 앞두고 있는 대통령 당선인의 비서실장 얘기는 입만 아프니 하지도 말자.


바로 이 장에서 공자가 보여준 태도는 자신이 평상시에 한 말에 대해 얼마나 엄격한 수행과 수양을 통해 그것이 자연스럽게 행동으로까지 배어 나오는 것인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지극히 당연하고 아주 기본적인 것에서 수양은 시작된다.

하늘을 나는 경공술도, 천지를 가르는 비기도 정권 찌르기 하나, 머리 치기 한 동작에서 시작된단 말이다. 그 기본적인 것을 하지 못하고 다른 이들이 그것을 제대로 하지 못하였다고 비난하던 자들이라면 자신은 그러지 말아야 할 것 아닌가?


당신은 지퍼가 열린 채로 짝다리 짚고 상대방의 지퍼를 올리라며 얘기할 것인가? 올이  나간 스타킹의 허벅지를 들이밀며 올 나간 스타킹으로 남자들 시선 강탈할 셈이냐며 상대방에게 언성을 높일 셈인가? 그러고서도 그 말에 상대가 고개 숙여 반성하길 바라는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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