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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Mar 25. 2022

누구에게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때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나아가는지에 따라 인생을 가른다.

子曰: “鳳鳥不至, 河不出圖, 吾已矣夫!”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鳳凰새가 오지 않으며, 黃河에서 河圖가 나오지 않으니, 내 그만이다.(끝장이다.)”

이 장은 슬프다. 파국이고 절망이다. 말년의 공자가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고 좌절하고 스스로에게 절망하는 한 마디가 담겨 있다. 먼저 전고(典故)가 많아 제대로 된 배경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에 무슨 의미에서 이렇게 이야기한 것인지 주자의 해설을 통해 알아보기로 하자.


鳳은 신령한 새인데, 舜임금 때에 나타나서 춤을 추었고, 文王 때에는 岐山에서 울었다. 河圖는 黃河에서 나온 龍馬의 등에 그려진 그림인데 伏羲 때에 나왔으니, 모두 聖王의 상서로움이다. 已는 끝났다는 뜻이다.


고대 중국의 역사에서는 군주가 정치를 잘하여 세상이 안정되고 잘 돌아가는 것에 대해 하늘은 어떤 식으로든 상서로운 징조를 통해 그것을 세상에 알려주었다고 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지금 이 장에서 공자가 언급하는 두 가지이다.


첫 번째는 舜임금이 세상을 평안하게 잘 다스리자, 하늘에서 봉황이 나타나 춤을 추었다고 하는 전설과, 같은 봉황새가 文王 때에 岐山에서 울었다는 사실을 상서로운 징조로 해석하는 것이다.


참고로 鳳凰(봉황)은, 원문에서 鳳(봉)이라는 한 글자로 표현했지만, 후대에 암컷을 가리키는 凰(황) 자가 더해져 ‘봉황’이라 부르게 되었다. 봉황은 <山海經(산해경)>에는 ‘오색 빛이 나는 새는 세 가지 이름이 있다. 하나는 皇鳥(황조), 하나는 鸞鳥(란조)고, 하나는 鳳鳥(봉조)이다.’라고 하여 봉황의 특색을 오색 빛이 나는 새로 규정한다. 오색 빛은 푸른색, 노란색, 붉은색, 흰색, 검은색이다.

봉황의 모양에 대해서는 문헌마다 달라 규정하기가 어려운데, <說文解字(설문해자)>에는 봉의 앞부분은 기러기이고, 뒤는 기린, 뱀의 목에 물고기의 꼬리, 황새 이마에 원앙의 깃, 용의 무늬에 호랑이의 등, 제비 턱에 닭의 부리를 가졌으며, 역시 다섯 색깔이라는 설명을 잊지 않고 붙이고 있다.


두 번째는, 조금 어려울 수 있는 개념이기도 한 하도(河圖)에 관련된 고사인데, 이것 역시 하늘에서 징조의 개념으로 내놓은 것이라고 해석하여 세상이 안정되어 잘 다스려졌기 때문에 나오는 상서로운 징조로 해석된다. 이것은 주역의 기본개념인 팔괘로 이어지는데, 낙서(洛書)라는 것과 함께 이해해야 하는 개념으로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하도(河圖)는 위의 주자가 주석을 단 것처럼 중국 복희 씨(伏羲氏) 때인, 지금부터 약 5,500년 전 황하(黃河)에서 용마(龍馬)의 등에 나타난 희고 까만 55개의 점을 보고 태호(太昊) 복희(伏羲)가 정리한 그림이다. 이를 8괘로 나타낸 것이 복희 8 괘도이다.


아래 그림과 같은 것인데, 동서남북 중앙으로 일정한 수로 나뉘어 배열되어 있으며, 낙서(洛書)와 함께 주역(周易)의 기본 이치가 되었다.

​<주역(周易)> ‘계사전(繫辭傳) 상’ 11장에 ‘하늘이 신묘한 물건을 내자 성인이 법 받았으며, 천지가 변화하지 성인이 본받았으며, 하늘이 상을 드리워 길흉을 나타내자 성인이 형상하였으며, 河水에서 圖가 나오고 洛水에서 書가 나오자 성인이 법 받았다.’라는 내용이 보인다.


낙서(洛書)는 지금부터 약 4,200년 전 낙수(洛水 황하의 지류)에서 영구(靈龜 거북이)의 등에 나타난 희고 까만 45개의 점을 보고 하(夏) 나라를 건국한 우(禹) 임금이 그린 것이다. 후에 문왕이 이를 보고 8괘를 완성하였는데 이를 ‘문왕 8괘’라 한다.

그런데 공자는 자신의 시대에 이러한 상서로운 징조가 아무런 것도 없었음에 절규한다. 이것은 크게 두 가지 의미를 가진다. 일단 가장 단순하게 보자면, 공자의 시대가 제대로 다스려지지 않아 하늘의 상서로운 징조를 도저히 볼 수 없다는 것을 탄식하는 문면 그대로를 파악하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런 의미로 보자면 모순이 생긴다. 


왜냐하면 공자는 실제로 위정자의 위치에 올라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탄식은 그 시대가 잘 다스려지지 못하여 하늘의 인정을 받지 못한 것은 사실이나 그것을 강조하기 위한 공자의 절규로도 볼 수 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두 번째는 공자 자신이 세상을 바꾸고자 공부하였고, 그리 실천하고자 하였는데, 제대로 세상을 다스리는 입장조차 올라보지 못하였다는 탄식이 기본적으로 깔린 상태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제자를 양성하고 여러 방면에서 천하를 주유하며 여러 군주들을 만나 설파하였음에도 그것을 성공하지 못하여 세상을 바꾸지 못한 것에 대한 자괴감에서 오는 탄식이라는 해석이다. 


이것은 사실 앞의 첫 번째보다 훨씬 더 아린 부분이 있다. 왜냐하면 링 위에 올라 보지도 못한 채 패배를 인정하는 꼴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혹자는 공자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술활동이나 여러 활동을 보였음에도 그것만으로는 하늘을 감화시키지 못하여 하늘이 상서로운 조짐을 내어주지 않자 공자가 자신이 그간 이뤄놓은 업적조차 하늘에 내밀만한 것이 못된다고 여겨 탄식한 것이라는 해석도 있는데, 약간 무리한 감이 있긴 하지만, 이전에 공자가 보였던 자신의 대에 도통(道統)을 이은 사람이 자신밖에 없다는 자부심 어린 발언을 생각하면 아주 무시해버릴 의견도 아니다.


그래서 장자(張子)는 그와 같은 맥락에서 다음과 같이 이 장의 탄식이 갖는 의미를 정리한다.


“봉황새가 나오고, 하도(河圖)가 나옴은 文明의 상서(祥瑞)이니, 伏羲와 舜임금과 文王과 같은 성왕(聖王)의 상서(祥瑞)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공자의 문장이 그 끝남(행해지지 않음)을 알 수 있다.”


慶源輔는 원문에서 공자의 문장(文章)이라는 것을 단순한 문장 그대로의 의미가 아니라 ‘禮樂과 制度 따위’라고 해석하였는데, 그렇게 해석하는 것이 훨씬 더 문맥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판단하는 근거는 이와 유사한 일화들이 <예기(禮記)>에 다음과 같이 상세하게 언급되고 있기 때문이다.


<禮記> ‘檀弓上篇’에 보면 공자가 죽기 직전의 상황에 대한 다음과 같은 일화를 전하고 있다.


공자께서 어느 날, 일찍 일어나 손을 뒤로 돌리고 지팡이를 끌며 문에서 천천히 거닐며 노래를 부르셨다. “태산이 무너지누나. 대들보도 쓰러지고, 철인이 시드누나!” 노래를 마치고 들어가 문을 마주 앉았다. (자공(子貢)이 이를 듣고, 夫子께서 장차 병드시겠구나.라고 하였다.)


... 중략...


“내 어젯밤 두 기둥 사이에 앉아 궤향을 받는 꿈을 꾸었다. 대저 밝은 임금이 나오지 않으니, 천하에 누가 나를 높일 수 있겠는가? 나는 장차 죽을 것이다.” 그리고나서 공자께서는 7일을 병들어 누웠다가 몰하셨다.


또 <禮記> ‘大戴禮 誥志篇’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聖人이 나라를 다스릴 때는 용이 끊이지 않고 오고, 봉황은 내려와 날아가지 않고, 낙수(雒水)에서 글이 나오고, 하수(河水)에서 그림이 나온다.


앞서 두 가지 의미의 해석을 하긴 했지만, 정말로 공자는 칠순이 넘어 죽음을 앞에 두고 처절하게 절망하고 탄식하였을까? 그리고 정말로 그랬다면 그 탄식과 절망은 정확하게 어떤 의미에서 나온 것들이었을까? 평생을 배움으로 일관하고 가르침으로 제자들을 통해서라도 세상을 바꾸고자 실천에 일관하고 수양했던 공자에게 어떤 아쉬움이 그렇게 남았던 것일까?


이제까지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었던 스승 공자의 죽음을 앞둔 탄식을 <논어> 한가운데에서 만난다는 것은 <논어>를 공부하는 데 있어 아주 중요한 전환점을 의미한다. 왜 이 내용을 맨 마지막에 넣지 않았을까? 물론 <논어>가 공자의 삶을 연대기적으로 나누어 시기에 맞춰 가르침을 열거한 것은 아니지만, 왜 하필이면 여기였을까, 라는 점도 다시 한번 생각해본다.


공자가 자신의 시대에 상서로운 조짐이 나오길 바랬던 것은 자신이 했던 행동들에 대해 하늘이 알아봐 주지 않아서였을까? 그것은 가능성이 지극히 희박한 궤변이다. 왜냐하면 내내 공자가 세상에 도가 없어진 지 오래라고 지적하였는데 그러한 세상에 하늘이 상서로운 조짐을 내려주었을 리 만무하지 않은가? 


게다가 자신이 단 한 번이라도 작은 나라는 고사하고 마을조차도 다스려 완전한 형태의 이상적인 정치를 구현해보지 못했다. 앞서 비유처럼 링위에 올라보지도 못하였으니 그것만큼 억울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자신의 천명을 감지하고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느꼈다면 더더욱 탄식하였을 것은 이해가 가고도 남음이 있다. 

마땅한 후계자나 미래가 기대되는 위정자가 있는 것도 아니고, 자신의 도가 점차 사회를 변화시키기 시작한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그의 대에서 모든 것이 끊기는 것은 아닌가 하는 불안감을 충분히 느낄만하다. 일반인이라면 자신이 죽고 난 뒤의 세상이 무슨 상관이냐며 이해하지 못할 부분이겠으나 공자의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다. 


어떤 것이 옳은 것이고 어떤 것이 잘못되었는지를 빤히 알고 있고, 그것을 알게끔 가르쳐왔는데, 세상은 전혀 변하지 않고 그것을 아는 자들은 머리로만 알 뿐 자신들의 출세만을 위해 그 알량한 지식을 곡학아세(曲學阿世)용으로 사용하여 높은 지위에 올라 부와 명예를 누리려고만 눈이 시뻘겋다면 그런 상황을 두고서 눈을 감을 시간이 다가오는 것만큼 속상하고 마음이 다급 해지는 일도 없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공자는 반드시 자신이 아니어도 되었다. 자신이 아니어도 그것을 기대할 수 있는 변화의 기미만이라도 보였더라면, 사람들이 변화해나가고 사회가 조금씩 달라지고 그들의 선한 본성으로 돌아가려는 분위기만 형성이 되었더라도 저렇게 절망적으로 절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수천 년이 지난 현재는 어떠한가? 많이 다른가? 당신은 공자가 아니지만, 세상의 혼탁함은 더 요지경으로 빠져 어디가 출구인지조차 보이지 않는다. 전 세계는 자국의 이익을 위해 민족주의가 창궐하고 자국 이익주의가 더 심화되어 우익들이 설치는 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처럼 되어버린다. 


조그마한 자신의 이익을 위해 몇백 몇천이 죽어나가는 전쟁을 아무렇지도 않게 벌이고 한 달이 넘도록 피를 흘리는 일을 감수하고, 자신들의 존재감을 알리겠다고 연일 미사일을 하늘에 쏘아대고 있다.

바이러스가 창궐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고생하고 있는데, 자신이 바이러스에 감염된 것을 알리게 되면 먹고사는데 지장이 될까 봐 알리지 않고 돌아다니며 확진자를 늘리는 바람에 백신은 의미가 없어져버리고 말았다. 애써 자위하길, 백신을 접종한 이들의 사망률이 지극히 줄어들었다고는 하지만, 정작 사망자들의 대부분은 기저질환으로 인한 죽음을 맞이하며 그 시신에서 바이러스가 검출되면 이 바이러스로 인한 죽음으로 기록된다고 한다. 


그런데 정작 정부에서는 기저질환으로 인한 죽음으로 치고 직접적인 연관성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 가장 큰 이유는 보상금에 대한 문제 때문이란다.


돈 많은 선진국들이 3차례 4차례까지 추가접종을 한다고 설쳤지만, 결론적으로 선진국의 접종률이 높아졌어도 가난하여 백신 접종률이 한 자리에 머물고 있던 아프리카 가난한 나라에서 시작된 오미크론이라는 감염력이 높은 바이러스는 결국 세계를 휩쓸고 정점을 다 채우고 내려와야 한다는 공식 아닌 공식까지 만들었다.

국가가 자국의 이익을 위한 결정을 내리는 것은 탓할만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이 궁극적으로 자국의 이익이 되는지는 심히 의문이다. 당장 대한민국만 하더라도 이전 정권이 꼴 보기 싫다고, 혹은 자신의 대출이 조금 편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자기 형제가 그쪽 라인에 줄 섰다고 지원 사격하질 않나, 심지어 곧 이어질 6월 지방선거에 그쪽에 줄을 서야 한 자리 얻어낼 수 있을 거라며 줄 서겠다고 얼쩡거리는 것들이 똥파리처럼 꼬이기 시작한다고 한다.


곧 죽음을 앞두고 자신이 생각한 방향으로 1%도 움직이지 않는 이기적인 이들을 보면서 탄식했을 공자의 마음은, 결국 수천 년이 지난 지금에도 해결되지 않을 것에 대한 답답함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제까지의 그런 꼴이라면 이후 수천 년이 지나도 조금 더 더 나아질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하늘에서 내주는 상서로운 조짐은 고사하고 이러다가 폼페이 최후의 날처럼 지구 최후의 날이 오지 않을까를 걱정해야 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의 강한 공감이 공자의 가르침에 흘러들어 가는 것이 과연 우연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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