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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Mar 24. 2022

진정 아는 자의 태도는 어떠해야만 하는가?

조금 아는 것으로 전횡하는 무지몽매한 이들에게.

子曰: “吾有知乎哉? 無知也. 有鄙夫問於我, 空空如也, 我叩其兩端而竭焉.”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아는 것이 있는가? 나는 아는 것이 없다. 그러나 어떤 비루한 사람이 나에게 (무엇을) 묻되, 그가 아무리 무식하다 하더라도 나는 그 (묻는 내용의) 양쪽을 다 말해준다.”

이 장은 약간 뜬금없는 공자의 자기 고백과 같은 글이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설명하는 방식의 구조를 취하고 있는데, 그 내용이 자신이 아는 것이 없다고 겸손하게 말하는 것 같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무식한 이가 뭘 물어온다면 처음부터 끝까지 어느 하나 빠짐없이 촘촘하게 모두 상세하게 가르쳐준다는 자신의 방식을 설명한다.


이 장을 설명한 수많은 해설서들은 이 장을 막연하게 공자의 겸양으로 해석한다. 하지만, 그 애매모호한 해석은 의문의 여지를 남긴다. 자신이 아는 것이 없다고 다소 극단적인 표현을 한 사람이 어떻게 다른 사람을 가르칠 수 있으며, 그것도 처음부터 끝까지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빠짐없이 그렇게 박학함과 섬세함으로 가득 채운 가르침을 줄 수 있단 말인가?


그 두 가지를 한 문장에 붙여서 말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위화감을 주지 않는가? 적당히 해설서를 읽으며 그저 그러려니 넘어가는 이들은, 또 그런 식으로 해설서를 참고하며 해설서를 출판한 무지몽매한 자들은 이 장의 속뜻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였기에 그런 식의 헛발질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서도 자신들이 헛발질을 했는지도 모르는 결과를 낳은 것이다.


이 장을 읽었을 때, 한 문장 내에서 왜 이런 모순되는 발언이 나왔는지에 대해 고개를 갸웃하며 의문을 가질만한 상식을 가진 당신이라면 이제부터 그 모순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풀어볼 기본적인 자격은 갖췄다고 하겠다.


먼저 주자가 이 장에 대해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지 그 해설을 참고해보기로 하자.


공자께서 겸사로 말씀하시기를, 자신은 지식이 없지만, 단 남에게 알려줄 때에는 상대방이 비록 지극히 어리석더라도 감히 다 말해주지 않을 수 없다고 하신 것이다. 叩는 發動한다는 뜻이다. 兩端이란, 양쪽 머리라는 말과 같으니, 始와 終, 本과 末, 上과 下, 精과 粗를 다 말해주지 않음이 없음을 말한다.


주자의 해석에서도 앞에서 던진 의문을 해결해줄 적당한 실마리가 쉽게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신에게 지식이 없다고 하면서 어떻게 상대방에게 모든 것을 알려줄 수 있단 말인가?


심지어 주석의 절반 이상은 공자가 설명하는 방식, 즉 양단(兩端)이라고 언급했던 방식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상세하게 설명한다. 그런데 이 해설이라면 의문을 가중시킬 뿐이다. 왜냐하면 원문에도 나와 있지만, 주석에서 다시 한번 강조한 것처럼, 그냥 사람들이 묻거나 제자들에게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공자는 굳이 무식하여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집어서 강조까지 하였다.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어 머리가 텅텅 빈 것 같은 사람이라는 표현으로 원문에서 ‘空空如也’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는데, 이것을 정말로 머리가 텅텅 비어 무식하면서 논어 해설서를 낸 자들이 감히 참람되게도 그 주체를 공자라고 오역하는 용감 무식함을 보여주는 경우도 더러 보였다. 그들의 무식하면서도 출판까지 하며 견강부회할 수 있는 용기가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 나는 도무지 잘 알지 못하겠다.


왜냐하면, 그런 오역을 하게 되면, 지금 풀어보려는 의문을 아주 벼랑 끝에서 밀어버리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머리가 텅텅 비어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자처한 공자가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처음부터 끝까지, 이쪽 끝에서 저쪽 끝의 그 사안에 대한 모든 것을 촘촘하게 설명하고 가르칠 수 있단 말인가? 이해하려고 해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늪에 빠지고 말게 되는 것이다.


주자에게 아무런 정보를 얻지 못하였으니, 배우는 자들이 혼란에 빠질 것을 걱정해주며 주석을 달아 해설하는 정자(伊川)에게 도움을 청할 수밖에 없겠다.


“聖人이 사람들을 가르침에 있어서 나아가게 함이 이와 같되, 오히려 사람들이 높고 멀다고 생각하고 가까이하지 않을까 염려한다. 성인의 도는 반드시 내려서 스스로 낮추니, 이렇게 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가깝게 여기지 않는다. 賢人의 말씀은 끌어올려 스스로 높이니, 이렇게 하지 않으면 道가 높아지지 않는다. (이러한 점은) 孔子와 孟子에게서 관찰해보면 알 수 있다.”


정자는 이 장의 후반부, 즉 공자의 가르침이 갖는 특징에 대해서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특별히 위의 의문을 풀 수 있는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 듯하다. 정자까지 해설에서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하면, 우리가 지금 풀려는 의문에 대해 주자와 정자의 시대에는 공자의 위의 발언이 아무런 위화감이 없었다는 것으로 의심(?)해볼 수밖에 없다.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이상한 것이 당시에는 아무런 위화감을 주지 않는 자연스러운 화법이었다면, 그것이 어떻게 그렇게 이해될 수 있었는지에 대해 차분히 다시 살펴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주자의 해설에서는 그저 설명하는 것에서 그쳤었던 설명인데, 정자의 해설에서 살짝 결이 다른 설명방식이라는 것이 곱씹으며 걸려 나온다.


정자의 설명에 의하면, 성인이 공자와 현인인 맹자를 비교하고 있다. 聖人(공자)은 자신의 도를 낮추고 겸손하게 그 도를 자신이 일부러 끌어내리는데, 그렇게 하지 않으면 배우는 일반 수준의 이들이 가깝게 여기지 않기 때문이고, 賢人(맹자)은 일부러 자신이 위로 높이는데, 그 이유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도가 높아지지 않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이쯤에서 '아!'하고 구체적이지는 못하더라도 당신의 논리에 탁 하고 걸리는 것이 있어야만 한다. 이 장의 가르침이 ‘모순’이라고 과장된 표현을 사용하기는 하였지만, 공자가 스스로 자신을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라고까지 과장되게 낮춰 표현한 것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무식한 사람이 질문을 해오더라도 자신이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사례를 들어서 그가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는 방식을 취한다는 상반되어 보이는 논리를 하나의 결론으로 낸 것은 결국 공자가 자신의 道를 일부러 낮춘 것이고, 그러한 이유는 정말로 그것을 높여 설명하고 자부하게 되면 뭇사람들이 그것을 배우고 따르는 것을 요원(遙遠) 한 것이라 여겨 현실적으로 받아들여 노력하지 않게 될 것까지 걱정했기 때문이라는 설명에 다름 아니다.


다시 말해, 본문을 다시 곱씹기 전에 주자와 정자가 이해한 이 문장의 전체는 뒤에 방점이 있는 것처럼 설명하고 있지만, 전체적인 대의는 앞에서 말한 공자가 자신의 도를 낮추고 겸양한 태도에 본질이 있다는 것이다.


자꾸 이해하기 어려운데, 심층적은 설명을 하는 것으로 아침부터 당신의 머리를 아프게 하는 것 같다는 생각에 이쯤에서 그냥 결론을 말해주지 않으면 힘들어할 것이 눈에 빤히 보여 이 장에서 왜 모순된 듯한 표현이 나왔는지를 설명한다. 이 어법에서는 맨 앞과 마지막의 상세한 상황 설명이 빠져 있다.


오늘 글을 시작하면서 공자가 ‘뜬금없이’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는 방식으로 이 말을 시작했다고 언급했다. 그것이 힌트였다. 수차례 공부하는 과정에서 설명한 바 있지만, 공자는, 그리고 <논어>의 편집 방식에는 ‘뜬금없이’란 없다. 즉, 공자가 이 말을 왜 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정자가 해설하고 있지 않은가? 그것은 공자가 이 말을 왜 하게 되었는지를 자연스럽게 생각하고 이 글을 읽어나가면 이해하는데 무리가 없다는 것이다. 생략된 상황설명은 공자가 이런 말을 하게 된 배경에 있다.


대개, 어떤 경우에 ‘내가 아는 것이 없다.’라고 겸양을 강하게 드러내는가? 맞다. 다른 이들이 나에게 모르는 것이 없는 완전무결한 성인(聖人)이라고 칭송하고 거리감을 두며 경외감을 표시할 때, 그렇지 않다고 겸양을 드러내 보일 때 사용한다. 그렇다면 뒤에 이어진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설명은 굳이 왜 들어갔을까?

질문을 하고 의문을 가진 이에게 케이스 바이 케이스 식의 대답을 해주는 공자 본연의 교육 스타일이 그대로 드러났다고 이해하면 된다. 상대가 성인인 공자를 요원하여 도저히 따를 수 없는 사람으로 보고 배워도 따라갈 수 없는 것이라 포기할 것을 우려하여 제대로 아는 것이 없는 사람이지만, 자신도 그렇게 끊임없이 노력하는 사람이라고 말한 뒤, 왜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그런 오해를 갖게 되었는지를 그들의 눈높이에 맞춰 설명해준 것이다.


무슨 말인지 선뜻 이해가 안 가는가? 당신을 포함한 공자가 누구인지 이름만 알고 읽어보지도 않은 <논어>는 좋은 말인 것은 알겠는데, 도저히 따를 수 있는 가르침이 아니라고 손사래부터 저었던 사람들에게 공자가 왜 그들이 그런 오해를 했는지, 그 오해의 포인트를 구체적으로 짚어 설명한 것이란 말이다. 왜 뭇사람들이 자신(공자)을 모르는 것이 없는 무불통지(無不通知)의 성인(聖人)으로 보게 되었는지를 겸양스럽지만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설명한 것이다.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그저 한 가지를 물어보면 그 한 가지조차 주관적이고 적당하게 설명하는 수준의 사람들만 보다가 그 원리에서부터 사람들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가르치며 그 사람이 이해하기 가장 쉬운 방식으로 그 사람에게 맞춰서 설명해주는 성인 공자의 방식을 보고서 충분히 그렇게 경외감을 느낄 수도 있겠다는 공자의 겸양 아닌 겸양의 분석이 뒤에 붙은 것이다.


그런데, 그 문구는 단순히 왜 사람들이 공자를 저 높이에 있는 성인으로 거리감을 두고 오해(?)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하면서 공자 특유의 어법으로 가르치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꼬집고 있는 것이다.


머리가 텅텅 비었다는 표현을 할 정도로 무식한 사람이 물어오더라도, 아니, 그런 사람이 물어왔기 때문에야말로 처음부터 끝까지 그 질문에 대한 끝판왕이라고 할 정도의 상세한 설명을 해주는 것은 물론이고 그 사람이 도저히 오해하고 잘못 오독해서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삽질을 하지 않도록 그 양쪽 끝을 모두 설명해주는 방식이야말로 그들이 배움으로 한 발 들여놓고 싶어 하는 계기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권계이다.


이 이면의 일갈은, 그 당시는 물론이고 조금 안다고 하면서 자신의 알량한 지식을 자랑할 뿐, 무식하고 공부하지 않은 자들을 무시하기만 할 뿐 그들의 무지를 제대로 해결해줄 생각을 하지 않는 겉만 지식인인척 하는 이들에 대한 강한 경고이고 죽비에 다름 아니다.


그것이 주자가 주석을 통해 공자의 ‘양단(兩端)’이라는 단어를 상세하게 풀었던 행간의 의미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 모든 것을 주자와 정자처럼 상식적으로 이해한 尹氏(윤씨)는 내가 위에서 설명한 다음과 같이 이 장을 정리한다.


“성인의 말씀은 상하가 겸하여 다하니, 그 淺近한 데 나아가면 뭇사람들도 모두 참여하여 알 수 있고, 그 지극한 것을 다하면 성인도 이보다 더할 것이 없으니, 이를 일컬어 兩端이라 한다. 예컨대, 樊遲가 仁과 智를 물었을 때 (공자의 대답이) 兩端을 다하여 더 이상 남김이 없었던 것과 같은 것이다. 만약 形而上만 말하고 形而下를 빠뜨리며, 理만 말하고 事物을 빠뜨린다면 어찌 聖人의 말씀이겠는가?”


여기서 윤씨가 예를 든 번지(樊遲)의 경우는 우리가 앞에서 공부한 ‘옹야(雍也)편’의 20장에서 번지(樊遲)가 공자에게 知와 仁에 대해서 물었을 때 설명하는 방식과 뒤에 공부하게 될 ‘안연(顏淵)편’ 22장에서 번지(樊遲)가 다시 仁과 知에 대해 물었을 때, 대답하는 방식이 달랐던 것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22장이 아니라 20장이 맞다

똑같은 개념이라도 어떤 제자가 어떤 상황에서 물어왔는지, 그 제자의 상황에 대해 명확하게 이해하고, 무엇보다 그가 이해하는 수준에 맞춰 설명하는 것은 성인 공자만의 최고 레벨에서만 구현할 수 있는 특별한 교육 방식이다. 그런데 심지어 같은 인물이 같은 개념에 대해 물었는데도 그 상황과 당시 질문하는 이의 변화 정도에 맞춰 각기 달리 설명하는 것은 공자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행할 수 없는 방식인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질문한 이조차도 이해하지 못하고 놓친 부분까지 설명해주어 더 이상 남아 있는 의문이나 오해의 여지가 없게 하는 것이 공자의 가르침의 방식이고, 사람들이 그 방식을 보고 자신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는 성인이라고 오해했던가보다,라고 허허 웃으며 겸양의 모습을 보이지만, 실제로 무언가를 가르쳐주는 자는 반드시 이러해야만 한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강조한 발화인 것이다.


평생 공부하고 머리 큰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는 것을 업으로 삼는 내 입장에서 시대는 강산이 몇 번이나 바뀌어갈 정도가 되었지만, 아이들은 점차 하향 평준화되어 가고 있다. 세계 유수의 대학을 주유하였지만,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그것은 이미 전 세계적 추세로 자질면에서도 노력면에서도 심지어 이해도의 면에서도 아이들은 결코 똑똑해져 가기보다는 덜 노력하면서 더 많은 것을 얻고 싶어 하는 말 그대로 ‘아이’ 수준으로 퇴행하고 있는 듯하다는 한탄을 자아내게 만든다.

강의시간을 줄여주는 것을 좋아하고, 왜 다른 교수들이 하는 휴강을 단 한 번도 하지 않는지, 왜 그렇게 수업태도에 대해서 지적을 하는지, 왜 적당히 과제를 내고 시험만 보면 되지 본질적인 공부에 대해서 노력하라고 잔소리(?)를 하는지, 무슨 초능력자도 아니면서 학생 한 명 한 명의 이름과 인상착의는 고사하고 그가 가진 특징이나 전 시간에 어떤 발언을 했는지까지 기억하며 그것을 교정해주는지 감탄도 아닌 경악을 하면서도 그들은 진정으로 감사하며 변화할 생각을 하지 못한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은, 그 무지몽매한 학생들과 많이 다른가? 진정 배우고자 하는 자세로 생(生)의 하루하루를 경주하고 있는가? 스스로에게 묻고, 깨닫고, 변화하길 바라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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