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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Mar 23. 2022

열 재주 가진 이는 어째서 굶어 죽게 되는가?

하나를 익히며 어떻게 열을 알 수 있는가에 대한 해답.

大宰問於子貢曰: “夫子聖者與, 何其多能也?” 子貢曰: “固天縱之將聖, 又多能也.” 子聞之, 曰: “大宰知我乎! 吾少也賤, 故多能鄙事. 君子多乎哉? 不多也.”


​大宰(태재)가 子貢에게 물었다. “공자는 성인이신가? 어쩌면 그리도 능한 것이 많으신가?”子貢이 말하였다. “(선생님은) 진실로 하늘이 풀어놓으신 聖人이실 것이요, 또 능한 것이 많으시다.” 孔子께서 이를 들으시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大宰가 나를 아는구나. 내 젊었을 적에 미천했기 때문에 비천하고 비루한 일에 능함이 많으니, 군자는 능한 것이 많은가? 많지 않다.” 牢가 말하였다.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세상에 등용되지 못했기 때문에 (여러 가지) 재주를 익혔다.’고 하셨다.”

이 장도 상당히 논란의 여지를 여러 군데 품고 있는 어려운 장으로 손꼽힌다. 이번에는 글자의 해석이 논란이 되기보다는 그 상황에 대한 입장 차이와 등장인물 네 사람의 이야기의 행간에 담겨 있는 의중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에 대한 부분이 논란이 있는 부분이다.


먼저 등장인물의 면면부터 살펴보자. ​大宰(태재)라고 등장하는 인물은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관직명이다. 주자는 孔氏의 주석을 이용하여 이 부분을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大宰는 관직명이니, 吳나라 사람인지 혹은 宋나라 사람인지 알 수 없다.” 與는 의문사이다. 大宰는 능한 것이 많은 것을 聖이라 여긴 것이다.


子貢(자공)에게 했다는 그의 질문의 의도가 첫 번째 난관이다. 정말로 감탄하고 존경하는 마음에서 이야기를 꺼낸 것인지, 은미하게 비꼬면서 이야기한 것인지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생각보다 이 의문에 대한 해답을 풀기 위한 실마리는 가까이 있다.


즉, 그 질문에 대해 답하고 있는 子貢(자공)의 말에서 그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를 파악할 수 있다. 왜냐하면 子貢(자공)이 상대방의 말귀를 못 알아들을 정도로 스승을 마냥 칭송하는 어리석은 스타일의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러하다. 위의 원문대로 말하였다. 子貢(자공)은 그의 말을 있는 대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고수들의 대화가 그렇게 단순하게 해결된다면 굳이 내가 이 장이 해석하기 어려운 장이라 하지 않았을 것이다. 단순히 子貢(자공)이 스승을 추앙하며 답변했다고 하여 태재의 질문이 좋은 의도였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그가 비아냥 조로 이야기했을 때 더 고수들은 문면 그대로 받아들여 그를 누르는 방식으로 정색하고 응대하는 방식을 사용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子貢(자공)의 이 대답에 대해 주자는 다음과 같은 주석으로 해설하고 있다.


縱은 肆와 같으니, 양에 한계가 없는 것을 말한다. 將는 거의의 뜻이니, 겸손하여 감히 알지 못하는 것처럼 한 말씀이다. 聖은 통하지 않음이 없으니, 능함이 많은 바로 그 부수적인 일이다. 그러므로 ‘또’라고 말하여 겸한 것이다.


여기서 끝나면 애매모호할 뻔했는데, 이들의 대화 내용을 전해 들은 공자가 드디어 나선다. 그런데 태재의 말에 대한 공자의 말 역시 양면적인 해석이 모두 가능한 고수의 어법을 사용하고 있다. ‘그가 나를 알아보는구나!’라는 말은 정말로 그가 제대로 판단한 경우에도 사용하지만, 그가 비꼬는 것을 짓누르려 할 때도 역설적인 표현에 많이 사용하기 때문이다.


그 부분을 견지하면서 그 뒷부분에 공자가 태재가 던져놓은 화두에 공자가 정리하는 방식을 눈여겨보자. 젊어서 미천한 지위였기에 비천하고 비루한 일에 능함이 많지만, 궁극적으로 군자는 능한 것이 많은 존재가 아니라고 단언한다. 그리고 그렇게 끝내버린다. 공자의 이 한 마디에 대해 주자는 다음과 같이 해설하고 있다.


젊어서 미천했기 때문에 능한 것이 많으나 능한 것은 비천한 일일 뿐이요, 聖人이라서 통달하지 못함이 없는 것은 아니라고 말씀한 것이다. 또 능함이 많은 것은 사람들을 거느리는 것이 아니므로, 군자는 굳이 능함이 많지 않다고 다시 말씀하여 깨우치신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점이 포착된다. 공자의 설명을 통해, ‘능함이 많다는 것’을 부정적인 의미로 살짝 틀어서 명확하게 박제한 것이다. 즉, 태재가 좋은 의미에서 말했다고 하더라도 공자는 그것이 자랑할만한 것도 아니거니와 성인이라서 통달하지 못함이 없는 것은 아니라는 설명을 한다.


무엇보다 마지막에 이상형으로 삼는 군자를 언급하며 능함이 많은 것이 아니라고 한 것에서 그것은 부정적인 의미로 기울게 된다. 그렇다면 공자의 말을 여는 태재에 대해 자신을 많이 안다고 언급한 것은 표면적인 것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지만 내면은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지적과 가르침을 동시에 주고 있다. 이것 역시 긍정적인 의미와 부정적인 의미, 모두를 내포할 수 있기 때문에 역시 논란은 끊이지 않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스승의 말을 들은 牢(뢰)가 스승의 말을 반복한다. 그런데 이 부분은 의심해서 살펴볼 여지가 충분히 있다. 왜냐하면 스승이 한 말을 이미 적었음에도 다시 그의 입을 통해 똑같은 이야기를 반복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합리적인 의심이 드는 대목이기 때문이다.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조금 이해가 안 갈 것이다. 그런데 牢(뢰)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게 되면 그 합리적인 의심이 이해가 갈 것이다. 주자는 牢(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牢는 공자의 제자로 성은 琴이요, 字는 子開이며, 또 다른 字는 子張이다. 試는 등용되는 것이니, 세상에 등용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여러 가지 재주를 익혀 통달했음을 말씀한 것이다.


이 주석만 보면, 그저 공자의 수많은 제자 중에 한 명이고 스승의 이야기를 들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牢(뢰)는 일단 <사기(史記)> ‘중니제자열전(仲尼弟子列傳)’에는 수록되어 있지 않은 인물이다. 그런데 다른 기록을 살펴보면, 일본의 유학자 다자이(太宰純)가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그의 이름을 언급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대개 <논어>의 앞 10편은 모두 금장(琴張)의 기록으로 그 문장이 奇崛하면서도 간결하고, 뒤 10편은 모두 원사(原思)의 기록으로 그 문장이 典實하면서도 자상하다. 그러한 까닭은 문자들에게서 풍기는 것이 그들의 사람됨과 같기 때문이다.


다자이(太宰純)의 분석과 검증에 따르면, <논어>를 편집한 공자의 제자가 바로 금장(琴張), 원문에 등장하는 牢(뢰)와 원사(原思)가 앞뒤 10편씩을 편집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 장을 편집한 인물이므로 자신이 직접 들었던 내용이 기억나 이곳에 넣었다는 이야기이다. 이 설에 대해서는 상당한 근거가 있어 주자 역시 吳氏(오씨)의 주석을 인용하는 것으로 이 부분을 검증하고 있다.


“제자들이 夫子의 이 말씀을 기록할 때 子牢가 옛날에 (夫子로부터) 들은 말씀 가운데 이와 같은 것이 있다고 말하였는데, 그 뜻이 서로 비슷했으므로, (여기에서) 아울러 기록한 것이다.

다시 원문의 전체 이야기로 돌아와 보자. 과연 태재는 어떤 의도에서 그런 말을 한 것인가에 대한 논란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눠볼 수 있다. 그렇다면, 고민할 것 없이, 세 가지 견해를 모두 궁구(窮究)해보도록 하자.


첫 번째 관점에서 보면, 성인은 큰일에 힘쓰고 작은 일에는 신경 쓰지 않는 것이 정상일진대 공자는 여러 기예에 능하니 과연 성인이라고 할 수 있느냐고 비꼰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충분히 가능성 있는 지적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해석한다면, 공자의 구체적인 대답도 자신이 여러 가지 재능이 있는 것에 대한 것을 겸양한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말하고 그것이 젊어서 신분이 비천하였기에 불가피하게 익혔던 것들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자는 그것이 잡기(雜技)에 해당할 뿐 군자의 본모습이 아니며 무엇보다 성인(聖人)이기 때문에 그런 것들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선을 긋는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군자는 결코 이것저것 능한 사람이 아니라고 규정한다.


이것은 한 가지에 전일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이전의 그런 과정을 거쳐 이제 하나로 집약되었다는 자신의 실제 인생을 설명함과 동시에 배우는 자들이 어떤 식의 마음가짐과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를 일깨워준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두 번째 관점에서 보면, 태재는 정말로 다재다능한 사람이기에 공자가 성인일 수 있었다고 생각했다고 보는 것이다. 무엇을 배우든지 다른 사람보다 빠르게 익히고 가르쳐준 사람을 쉽게 뛰어넘는 능력을 보이는 사람이 있다. 태재의 입장에서는 이것저것 조금만 익힌 것 같은데 상당한 경지에 이른 공자가 그러한 능력들을 갖췄기 때문에 성인으로 불린다고 찬탄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 역시 공자의 대답에서 정리된다. 첫 번째 경우에서 설명한 것과 마찬가지로 공자는 그것이 성인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도 아니고 자신이 일부러 그렇게 이것저것 잡기에 능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불가피한 젊은 시절의 신분이 미천하였기에 그러한 기술들을 익히게 된 것 ‘뿐’이라고 명확하게 설명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공자가 자신의 젊은 비천했던 시절을 단순히 겸양이 아닌 사실로 커밍아웃하는 당당함을 보임과 동시에 결국 그러한 것들로 성인이 될 수 없음을 명확하게 정리해주고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 관점으로 보면, 태재의 입장에서는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어찌 그리 다재다능하신지 이유를 알지 못하겠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이어져 나온 자공(子貢)의 대답과도 자연스럽게 맞물린다. 큰 도를 깨우친 스승 공자의 입장에서는 모든 것이 하나의 도리로 수렴되어 모든 일에 있어 이치를 깨우쳐 다재다능할 수 있었다고 설명해준 것이 된다.


하지만, 이것 역시 공자의 마지막 가르침에서 걸러진다. 공자의 입장에서는 분명하게 군자는 결코 이것저것 다재다능한 모습을 갖추지 않는다고 단언하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정리해놓고 보니, 결국 다양한 해석에 대한 입장 차이가 있다고는 했지만, 공자의 마지막 갈무리 가르침에서는 모든 것이 하나로 귀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공자의 입장에서 보면, 군자라 함은 이것저것 모든 분야에 뛰어날 필요가 없이 하나의 도를 깨치고 그것을 전일(專一)한 인물이고 공부 역시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군자는 중대한 일을 알 뿐 특정 분야의 전문적인 세세한 다른 일들을 많이 알 필요도 없고 알지 않는 법이라고 단정 지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문면에서는 보지 못했던 형이상학적인 결론을 더듬게 된다. 바로 군자가 전일해야 할 그 하나의 것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단순히 학문에 전념하면 된다는 식의 막연한 가르침은 공자의 가르침을 행간까지 깨끗하게 비워내지 못한 자들이 만들어낸 허상에 불과할 뿐이고 실제로 조선의 유교는 통치 기반으로 활용하기 위해 곡학아세한 학문으로 변질되면서 그러한 식의 가르침을 많이 뿌려왔던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이제까지 공부해왔던 바와 같이 공자의 가르침은 그렇게 어둠 속에서 막연히 더듬어가며 존재를 파악하게 하는 공부가 아니다. 명확하고 뚜렷하며 그 나아갈 바를 정확하게 일러주는 방식이다.


그렇다면 군자가 전일(專一)해야 할 그 하나는 무엇일까?

앞서 살짝 언급했던 ‘이치’로 비견되었던 도(道)를 의미한다. 공자가 한 가지를 전일해야 한다고 한 것이 세부적인 다른 것들을 익히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공부를 통해 세상과 자연과 천지가 돌아가는 이치를 깨닫게 되면 결국 그 이치에 맞게 돌아가지 않는 것이 없음을 공자는 실제로 경험한 성인(聖人)이었다.


인터넷이 생겨나고 첨단 과학이 발달하면서 지식이 넘쳐나기 시작하고 그보다 훨씬 더 많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쓰레기 정보들이 섞이면서 작금의 공부는 옥석을 가릴 줄 아는 시각부터 그 정보가 무엇으로 연계되는지 네트워킹 방식으로 정보가 어디에 있는지 파악하는 능력을 요구하고 있다. 공자의 시대에 그만큼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사람의 한정된 능력으로 그 모든 것들을 배우고 익히고 전문가가 될 수 없었던 것은 비슷한 실정이었다.


여기서 앞서 말한 세상만사가 돌아가는 이치를 익힌다는 것은, 만물의 이치가 저마다 달라 보이지만 그 흐름이나 운용방식은 모두 같다는 것을 깨닫는 과정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다양한 공부와 수양을 통해 이론적으로나 지식적인 면에서는 물론이고 임상적인 면에서 그것을 변용하여 어디에고 적용할 수 있는 수준의 수양이 되어 있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공자가 말한 군자가 여러 가지 재주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은 지엽말단적인 것이 아닌 전체를 통괄하는 그 원리와 이치를 의미하는 도(道)를 가리키는 것에 다름 아닌 것이라는 게 나의 결론이다.

대통령이 군통수권자이긴 하지만, 모든 군사장비나 군 전략의 전문가는 아니다.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세계정세와 그들의 알력과 힘의 이동을 모두 파악할 수 있는 외교의 전문가도 아니다. 원자력에 대해서도 그러하고, 쓰레기 폐기 문제에 대해서도 그러하고, 수천수만 가지의 분야가 대통령의 최종결제를 필요로 한다.


대통령이 모든 것을 알 필요는 없다고 무식한 소리를 한 법비도 있기는 했지만, 정치를 하겠다고 하는 이들 중에서 법비가 차지하는 비율이 압도적으로 많은 것은 행정과 법률이라는 시스템의 전반적인 원리를 이해하는 것이 그 무리에 속해 녹아드는데 가장 필수적인 알량한 지식이라는 점에서 표면적으로 보면 앞서 설명한 원리에 해당한다고 할 수도 있다. 실제로 대한민국은 율사(律士)들의 나라가 된 지 오래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법을 전공한 따위로 군자는 고사하고 나라의 수장이 될 수 없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삼라만상이 돌아가는 이치이자 원리인 도(道)는 결코 알량한 사법시험에서 쌓은 지식 따위로는 접근조차 할 수 있는 것이 아닌, 수양과 실천된 삶으로 다져온 인생을 갖춰야만 알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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