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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Mar 22. 2022

당신이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인가?

무엇을 두려워해야 하는지 고민조차 해보지 못했던 이들에게.

子畏於匡, 曰: “文王旣沒, 文不在玆乎? 天之將喪斯文也, 後死者不得與於斯文也; 天之未喪斯文也, 匡人其如予何?”
孔子께서 匡땅에서 경계심을 품고 계셨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文王이 이미 별세하셨으니, 文이 이 몸에 있지 않겠는가? 하늘이 장차 이 文을 없애려 하셨다면 뒤에 죽는 사람(나 자신)이 이 文에 참여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하늘이 이 文을 없애려 하지 않으셨으니, 匡땅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하겠는가?”

이 장은 유명한 일화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이다. 공자가 匡땅에서 그곳 사람들에게 양호(陽虎)로 오인되어 포위당한 적이 있었는데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노나라의 장수 양호(陽虎)가 匡땅을 침공했을 때 그곳 사람들에게 포악한 짓을 많이 하여 그곳 사람들이 그에 대하여 매우 나쁜 감정을 가지고 있었는데 마침 그때 공자가 匡땅을 지나가게 되었고, 공교롭게도 양호(陽虎)가 침공할 때 그를 수행했던 공자의 제자 안각(顔刻)이 이번에는 공자를 모시고 다니면서 그때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곳 사람들에게 양호(陽虎)가 다시 온 것이라고 오해를 받게 된던 것이다. 다행히도 이 오해는 금방 풀렸다고 한다. 이 장에서 공자가 하는 말은 그 당시 공자가 제자들에게 한 말을 옮긴 것이다. 주자는 주석에서 이 이야기를 고증할만한 <사기(史記)>의 언급을 통해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설명한다.


<史記>에, “陽虎(양호)가 일찍이 匡땅에서 포악한 짓을 했었는데, 부자의 모습이 陽虎와 유사했으므로 匡땅 사람들이 (孔子를 陽虎로 오인하여) 포위했다.”라고 하였다.


사실 이 장의 핵심은 이 사건이 아니다. 자칫 잘못하면 억울하게 다른 사람으로 오인받아 남의 땅에서 개죽음을 당할 수도 있는 상황이다. 죽음을 앞에 둔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사람의 본성은 그대로 드러날 수밖에 없다. 자신이 억울한 개죽음을 당할 수도 있는 상황에서 스승 공자는 과연 어떤 언행을 보여주었는지가 이 장의 핵심이다.


공자 역시 타고난 무인도 아니고 생사가 오가는 전쟁터에서 삶을 보낸 경험이 있었던 것도 아닌 터라 다른 사람으로 오해받았다고는 하지만 살기를 가지고 자신들을 해하겠다고 조금씩 포위망을 접혀오는 원한을 뿜어대고 있는 사람들의 광기(狂氣) 앞에서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을 리 없다. 


그런데, 역시나 孔子의 반응은 남달랐다. 갑자기 자신이 하늘이 지정하신 도통(道通)을 이은 사람이니 운명이 여기서 이렇게 죽을 운명이 아니라는 말을 꺼낸 것이다. 이러한 공자의 말을 통해, 우리는 두 가지를 이 장을 통해 파악할 수 있다. 

한 가지는, 공자가 자신의 주어진 운명과 책무에 대한 자부심을 정말로 뼛속 깊이 가지고 있었기에 저렇게 당당히 말할 수 있었다는 것이고, 또 다른 한 가지는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도 제자들의 앞에서 그 당당함으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기개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앞서 설명에서는 간략하게 오해가 금방 풀렸다고 했지만, 오해가 풀리게 된 극적인 상황은 그렇지만도 않았다.


당시 공자를 수행하던 자로(子路)는 이런 억울한 누명을 쓰고 있다는 분노에 바로 주먹을 움켜쥐고 그들과 일전을 겨루겠다고 자리를 박차고 나갈 참이었다.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공자는 이 장에서와 같은 가르침과 같은 이야기로 제자들의 동요를 진정시킨다. 하늘에게 선택을 받은 자신이 여기 있으니 결코 어떤 일도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제자들을 안정시킨 것이다. 


그 자리에서 개죽음을 당할지도 모른다고 겁에 떨고 있던 제자들을 위로하듯 공자가 말을 마치고서는 바로 자리를 박차고 나가 일전을 벌이려는 자로(子路)에게 노래를 부르라고 명한다. 마지못한 자로(子路)가 그 자리에서 노래를 시작하고, 공자가 따라 부르자 나머지 제자들도 합창을 하며 두려움은 화합의 분위기로 바뀌어간다. 


노랫소리가 크게 울려 퍼지고 나서야 匡땅땅 사람들은 자신들이 사람을 잘못 보았다는 오해를 풀고 정중히 사과하고 포위를 풀게 된다. 물론 이것도 수많은 당시 상황에 대한 일설이고 다른 방법으로 풀려났다고 언급하는 기록들이 있기는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위기를 벗어나 오해를 풀었다는 것이다.


이 장에서 공자가 한 이 기가 막힌 자신에 대한 넘치는 자부심은 그저 허풍이나 자만에서 나온 것이 아니기에 그 무게가 크다. 왜냐하면 앞서 설명했던 것처럼 죽음을 앞둔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서툰 오만을 부리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자는 이 말을 다음과 같이 해설하고 있다.


도가 드러난 것을 文이라 하니, 禮樂과 制度를 말한다. 道라고 말하지 않고, 文이라고 한 것은 또한 (공자의) 겸사이다. 玆는 이것이니, 공자께서 자신을 일컬으신 것이다.


이 주석은 상당히 큰 의미를 갖는다. 왜냐하면 다른 주석에 의하면 공자가 문(文)이라고 언급한 것을 도(道)로 환치하지 않고 그대로 새기기 때문이다. 그 내용을 먼저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공자는 ‘易’의 도에 밝아 장차 <주역(周易)>의 十翼傳(<周易>의 彖傳 上下, 繫辭傳 上下, 文言傳, 說卦傳, 雜卦傳, 序卦傳)을 지어 후세에 전하려 했으나, 그 당시 미처 완성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하늘이 이 글을 없애려 한다면 나는 참여하여 이 글에 힘쓸 수 없지만, 하늘이 이 글을 없애려고 하지 않는다면 나는 오늘에 죽음을 당하지 아니할 것이니, 광 땅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하겠는가?”라고 한 것이다.


이는 실증적으로 자신이 하늘의 책무를 받아 그 뜻을 세상에 온전히 전해야 하는 임무를 완수해야 하는데 아직 그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였으니 하늘이 자신의 명을 거두어갈 일이 생길 일이 없다고 일종의 자부이고 자기 위로였던 것이다. 물론 이렇게 보는 견해도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공자라고 왜 죽음이 무섭지 않았겠는가? 하지만, 수많은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을 인솔하는 입장에서 그는 제자들의 동요를 진정시켜야 했고, 흥분해서 사고를 칠 수 있는 자로(子路)를 만류했어야만 했다. 그렇다면, 그들의 눈높이에 맞춰 그들이 동요하지 않고 믿고 마음을 놓을 수 있는 이야기를 해서 믿음을 주어야만 했을 것이다. 그들에게 스승 공자의 말씀은 절대적일 수밖에 없는 성인의 말씀이 아니던가?

실제로 주자가 직접 주석에 편집해서 넣은 馬氏의 주석을 살펴보면 그 의미를 그대로 살려 이해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文王이 이미 별세했기 때문에 공자께서 자신을 일러 ‘뒤에 죽는 사람’이라 한 것이다. ‘하늘이 만약 이 文을 없애려고 하셨다면 반드시 나로 하여금 이 文에 참여하지 못하게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나는 이미 이 文에 참여하였으니, 그렇다면 이는 하늘이 아직 이 文을 없애려고 하지 않으신 것이다. 하늘이 이미 이 文을 없애려고 하지 않으시니, 匡땅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하겠는가’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는 반드시 하늘의 뜻을 어기고 자신을 해칠 수 없음을 말씀한 것이다.”


그런데 주자가 위의 주석에서 이것을 단순한 文이 아닌 道로 이해하고 공자의 의도가 가진 행간의 본의(本意)라고 당당하게 말하며 文이라고 한 것은 공자의 겸사(謙辭)라고까지 한 것은 그만큼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앞에서 한 글자 한 글자 모두 풀지 않았지만, 이 장은 두 글자에 대한 의미 때문에 이 장의 내용 하나만으로도 논문들이 쏟아져 나왔던 의미심장한(?) 장이다. 문제의 두 글자가 무엇인지 중급자 정도의 수준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장을 해석한 어떤 한국의 <논어> 해설서에서도 이 부분에 대해 꼼꼼하게 읽어낸 책이 단 한 권도 없다. 이유? 어려우니까! 그리고 그 미묘한 차이가 주는 큰 격차를 이해하지 못하는 수준의 이들이 훨씬 더 많기 때문에 그렇다. 자세한 설명까지는 지면의 한계와 학도들의 두통을 고려하여 간략하게만 서술하기로 한다.


첫 번째 문제가 되는 글자는 지금 막 우리가 눈여겨보고 있던 주자의 주석에서 언급한 ‘이것 자(玆)’라는 글자이다. 주자는 이것을 공자라고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단순히 문(文)이 아니라 도(道)라고 환치하고 그 의견에 대해 확신할 수 있었던 것이다. 본문에서 내가 해석한 대로 다시 그 부분을 풀어보자면, ‘文이 이 몸에 있지 않겠는가?’가 하는 것이다. 

앞서 내가 해설할 때 도통(道統)의 맥이 자신에게 이어진다고 보았다고 설명한 것이 바로 문(文)이 아니라 도(道)로 환치한 것이다. 굳이 현대적인 관점에서 이렇게 해석하는 객관적인 근거를 제시하자면 크게 두 가지 정도가 있을 것이다. 하나는, 뜬금없이 문(文)을 언급하면서 그 맥을 이어온 바로 이전의 인물로 언급된 문왕(文王)이다. 문왕은 문(文)이 뛰어난 문인(文人)이 아니다. 


앞서 누차 공부한 바와 같이 문왕(文王)은 하늘의 도를 이어받아 정치를 잘한 것으로 정치의 도를 실천한 인물로 공자에게 극찬을 받은 인물이다. 그런데 굳이 문장(文章)을 말할 아무런 맥락이 없다는 것이다. 두 번째 근거는, 그것을 받은 인물을 자신이라 지칭한 것이다. 앞의 말처럼 그 대명사가 무엇을 혹은 누구를 가리키는가에 따라 의미는 상당히 달라질 수 있는 문장이다. 


그런데 주자가 해설한 대로 공자라고 본다면, 자신이 문왕의 의지를 그대로 이어받은 적통(嫡統) 계승자임을 자처한 것이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공자는 문왕과 같은 위정자의 위치에 있지 못했다. 위정자는 고사하고 위정자들에게 선택받지도 못하여 천하를 주유한 인물이었다. 그런데 이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죽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세상에는 문왕의 도를 실천해 보이는 위정자가 한 명도 없다. 그렇다면 문왕의 도를 이어받은 적통 계승자가 죽게 된다면 세상의 도는 그 맥이 끊겨버리게 된다. 그렇다면 그것은 당연히 앞서 설명한 것처럼 문장(文章)이라고는 도저히 볼 수 없게 되어버리고 만다. 주자가 그렇게 자신이 있었던 것은 다른 것(문장)으로 해석될 여지조차 없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이 장의 가장 앞에 나오는 ‘두려워하다’는 의미의 ‘외(畏)’자가 무엇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인지 잠시 생각해보기로 하자. 당신이 이 장을 읽을 때 느꼈던 그 글자의 상황적인 의미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시중에 나온 <논어> 해설서의 100%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억울한 개죽음을 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혹은 ‘공포’로 읽었을 것이다. 


자아, 조금 심호흡을 하고 이제까지 중간에 읽어왔던 것을 종합하여 다시 한번 원문을 읽어보라. 공자가 그 마을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두려워했던’ 것이 죽음에 대한 공포였는지를 말이다.


맞다. 공자가 우려했던 것은 자신이 이런 곳에서 개죽음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일반인 차원의 두려움이 아니었다. 자신이 미처 마치지 못했던 <주역(周易)>을 비롯하여 자신이 미처 끝내지 못한 하늘의 뜻을 세상에 알리는 것들에 대한 것이 미진한 것을 걱정하는 것이다. 세상에 어떤 일반인들이 자신이 이제 죽을지도 모르는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자신이 미처 끝내지 못한 공부에 대해서 걱정하고 두려워하고 앉아 있단 말인가? 


그래서 공자를 성인(聖人)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종교를 대표하는 인물도 아닌데 왜 4대 성인에 공자가 들어가는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이 장의 행간은 아주 쉽게 왜 공자가 성인의 경지에 들어가는지에 대해서 명료하게 설명해주고 있다.


당신이라면 그럴 수 있겠는가? 당신의 사명이 하늘의 올곧은 뜻을 세상에 전하는 것이라 여기고 그것을 완수하지 못하고 죽을까 봐 두려워하겠는가? 오늘의 공부를 시작하면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죽음을 앞에 둔 인간이라는 존재는 가식을 모두 벗어버리고 본연의 민낯을 보이게 된다. 죽음은 고사하고 아주 얄팍하게 이익만 앞에 두고서도 알량한 그 민낯을 드러내는 것인 인간이라는 동물이다. 

그런 웃픈 현실 속에서 이 장에서 보이는 공자의 모습과 공자가 진정으로 두려워한 것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글자의 의미를 조금 더 깊이 있게 생각해보는 것만으로도 이제까지 삶과 죽음에 대한 당신의 태도와 마음가짐을 다시 한번 바로잡게 한다.


조금 엉뚱한 이야기일 수 있겠지만, 자살을 선택하는 이들의 유서를 심리학에 의거하여 분석하게 되면, 일종의 패턴이라는 것을 보인다. 범죄심리학에서도 그것이 타살인지 자살인지를 분석할 때 그 기준이 되는 증거물로 유서가 과연 그 사람이 죽기 전에 직접 적은 것인지 아닌지를 분석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그 경우 유서가 가지고 있는 패턴이 무엇인지 아는가? 대부분 일반인들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때 그전에 유서는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이고 부탁이다. 그런데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사람이 무엇을 그렇게 부탁할 것이 있겠는가? 


실제 그들의 유서가 갖는 패턴 중에서도 가장 큰 특징은 두고 가는 사람들에 대한 미안함이다. 그래서 ‘미안하다. 죄송하다.’라는 표현이 가장 많이 등장한다. 그것은 어떤 이유로든 자신이 이제 세상에 없음으로 인해 해줄 수 없는 것에 대한 사죄에 다름 아니다.

이 장에서 공자가 두려워했던 것이 자신의 안타까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자신이 완수하지 못한 책무에 대해 이대로 죽게 되면 그것을 완수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일반 수준의 두려움이라는 범주를 뛰어넘는 것이다. 이 장을 읽으면서 늘 생각한다. 그런 두려움을 당당하게 가질 수 있을 정도가 되려면 어느 정도 공부하고 도대체 어느 정도까지 수양을 거쳐야 가능할 수 있는 것인지를.


평생을 배워도 세상의 모든 지식을 머리에 담고 갈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많이 배우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대한 기준과 배우는 원리를 터득하고 그것을 내 몸에 배이게 하고 그것으로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데 사용하는 것이다. 그중에 가장 으뜸은 내 눈에 보이는 것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가르침을 통해 더 많은 이들의 눈을 트이게 하는 것이다.


그러한 마음가짐이 당신의 오늘 아침이 무 젖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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