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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Mar 21. 2022

나를 버리고 나서야 진정한 나를 만나게 된다.

나를 버리고 도대체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

子絶四: 毋意, 毋必, 毋固, 毋我.
공자께서는 네 가지의 마음이 전혀 없으셨으니, 사사로운 뜻이 없으셨으며, 기필하는 마음이 없으셨으며, 집착하는 마음이 없으셨으며, 이기심이 없으셨다.

이번 장은 제법 유명한 구절이다. 공자께서 네 가지를 끊었다고 하는 것으로 모두 똑같은 구조이긴 한데, 어떤 네 가지를 끊었는지에 대해서는 해석이 이상한 해설서들이 많아 일반인들이 잘못 인용하거나 엉뚱한 소리를 하는 경우도 적지 않은 구절이다.


먼저 네 가지 개념에 대해서 주자는 어떻게 풀고 있는지 주석을 살펴보기로 하자.


絶은 전혀 없는 것이다. 毋는 <史記>에는 無로 되어 있으니, 이것이 옳다. 意는 사사로운 뜻이요, 必은 기필하는 것이요, 固는 執滯하는 것이요, 我는 사사로운 자기를 뜻한다. 이 네 가지는 서로 시작과 끝이 되니, 즉, (어떤 일이) 사사로운 뜻에서 시작되어 기필하는 마음에로 이행되고, 이것이 고집하는 데 머물러 이기적인 자아로 완성된다. 意와 必은 항상 일이 생기기 전에 있고, 固와 我는 항상 일이 생긴 뒤에 있다. (그러나) 我가 다시 私意를 내게 되면 物慾에 이끌려 끊임없이 반복 순환하게 된다.


첫 번째, 사사로운 뜻이 없었다. 이것을 억측하지 말라고 해석까지 있다. ‘뜻 의(意)’라는 글자를 어떻게 ‘억측하다’까지 끌고 갔는지는 모르겠으나, 최소한 가장 기본이 된다고 하는 주자의 주석이라도 조금 꼼꼼하게 읽었으면 하는 작은 바람이 있다. 


그들의 해석을 살펴보면, 사람이나 일을 실제로 경험하기도 전에 미리 억측한다고 의역을 한 것인데, 억측을 한다고 의역을 한 것이 어느 정도 이해한 것이라고 받아주더라도 이 첫 번째 항목에 대한 것은 왜 그런 행동을 하는가에 대한 원인을 바탕에 둔 공자만의 말하기 방식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간단하고 애매모호한 말 같지만 ‘사사롭다’로 번역한 용어의 의미는, 주자의 해설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결국 가장 뒤의 네 번째 나(我)로 이어짐과 동시에 수렴되는 방식의 뫼비우스 띠 논리의 공자식 논법에 하나이다.


두 번째, 必은 ‘기필한다’로 새겼다. 굳이 현대어로 풀어본다면 ‘반드시 그래야 한다는 것으로 우기는 것’ 정도가 될 것이다. 이것을 또 어떤 해설서들은 ‘독단’으로 풀어 해석한다. 얼핏 보기에 비슷해 보이는가? 그게 바로 ‘사이비(似而非; 비슷해 보이지만 아닌 것)’라는 것이다.

 

‘독단’이란, 사전적으로 ‘남과 상의하지 않고 혼자서 판단하거나 결정하는 것’ 혹은 ‘근본적인 연구를 하지 않고 주관적인 편견으로 판단하는 것’을 의미한다. 기필한다는 것 역시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그런 행동을 하는가에 대한 것이 초점이다. 


이 두 번째를 읽게 되면 이제 이 네 가지가 각기 다른 것이 아니라 수순에 따라 유기적인 연관을 가지고 움직이는 일련의 과정임을 눈치채야만 한다. 첫 번째를 억측하다, 따위로 의역해버리면 네 가지는 각기 다른 안 좋은 행동 정도로 읽힐 뿐이지만, 사사롭다, 혹은 사사로이 마음먹고 그 일을 시작하는 것으로 해석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두 번째에 그렇게 사사로운 마음을 먹고 시작한 일을 반드시 그렇게 되게 만들어야 한다는 아집으로 세 번째에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세 번째는 현대어가 있기 때문인지 ‘고집한다’라는 해석으로 새긴다. 문제는 앞서 두 가지의 과정을 거쳐오면서 그것을 왜 고집하는지에 대해 곱씹어 생각하며 생각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 네 번째의 해석을 자기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 것이라고 새기는 해석부터 ‘자기가 아니면 안 된다고 여기다’까지 중구난방 되는대로 사이비 해설이 판을 친다. 아니란 말이다. 네 가지가 별개의 것이라고 따로 해석하려 하니 뭔가 잘못된 행동으로 치부하려는 현대어적 해설 따위가 이 장의 가르침이었다면, 그 알량한 해석으로 굳이 네 가지 문구를 같은 문법구조를 두고 왜 나(我)를 가장 마지막에 두었는지를 주자의 해설만이라도 보고 생각을 좀 하고 해석하고 새기란 말이다.


주자는 이 네 가지의 문법적 구조가 같다는 것으로 초심자조차도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남겨준 공자의 배려에 대해 당연히 인지하고 위와 같이 해설을 달았다. ‘이 네 가지가 서로 시작과 끝이 된다.’라는 말로 주자는 배우는 자들에게 공자식 뫼비우스 띠 논법을 환기시켜준다. 그리고 꼼꼼하게 한 글자씩 다 의미를 풀어준다. 


사사로운 뜻(意)을 가지고 어떤 행동을 벌이게 되면 그 일을 반드시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이루고자 하는 마음(期必)으로 밀어붙이게 된다. 그것이 사리에 맞는지 맞지 않은지 환경을 보거나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만’을 고집하게 된다. 그래서 결국 사사로운 마음, 목적, 자신의 사욕이 바라는 바는 자신만을 위한 것으로 전락하게 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악순환은 그렇게 이기적인 자아를 만드는 것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그 이기적인 사욕에 사로잡힌 자아는 자신의 사사로운 마음으로 모든 일을 도모하고자 한다. 이것은 다시 처음으로 꼬리가 맞물린다. 그렇게 어느 것이 먼저랄 것이 없는 뫼비우스 띠의 악순환인 반복된다는 것을 공자는 경계하고 있다.


어느 무지몽매한 자는 ‘무아(毋我)’를 멋있게 ‘자기를 내세우지 말라’는 별개의 표어로까지 쓰더라. 이젠 그런 자들을 말리기보다는 그런 한자조차 제대로 새기지 못하는 자들의 그 같잖은 혹세무민(惑世誣民)이 선동되지 말고 깔끔하게 불소시개로 그 종이 덩어리를 던져버릴 안목 정도는 갖춘 초심자이길 기대한다.


여기서 아직 언급하지 않았던 ‘무(毋)’라는 금지사에 대한 의미를 문자 그대로 새기는 우를 범할까 싶어 정자(伊川)가 그 금지사조차도 공자는 허투루 사용하지 않았음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여기의 毋자는 (의도적으로) 금지하는 말이 아니다. 성인은 이 네 가지 마음이 전혀 없으시니, 어찌 (의도적으로)금지할 필요가 있겠는가?”


이것을 공자에 대한, 혹은 유학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공자에 대한 무조건적 찬양이라는 식으로 치부하는 이들이 있는데, 대개 그런 자들은 원시 유학이 뭔지도 모르고 고문을 해석할 줄 모르면서 그저 조선시대의 삐뚤어진 ‘유교’로만 유학을 받아들여 그런 바보 같은 소리를 한 것이다. 


사실 이 주석은 ‘毋’라는 글자를 왜 공자가 사용했는지에 대해 중급 이상의 배우는 자들에게 생각할 화두를 던져준 것이다. 왜냐하면, 이 장의 맨 앞에 ‘絶’이라는 단어가 있다는 것에 주목하라고 다시 한번 멍하니 뒤의 네 가지 해석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학도들의 머리를 목탁처럼 두들겨주고 있는 것이다.


공자께서 이런 것이 ‘일절 없으셨다’라고 말하고 굳이 그것을 ‘하지 말라’라고 표현할 리가 없다는 기본적인 문법구조를 깨닫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毋’라는 금지사를 쓴 것인가를 생각해내라는 것이다. 앞서 주자는 이 부분에 대한 주석을 통해 <사기(史記)>에서 ‘무(無)’로 쓴 것이 맞다고 하였다. 즉, 주자 역시 이 부분이 이상하다고 여겨 고증하고 뜻을 다시 새긴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어>에서는 금지사로 한 것은, 두 가지 의미를 모두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스승 공자께서는 당연히 일절 없으셨던 부분이 맞고, 제자들에게는 그렇게 하라고 하셨던 것이니 편집하는 제자들 입장에서는 스승님의 말씀을 담고자 그런 방식이 튀어나와버린 것이 아닌가, 하고 나는 조심스럽게 추측한다.


그래서 이례적으로 이 장에 대해서는 두 사람의 의견을 주자는 더 넣어서 그 행간의 의미를 더 확고하게 설명하려고 한다. 먼저 장자(張子)는 이 장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위의 네 가지 중에 하나라도 (마음속에) 있으면 이는 천지(天地)와 서로 같지 못한 것이다.”


개별적인 것이 아니기에 그 연결고리가 끊어진 뫼비우스의 띠는 연결될 수가 없다. 말 그대로 끊어진다. 때문에 그 네 가지 중에서 한 가지만이라도 있다면 그것은 자연의 순리를 따르는 모습일 수 없다고 한 것이다. 

이것은 반대로 이 네 가지의 연결고리를 끊게 되는 경지에 오르게 되면 천지(天地;자연)와 하나가 되는 경지에 오른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에 다름 아닌 강조의 의미가 된다.


마지막으로 양씨(楊時)는 앞서 살펴보았던 ‘무(毋)’의 의미와 왜 성인인 스승 공자에 대해서 그런 표현이 사용되었는지에 대해 배우는 자들이 헷갈려할까 싶어 다음과 같이 정리해준다.


“지혜가 족히 성인을 알 수 있고, 그를 자세히 살펴보아 묵묵히 깨닫는 자가 아니라면 (성인의 이와 같은 점을) 기록할 수 없는 것이다.”


아! 이 마지막 주석에서 또 한 번 선배들의 안목에 감탄이 흘러나오지 않을 수 없다. 앞서 설명했던 바와 같이 성인(聖人)인 공자께서 전혀 없으셨던 것을 기록하려면 누군가는 그것을 읽어낼 수 있는 안목을 갖췄어야 하고 이런 기록이 가능하다는 것은 스승의 경지에까지는 못 올랐을지언정 스승이 그 경지에 올랐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지혜의 수준까지는 되었어야 기록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이 얼마나 논리 정연한 정리란 말인가!


스승의 가르침을 어느 정도 흡수하고 따라오지 못하는 제자들은 그저 자기 스승이 대단하다고 숭앙할 뿐 그 경지가 어느 정도인지 그리고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한다. 그것은 이른바 자신이 지식적으로 스승에게 배워 어떤 것이 옳은 것이고 어떤 것을 지향해야 하는지는 알지만 미처 그것을 실천에 옮길 수양이 아직 부족한 제자 정도라도 되면 스승이 그것을 부단한 수양 과정을 통해 생활 속에서 그것을 옮기는 것이 보이고 그것에 감화받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것을 알아보기 위한 과정까지 오르는 것도 만만치 않다는 것을 양 씨(楊時)는 알고서 두 가지 모두를 여기서 말한 것이다. 공자의 가르침에는 과정이 있다. 그 과정을 건너뛰는 ‘엽등(躐等)’이라는 것은 참람된 행동임은 물론이고 논리적으로도 불가능하다. 영어단어를 모르는 학생이 갑자기 영어로 아무렇지도 않게 대화를 하겠다고 아무리 발버둥 쳐도 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이 어렵고 심오한 공자의 가르침과 스승의 그 모습을 기록하였을 제자 누군가의 노력과 그 경지를 단순히 자기 고집이 세다는 둥 자기만을 고집해서는 안 된다는 둥, 자기가 아니면 안된다는 경계의 뜻이라는 둥 그 얄팍한 해석 따위로 누를 끼치는 이들이 더 이상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제 고급단계에 들어가서 조금 깊이 있게 행간을 이해해보자. 앞서 이 장의 핵심 화두가 되었던 ‘사사롭다’, 혹은 ‘사욕(私慾)에 의한 이기적인 자아’가 도대체 무엇을 위해 그런 사사로운 마음을 먹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이 장은 물론이고 공자는 설명하지 않았다. 


나 같아도 이 짧은 문구조차도 제대로 해석하지 못하고 흙탕물을 튀기고 있는데 그 깊이에 있는 행간의 의미까지 설명한다는 것이 무리라고 생각하여 더 꺼내놓을 생각을 하지 않을 것 같은데 공자는 오죽했겠나 싶다. 그래서 공자께서 말씀하지 않은 부분이지만 고급 학습자들에 해당하는 제자들은 알아서 모두 다 알고 있는 그 부분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굳이 이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 해석을 풀어놓는 이유는, 이 부분이 결국 이 장의 최종적인 지향점인데, 달을 가리키고 있는데 손가락조차도 찾지 못해 엉뚱한 곳을 보는 이들에게 달이 어느 쪽에 있는지에 대해서 방향성은 알려줘야 할 것 같다는 책임의식 때문이다.


왜냐하면 얼핏 위의 해설을 읽고 나서 사리사욕(私利私慾)이라는 것을 형이하학적으로만 이해할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 때문이다. 물론 개인의 부와 명예 따위만을 생각하는 것도 사리사욕의 대표적인 예이다. 하지만 현대에 그렇게 협소하게 전성된 의미만이 다가 아님을 알고 있으라는 의미에서 설명한다. 


이 장에서 가리키고 있는 사사로움이라는 것은 마지막의 ‘나(我)’로 귀결된다고 하였다. <논어> 강의로 유명세를 치른 K대 철학과 교수 출신의 빡빡이 한의사는 이 마지막의 개념이 앞의 세 가지를 모두 수렴한다고 하였는데, 그것 역시 나는 오버라고 본다. 


왜냐하면 순차적으로 이어지고 다시 첫 번째로 이어지는 뫼비우스의 띠를 설명할 때 어느 것을 시작이라고 할 수도 없을뿐더러 앞의 세 가지가 뒤의 하나에 모두 수렴되는 개념이라면 공자가 굳이 이런 문법구조를 사용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정리하여 설명하자면, ‘사사로움’이란 ‘나를 위주로 하려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궁극적인 목적이 나 개인에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나는 이 장을 설명할 때 ‘두루’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나(我)’의 대척 개념으로 설명한다. 

이것은 불가(佛家)의 가르침에서 자기 수도를 통해 자신을 지워버리라는 가르침과 크게 다르지 않다. 실제로 이 장을 설명할 때 적지 않은 학자들이 공자 시대의 가르침이 도가(道家)나 불가(佛家)를 이단이라 공격하며 배격하기는커녕, 그 수양의 형태가 많이 닮아 있다고 설명하는 것도 그러한 이유이다.


사람은 언제나 무언가를 판단해야 하고 무언가의 목적의식을 가지고 행동하는 존재이다. 돈을 벌기 위해? 권력을 잡기 위해? 사회를 바로잡기 위해? 어떤 식으로든 그의 목적 행위는 수면 위로 드러날 수밖에 없다. 그것이 아주 간단하게 자신의 입을 통해서 나오는 경우는 두말할 나위도 없고, 아무리 자신이 아니라고 우겨도 그것은 사욕(私慾)에 가까울수록 도드라질 수밖에 없기 마련이다.

사이비 점쟁이들이 부적을 써야 한다고 하고, 굿을 해야만 한다고 하고, 터를 잘못 잡았으니 조상의 무덤을 옮겨야 한다고 하는 것이나 대통령의 거처를 옮겨야 한다고 하는 그 모든 것은 인간의 비뚤어진 사욕(私慾)에서 말미암은 것이란 말이다. 제발 정신 좀 차리고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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