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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Mar 18. 2022

당신은 어떤 기준으로 판단을 내리는가?

자신만의 기준도 없이 부유하는 하루살이들에게 고함.

子曰: “麻冕, 禮也, 今也純, 儉, 吾從衆. 拜下, 禮也, 今拜乎上, 泰也, 雖違衆, 吾從下.”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베로 만든 면류관이 (본래의) 禮이지만, 지금에는 冠을 생사(生絲)로 만드니, 검소하다. 나는 여러 사람들을 따르겠다. (堂) 아래에서 절하는 것이 (본래의) 예인데, 지금은 (堂) 위에서 절하니, 이는 거만하다. 나는 비록 사람들과 어긋나더라도 (堂) 아래에서 절하겠다.”

이 장은 공자가 예(禮)에 대해 어떤 기준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아주 잘 보여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서로 다른 두 가지 경우의 예(禮)가 깨진 사례를 보여주며 공자가 예에 대한 기준을 무엇으로 삼고 있는지를 아주 명확하게 보여준다.


첫 번째 예는, 면류관을 무엇으로 만드는가 하는 문제이다. 본래 예(禮)에는 베로 만든 면류관을 써야 한다고 하지만, 재료도 그렇고 무엇보다 너무 손이 많이 가서 물건이 비싸기 때문에 현실적으로는 생사(生絲)를 사용하는데, 검소하기 때문에 그것을 따르겠다고 한 것이다. 앞서 배운 ‘팔일(八佾)편’ 4장에서의 언급처럼 ‘예를 사치한 것보다 검소한 것이 낫다.’라고 했던 공자의 평상시 생각이 그대로 반영된 것이다. 그래서 이유에 대해 ‘검소하다’라고 이유를 명확하게 밝혔다. 그 부분에 대해 주자는 다음과 같이 해설하고 있다.


麻冕은 검은 베로 만든 관이다. 純은 실이다. 儉은 省約을 이른다. 검은 베 관은 30升의 베로 만드는데 승은 80올(縷)이므로 곧 날실이 2400올(縷)이 된다. 이는 세밀하여 만들기가 어려우니, 생사(生絲)를 사용하여 (수공이) 생략됨만 못하다.


두 번째 예는, 신하와 군주 간의 예에 있어 당(堂) 위에 올라가 절을 하는 것과 당(堂) 아래에서 절을 하는 것에 대한 부분이다. 본래 예에서는 당(堂) 아래에서 해야 하는데, 당시 당(堂) 위에 올라가 절하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그저 예가 흐지부지된 경우이다. 


이는 예의 본질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편의에 따라 형식을 바꾸려고 하는 것에 대해 엄중히 그래서는 안된다고 경계하는 공자의 생각이 담겨 있는 일갈(一喝)에 다름 아니다. 이 부분에 대해 주자는 다음과 같이 해설하고 있다.


신하가 군주와 예를 행할 때에는 마땅히 당 아래에서 절해야 하며, 군주가 그것을 사양하면 그제서야 당(堂) 위로 올라가서 절을 끝낸다. 泰는 교만함이다.


이 두 가지 사례에 대한 공자의 기준을 의(義)로 파악한 정자(伊川)는 다음과 같이 이 장의 가르침을 정리한다.


“군자가 처세함에 있어서 일이 의리에 위배되지 않는 것은 세속(世俗)을 따르는 것이 괜찮지만, 의리에 해로울 경우에는 세속을 따를 수 없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의리’에 대한 개념 규정도 따로 있어야 하겠지만, 나는 선배, 정자의 견해를 조금 더 확장, 발전시켜보기로 한다.


‘시류(時流)’라는 것이 있다. 이른바 트렌드라고 부르는 것이다. 혹은 그것을 다른 의미에서 대세(大勢)라고 하기도 한다. 위의 주석에서 ‘시속(時俗)’이라고 불렀던 것도 같은 의미인데, 결국 동시대의 뭇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많이 하는 것의 흐름을 말하는 것이다. 

공자가 위에서 예로 들었던 두 가지 사례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본래의 예나 본래의 가르침대로 하지 않는 데에는 다양한 이유가 발생한다. 비싸서 서민들이 그 예를 따르기 위해 부담이 가면서까지 하지 않되, 그렇다고 그 예 자체를 생략할 수는 없어 가격이 조금 저렴한 것으로 한다는 이유에서부터 굳이 당 아래에서 절을 하는 것이 옷이 지저분해질 수도 있고, 너무 격을 두는 것 같아서 굴욕적인 기분도 들고 무엇보다 번거롭기 때문에 왔다 갔다 하는 것보다 실질적으로 당 위에 올라가 해도 된다고 판단하는 이유 등이 있을 수 있다.


공자는 그 변용을, 어떤 것은 예에 맞지 않는다고는 하지만 시속(時俗)에 따르겠다고 하였고, 어떤 것은 예에 어긋나니 시속에 따르지 않겠다고 하였다. 원문을 잘 보면, 첫 번째 사례에 대해서는 그 이유를 검소하기 때문이라고 적고, 두 번째 사례에서는 그 이유를 ‘거만하기 때문이다(泰也)’라고 명확하게 밝힌 것은 기준이 무엇인지 행간을 읽어내라는 힌트를 주는 것에 다름 아니다. 


특히 두 번째 사례에서는 시속(時俗)에 따르지 않게 되면서 사람들과 어긋나는 것에서 오는 불이익을 감수하겠다는 뉘앙스의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이른바 대세를 따르는 이유는 튀지 않겠다는 것이고 대다수의 생각과 행동에 동조하여 무난하게 그들과 한 편(?) 임을 암묵적으로 동의받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과 다르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은 예(禮)에 대한 것에 맞는가 맞지 않는가를 논하기 전에 뭇사람들의 눈총을 받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공자는 그것이 자신의 기준에 맞지 않는 것이라 생각하여 잘못이라면 자신이 받을 눈총이나 불이익이 있더라도 그것을 따르지 않겠다고 의견을 밝혀야 한다고 주장한다.


왜 빨리 공자의 기준에 대해서 이야기해주지 않고 변죽을 울리는 것인가 답답한가? 하지만 이것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기 때문에 설명하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다. 왜냐하면 대부분은 기준이 있다고 말하면서도 그 시류라는 것의 눈치를 보느라 자신의 신념을 아무렇지도 않게 숙이고 감추고 꼬리 내리기 때문이다. 


수천 년 전 중국에 있던 공자가 살던 시대부터 이미 그것은 인간의 본성이고 무리의 본성이었기에 공자는 이 장에서 그 부분을 한 글자 한 글자에 담아 읽는 이들의 양심 구석구석을 찔러댄 것이다.


공자의 기준은 언제나 하나였고, 그 기준에 대한 것을 가르침에 있어 언제나 똑같은 목소리를 냈었다. ‘본질’. 예가 무엇인지에 대해 공부하고 익혀 그 본질에 대해서 깨닫게 된다면 세부적으로 그것을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서 일일이 알아보거나 당황하지 않게 된다고 가르침을 내려준 바 있다. 

예의 본질은 예를 갖춰야 할 대상에 대한 존중이고 그것은 면류관이 비싼 베로 되어 있어야만 드러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제사상에 올라가야 하는 음식들의 종류나 어떻게 놓는지까지 상당히 세부적인 부분에까지 지침이라는 것이 있지만, 비싼 고기가 올라가야 할 자리에 다른 고기류를 놓거나 비싼 생선이 올라가야 할 자리에 다른 생선으로 대체되거나 가장 크고 좋은 과일을 놓아야 한다는 기본적인 상식과 다르게 그 과일의 가격이 너무 올라 크고 튼실한 것을 올리지 못했을 경우 그것이 예의 본질을 상하게 하는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요 근래에 들어 제사상에 고인이 생전에 즐기셨던 음식을 올리는 것이 맞다고 하여 바나나에서부터 피자까지 제사상에 올리는 경우가 일반화되어가고 있다. 공자가 그 모습을 보았다면 그것이 예의 본질에 위배되는 것이라고 판단하지는 않았을 것이라, 조심스럽게 짐작해본다.

앞서 정자가 말한 의리도 같은 의미에서 이해된 용어로 사용된 것이다. 내가 굳이 그것을 확장하여 ‘본질’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 것은, 예(禮)에서만이 아니라 모든 생각과 행동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 ‘기준’이라는 것이 필요한데, 그 기준이라는 것은 그것이 가지고 있는 ‘본질’ 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판단의 기준이 되는 것이 해당 개념에 대한 ‘본질’이라는 것은 이제까지 우리가 공부해왔던 공자의 가르침의 과정을 그대로 보여준다. 어떤 사안이나 개념에 대한 본질을 파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이 무엇인지도 파악하지 못한 상태라면 기준을 세우기도 전에 혼란에 빠지게 된다. 즉, 어떠한 행동을 취할지에 대해서 판단하기 위해서는 사안의 본질을 파악하는 배움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사안에 대해 혹은 그 개념에 대해 사실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지향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파악하는 것은 시비(是非;옳고 그름)를 판단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 과정은 단순한 지식을 채워 넣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 부분을 일깨워주기 위해 공자는 면류관의 예를 든 것이다. 분명히 고례(古禮)에는 면류관은 베로 짠 것을 사용해야 한다고 세부적인 부분까지 설명하고 있다. 지식만을 강조했다면 고지식하게 그 옛날 책이나 옛날 방식을 고수하겠다고 판단하는 것이 옳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공자는 그것이 아니라는 부연설명을 길게 붙이는 대신, 짧은 사례를 보여주고 시속에 따르겠다고 보여주기를 통해 가르침을 준 것이다.


단편적으로 공자의 가르침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오독(誤讀)한 사람은 다시 이 장을 읽고 나서 따질 수 있다. 기준이 어떻게 바뀌냐고, 왜 앞에서는 예에 정한 대로 따르지 않고 시속을 따르겠다고 해놓고, 뒤의 사례에서는 왜 시속을 따르지 않으면서 그 이유가 거만하기 때문이라고 말하느냐고 할 수 있다. 


내가 굳이 ‘오독(誤讀)’이라는 설명을 한 이유를 눈치챘는가? 공자의 가르침을 이해하는 수준까지 이르기도 전에 공자가 말한 내용조차도 오해하는 수준의 사람이 범할 수 있는 아주 수준 낮은, 하지만 결코 적지 않은 경우이기 때문이다.


자신보다 지적 사유나 수양의 정도가 훨씬 높은 수준에 있는 상대의 생각을 그보다 낮은 사람이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아무리 쉽게 설명해준다고 해도 그것에 대한 자신의 능력으로 이해할만한 수준의 사람이 아니라면 설명을 굳이 길게 하고 사족(蛇足)을 아무리 많이 단다고 하더라도 오독의 늪에 빠지거나 잘못 해석해놓고서는 도리어 상대를 탓하는 후안무치(厚顔無恥)함을 보이는 경우를 우리는 실제 생활에서 생각보다 아주 자주 만나곤 한다. 

어쩌면 공자의 설명이 상세하지 않은 이유 중 하나가 그만한 것을 이해하고 오해의 소지가 적을만한 수준의 사람들만이 읽어낼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장치가 아닐까 하고 생각한 적도 나 개인적으로는 있었다. 왜냐하면 공부의 경지가 한 단계 한 단계 올라갈수록 산에 높이 오를수록 보이는 절경이 달라지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게 되는데, 그것은 먼저 올라간 사람이 아무리 유려한 문장과 상세한 설명으로 한다고 하더라도 직접 올라 직접 자신의 눈으로 보고 자신의 가슴으로 느끼지 않는다면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본질’을 파악하고 기준을 삼는다는 것은, 단순하게 모든 판단의 기준이 ‘금전’이라던가 현실과는 상당히 유리된 조폭영화에서 말하는 ‘의리’라던가 하는 것처럼 그렇게 단순하지 않음을 이 장은 확실하게 보여준다. 예컨대, 공부를 하는 이유에 대해 지금까지 상당히 많은 장을 통해 가르침을 익히고 생각해온 바 있었다. 


하지만, 그 이야기들 중에서 어느 하나 같은 경우는 없었다. 하지만 명확한 것은 그 경우들마다 아닌 것에 대한 확실한 인지를 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이전 장에서 설명했던 바와 같이, 공부를 열심히 해서 서울대를 가서 결국 하고자 하는 것이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에서 벗어나 개천 용이 되어 부와 명예를 거머쥐기 위한 것이라면 그것은 길을 잘못 들어선 것이다. 굳이 어제 언급했던 공부를 지금 본질에 대한 공부와 연관하여 다시 언급하는 데에는 그것이 본질을 흐리는 가장 큰 장애가 되기 때문이다.


공부가 오로지 자신이 속해있던 시궁창 같은 인생에서 벗어나는 것이라 여겼던 그들은 개천의 흙탕물에서 위로 오를 동아줄은 공부밖에 없다면서 공부를 했다. 똑똑하고 노력까지 멈추지 않았던 그들은 기어코 위로 올라갔다. 여기서 가장 큰 딜레마가 생긴다. 그들은 본질에 대해서 모를 정도로 어리석지도 학문의 정도나 수준이 낮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뭐가 문제였길래 그들은 위로 올라갔다고 하면서 결국 시궁창보다 더한 똥통을 뒤집어쓰고 인생을 그렇게 지저분한 막장의 나락으로 떨어뜨렸을까?


그것이 공자가 가르침을 주면서 수차례 강조하였던 사욕을 조절할 수 있는 수양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본질을 다 알면 뭐하겠는가? 그것이 자신의 이익이나 자신의 사욕과 배치되거나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하면 아무런 양심의 거리낌 없이 구겨서 쓰레기통에 던져 버리고 모른 척하니 말이다. 

그래서 본질이 자신의 생각과 행동의 기준이 되는 것은 머릿속에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이 우리가 배운 공자의 배움의 끝은 실천에 있고, 단순히 행동으로 옮기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의식적으로 행동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마음에서 배어 나올 정도로 수양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공부가 어렵고 어렵다고 한 것이다.


대선이 끝난 지 이제 일주일밖에 되지 않아 아직도 그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국민들이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6월 지방선거를 위해 벌써부터 난리법석을 벌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빨간당은 빨간당대로 대선에서 정말 종이 한 장 차이의 차이였기 때문에 지방선거에서 압승을 하지 못한다면 당선인의 대통령직 수행의 리더십에도 큰 차질을 보일 거라며 설레발을 치고 있다. 


파란당은 파란당대로 이전 서울시장과 부산시장의 보궐선거 당시의 국민여론의 가혹한 정권 심판의 칼날보다는 훨씬 더 희망이 보인다며 동상이몽을 꾸며 선거전에 벌써부터 돌입하였다. 

그렇게 6월까지는 또 전국이 지방선거로 달아오를 예정이다.


사람이 되는 공부를 하는 신성한 아침 <논어> 읽기 시간에 자꾸 사람 같지 않은 이들을 언급하는 것이 불편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가져본다. 내가 유난히 정치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거나 정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즐거운 사람도 아니다. 

허나, 중요한 것은 정치는 당신의 삶과 아주 밀접하고 우리 사회를 바꾸는데 필수적으로 알아야 할, 참여해야 할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누가 대통령이 되든 내 삶에 그렇게 큰 변화가 생기거나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착각하는 이들이 많은 이상, 사회는 결코 바뀌지 않는다.


대한민국은 대의민주주의를 표방하는 나라이고, 그 민주주의를 완성시키는 것은 국민 한 명 한 명의 뜻이고 의지이다. 당신이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하는 것은 ‘본질’을 모르기 때문이다. 모르는 것은 배울 수 있으나, 배우고자 하는 의지가 없다면 그 어떤 것도 소용이 없게 된다. 


매번 우왕좌왕하고 싶은가? 아니면 당신만의 확고한 기준이라는 것을 갖추길 바라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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