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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Mar 17. 2022

당신은 무엇을 잘하는 사람으로 명성을 얻고 싶은가?

공부를 열심히 하는 이유가, 잘 살기 위한 것이라 착각하는 자들에게.

達巷黨人曰: “大哉孔子! 博學而無所成名.” 子聞之, 謂門弟子曰: “吾何執? 執御乎? 執射乎? 吾執御矣.”
達巷黨의 사람이 말하길, “위대하구나, 공자여! 박학하였으나 (어느 한 가지로) 이름을 낸 것이 없구나!”하였다. 공자께서 그것을 들으시고 문하의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다. “내가 무엇을 전문으로 잡아야 하겠는가? 말 모는 일을 잡아야 하겠는가? 아니면, 활 쏘는 일을 잡아야 하겠는가? 내 말 모는 일을 잡겠다.”

아주 오랜만에 숨은 고수가 한 명 등장하는 에피소드이다. 주자가 주석에도 밝혔지만 이 마을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사람은 누구인지 특정되지 않는다. 전에도 말했지만, 대개 <논어>에서 등장하는 구체적인 설명 없는 무명자(無名子)는 은둔 고수에 해당한다.


첫 장에서도 그랬지만, 이 장 역시 생각보다 논란이 많은 장이기도 하다. 몇 가지 논란의 핵심을 짚어보자면, 먼저, 달항(達巷) 마을 사람이 했던 말이 공자를 비아냥거린 것인지 아니면 공자의 재주를 아까워했던 것인지에 대한 의견부터가 확연하게 갈리는 해석들이 분분하다. 


두 번째 논란의 핵심은, 공자가 결국 그의 말을 전해 듣고 나서 한 말이 자신을 칭찬한 것으로 이해하고 겸양의 마음으로 그것을 받아주었다고 보는 견해와, 자신의 처지를 비아냥거린 것에 대해 아무렇지도 않게 툴툴 털어내며 농담으로 그냥 한 말인지, 그것도 아니면 최근에 학계에 등장한 내용처럼 그동안 문(文)에 집중하여 경지를 이뤘으니 부족하다고 여기는 무(武)의 분야에 집중하여 전쟁용 전차를 모는 일에 집중하고 싶다는 말인지 등에 대한 해설이 분분하다.

먼저 주자가 이 장에 대해서 어떤 식으로 이해했는지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자.


達巷(달항)은 당(지역 단위)의 이름이다. 그 사람의 성명은 전하지 않는다. 박학하였으나 (어느 한 가지로) 이름을 낸 적이 없다는 것은 그 학문이 넓음을 찬미하면서도 한 기예로 이름을 이루지 못했음을 애석히 여긴 것이다.


주석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주자는 달항(達巷) 사람이 공자의 박학다식함을 찬탄하면서도 어느 하나의 특정 분야에서 명성을 이루지 못했다고 애석해한 것으로 해석한 것이다. 이렇게 해석하는 것은 그저 주자의 주관적인 해석이 아니다. 당연히 원문에서의 객관적으로 그렇게 판단할 근거에 바탕으로 해석한 것이다. 


예컨대, 발언의 시작을 ‘위대하다’라는 찬미하는 표현으로 시작하는데, 그런 표현은 당시에도 그렇고 고문의 특성상, 현대에 볼 수 있는 것처럼 상대를 비아냥거리기 위한 정도로 사용하는 반어적 표현으로 사용된 용례를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앞에서 찬미한 내용은 말 그대로 찬미라고 볼 수밖에 없을 정도의 표현이라고 본 것이다. 


그리고 ‘박학하였으나’라는 표현은 안타까움을 드러낸 것으로 굳이 칭찬과 찬미의 표현을 ‘박학’이라고 일부러 배치하여 사용하면서 어느 한 가지로 이름을 내지 못하였다는 말 역시 현대의 반어와 비아냥거림의 차원에서 해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당대의 표현과 문법적 용법이 지독한 반어나 풍자로 보기 어렵다는 판단에서 나온 해석이다.


그래서 이어져 나오는 공자의 스스럼없는 대답을 그대로 옮긴 것에 대해 공자가 왜 그렇게 말했는지를 주자는 다음과 같은 주석을 통해 해설하고 있다.


執은 전문으로 잡는 것이다. 射와 御는 모두 하나의 기예인데, 御는 남의 마부가 되는 것이어서 잡는 일이 더 비천하다. “나로 하여금 어느 일을 전문으로 잡아서 이름을 이루게 하려고 하는가? 그렇다면 나는 장차 말 모는 일을 잡겠다.”라고 말씀한 것이다. 이는 남이 자신을 칭찬하는 말을 듣고서 겸사로써 받으신 것이다.


이 부분은 공자가 자신을 칭찬하며 자신이 출세하여 높은 위정자에게 초빙되어 가지 못함을 아쉬워해주는 이의 격찬에 겸양으로 표현했다고 본 것이다. 그 근거는 역시 공자의 대답 그 자체에서 찾는다. 공자가 그 어느 한 가지로 이름을 이루려고 한다면 가장 비천한 직업으로 알려진 수레를 모는 사람이 되겠다고 한 것에서 해석의 실마리를 찾은 것이다. 


왜냐하면 결국 이름이 천하에 알려지고 높은 지위에 오르지 못한 것에 대해 한탄을 하였으니 자신이 현실적으로 그런 대접을 받지 못한 것에 대한 겸연쩍은 마음을 관리직도 아닌 가장 천하게 보는 말모는 일을 함으로 유명해지는 것을 택하겠다고 한 것으로 명성을 구하는 것이 이제껏 공부했던 것으로 얻고자 한 것이 아님을 말하고 있다 본 것이다.


이 부분은 뒤에 상술하겠으나 상당한 의미를 갖는 부분이다. 왜냐하면 대개 공자가 박학하다는 것은 문학, 역사, 철학 등등 인문학적인 소양을 갖추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고 그중에서 어느 하나로 명성을 날리지 못하였다고 아쉬워한 부분은, 바꿔 말하자면 그가 그렇게 공부하고 수양을 통해 갖춘 다양한 경험과 지식들을 바탕으로 등용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공자는 자신이 공부하고 스스로를 수양한 것은 위정자에게 등용되어 입신출세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즉, 박학하다는 것과 그것으로 입신출세하지 못했다는 것은 상관관계가 없다고 말해주는 것으로 그 말을 전하고 그 상황에 대한 일화를 알고 있는 제자들에게 다시 한번 가르침을 던져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행간의 의미를 오롯이 읽어낸 윤 씨(尹暾)가 배우는 자들이 행여 그 부분을 놓칠까 싶었는지 그 의미에 대해 다음과 상세하게 주석을 통해 설명해주고 있다.


“성인은 도가 온전하고 덕이 완비되어 어느 한 가지 장기로 지목할 수 없다. 그러나 達巷黨 사람은 공자의 위대함을 보고서 생각하기를 그 배운 것이 넓으나 어느 한 가지 잘함으로 세상에 이름을 얻지 못했음을 애석히 여겼다. 그러하니 성인을 흠모하였으나 성인을 제대로 알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로 하여금 무슨 일을 전문적으로 잡아서 이름을 얻게 하려고 하는가? 그렇다면 말모는 일을 잡겠다.’고 하신 것이다.”


앞의 설명을 듣지 않고서 보면 그저 윤 씨도 공자를 칭송하기 위해 대강 같은 뜻을 반복한 것이 아니었느냐고 오독할 수도 있는데, 실제로 앞의 배경에 대해 알고서 이 주석을 읽어보면 왜 윤 씨가 다음과 같은 주석을 달았는지 이해가 조금은 쉽게 될 것이다.


마을의 고수였던 은자(隱者)도 만만치 않은 인물이기는 하였으나 성인의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 읽어내기에는 약간 부족함이 있었던 것인데 그 부분에 대해 그를 일깨워주고 그 이야기를 듣고 알고 있는 제자들을 일깨워주기 위해 전공을 하기는 해야 하지만, 사회적으로 명성을 이루었다고 보기에는 가장 비천한 직업인 말모는 직업을 대신 이야기했다고 보는 것이다.


앞서 잠시 언급했던 것처럼 최근 학계에서 등장했던 주목받는 해석 중의 하나가 있다. 공자가 문무(文武) 중에서도 문(文)은 이미 일정 경지에 올라섰으니 자신이 그간 힘쓰지 못했던 무(武)의 분야에 대해 좀 더 배우고 익히고 싶다는 식의 해석이 바로 그것이다. 그렇게 해석하게 되면 단순히 천한 신분의 남의 마차를 모는 것이 아닌, 정말로 전장에 쓰이는 전쟁용 수레를 끄는 기술을 익힌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머리 빡빡 깎고 깨진 질그릇 소리를 내는 K대 철학과 교수 출신으로 <논어> 강의로 유명했던 그 양반은 냉큼 그 해석을 받아들이고 그것이 정설인 것처럼 풀었다. 왜 이렇게 살살 비꼬는 듯이 말하는가 싶은지 이미 눈치챘겠지만, 나는 그 의견이 맞는 것인지에 대해 잘 알지 못하겠다.


학자마다 해석이 다를 수 있고, 견해가 다를 수 있다는 정도로 넘어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갑자기 공자가 자신이 활 쏘고 전쟁용 수레를 잘 모는 전문적인 공부를 하고 싶다고 새로운 분야의 학구열을 불태웠다는 해석에 쉽게 귀를 기울이기가 어렵다.


하여, 이 장에 대한 내 해석을 정리하자면, 마을의 은둔해있던 은둔 고수가 평소에 앙망해마지않던 공자에 대해 칭송하면서도 위정자들에게 높이 등용되지 못함을 아쉬워했는데, 자신이 잘 나가지 못한 것에 대해 아쉬워했다는 은둔 고수 팬의 이야기를 들은 공자가, 단순히 감사하거나 겸양의 뜻을 보인 것이 아니라, 결국 박학이라는 것은 위정자에게 등용되기 위한 공부가 아니라는 점을 보임과 동시에, 그 이야기의 전반을 보고 들어서 알고 있는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주기 위해 만약 그런 식으로 입신양명을 위한 공부를 하는 것이라면 가장 비천하다고 사람들이 여기는 다른 사람의 마차를 끄는, 지금으로 치면 영화 <기생충>에 나왔던 다른 사람 차를 모는 개인 기사나 하겠다고 역설적으로 가르침을 준 것이다.


이것은 결코 그것을 배워서 유명해진다고 하더라도 사회적인 신분으로는 비천하기 그지없는 직업이기 때문에 듣는 이들로 하여금 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 대목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아쉬움에 공자가 그렇게 박학함에도 출세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던 은자(隱者)도 공자의 말을 나중에 듣고 깨달음이 있기를 바란 것이요, 제자들 역시 공자의 문하에 들어와 배우고 익히는 제자들의 목적이 결코 그것이어서는 안 된다고 경계하는 것이다. 배우고 익혀 박학하게 되는 목적이 결코 그것을 토대로 세상의 명성을 얻고자 함이 아님을 돌리고 돌려 에둘러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아! 이것이야말로 정말로 행간의 미묘하면서도 은미 하게 감춰진 의미를 읽을 수 있는 이들만이 깨닫고 스스로를 반성하라는 의미가 아닌가? 

때문에 나는 이렇게 해석하고자 한다.




전에도 몇 번 언급한 바 있지만, 공부를 잘해서 관악산에 있는 경성 제대의 법학부에 들어간 자들이 뉴스에 상당히 많이 오르내린다. 이번에 대선에 당선된 이를 비롯하여, 국정농단이라는 신조어를 일반적인 일상용어로 만들어놓은 군바리의 딸의 뒷켠에서 ‘대원군’ 노릇을 하다가 역시 감방에 간 이도 ‘그곳’ 출신이었다. 

그 당시 민정수석이라며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의 출신으로 공부에 모든 것을 걸고 ‘소년 급제’라는 것을 해서 팔려가는 장가를 가서 기어코 빠득빠득 민정수석을 달았다가 국민적인 개망신을 당한 이 역시 ‘그곳’ 출신이었다. 

군바리의 딸을 욕하고 그녀를 뒤에서 조종했던 여자의 딸을 욕하면서 결국 공부 못하는 자기 딸을 의사로 만들기 위해 스펙을 만들고 그것에 공감하며 그곳의 교수를 하다가 민정수석에서 법무부 장관까지 요란하게 문 정권의 황태자로 불렸던 그 역시 ‘그곳’ 출신이다. 

제주도의 신동 소리를 들어가며 ‘그곳’에 입성하여 정치판에 들어가는 것까지 공부를 통해서 들어갔던 것처럼 설치다가 퇴물 정치인 소리를 듣다가 그나마 비빌 언덕이라며 자기 고향에 가서 도지사를 합네 하다가 그것도 못 채우고 권력욕에 헐레벌떡 들치고 설치고 다니는 자 역시 ‘그곳’ 출신이다.

군바리 딸의 정권에서 초대 민정수석까지 하고 허구한 날 대통령의 아들과 딸을 저격하며 모든 것은 그 아비의 탓이라고 하다가 그 아들이 기상천외한 50억이나 되는 퇴직금을 받았는데, 자신은 알지도 못하고 아무런 상관도 없다며 감방에 들어갈 날을 받아둔 그 역시 ‘그곳’에 가고 싶었으나 떨어져서 당시에 유행하던 후기 대학이라는 곳으로 재수를 하지 않기 위해 갔다가 사법고시를 패스하고 다시 그 권력지향 서클에 기어코 몸을 비집어 넣었던 자였다. 


차마 그들에게 선배라고, 혹은 동문이라고 말하기가 너무 부끄러운 사태가 연이어 쏟아져내리고 있다. 물론, 똑똑하지 않은 사람보다야 똑똑하고 많이 배운 사람이 국가 요직을 맡고 국가를 경영하는데 힘을 보태는 것이 맞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위에 대표적으로 몇 명 열거하지도 않았지만, 그들이 해먹은 나라의 꼴을 보라. 


수천 년 후의 대한민국에서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을 노스트라다무스 뺨치는 예언력으로 미리 보았던 공자의 일갈은 바로 오늘 배운 이 장의 내용에 다름 아니다. 그들의 알량한 법제적 지식은 그런 식으로 나라를 조금씩 한입씩 지들의 배를 채우는데 소진되어만 갔다. 

나라가 그들로 인해 좀먹어가 죽어가는 신음과 비명을 뱉어내고 있는데도 그들은 자신들의 배를 더 채우겠다고 그 사나운 어금니를 들이대며 여기저기 입을 들이대고 최대한 입을 크게 벌려 여기저기 이빨 자욱을 남기며 물고 뜯고 그 살점들을 빼앗길 새라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것을 입에 물고 신나게 자기 집으로 달려갔다.


공부를 잘해서 출세하고 ‘그곳’에 입학하고 그렇게 정치의 꼭대기에 있는 자들만이 문제인 것 같은가? 어차피 전국 모의고사를 봐도 ‘그곳’은 언감생심 서울권의 대학도 들어가지 못한 당신은 그 비난으로부터 자유로울 것이라고 여겨 그저 ‘공부도 잘했는지 모르고 얼마나 잘났는지 모르겠지만 속은 시커멓게 썩은 것들’이라며 소주 한잔의 안주거리로 삼는 소시민 코스프레를 하고 있는가?


이미 수차례 강조하고 설명했던 것처럼 나라를 좀 먹는 수준이 되어 나라가 스러져가며 여기저기서 비참한 비명소리가 이 정도로 공기를 찢고 터져 나올 지경이 되려면, ‘그곳’ 출신 몇몇이 살점을 물어뜯는 것만으로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는다. 


조직적인 범죄에서 가장 나쁜 놈은 배후에서 그것을 설계하고 가장 많이 챙겨 먹는 놈도 있겠으나 그것을 알고도, 보고도 암묵적으로 동의하며 자신의 자리를 보장받거나 자신도 그 곁에서 떨어지는 콩고물을 받겠다고 바싹 귀를 붙이고 꼬리를 흔들며 헥헥거리는 소시민이라는 코스프레를 하는 ‘방관자’라고 하는 공범들이 있어야만 이루어진다. 

왜냐하면 아무리 법에 정통하고 머리가 비상한 법비 출신의 나쁜 놈이 뒤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해 먹으려고 하더라도 결국 그것을 처리하는 데에 손발이 되고 증인이 되고 제삼자의 입장에서 똑똑히 목도하는 자들은 모두 그 소시민 코스프레를 하는 당신들이기 때문이다. 나는 아니라고 부인하고 싶은가? 


나에게 말고 당신에게 물어라, 당신의 양심이 스 대답에 주저하지 않고 당당히 대답할 수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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