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발검무적 Mar 16. 2022

본성에 따라 행동하면 짐승과 다를 바가 없다.

알아듣지 못할 짐승에게 설교하는 사람은 없다.

子罕言利與命與仁.
공자께서는 利와 命과 仁을 드물게 말씀하셨다.

자한(子罕)으로 시작하기 때문에 ‘자한(子罕)편’의 첫 장임을 알 수 있다. 9편까지 오면서 이미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지만, <논어>의 편명은 그 편의 첫 번째 장의 시작 두 구절을 편명으로 삼고 있다. 이 장은, 그야말로 달랑 여덟 자, 그것도 세 가지 개념에 대해서 한꺼번에 똑같은 동사를 사용하고 있다.


이 장의 표면적(?) 해석부터 깔끔하게 해내기 위해서는 두 가지를 해결해야만 한다. 첫 번째는 利와 命과 仁의 개념이 명확하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파악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그 세 가지를 드물게 말씀하셨다는 이유를 행간을 통해 읽어내면 된다.


그런데 이 붙어있어 현토를 끊지 않은 여덟 자의 문장은 이후 <논어>를 공부하고 연구한 학자들 사이에 이견이 제법 많이 발생한 장이기도 하다.


고문은 문장을 어디에서 끊어서 해석하는가에 따라 뜻이 완전히 달라진다는 것은 이미 앞서 공부에서 누차 설명한 바 있다. 이 문장 역시 그러한 문장에 해당한다. 이 문장의 구두점을 ‘子罕言利與命, 與仁’이라고 찍어 해석해야 한다고 보는 이도 있고, 내가 위의 원문에 어디에도 쉼표로 끊지 않은 것처럼 어떤 학자는 통째로 한 문장으로 보는 경우도 있고, ‘利’ 자 뒤에 쉼표를 찍어 ‘子罕言利, 與命與仁’으로 댓구처럼 읽어야 한다고 보는 학자도 있다.

우선 세 가지 개념어를 정말로 공자가 언급을 잘하지 않았는지 실증적인 데이터부터 검증해보기로 하자.


<논어> 전체에서 ‘利’가 ‘이익’이란 의미로 해석된 곳은 모두 아홉 군데 정도다. ‘명(命)’ 역시 일곱 곳에서 거론되는데 1만 2000여 자에 이르는 <논어> 전체를 본다면 개념어임을 감안하더라도 빈도가 매우 낮은 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원문의 언급처럼 정말로 ‘드물게’ 언급한 것이다.


이러한 데이터의 실증적인 근거를 통해, 두 번째 문제인 세 가지 개념어를 같은 동사로 ‘드물게 언급했다’로 보는 것에 이견을 가진 학자들이 등장하게 된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仁’ 자의 앞에 사용된 ‘與’를 어떻게 해석하는가에 대한 의견에 따라 완전히 달라지는 해석을 갖게 되어 상당한 논란이 있다. 원래 이 글자는 두 가지의 의미로 많이 사용되는데, 하나는 ‘∼와 더불어’란 의미와 다른 하나는 ‘허여(인정)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그런데 드물게 언급한 것은 앞의 두 개념에 대해서는 일곱 번 정도밖에 언급하지 않았으니 맞는 말인데, 뒤의 ‘仁’ 자의 사용 빈도가 100번 이상이라는 통계학적 수치를 감안하면 최소한 ‘仁’ 자에는 드물게 언급했다는 말이 적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나름 근거 있는 비판이 나오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러한 과학적인(?) 실증적 데이터를 제시하는 학자들은 ‘여인(與仁)’ 앞에서 끊어 뒤의 두 단어는 별도의 문장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 더 합리적이라는 주장이다.


물론 이런 의견에 대해 중국의 양보쥔(楊伯峻)처럼 반론을 제기하는 학자도 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논어>에서 ‘仁’을 언급한 곳이 실제로 많다 보이는 것은 사실이나 그것은 다른 사람과의 대화 속에서 불가피하게 언급된 것일 뿐, 실제로 공자가 평생 직접 거론하며 꺼낸 말 중에서 ‘仁’이라는 글자가 차지하는 비중이 비교적 적다는 이유를 들어 기존 학자들의 상당수가 <논어>라는 제자들이 편집한 책에 구애되어 공자가 말한 본연의 취지를 왜곡했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것이 오히려 중국식의 과장된 우기기라고 말하는 학자들도 있다.


그런데 앞서 소개한 의견 말고도 또 다른 해석을 제시한 학자도 있다. 중국의 철학자 리쩌허우(李擇厚)는 ‘子罕言利. 與命, 與仁’이라고 끊어 읽고 해석을 ‘공자는 이익을 드물게 말했다. 명을 인정하고 인을 인정했다’라고 해석하기도 했다.


내가 굳이 오늘 이 여덟 자밖에 안 되는 자한 편의 첫 장의 문구에 대한 다양한 학자들의 대표적인 몇 가지 해석 방식을 소개하는 것은, 그만큼 고문 중에서도 <논어>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데는 워낙 다양한 방식이 가능할 정도의 난해함이 숨어 있다는 것을 직접 보여주기 위함이다.

늘 말하지만 고작 여덟 자밖에 안 되는 것으로 이렇게 완전히 다른 의미로 해석되는 언어도 없지만 같은 한문이라고는 하지만, 공자가 아니고서는 이런 어법을 그것도 이치에 맞게 구사할 수 있는 수준의 성현은 없었기에 후대 학자들에게 이렇게 많은 숙제와 공부 거리를 안겨준 것이기도 하다.


이야기가 나온 김에 <논어>를 제대로 읽는 법에 대해 언급한 이가 있어 소개한다.

1924년생으로 2015년에 작고한 일본의 저명한 중국 역사소설가인 진순신(陳舜臣)이라는 사람이다. 한국에서도 그의 <논어 강의>가 출판되어 나왔을 낼 정도로 자칭 중국 문사철(文史哲;문학, 역사, 철학)에 대한 마니아를 자처했던 이이다. 우연히 자료를 검색하던 중에 발견한 그의 책을 들추다 보니, 그가 <논어>를 제대로 읽는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 제시한 일곱 가지 항목이 보였다. 그간 매일 한 장씩 이 매거진을 읽으며 함께 공부해온 발검 스쿨 학도들이라면 이미 알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마치 우리의 공부 과정을 본 듯 말하는 그의 정리가 재미있어 소개한다.


1. 행간의 숨어 있는 의미를 포착하라.


2. 원문의 한자 쓰임에도 주의하라.


3. 과거와 현재의 역사적 사건을 반추해보라.


4. 논어의 각 장면을 삽화처럼 그려보라.


5. 논어 주석서들의 해석 차이에 주목하라.


6. 일본의 논어 연구와 관점에 주의하라.


7. 논어의 구절을 우리 일상에서 찾아보라.



다시 원문으로 돌아와 보자. 왜 내가 위의 여러 견해가 있음에도 한 덩어리로 보고 끊지 않았는지에 대한 점을 이해하기 위해 개념어를 다시 정리해보자. 현대 해설서나 심지어 몇몇 학자들은 ‘利’를 ‘이익’으로 ‘命’을 운명이나 천명(天命)으로 해석하여 그것을 공자가 선호하지 않았다는 식으로 단정 짓는 설명을 하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세 가지 개념은 모두 공자의 가르침에 있어서는 아주 중요한 개념어들이다. 앞서 두 가지 개념을 피상적인 의미이거나 현대적인 의미로 해석하는 것은 공자의 가르침을 온전하게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마침 주자가 이 장에 대한 해석을 남긴 것이 없어, 대신 이 개념어들을 유학에서 어떻게 파악하는지에 대해 설명한 <논어 주설(論語註說)>의 설명을 대신하여 소개한다.



이(利)라는 것은 하늘이 명한 나의 본성이다.


명(命)이라는 것은 인간이 태어나면서 만나는 때의 운명이며, 태어나면서 처하게 되는 지위나 환경이며, 태어나면서부터 품부(稟賦) 받은 자질 같은 것이다.


인(仁)이라는 것은 충(忠)이고 서(恕)이며 중용(中庸)과 같은 내면적 덕성이다. 만약 사욕(私慾)의 이(利)를 명(命)과 인(仁) 위에다 올려놓는다면 그것은 공자의 도가 근본적으로 어긋나 버리는 것이다.


성(性)과 천도(天道)는 얼마든지 알 수 있는 것이나 근원적인 작위 대상이 아니다. 그래서 부자께서는 일상적으로 말씀하시지 않은 것이다. 인(仁)이라는 것은 작은 선행일지라도 그것들을 하나하나 차곡차곡 쌓아 올려서 이루어가는 것이다.


선을 실천할 수 있다면 인(仁)에는 스스로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자는 일상적으로 자주 말하지 않은 것이다. 숨기거나 사람들에게 일러주는데 인색했다는 그런 뜻이 전혀 아니다.


많은 선행을 쌓아 올려 인(仁)을 이루는 것은 나무 재목을 하나하나 쌓아 올려 집을 짓는 것과 같은 것이며, 만약 선(善)을 버리고 인(仁)을 말한다면, 근본적으로 말할 자격이 없는 것이다.


, 이 여덟 자 중에서 가장 간단하다고 생각했던 이 편의 편명부터가 의미하는 바가 감춰져 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드물게 말했다’는 앞서 현대 해설서들이 하나같이 밝힌 것처럼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된 것이 아니라. ‘드물게’에 방점이 찍혀 그것을 꺼려서 말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드물게 ‘말했을 뿐’이라는 것으로 환치된다. 위의 주석처럼 선(善)을 버리게 되면 인(仁)은 근본적으로 말할 수조차 없는 것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공자의 기본적인 가르침은 인간이 가진 본성은 선하다는 것이고 그것을 모르면 알게 하여 깨닫게 하여 돌아가게 만드는 것이고 알고 있다면 나쁜 사욕이 그것을 방해하거나 덮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가지고 있는 천성에 해당하는 본성이 중요하지 않은 개념일 리가 없고, 그것 자체가 악한 본성이라고 파악하는 것 자체가 현대에 이미 오염되어 전성된 의미로 오해하고 오역하게 되는 원인이 된다.

결국 인간의 본성의 가장 근원적인 경향성은 인간이 날 때부터 가지고 있었던 것이기에 인간 존재의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바른 형태로 유지하고 키워나아가는가에 달려 있는 것이니 공부와 수양을 인간이 가진 본래의 성향과 어떻게 조화시키는가가 관건임을 끊임없이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을 뜬금없이 공자가 공리주의(물론 위 주석에 의하면 이(利)의 개념이 개인적인 이기심이 아닌 만인의 복지라는 의미는 틀리지 않은 해석이다.)와 운명론을 싫어했기 때문에 이를 자주 언급하지 않았고, 인(仁)이란 구체적으로 꼬집어서 말하기 어려운 것이기 때문에 이에 관하여 설명하기를 꺼렸다는 식의 표면적인 이해와 설명은 이해하거나 동의하기도 어려울뿐더러 혼란만 초래할 뿐이다.


물론 ‘공야장(公冶長) 편’ 13장에서 “夫子께서 인간의 본성과 천도에 관하여 언급하시는 말씀은 들을 수가 없었다.”라는 부분의 의미를 끌고 와서 설명하는 것이 틀리다고만 지적할 것은 아니지만, 다각적인 의미로 전체를 조망하는 해석과 이해가 필요함은 재차 강조하여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정자(伊川)는 이 장의 핵심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利을 따지면 義를 해치고, 命의 이치는 은미하고, 仁의 도는 크니, 모두 夫子께서 드물게 말씀하신 바이다.”


다소 주석이 더 의미심장한 경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는 해설이긴 하지만, 위의 설명을 다 듣고서 읽으니 정자는 실제로 공자가 말했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고 정리했다는 느낌이 확연히 들지 않는가?


그 뜻이 크고 은미 하기 때문에 드물게 말했다는 것은 어렵고 복잡하기 때문에 그렇게 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어차피 형이상학적인 개념이고 공자에게 있어서 그것은 부단한 공부와 수양 과정을 통해 실천과 합치되었을 때 설명될 수 있는 개념인데 그것을 말로 설명한다는 것이 부족하다고 생각했기에 드물게 말한 것일 뿐이다.


<논어 집해(論語集解)>에서 하안(何晏)은 다음과 같이 이 장의 인(仁)을 설명한다.


“인(仁)이란 사람의 행동 가운데 가장 성대한 것이다. 이런 행동에 미치는 자가 적으므로 드물게 말한 것이다.”


이처럼 이해하는 방식은 제각기 다를 수 있지만, 근본적인 지향점과 공자가 이 부분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고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의 공부를 돌아보게 한 것은 다양한 방식으로 주효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부와 명예, 권력을 좋아하는 것은 사람의 본성에 해당한다. 그것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을 좋아한다고 해서 그것을 위해 살지는 않는다. 고기를 좋아한다고 해서 고기를 먹기 위해 돈을 버는 사람은 없다.

돈을 버는데 그중에서 반드시 먹고살아야 하고 먹는 것이 살기 위한 수준이 아니라 맛있는 것을 골라 먹을 수 있는 수준으로 부의 수준이 올라가고 그렇다면 더 맛있고 더 좋은 고기를 먹기 위해 돈을 쓸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그 고기를 먹기 위해 돈을 벌거나 일을 하는 것은 아니다. 부수적으로 그것을 먹고사는 일의 일환으로 들어가는 것일 뿐, 그것이 그 사람의 삶의 목적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삶의 목적이 되는 경우가 있다.


예컨대, 집안 형편이 넉넉하지 않은 학생이 학자금 대출도 받지 못해 알바를 해서 학비를 모으지 못하면 학교를 다닐 수 없게 되는 경우가 그 비근한 예에 해당할 것이다.


그런데 참 안타까운 것은 주객이 전도되는 것을 그 학생들은 모른다는 것이다. 대학을 왜 가는가?

공부를 왜 하는가? 에 대한 제대로 된 목적의식의 설정이 안 되어 있는 경우, 남들이 대학을 가니까 이름뿐인 대학을 가고, 그 대학의 등록금은 삼류대학일지라도 비싸니까 그 대학을 다니기 위해 어떻게 해서든 돈을 벌어 학비를 내야 학교를 다닐 수 있고, 그 힘든 알바를 하느라 정작 강의에 들어가면 허접한 강의 내용 때문인지 졸기 시작하고 그렇게 꾸역꾸역 지내는 생활이 지속된다.

그렇다면 그 학생이 대학을 다니는, 강의를 듣는 목적은 무엇인가? 궁극적으로 왜 공부를 하는가? 그 대학을 나와도 출세는 고사하고 취직이 보장된 것도 아닌데?


부와 명예와 권력이 자신의 삶의 목표인 양 그렇게 으르렁거리며 바득바득 대접받겠다고 위로 올라가려는 그들을 보며, '어차피 그 과정에서 한 나쁜 짓 때문에 감옥에 가서 말년에 추하게 끝나면서도 왜 그렇게 살지?'라고 당신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을 때도 그들은 당신들을 내려다볼 수 있어 뿌듯하다고 생각한다.


다시 한번 곰곰이 잘 생각해보라.

당신은 무엇을 위해 사는지?

매거진의 이전글 고인(古人)을 칭송함은 제대로 본받으라는 회초리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