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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Mar 29. 2022

우리 스승님에 대해 제대로 알려주마.

가장 가까이에서 경험한 스승 공자에 대한 안연의 묘사

顔淵喟然歎曰: “仰之彌高, 鑽之彌堅, 瞻之在前, 忽焉在後. 夫子循循然善誘人, 博我以文, 約我以禮, 欲罷不能. 旣竭吾才, 如有所立卓爾, 雖欲從之, 末由也已.”


안연(顏淵)이 크게 탄식하며 말하였다. “(夫子의 道는) 우러러볼수록 더욱 높고, 뚫을수록 더욱 견고하며, 바라봄에 앞에 있더니 홀연히 뒤에 있도다. 夫子께서 차근차근히 사람을 잘 이끄시어 文으로써 나의 지식을 넓혀주시고 禮로써 나의 행동을 요약하게 해 주셨다. (공부를) 그만두고자 해도 그만둘 수 없어 이미 나의 재주를 다하니, (夫子의 道가) 내 앞에 우뚝 서있는 듯하다. 그리하여 그를 따르고자 하나 어디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 장은 공자의 애제자이자 요절하여 스승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안빈낙도(安貧樂道)로 대표되는 안연(顏淵)이 가장 가까이에서 보고 느낀 스승을 묘사한 것이다. 이 장을 통해, 크게 세 가지의 방식에 감탄하고 공부의 안목을 넓힐 수 있다고들 한다.


첫 번째, 이제까지 공자가 스스로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표현했거나 단편적으로 언급한 것과는 다른 제자의 객관적인 평가를 볼 수 있다는 것. 두 번째는, 안연이라는 공자가 인정했던 제자의 글 수준과 그 안목과 어떻게 사람을 표현하는가에 대한 경지를 살펴볼 수 있다는 것.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스승과 제자의 가르침과 배움의 교감이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지에 대한 올바른 사례에 대한 제시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원문에서 세 문장으로 나누어 스승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내용에 대해 하나하나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첫 번째 문장에서는 스승이 아닌 스승의 道에 대해서 묘사하고 있다. 마치 기암절벽의 산을 묘사하는 듯한 표현처럼 되어 있고 주어가 생략되어 있어 얼핏 보면 착각할 수도 있을 정도의 표현으로 글이 시작된다. 주자는 이 문장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석하고 있다.


우러러볼수록 더욱 높다는 것은 (道에) 미칠 수 없는 것이요, 뚫을수록 더욱 견고하다는 것은 (道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이요, 道가 앞에 있다가 홀연히 뒤에 있다는 것은 황활하여 어떻게 형상할 수 없는 것이니, 이는 顏淵이 夫子의 道가 무궁무진하고 또 방향과 형체가 없음을 깊이 알고 감탄한 것이다.


주자의 해석을 읽으면 정말로 그렇겠구나 하지만, 다시 원문을 보고 그것이 스승의 도를 묘사한 것인지를 찬찬히 살펴보면, 이미 안연(顏淵)의 표현방식은 형이상학적인 것을 표현함에 있어 구체적인 형상화를 넘어 언외(言外)의 모순된 표현으로 일관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볼수록 더욱 높다는 것과 뚫을수록 더욱 견고하는 것은 그 높이와 깊이와 두께 일반적으로 상상하는 것을 훨씬 상회하고 있음을 강조하는 모순된 표현인 셈이다. 특히 마지막 앞에 있다가 홀연히 뒤에 나타난다는 것은 그야말로 마술이나 마법을 묘사하는 듯 일반인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님을 강조한 것이다.


두 번째 문장에서는 스승 공자가 자신에게 어떤 가르침을 주었는지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부분이다. 스승이 어떤 가르침을 주었는지는 도대체 공자가 제자들에게 어떤 가르침을 어떻게 주었는지에 대한 부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며, 무엇보다 애제자이자 수준이 높았던 안연(顏淵)이 직접 묘사하는 부분이기에 그 가르침의 대강을 파악할 수 있는 요긴한 증거이기도 하다. 주자는 이 부분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해설을 하고 있다.


文으로써 지식을 넓혀주고, 禮로써 행동을 요약하게 함은 가르침의 차서(次序)이다. 夫子의 道가 높고 묘하나 사람들을 가르침에 순서가 있음을 말씀한 것이다.


이는 우리가 <논어>를 공부하면서 그간 확인해온 공자의 가르침의 순서를 설명한 것이다. 단순히 내용이나 어떻게 가르쳤는지를 설명하는 것 대신 가르쳐준 순서를 알려준 것은 의미가 크다.


특히 처음 시작이 지식을 넓혀주기 위한 文이라는 것은 당연하다 하더라도 바로 뒤에 이어 나온 것이 행동을 요약해주는 것으로 禮를 언급한 것은, 예가 가지고 있는 개념적 속성에 대해서 명확하게 설명해주는 것과 동시에, 고리타분한 예의범절이 아닌 배운 것을 실천함에 있어 그 행동을 무엇으로 조절하는 기준으로 삼아야 하는가에 대한 개념으로 禮가 사용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내용이 얼마나 간략하면서도 명쾌하게 공자의 가르침의 순서와 방식을 설명하는 것인지를 눈치챈 이들 중에서 候氏(후씨)는 그래서 이 부분에 대해 이렇게 정리하고 있다.


“文으로써 나의 지식을 넓혀주었다는 것은 致知와 格物이요, 禮로써 나의 행동을 요약하게 해 주었다는 것은 ‘자기의 私慾을 극복하여 예로 돌아간다[克己復禮]’는 것이다.”


候氏(후씨)는 단순하게 언급되어 있는 것 같지만, 지식을 문(文)으로 넓혀주었다는 내용 안에 숨겨져 있는 ‘격물치지(格物致知)’를 끄집어내 주어 상기시켰고, 禮로써 행동을 요약하게 해 준다는 내용이 바로 극기복례(克己復禮)라는 가르침임을 다시 환기시켜주고 있다.


개념어에서 시작하여 그 세부적인 행동지침과 교과목으로 이어지는 내용에 대해 안연(顏淵)이 가장 상위에 해당하는 개념으로 정리한 것을 다시 풀어준 것에 불과하다. 그래서 程子(정자)는 다음과 같이 이 장을 정리한다.


“이는 顏子가 聖人을 가장 적절하고 합당하게 일컬은 곳(부분)이다. 聖人이 사람을 가르침은 오직 이 두 가지뿐이다.”


크게 말한 것 같지만, 결국 이 두 가지 안에 모든 방식의 배움과 실천의 양식이 다 담겨 있다는 감탄에 다름 아닌 해설이다.


이제 마지막 세 번째 문장에서 안연은 그래서 최종적으로 자신이 어떻게 변화하였고 앞으로 나아갈 바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는 것으로 스승에 대한 묘사를 정리한다.


말은 자신의 느낌이고 자신이 나아갈 바라고 하고 있지만, 그 행간을 보면 스승에 대한 적확한 묘사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낼 수 있다. 여기서 원문의 해석이 오해의 여지가 있어 부연하자면, ‘(공부를) 그만두고자 해도 그만둘 수 없어 이미 나의 재주를 다한다.’라는 의미는 자신이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스승의 가르침이 자신을 그렇게 이끈다는 의미이다.


특히, 뒷문장에 해당하는 ‘이미 나의 재주를 다한다’라는 의미는 스승의 가르침이 자신이 모르고 있던 잠재된 힘까지도 모두 끄집어낼 정도의 마법과도 같은 힘을 발휘한다는 신묘함을 드러내고자 하는 표현이다. 그런데 역시 이 장의 백미(白眉)는 마지막 문장이다. 스승의 도를 그렇게 찬미하고 명확하게 정리해놓고서는 한다는 말이, ‘그를 따르고자 하나 어디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이다.

이것이야말로 스승 공자가 성인(聖人)이면서 자신이 제대로 아는 것은 없다고 말했던 앞서 공부하며 살펴보았던 그 모습과 그대로 닮아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스승의 흉내를 낸 수준이 아니라 그 스승에게 배워 그대로 그 가르침이 몸에 배어 나왔음을 증명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경지이니 그의 요절을 스승 공자가 어찌 애통해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이 마지막 문장에 대해 주자는 다음과 같이 해설을 하고 있다.


이는 顏子가 자신의 학문이 이른 경지를 스스로 말씀한 것이다. 학문에의 기쁨이 깊고, 힘쓰기를 다하여 道를 봄이 더욱 가까운, 또한 그 힘을 쓸 데가 없는 것이다.


왜 이것이 자신에 대한 공부와 소감에 그치지 않는가 하는 것은 마지막 문장에서 자신이 모든 능력을 모두 발휘하게 하도록 가르치고 일깨워줘 놓고서 스승은 홀연히 또 손이 닿지 않는 저 한 단계 위에 우뚝 서 있다는 표현으로 대신하였다. 그래서 吳氏는 이 부분을 다음과 같이 다시 부연한다.


“이른바 卓爾(우뚝하다)란 것은 일상의 행하는 일 사이에 있는 것이요, 이른바 또한 대단히 힘을 쓸 수 없는 것이다.”


내가 굳이 설명하지 않았지만, 주자가 앞서, ‘힘을 쓸 데가 없다’라는 표현을 하고, 이어 씨가 ‘힘을 쓸 수 없다’고 표현한 것에 대해 의문을 가질만한 수준이면 중급 이상의 수준이 되는 것이다. 그러한 배우는 자들이 있을 것을 걱정하여 楊氏가 다음과 같이 그 부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해준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善人으로부터 채워서 大人에 이르기까지는 力行을 쌓아서 될 수 있지만, 大人이 되어서 化하는 聖人으로 말하면 力行으로 미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顏子가 (聖人의 경지에) 한 칸을 이르지 못한 이유인 것이다.”


‘力行’은 말 그대로 힘써 행하는 노력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렇게 힘써 노력하여 도달할 수 있는 경지가 있고, 그 이상의 성인(聖人)의 경지까지 올라서기 위해서는 또 다른 방식, 이른바 몸에 힘이 빠지는 자연스러운 무위(無爲)의 노력이 필요하다.


양 씨는 안연이 그 경지에 오르지 못하여 안타까워했다고 보고 <논어>의 앞장에서 살펴보았던 왜 안연이 스승 공자의 경지에서 한 단계가 부족하였는지에 대한 모호했던 설명의 실마리로 제공해주고 있다. 그 행간의 의미를 읽은 정자는 이 장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이것은 顏子가 孔子를 깊이 알고 잘 배운 것이다.”


마치 선문답 같은 내용으로 마무리한 것에 배우는 자들이 의문을 가질 것이 빤히 보이니 그 아래의 수준에 해당하는 배우는 자들을 위해 호씨(胡氏)가 그 행간의 의미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체 장을 정리하며 다음과 같이 상세히 풀어준다.


“顏子는 (앞에 아무 일이 없이) 깊이 감탄을 하였으니, 이는 顏子가 학문에 이미 터득한 바가 있으므로, 그 먼저는 어려웠고 뒤에 터득하게 된 연유를 말하고, 그 공을 聖人에게 돌린 것이다. 높고 견고하며 앞에 있다가 뒤에 있다는 것은 道의 本體를 말한 것이요, ‘우러러보고 뚫으며 바라보고 홀연히’라는 부분은 그 要諦를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夫子께서 차근차근히 잘 이끄시어 먼저 나를 文으로써 博學하게 하시어 나로 하여금 古今의 일들을 알고 일의 변화를 통달하게 해 주셨다. 그런 뒤에 나의 행동을 禮로써 要約하게 하시어 나로 하여금 배운 것을 존중하게 하고 아는 것을 행하게 하시니, 이는 마치 길을 가는 자가 집에 다다르고, 밥 먹는 자가 배부름을 구하는 것과 같았다. 이 때문에 공부를 그만두고자 하여도 그만둘 수 없어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조금도 쉬지 않았다. 그렇게 한 뒤에야 夫子의 서 계신 모양이 우뚝함을 보고, 비록 따르고자 하였으나 어찌할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이는 따르는 바를 게을리하지 않아 우뚝히 서있는 경지에 꼭 이르기를 구한 것이다. 아마도 顏子의 이 탄식은 ‘이 말씀에 종사하겠다.[請事斯語]’고 한 때에 ‘3개월을 仁을 떠나지 않았다. [三月不違仁].’라고 하였던 때에 있었을 것이다.”


안연(顏淵)만큼 스승의 자취를 따르고 스승의 경지에 오르고 싶었던 이는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그려지는 해설이다. 우리가 앞서 공부한 내용을 풀어 주석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안연(顏淵)은 ‘3개월을 仁을 떠나지 않았다. [三月不違仁].’ 이 의미는 3개월의 날짜를 헤아린 것이 아니라 스승의 경지에 이르러 자연스럽게 그것이 항상 몸에 배어 있지 않았다는 안타까움을 드러낸 것이다.


물론 안연(顏淵)이 이른 경지조차도 어느 누구도 감히 오를 수 없었던 경지였기에 그런 구체적인 표현을 쓴 것이었으나 이 장에서 스승을 묘사했던 바와 같이 가난함조차 불편하게 여기지 않는 범인(凡人)의 경지를 이미 오래전에 넘어섰던 안연마저도 자신이 어느 정도 올라섰다고 생각하면 스승은 벌써 저만치 우뚝 솟아 손에 닿을 수 없는 경지에 이르러 계셨으니 그것을 어떻게 해보겠다고 힘을 쓰거나 할 처지가 아니었다는 말이다.

안연(顏淵)이 누구인지 모두가 알고 있는데, 그 천하의 안연이 이렇게까지 스승의 단계를 표현한다면, 그 누가 공자가 성인이라는 것을 의심하고 평가절하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안연(顏淵)의 이 표현은 단순한 스승에 대한 존경이나 찬미에서 나온 것이 아닌 실질적인 공부를 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단계와 마음을 그대로 드러냈고, 그 과정 전체를 인도해준 스승의 가르침의 요지를 평가 속에서 녹여내는 경지를 보여주었다. 말을 더 보태거나 꾸미지도 않고 그렇다고 정확하지 못하게 애매모한 설명으로 얼버무리지도 않은 이 묘사와 설명이야말로 안연의 수준과 스승 공자의 경지, 두 가지를 너무도 명확하게 그려내는 평가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고전을 공부하는 것, 그리고 아침마다 이렇게 <논어>를 읽고 공부하는 것은 막연한 형이상학을 오르지도 못할 것이라고 선 그으면서 막연하게 동경하는 것이 아님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해주는 가르침에 다름 아니다. ‘도대체 왜 공부하는가?’에 대한 화두는 이제까지 공부를 해오면서 수차례 묻고 또 물었다.


그것은 공자가 그러하였고, 공자의 문하에서 배웠던 제자들이 모두 거쳤던 과정에 다름 아니다. 그것을 몰라서 묻고 또 물은 것이 아니다. 그것을 제대로 알기가 어려우며, 알게 되더라도 실천에 옮기는 것이 더 어렵고 그보다 그저 무식하게 노력하여 실천에 옮기는 것이 다가 아니라 그것을 굳이 억지로 내가 하고자 노력하지 않더라도 자연스럽게 나올 수 있는 단계에 이르기까지의 수양을 위한 과정이고 단계였음이다.

스승 공자와 안연

그 말씀을 제대로 해독해내는 것도 만만한 것이 아니지만, 그다음 단계를 통과하고 나면 다시 그다음 단계가 계속해서 나오기 마련이다.


사람의 삶이 그러하다. 모두 끝난 것 같고, 모두 이룬 것 같더라도 또 그다음이 보이기 마련이고, 모두 해결한 것 같은데 또 고민이 나오기 마련이다. 그래서 배우고 익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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