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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Mar 30. 2022

누가 너에게 그리해도 된다고 가르치더냐?

‘이 정도는 괜찮지 않나?’ 하는 안일함에 대한 일침

子疾病, 子路使門人爲臣. 病間, 曰: “久矣哉由之行詐也! 無臣而爲有臣, 吾誰欺? 欺天乎? 且予與其死於臣之手也, 無寧死於二三子之手乎! 且予縱不得大葬, 予死於道路乎?”


공자께서 병환이 심해지자 子路가 門人으로 家臣을 삼았다. 병환이 좀 덜해지자 말씀하셨다. “오래되었구나, 由가 거짓을 행함이여! 나는 家臣이 없어야 하는데 家臣을 두었으니, 내 누구를 속였는가? 하늘을 속였구나! 또 내가 家臣의 손에서 죽기보다는 차라리 자네들 손에서 죽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또 내가 비록 성대한 장례는 못 받는다고 할지라도 길에서 죽기야 하겠느냐?”

자로(子路)

이 장은 조금 기가 막힌 일화를 배경으로 한 사건이다. 공자가 병환이 심해져 죽을지도 모르는다고 생각했던 자로(子路)가 스승인 공자가 한때 노나라의 대부였다는 사실을 빙자하여 같은 문인 중에서 한 사람을 가신(家臣)으로 삼아 장례 준비를 했던 것이다.


당시의 예법에 의하면 현직에 있는 대부라야 비로소 가신으로 하여금 장례를 치르게 할 수 있었는데 스승을 위한다는 마음에 자로(子路)가 참람된 행동을 벌이고 만 것이다. 다행히 병에서 조금 차도가 생겨 자리에서 일어난 스승 공자가 이 사실을 알고 대노한 것이 바로 이 장의 언급이다.


먼저 주자가 공자의 이 발언에 대해 어떻게 해설하고 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夫子가 이때에 이미 벼슬에서 떠나 家臣이 없었는데, 子路가 家臣을 두어 공자의 喪을 치르고자 한 것이니, 그 뜻은 실로 聖人을 높인 것이나, 높이는 방법을 알지 못한 것이다.


스승을 높이려고 한 의도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잘못된 방법을 지적한다. 공자가 이 사실을 알았다면 당연히 미연에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금지했을 것이라는 의문을 갖는 이들이 시비를 걸까 싶어 주자는 다시 그 부분에 대한 변호도 곁들여 다음과 같이 해설한다.


병이 심할 때는 알지 못하였다가 차도가 있은 다음에야 그 일을 아셨다. 그러므로 말씀하시기를 “내가 家臣을 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어서 속일 수 없다. 그럼에도 家臣을 두게 하였으니, 이는 하늘을 속이는 것일 뿐이다.”라고 하신 것이다. 사람이 하늘을 속임은 막대한 죄인데, 이것을 끌어다가 자책하였으니 그 子路를 꾸짖으심이 깊은 것이다.


원문에서 알 수 있듯이 공자는 자로(子路)를 꾸짖거나 혼내지 않는다. 자로(子路)를 너무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히려 이런 꾸짖음의 방식은 자로(子路)에게는 더 큰 회초리일 것임을 스승도 제자도 모두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공자의 꾸짖는 방식이 분노의 감정을 상대에게 쏟아내는 방식이 아닌 자신에게서 잘못을 구하는 방식임을 공자의 가르침을 받고 공부한 자라면 누구나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공자의 꾸지람이 정점에 달하는 것은 마지막 문장에 있다. 단순한 분노나 꾸지람이 아닌 가르침을 주기 위해서는 호된 회초리 같은 그 무언가가 필요하기 마련이다. 여기서는 극단적인 비유로 공자가 가신(家臣)에 의해 성대하게 장례를 치르는 것이 얼마나 의미 없는 참람된 행동인지를 강조하며 그렇게까지 하지 않더라도 장례를 제대로 치르지 못하고 길거리에 시체가 버려질 일이 없을 텐데 굳이 그렇게 했느냐고 꾸짖음과 동시에 일깨워준다. 이 내용에 대해 주자는 다음과 같이 해설하고 있다.


길거리에서 죽는다는 것은 시신이 길거리에 버려져서 장례하지 않음을 말하니, 또 반드시 그러할 것이 없는 이유로써 깨우쳐 주신 것이다.


바로 이전 장의 공부에서 안연(顏淵)이 스승의 가르침을 언급하면서 예(禮)를 통해 행동을 절제해주었다고 하였다. 예에 대한 다양한 상황과 그 언급에서 하나의 기준이 되는 것은 때와 신분에 맞춰서 하지 않는 참람된 예는 사회질서를 파괴한다는 것이 공자의 일관된 가르침이었다.


예의 기준을 어겨가면서 참람된 행동을 하는 것은 자신이 평생을 쌓아왔던 가르침을 무너뜨리는 표리 부동한 행동에 다름 아닌 것을 공자는 물론이고 제자들도 알고 있었기에 이러한 극단적인 설명으로 가르침을 준 것이다.


그래서 범씨(范氏)는 이 장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부연하여 설명하고 있다.


“曾子가 臨終時에 일어나서 누워 있던 깔 자리를 바꾸도록 하면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바름을 얻고 죽으면 그뿐이다.’하셨다. 그런데 子路는 孔子를 높이고자 하였으나 家臣이 없어야 할 경우에 家臣을 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이 때문에 거짓을 행함에 빠져 죄가 하늘을 속임에 이르렀으니, 君子는 말과 행동에 있어 비록 하찮은 것이라도 삼가지 않을 수 없다. 夫子께서 子路를 깊이 징계하신 것은 學者들을 경계시키기 위한 것이시다.”


이 주석에서 핵심이 되는 지적은 바로 ‘말과 행동에 있어 비록 하찮은 것이라도 삼가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별것 아니라고 생각하는 그 사소한 것, 그리고 내 스승은 성인이신데, 그렇게 참람되이 하는 이들도 하는데 우리 스승님이 당연히 그 정도 한다고 문제 될 것은 없지 않겠는가 하는 그 안일함이 둑을 무너뜨리는 바늘구멍이 된다는 것을 경계한 것이다.


그래서 양씨(楊氏)는 이 장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앎이 지극하고 뜻이 誠實한 자가 아니면, 지혜를 쓰고 스스로 사사롭게 하여, 無事한 것을 행할 줄 몰라, 왕왕 거짓을 행하고 하늘을 속임에 빠지면서도 그것을 알지 못한다. 子路가 바로 이러한 경우에 해당된다.”


이 주석에서 지적하는 행간은 앞서의 구체적인 설명의 확장이다. 결국 사사로운 사욕에서 모든 것은 비롯된다. 내가 사랑하는 가족, 내가 존경하는 스승, 그리고 ‘우리’만 생각하게 되면 우리만 눈감으면 문제 될 것이 없다는 안일함이 고개를 쳐들게 된다. 자로(子路)가 아무리 우직함의 대명사라고 하지만 현재 대부가 아닌 스승이 가신을 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모를 리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공자는 더 속이 상했고 화가 났었을 것이다. 공자의 가르침은 다른 사람들이 모른다고 해서, 그래도 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자가 원문에서 하늘을 속였다고 표현한 것이다. 실제로 현대어에서도 많이 사용되는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내가 안다는 말은, 하늘과 땅이 바로 나를 가르치는 말이다.


즉, 아무도 모른다고 하는 말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자신의 안일함이 저지른 실수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자신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하늘을 우러러 당당히 드러낼 수 없다는 의미로 사용된 말이다.


공자가 정말로 병세가 위중하여 죽었더라면, 물론 그런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 생각하여 자로(子路)는 그것이 안 되는 행동인 줄을 알면서도 그리 준비를 했었다. 이제까지 보아왔지만, 자로(子路)는 잘못된 것을 보면 주먹이 먼저 나가는 다혈질의 정의구현자였다. 그런 그가 왜 그런 행동을 벌였을까?

이 장과 이 장의 주석에서 공자를 비롯하여 모든 학자들은 자로(子路)를 심하게 비난하지 않는다. 자로(子路)의 행동이 무식에서 나온 것도 아니고 예를 잘 몰라서 그런 것도 아니고, 실제로 그 방법을 어찌해야 할지 몰라서 그런 것도 아니었다. 스승에 대한 절대적인 존경이라는 그의 사사로움이 일어나면서 그런 행동을 했다는 것을 심정적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해한다는 것과 자신이 같은 입장이었다면 그렇게 하는 것과는 또 다른 이야기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런 유혹에 빠질 수 있음을 공부하는 자들도 알고, 그것에 대한 끊임없는 공부와 수양을 해나가는 입장이기에 그저 자로를 비난하는 것이 의미가 없음을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앞서도 설명하였지만, 아주 사소하고 별것 아닌 것에 대해서도 늘 삼가고 예에서 벗어나는 행동을 보여서는 안 된다고 가르친다. 여기서 이 장에 숨겨진 의미를 또 하나 간과하고 지나쳐서는 안 된다. 이 장은 ‘공자의 죽음’이라는 중차대한 일에 대해서, 그리고 그와 이어지는 ‘장례’라는 예에서 가장 중시하는 형식 중에 하나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이것은 결코 사소하고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 일화는 예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가장 큰 일에 대해서 사사로움이 들어가서 일을 어떻게 망쳐 사회의 질서를 무너뜨릴 수 있는지를 경고하는 아주 적확한 구조를 가지고 있었기에 하나의 장으로 구성될 수 있었던 것이다. 정말로 사소하여 다른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일도 아니고 장례라는 것은 치르게 되면 모든 이들이 알게 되는 당시나 지금이나 대사(大事)에 해당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중요하고 큰일이 어그러지는 것은 지극히 작다고 생각하는 한 부분에서 시작될 수 있음을 권계한 내용을, 바로 이 장은 지적하고 있다.

사람들은 말하곤 한다, 작고 세세한 일에 집착을 보이지 말고 큰일에 신경 쓰라고.


그런데 참 우스운 것은 큰일이 망쳐진 원인을 나중에 분석하다 보면 아주 상관없을 것 같은 지엽말단적인 것이 잘못되면서부터 틀어져가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반대로 큰일이 이루어지는 것은 큰 일만 신경 쓰는 맨 위의 사람들이 성공시키는 것이 아님을 큰 일을 성사시켜본 이들은 안다.


아주 사소하지만, 우연처럼 시작된 그 일들을 차곡차곡 쌓아가기 시작하면서 그것이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큰 일은 마침내 빗물이 강을 이루고 바다로 흘러가듯이 유연하게 완성되는 과정을 거친다. 그 과정에서 사소한 돌팔매나 누군가의 장난질 하나가 물의 흐름을 완전히 틀어놓거나 예상치도 못하고 막아버리는 일은 아주 아무렇지도 않게 생기곤 한다.


그래서 어떤 조직에서 반드시 성사해야만 한다는 큰일은 어느 한 사람의 독단적인 결정이나 노력만으로 이뤄지는 일이 없다. 혹시 그래보인다고 하더라도 그 한 사람의 보이지 않는 노력에는 그를 만들기 위한 그의 부모님이 계셨고, 그의 주변을 받쳐주며 그가 그렇게 노력하고 과감한 결정을 할 수 있도록 지지하고 지원해준 환경과 사람들이 있었다는 말이다.


수천 년이 지난 대한민국에서도 버젓이 공자가 그렇게 경고하고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했던 일들이 수차례 벌어졌고 또 벌어지고 있다. 정작 당사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대통령이 사는 청와대에 아무런 직책도 학력도 지위도 경험도 없는 여자가 버젓이 들락거리는 일을 아무도 모를 것이라고 여기며 그녀의 개인 운동 트레이너를 턱 별정직 공무원으로 고용하고 아무런 보직이나 신분을 가지고 있지 않은 그녀를 청와대의 인원들이 마치 V.I.P 대하듯이 했다.


우리가 생각하는 저 미개한 동남아의 나라도 아닌 차이니즈 타이베이 같은 곳에서도 벌어지지 않을 지경의 그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실제로 거기서도 더 심한 일이 벌어지는데 내가 모르고 있을 수도 있으니 유보적인 표현으로 대신한다. *내가 왜 그 미개한 이들을 그렇게 폄하하는지 궁금한 학도들은 아직 읽지 않은 나의 브런치 북에 힌트가 있음을 참고하길 바란다. )


자기 자식이 공부를 못한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국회의원이니까 까짓 거 다른 사람들 모르게 권력을 쓴답시고 생전 듣보잡이던 전형을 그 해에만 만들어 자기 자식을 대학에 입학시키거나 정상적인 시험으로는 도저히 들여보낼 수 없을 것 같으니까 자신의 위치와 네트워크를 이용하여 특채의 형태로 전형의 조건에도 맞지 않는데 불쑥 중간에 집어넣거나 자기 재산은 모두 기부한다고 해놓고서는 재산을 해외나 다른 유령회사에 빼돌려놓고서는 장사꾼이 아닌 척 군다거나 그 모든 행동들은 그들을 파멸로 이끌었고, 앞으로 이끌 예정이다.


도둑놈 주제에 장수를 하여 많은 유자(儒者)들에게 회자되었던 도척(盜跖)이 훌륭한 일을 많이 하였기 때문에 하늘이 천수(天壽)를 누리도록 허락한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모르거나 자신의 한정된 지혜로 풀 수 없는 상황이 생겼을 때 천운(天運)을 말한다. 그런데 하늘은 그렇게 사람들이 임의로 필요할 때만 찾는 존재가 아니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하늘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다는 점에서 바로 나 자신과 일치되는 존재이다. 그렇다면 다른 누구도 모르는 당신만의 잘못과 부족함과 부끄러움을 당신은 알고 있다는 의미가 된다. 도척(盜跖)이 정말로 행복하게 누릴 것을 다 누리다가 죽었을 수도 있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분명히 잘못을 해놓고서도 감옥에 가지 않고 천벌을 받지 않고 호의호식하며 오히려 승승장구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들이 워낙 많기 때문에 굳이 도척(盜跖)의 예까지 들지 않더라도 우리는 세상이 선한 것만은 아니라고, 하늘이 있기는 정말 있는 거냐고 술을 마시고 욕지거리를 하곤 한다.


하지만, 하지만 말이다.

당신이 단 한번 살며 원하는 삶이 도둑질을 하든 다른 사람을 해하면서까지 자기 혼자만 잘 먹고 잘 사는 것이며 그러면서도 하늘의 천벌을 받지 않고 그저 천수를 누리는 것인가? 정말로 그러한가?


굳이 국회의원 배지까지 달고 표리 부동한 얼굴로 작정하고 막장의 길로 달리겠다고 하는 바보가 아니라면 그런 삶을 바라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공자가 일깨우고자 했던 것은 악한 이들이 가지고 있을지도 모를 일말의 선함이 아니라 모든 일반인들이 본래 가지고 있던 선한 바탕을 깨닫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을 해하고 나면 불편해지는 마음, 다른 사람을 밟고서 내가 올라서 봐야 행복할리 없을 거라는 지극히 상식적인 그 선함 말이다. 그런데 그것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그 선함이 어떤 것인지 다시 명확히 인지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공부하는 것이고, 그것을 알아도 행하지 않는 관악산 아래 경성제대 출신의 사람들처럼 출세 욕망의 일환으로 삼지 않고 공부하여 판단하게 된 옳은 것이 무엇인가를 기준으로 삼아 바르게 행동하는 것을 부단히 실천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장의 가르침처럼 내 스승, 내 부모, 내 아이를 위해서라면 그 정도는 해도 되지 않을까? 정작 직접적으로 다른 사람들의 피해를 입히는 것도 아닌데 괜찮지 않을까? 하는 안일함은 언제든 파고든다. 안연(顏淵)조차도 仁이 몸에서 떠나지 않았을 3개월이 아닌 다른 틈새는 이런 식으로 만들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자로(子路)가 안연(顏淵)보다 수준이 심하게 떨어져서 그런 일을 벌인 것이 아님을 확인케 하는 대목이다.

그렇게 공부하고 성인이던 스승을 곁에 늘 보좌하고 보고 배운 이들조차도 그런 실수를 저지른다. 하물며 이제 공부를 해야겠다고 마음만 먹은 당신이야 일러 무삼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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