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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Mar 31. 2022

쓰여지길 바라지 않는 군자는 없다.

다만, 그것이 도에 맞지 않으면 나서지 않을 뿐이다.

子貢曰: “有美玉於斯, 韞櫝而藏諸? 求善賈而沽諸?” 子曰: “沽之哉! 沽之哉! 我待賈者也.”
子貢이 말하기를 “여기에 아름다운 玉이 있을 경우, 이것을 궤 속에 넣어 감추어 두시겠습니까? 아니면 좋은 값을 구하여 파시겠습니까?”하자, 공자께서 대답하셨다. “팔아야지, 팔아야지. 그러나 나는 좋은 값을 기다리는 자이다.”

이 장은, 스승과 제자 간의 미묘한 생각 읽기가 오가는 부분이 있어 세밀하게 읽어내야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자공이 천하를 주유하던 스승 공자에게 은유적인 질문을 던지는데 그 질문의 의도를 잘 파악하는 것에서부터 상황을 이해하는데 실마리를 제공한다. 


현대의 해설서에서는 이 부분을 자공이 재주가 있으면서도 천하를 주유하며 중용되지 못하는 스승 공자를 위로하기 위해 던진 질문이라고 하는데, 그들이 제대로 행간을 읽었는지에 대해서 나는 잘 알지 못하겠다. 왜냐하면, 위로를 하기 위한 질문이라고 보기엔 스승의 생각을 떠보려는 것 같다는 의구심을 지우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 근거는, 자공의 성향과 능력과 관련이 있다. 자공이 어떤 능력을 가진 인물인지에 대해서는 앞서 많이 언급한 바 있다. 그는 이재(理財)에 밝은 장사꾼 출신이었다. 그래서 공자가 천하를 주유할 때에도 의식주를 해결하는 재무를 총괄 책임하고 살림살이를 책임지는 역할을 계속해서 맡아온 바 있다. 굳이 그것을 모르거나 기억이 나지 않더라도 원문의 질문만 보더라도 그가 비유하는 상황을 보면 알 수 있다. 


대개 자공이 예를 드는 비유의 소재나 그 형태를 보게 되면, 물건을 사고파는 것이나 물건의 가치를 은유하는 경우를 쉽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자공은 스승을 떠보는 듯한 질문을 던진 것일까?


이 장의 내용에 대해 주자는 어떻게 판단하고 있는지 그의 해설을 먼저 살펴보기로 하자.


자공은 공자가 도를 지니고 계시면서도 벼슬하지 않기 때문에 위의 두 가지를 가설하여 물은 것이다. 공자께서는 진실로 팔아야 하겠으나 다만 값을 기다려야 할 것이요, (팔리기를) 구해서는 안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자공은 두 가지의 대답을 가설하고 물었다고 주자는 보고 있다. 대답이 두 가지 정도로 나올 수 있다고 가설하여 묻는 질문은, 상대를 위로하기 위한 질문이라고 보기에는 어려운 부분이 있다. 


굳이 그런 오독을 현대 해설서의 저자라고 하는 이들이 했던 근거라면, 자공이 스승에게 충분한 능력(道)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왜 그것을 펼치지 못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한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 또한 문제가 있다. 


자세히 살펴보면 공자는 이미 자공의 질문이 갖는 의도와 행간의 의미를 모두 파악하고 대답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데, 자공의 질문 자체가 공자가 능력을 갖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팔기 위해, 즉, 위정자들에게 어필하는 것이 부족하지 않느냐는 의구심을 전제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공자의 대답은 자공이 전제부터 잘못 생각하고 있음을 지적하기 위해 오버하면서 대답해준다.


주자는 공자의 대답을 해설하며 ‘팔아야지’라는 말을 두 번이나 강조하며 오버한 것은 판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기본 전제이지만, 가장 중요한 요소가 빠져 있어, 팔리기를 구해서는 안된다는 말로 직접 나서서 자신을 등용해달라고 설치고 다닐만한 것은 아님을 에둘러 가르쳐주고 있다. 

자칫 말장난처럼 들릴 여지가 있기도 한 부분인데, 미묘한 차이가 있으니 그 행간의 의미를 잘 새겨야 한다.


다시 설명하자면, ‘자신이 위정자들에게 팔리기를 원하지 않는 군자는 없다’는 명제를 전제로 삼고 있다. 대개 은자(隱者)의 대명사라고 하면, 백이(伯夷), 숙제(叔齊)나 강태공(姜太公)을 든다. 그런데 공자의 기본 전제에 의하면 이들 역시 정치를 등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자신을 알아줄 사람을 기다렸다는 설명이다. 


즉, 세상에 나와서 자신을 유세하며 써달라고 매달린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가치를 가진 사람이 찾아와 자신을 쓰겠다고 하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라는 설명이다.


그래서 이 의미를 읽어낸 범씨(范氏)는 다음과 같이 이 장의 의미를 정리한다.


“君子가 일찍이 벼슬하려고 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또 그 道(정당한 방법)를 따르지 않음을 싫어한다. 선비가 禮遇를 기다리는 것은 玉이 값을 기다리는 것과 같다. 예컨대, 伊尹이 華野에서 농사를 짓고 伯夷와 太公이 바닷가에서 은거할 때에 당시 湯王과 文王이 없었다면 이들은 그대로 일생을 마쳤을 뿐일 것이요, 반드시 道를 굽혀 남을 따르고 玉을 자랑하여 팔리기를 구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주석은, 공자가 이 장의 대답을 통해 자공(子貢)의 불만 어린 의구심에 일침을 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제까지의 <논어>에 나온 질문과 공자의 대답이 갖는 구조는, 공자가 질문자의 성향과 상황을 모두 파악하여 그 사람의 눈높이 맞는 깨달음을 주는 방식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뜬금없이 이것을 자공이 천하를 주유하는 스승을 위로하기 위한 것이라는 해석은 설득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범씨가 읽어낸 행간의 의미를 정리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군자가 벼슬을 하지 않겠다고 마음을 먹은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다만 그렇게 보였던 이유는 자신이 세상에 나서는 과정에서 道(정당한 방법)에 부합하지 않는다면 자신의 입신양명을 위해 벼슬을 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무엇을 우선으로 삼는가에 대한 문제를 전면에 내세운 것이다. 현상만을 본다면 자공의 질문은 그의 성향과 전직에 어울리게 상당히 현실적인 질문이다. 능력이 안 되는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천하를 주유하고 자리를 잡지 못하는가라고 의문을 제기한 조금 과장하자면 불만을 내세운 것이다. 하지만, 공자는 제자 자공이 이해하지 못한 핵심적인 부분을 깨라고 다시 한번 일깨워주어 자공이 가지고 있는 일반인들의 고정관념에 대해 오해임을 해명한 것이다.


자공의 비유를 그대로 가지고 와서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정말로 좋은 옥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재(理財)에 밝은 자공의 입장에서 보면, 그렇게 좋은 물건이 있다는 것을 세상에 널리 알리고, 사려는 사람이 찾아오기 전에 사고 싶어 하는 사람이 생기도록 일종의 마케팅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논리이다. 


그런 입장에서 보면 옥을 가지고 있다는 것조차 사람들이 알지 못한다면 그것을 살 사람이 누가 있을 것이며, 그렇게 가지고만 있는 행위 자체는 결국 그 옥을 팔 생각이 없는 것이 아닌가?라는 의구심이 담긴 일종의 도발이라고까지 볼 수 있는 질문인 것이다. 그나마 스승이기에 예의를 갖춰, 그것을 파시겠습니까?라고 물은 것은, 전체적인 앞서의 상황을 모두 감안하고 물은 것이다.


원문에서 ‘궤속’이라고 표현되었던 ‘온독(韞櫝)’이라는 표현은 뒤에 배울 ‘양화(陽貨)편’의 1장에서 언급되는 ‘회보(懷寶)’라는 표현과 같은 의미로 사용된 것이다.


이에 대해 공자는 단호하게 그것이 아님을 설명해준 것이다. 옥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굳이 그것을 들고나가서 이런 옥이 있으니 사라고 하는 것은 군자가 할 행동이 아니라고 선을 긋는다. 

그리고 그 문구에는 없지만 범씨가 알아들었으니 눈치 빠른 자공이라면 당연히 이미 알아들었을, ‘팔아야 한다고 결정하는 기준’에 대한 보이지 않는 핵심이 분명히 존재한다. 


그 내용에 대해 굳이 설명하지 않은 것은 너무도 명확하고 수차례 설명한 부분이기 때문이라는 점과 무엇보다 그 부분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설명으로 들어가면 이야기할 것들이 너무도 많아지기 때문일 것으로 짐작한다.

그 도라고 하는 것은 범씨의 주석을 해석하면서 내가 붙인 ‘정당한 방법’이라는 설명으로도 가능하지만, 그 과정에 어떠한가에서부터 시작해서 군자를 등용하겠다는 위정자의 의도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 위정자가 이제까지의 정치를 올바르게 했는지, 게다가 군자를 등용하려는 위정자가 군자에게서 어떤 가치를 높이 보았는지에 대한 것 등등 살펴보아야 할 것들이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범씨는 그것을 아울러 설명하기 위해 전례를 들었다.


유학에서 예시되는 대표적인 은자(隱者)들이 숱한 세월을 모두 보내면서도 결코 부화뇌동(附和雷同) 하지 않고 자신의 진정한 가치를 알아줄 군주를 차분히 기다렸고, 결국 세상이 안정되고 그런 군주가 나와서야 그들을 찾았다는 점을 강조한 것으로 공자의 이야기에 객관적인 무게를 싣고 있다.


사실 현실적으로 스승을 필두로 한 공자 사단을 먹여 살리고 그 기반을 갖춰야 했을 자공이 얼마나 답답했으면 저런 질문을 했을까도 이해가 되고, 자신의 마음과는 달리 세상은 안정되지 않고 자신의 가치를 알아봐 줄 위정자는 나타나지 않은 채 말년으로 치닫는 그 상황이 좋았을 리 만무하다. 그러나, 역시 성인은 달랐다. 제자의 그 조바심을 오히려 에둘러 표현하여 스스로 깨닫게끔 하는 대답의 방식을 취해 자공이 스스로의 생각할 수 있도록 여지를 준다.


이 장의 내용이 은신하여 재능을 감춰두는 것보다 세상에 발휘하는 것이 좋다는 식으로 버젓이 오독하고서는 설명하는 사람까지도 보았다. 도대체 멀쩡한 의미의 글을 그렇게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지 오독하는 방식도 여러 가지라는 생각을 갖게 만드는 이들이 많다.


대선 직전에 그렇게 법비를 욕하며 1년 안에 손가락을 자르고 싶어질 거라고 말하던 이는 인수위원장으로 지금 당선인을 돕는다며 신이 나있다. 그의 그러한 모습을 보면서 문득 이 장이 떠올랐다. 그는 자신이 또 ‘철수’에 해당하는 후보 사퇴를 하면서 정권교체를 위해서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했다. 


그의 입에서 나왔던 ‘불가피’라는 단어는 지금은 당선된 이가 빨간당을 선택한 것이 불가피한 것이라고 할 때 언급되었던 그 ‘불가피’이다. 그 말인즉은, 만약 파란당에서 그를 선택해주었다면, 그는 파란당이든 빨간당이든 자신을 불러주는 쪽에 가서 대통령이 된다는 자신의 목적만 달성하면 된다고 여기는 것을 은연중에 드러내고 말했다.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고 추구하는 바가 다르니 그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을 나와 다르다고 비난할 것은 없을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개인의 취향 차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근거가 바로 이 장에서 공자가 말한 핵심 내용에서 나온다.


세상을 바로잡겠다고 공부하고 정치에 투신한 이들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숱하게 많아왔고 지금도 쏟아지고 있다. 그런데 만약 세상이 혼탁하고 모든 위정자들이 제대로 된 안목조차 가지고 있지 못하다면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불가피’하다는 명분을 내세워 일단 아무에게나 의탁하여 출세를 하고 난 뒤에 내가 출세하고 나서 정점의 자리에 서게 되면 그때 가서 제대로 세상을 바꾸겠다. 


그전까지는 더럽고 치사하더라도 어쩔 수 없이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하겠다.라고 하는 논리가 정당하다고 할 수 있을까? 공자는 인간의 그 본성적인 부분까지도 감안하여 이 가르침을 자공에게 던져주고 있다. 자공의 질문이 갖는 행간의 깊이를 넘어서 사람들이 생각할만한 그 고민의 지점을 이미 간파했던 공자는 수천 년 전에 일목요연하게 지적한 것이다.


고민의 지점이라고 했던 것은, 처음부터 대놓고 값싸게 출세를 하겠다는 사람들은 아예 논외로 하더라도, 매번 철수만 하다가 정권교체를 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통합을 결정했다고 하는데, 그것은 매번 철수만 했던 이들이 주로 하는 변명이다. 김영삼이 대통령이 되겠다고 통합 어쩌고 했던 것도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맥락이다.

만약 당신이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데, 정말로 당신만의 힘으로는 역부족이라고 생각되면 당신이 불의라고 생각했던 이와도 과감하게(?) 손을 잡는 것이 정당성을 담보하는가? 그것에 대한 해답은 그 비겁한 변명을 한 이들의 역사를 살펴보면 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자신이 올바른 道에 부합하지 않을 때,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라는 궤변을 내놓았던 이들이 결국 자신이 정권을 잡게 되거나 위에 올라갔을 때 본래의 성정을 되찾는 경우를 나는 단 한 번도 역사를 통해 본 적이 없다. 수차례 강조하지만, 역사를 공부하는 것은 변하지 않은 인간의 본성을 객관적인 사실을 통해 검증하고 똑같은 실수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그 긴 역사의 기록 중에서 단 한 번도 원래 올바른 것을 잠시 굽혔다가 다시 돌아와서 제대로 뜻을 펼친 이가 없었다는 점에서 다른 대의명분이랍시며 그들이 떠들어댔던 것들은 모두 핑계이고 변명일 뿐이다. 그들은 그저 자신이 그대로 사그라들 것이 두려워 어떻게 해서든 권력에 기생하겠다고 그러한 변명으로 자신의 구차함을 포장하고 싶어 할 뿐이다.


앞으로 이어지게 될 총리 인선부터 인사 청문회를 보게 되면, 이제까지의 청문회와 크게 다르지 않은 인간군들의 구차함을 당신은 목도하게 될 것이다. 문재인 정부에서 인사 참사로 일컬어지던 수많은 이들은 최소한 자신이 어떤 책을 잡힐지를 알면서도 그 자리에 뻔뻔하게 얼굴을 들이민다는 것이다. 


심지어, 청와대 인선팀의 막무가내 정신으로 그냥 밀어붙인 경우도 우습지만, 그마저도 밀어줄 수 없어 낙마했던 이들은 자신들이 원하던 자리를 얻지도 못하고 평생의 오점을 방송과 지면을 통해 전국에 공개하고서도 다음날 생업의 자리에 복귀하는 서로 민망한 일을 버젓이 벌인 것이다.

그와 같은 일을 벌인 이유는 단 하나이다. 그들은 옥을 가지고 있지도 못하면서 자신이 옥을 가지고 있다며 그것을 사달라며 대규모 마케팅 행위를 한 것이다. 정말로 옥을 가지고 있는 자는 그렇게 함부로 자신의 자손들이 두고두고 창피할 그 흑역사를 스스로 연출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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