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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Apr 01. 2022

어디에 사는가보다 더 중요한, 내 뜻을 펼칠 수 있는가

내 뜻을 펼칠 수만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子欲居九夷. 或曰: “陋, 如之何?” 子曰: “君子居之, 何陋之有?”
공자께서 九夷에 살려고 하시니, 혹자가 말하기를 “(그 곳은) 누추하니, 어떻게 하시렵니까?”하였다. 이에 공자께서 대답하셨다. “군자가 거주한다면 무슨 누추함이 있겠는가?”

이 장에서는 앞서 공부했던 공야장편의 6장에서 언급했던 ‘도가 행해지지 않으니 뗏목을 타고 바다로 나가야겠다’는 내용과 맞물려 이해되는 부분이다. 왜 공자가 갑자기 九夷로 가려고 했는가에 대한 의미를 같은 이유에서 찾은 것이다. 이 장에 대해 송나라의 유학자 형병(邢昺)은 “공자께서는 중국 땅에서 도가 행해지지 않는 것을 싫어하여, 마음이 실의에 빠졌기 때문에 구이에 가려고 하였다.”라 설명하였다.


그런데 이 장의 내용이 간단하게 이것으로 끝이라고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이 장에는 따져봐야 할 것들이 너무도 많이 산재해있다.


특히, 공자가 그렇게 이야기한 이유에서 시작해서, 그 이야기를 듣고 ‘혹자’(어떤 이가 갑자기 나오면 의심하고 읽어야 한다. 그가 그냥 엑스트라가 아닐 확률이 상당히 높기 때문이다.)가 묻는다. 오랑캐들이 사는 곳인데 누추하지 않느냐고, 그랬더니 군자가 거처하게 되면 누추함이 없다고 공자가 단정적으로 대답한다.


오랑캐들이 사는 곳에 군자가 가서 살면 그곳이 누추해지지 않는가? 아니, 애초부터 누추하다는 개념은 상대적인데 오랑캐들이 사는 곳에 대해 누추하다고 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의문이 하나둘이 아닌 장이다. 게다가 이 장의 주자의 주석은 아주 짧고 간략하다. 기타 다른 학자들의 주석도 인용되어 있지 않다. 먼저 주자가 뭐라고 이 장에 대해 주석을 달았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군자가 사는 곳에는 교화되니, 무슨 누추함이 있겠는가?


가장 근본적인 문제가 되는 것에 대한 해설을 달았다. 그런데 주자의 주석도 결국 군자가 가기 전의 ‘그곳’이 누추하기 때문에 군자가 가서 ‘교화’를 해야 누추함이 없어진다는 식의 해설을 하였다. 나 개인적으로는 이 부분도 조금 걸리는 부분이다. 왜 내가 마음에 걸려하는지 하나씩 설명해보기로 하겠다.

刘禹锡의 <陋室铭>

먼저, 이 장에서 공자가 중국 중원을 버리고 떠나겠다고 한 곳으로 지목된 九夷(구이)라는 곳의 ‘夷’는 앞서 잠시 언급했던 ‘오랑캐’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좀 더 정확하게 풀이하자면, 夷는 ‘동쪽의 오랑캐’를 가리키는 한자로, 중국에서는 중국을 중심으로 위치에 따라 동쪽 오랑캐를 夷(이), 서북쪽 오랑캐를 狄(적), 서쪽 오랑캐를 戎(융), 남쪽 오랑캐를 蠻(만)이라고 지칭했다.


‘九夷’라는 용어에 대해서도 <後漢書(후한서)> ‘東夷傳(동이전)’에는 畎夷(견이), 于夷(우이), 方夷(방이), 黃夷(황이), 白夷(백이), 赤夷(적이), 玄夷(현이), 風夷(풍이), 陽夷(양이)라고 했고, 앞서 등장했던 송나라 유학자 邢昺(형병)은 玄菟(현토), 樂浪(낙랑), 高麗(고려), 滿節(만절), 鳧臾(부유), 索家(색가), 東屠(동도), 倭人(왜인), 天鄙(천비)라 설명하였다. 기록에 전하는 내용이 있어 설명하기는 했지만, 공자가 이 장에서 언급한 九夷(구이)라는 곳은 구체적인 이 장소들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기에 그 장소를 구체적으로 풀이하는 것이 의미가 없다.


다시 말해, 九夷(구이)는 중국이 아닌 이 엉망이고 개차반인 중원이라는 곳의 상대적인 장소를 의미한 것이다. 여기서 邢昺(형병)을 비롯하여 현대 해설서에서 이 장의 표면적인 일차적 의미가 드러난다. 공자는 앞서 설명했던 ‘공야장(公冶長) 편’의 6장에서도 말했던 것처럼 자신의 가치를 알아봐 줄 제대로 된 위정자가 없는 것은 고사하고,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서로 죽이고 죽는 그 지저분한 예의도 모르고 염치도 모르는 본능만이 살아있는 중국 중원에 자신이 의탁할 나라나 군주가 없음을 천하를 수년간 주유하며 깨닫고 탄식하게 된다.


가장 좋은 경우는, 자신이 나서서 세상을 바로잡지 않아도 될 정도로 제대로 정치하는 군주가 있어 세상이 안정된 것이고, 그다음 세상이 혼탁해졌다 하더라도 어느 한 명이라도 제대로 된 안목을 갖추고 세상을 바로잡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있어 자신의 지혜와 경험을 빌려 함께 세상을 바로잡아가자고 할만한 위정자가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도 못했다.


공부를 통해 그리고 그것을 실천하고 현실에 적용해 살면서 세상이 잘못되어가고 삐뚤어져 있는 것을 보면서도 자리를 얻지 못하고 사람을 얻지 못하고 자신을 알아봐 줄 군주를 얻지 못한 채 세월을 모두 보내버린 성인의 한탄에 다름 아니라는 초심자 수준의 해석이 일차적인 이 장을 이해하는 방법이다.

刘禹锡의 <陋室铭>

이제 중급자 수준으로 올라가 보자. 혹자가 물었다. “(그곳은) 누추하니, 어떻게 하시렵니까?” 앞서 잠시 힌트를 주기 위해 언급했던 ‘누추하다’라는 개념 자체가 상대적이라는 것을 철학적 개념을 사유하지 않더라도 민감한 사람이라면 여기서 이 단어가 거슬릴 수밖에 없다. 앞서 구이(九夷)라는 단어에서 본의 아니게(?) 공자의 입에서 오랑캐라는 용어가 나온 것을 다른 식으로 오독하게 되어 흐르면 오랑캐들이 사는 곳은 누추한 곳이라는 의미로 이어진다.


그렇다면 상대적으로 중국 중원이 문명의 핵심이고 누추하지 않은 깨끗하고 정갈한 곳이라는 의미가 된다. 공자가 뒤에 자신이 하려는 이야기로 대답을 하고 구구절절이 설명해주지 않았지만, 공자는 앞서 구이(九夷)라는 단어를 미개한 오랑캐의 의미로 사용한 것이 아니다. 이 지저분하고 엉망진창인 중원이 아닌 먼 곳을 불특정하게 지칭한 것이다. ‘九’라는 용어가 ‘많은’이라는 의미를 갖는 고문의 용어적 특징을 갖는다는 상식을 알면 그것은 그리 어려운 추정도 아닌 것이다.


혹자의 논리에 의하면 자신은 문명이 상위인 곳에 살고 있고, 자기를 제외한 다른 곳이 미개하고 오랑캐의 영역이라고 여기는 잘못된 시각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신기하지 않은가? 만약 정말 오랑캐의 땅이라 여긴다면 혹자는 정작 그곳에 가본 적도 없고 그들을 직접 만나본 적도 없었는데 그저 그 자신을 중심으로 여기고 자신들이 속한 곳에서 멀리 떨어진 ‘ 그곳’을 ‘누추하다’라는 표현으로 폄하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공자는 이 표현에 대해서, 그 잘못된 편견에 사로잡힌 잘못된 생각에 대해 일일이 고쳐주거나 나무라지 않고 이렇게 대답한다


“군자가 거주한다면 무슨 누추함이 있겠는가?”


이 대답은 중급을 넘어 고급 수준으로 올라가야 의문을 갖고 이해할 수 있는 단계가 되어버렸다. 껍데기로만 보면 마치 앞서 혹자의 논리를 그대로 받아들여준 것처럼 보이지만, 방점을 뒤에 두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무슨 누추함이라는 것이 있단 말인가?’ 이 내용에 대해 앞서 주자는 군자가 거주하여 교화를 함으로써 변화되기 때문에 누추해지지 않는다고 보았는데, 그 해설에 내가 본능적으로 거슬렸던 이유는, 공자가 가서 교화를 한다고 하지 않고 ‘거처한다’라는 표현을 썼기 때문이다.


<논어>를 공부하면서 수차례 강조했지만, 수천수만 글자 중에서도, 심지어 그 단어들이 한 가지 뜻만 가지고 있지 않은 한자의 특성상, 그 상황에 꼭 맞는 글자를 적확하게 사용하는 수준과 경지에 오르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하였다.


그런 점에서 공자가 굳이 여기에서 주자의 해석처럼 가서 내가 교화한다던가 그들을 변화시킨다는 표현을 쓰지 않고 군자가 그곳에 가서 거처한다면 누추할 것이 무엇이 있겠느냐고 반문한 것은 정확한 의미를 내가 지금 해설하기 이전에, 최소한 주자가 해설을 한 이유가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고 생각된다.

刘禹锡의 <陋室铭>

그래서 꼼꼼하고 머리가 좋았던 고급 수준 학습자의 대표, 다산(정약용)은 이 장의 누추하다(陋)라는 글자의 의미를 ‘좁다’라는 의미로 변형하여 이해하려는 시도까지 보였다. 자아, 무슨 의미인지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한 학도들에게 재미있는 예를 들어 이해를 돕기로 하자.


천재적인 축구선수가 있다. 아무리 천재적인 플레이를 하고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는 피지컬 능력을 갖췄다고 하더라도 그가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존재처럼 프리미어리그에서 뛸 수는 없다. 그에게도 시작이 있단 말이다. ‘누추한’!


축구는 혼자서 하는 게임이 아니다. 물론 수준이 낮을수록 한 명의 플레이어의 능력만으로도 게임의 승패를 좌우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수준이 높아질수록 한 사람의 능력만으로 게임의 승패를 좌우하기엔 힘들어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프리미어리그의 팀들은 그 팀이 최상위 리그의 훌륭한 팀이기 때문에 그 안에 들어가면 선수가 훌륭해지는 것일까? 그게 아니라는 것은 바보라도 안다. 그 팀이 훌륭한 이유는 그 팀에 훌륭한 선수들이 많아 그들이 축구의 특성상 화려한 개인적인 능력을 바탕으로 하여 팀플레이라는 것을 해낼 줄 아는 조화로운 능력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여기까지는 어려울 것도 없고 누구나 다 이해하는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동네 조기 축구회에 가면 조기 축구회가 누추해지나? 아니면 그들이 그 조기축구회의 사람들에게 축구를 가르치기 시작하면 누추함에서 벗어나나? 말도 안 되지 소리이지 않은가? 스타플레이어는 프리미어리그에 있든 조기축구회에 놀러 가든 본질이 변하는 것이 아니다.


공자가 마지막에 했던 그저 질문에 맞춰 이야기했던 것처럼 들렸던 그 말은, 사실 두 가지 의미에서 좌우 어퍼컷을 날린 것에 다름 아니다. 혹자에게 ‘네가 있는 자리가 누추하지 않은 자리이고 네게서 멀리 떨어진 그곳이 누추한 곳이라는 생각 자체가 너를 폄하하는 것임을 왜 모르느냐?’라고 한 방을 크게 날린 것과, ‘내가 바라는 바는 어디에 가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을 뿐이다.’라는 또 다른 회심의 일격인 것이다.


초급자 수준에서 보았던 것처럼 지금 여기에서 자신의 능력을 펼치지 못한 것이 한스러워 공자가 이 말을 꺼낸 것은 상황적으로는 틀린 지적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 혼탁하기 그지없는 춘추전국시대의 중원에서는 나를 알아봐 줄 군주도 제대로 정치를 할 위정자도 없으니 다른 곳으로 떠나겠다.’라고 한 것은, 내가 내 뜻을 어디에서든 펼치고 싶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지, ‘여기가 아니라 더 미개한 오랑캐들이 사는 곳에 가서 거기에서 내 뜻대로 정치를 하며 살았으면 좋겠다.’라는 소시민적인 소망을 말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성인 공자를 도대체 어느 지경까지 끌어내리려고 참람되이 그런 해석을 감히 달 수 있단 말인가?


이 장에서 공자가 지향하는 군자의 자세는 ‘학이(學而) 편’ 15장에 나오는 ‘빈이낙도(貧而樂道; 가난한 몸이지만 하늘의 뜻으로 알고 도(道)를 즐기는 것)’의 자세를 의미하는 것에 다름 아니고, ‘옹야(雍也) 편’ 9장에 나왔던 ‘단표누항(簞瓢陋巷; 길거리에서 먹는 한 그릇의 밥과 한 바가지의 물로 영위하는 선비의 청빈한 생활)’을 하더라도 전혀 불편할 것이 없는 경지에 다다르게 되어 ‘술이(述而) 편’ 15장에 나왔던 ‘곡굉지락(曲肱之樂; 팔을 베개 삼아 잠을 자는 속에 있는 즐거움이라는 뜻으로, 가난에 만족하여 그 속에서 즐거움을 찾는 간소한 생활을 비유한 것)을 함에도 감사한 마음으로 지낼 수 있는 경지를 의미한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있다. 이상하고 잘못된 말이다. 사람이 자리를 만드는 것이지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것을 나는 동서고금 어떤 기록에서도 본 적이 없다. 끊임없이 공부하지 않고 노력하지 않고, 눈곱만치 공부하고 제대로 실천하는 삶을 지향하지도 않은 자가 높은 자리에 오르게 되는 경우는 있어도 그런 자가 중요한 자리에 가게 된다고 갑자기 그의 력 이상을 발휘하거나 이전의 부도덕하거나 부족함을 드러내지 않을 리가 없지 않은가? 결국 자리는 그 자리에 앉는 자의 자질과 능력이 만들어내는 것이다.


부단한 수양을 통해 능력과 경험을 쌓은 자는 어떤 자리에 있더라도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기 때문에 낭중지추(囊中之錐)가 되지 않을 수가 없게 도드라지기 마련이다. 앞서 예를 들었던 출중한 능력을 갖춘 스타플레이어는 조기 축구회 때부터 모든 이들의 눈에 띄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학문의 여러 분야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울대에 있는 교수들이 그 분야의 일인자가 아닌 것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현상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 안에서 공부하고 가르치면서 내가 보았던 것은 그들의 정치적인 짓거리였을 뿐, 그들이 끊임없이 노력하여 일가를 이루거나 배움을 바탕으로 실생활에 실천하며 실사구시(實事求是)하는 태도는 그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아니, 오히려 그 반대여서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기 일쑤였다.


오히려 보지 않고 만나지 않았더라면 실망하지 않았을 것을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실망의 낙차는 심각하리만큼 컸다. 그나마 배울 수 있었던 것은 타산지석(他山之石)의 교훈이었다.


그런데 참 신기한 것은 학자를 가장하는 그들을 비롯해서 국회의원 배지를 달고 싶어 하는 이들이나 심지어는 그들의 잡다한 일을 봐주며 보좌관이니 비서관이니 비서니 하는 일을 하는 젊은 친구들까지도 하나같이 그 놈의 ’자리‘에 목숨을 걸고 달겨든다는 것이다. 그들이 그렇게 목메는 자리의 특성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일단 침부터 흘리고 자신의 입안에 들어가지도 않을 크기의 것을 먹겠다고 입을 벌리다가 입이 찢어지고 턱이 빠지는 꼴을 우리는 청문회 등의 여러 루트를 통해 너무도 많이 보아왔다.


그렇게 자신을 준비시켜두지 않은 자들이 얼마나 많은 실수투성이로 남들에게 손가락질을 받는지 보았던 이들조차도 자신이 준비가 덜 되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음에도 자리에 연연한다.

자리라는 것은 영원하지 않다. 임기라는 것이 있고, 임기가 없더라도 달이 차면 기우는 것처럼 영구히 오래가는 권력이은 없단 말이다. 자리가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을 안다면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오르려고 하다가 다치고 그나마 오래 앉지도 못하느니보다는 차분히 그 자리에 앉아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때까지 스스로를 갈고닦을 필요가 있지 않겠는가?


평생을 준비하고서도 완벽하지 않다고 조심스럽기 그지없는 '신독(愼獨)'을 강조하던 성인 공자도 있었거늘, 어디 감히 자신이 있는 자리가 중앙이라 여기고 그 더러운 권력으로 점철된 자리가 대단한 것인 양 목에 힘을 주고 거들먹거린단 말이냐?


네가 서 있는 자리가 중하더냐? 아니면 그 자리에 누가 서느냐가 중하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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