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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Apr 04. 2022

공자는 왜 삶의 완성이 음악에서 이루어진다고 했는가?

당신이 고리타분하다고 여겼던 예악의 진짜 모습.

子曰: “吾自衛反魯, 然後樂正, 「雅」·「頌」各得其所.”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衛나라에서 魯나라로 돌아온 뒤에 음악이 바루어져서, 「雅(아)」·「頌(송)」이 각기 제자리를 찾게 되었다.”

공자는 천하를 주유하고 세상을 떠나기 5년 전에 위나라에서 노나라로 돌아온다. 돌아와서 그가 가장 먼저 했던 일이자 세상을 뜨기 전에 마지막으로 했던 것이 <시경(詩經)>을 편찬한 것이다. 본문에서 구체적으로 언급한 「雅(아)」와 「頌(송)」은 각 지방의 민간 가요인 「풍(風)」과 더불어 『시경』의 세 부문을 이루는 분류이다. 앞서 한번 설명한 바 있으니 간략하게 다시 부연하자면, 「雅(아)」는 다시 「소아」와 「대아」로 나누어지며, 「頌(송)」은 종묘 제례악으로 제사 지낼 때 사용되던 것을 가리킨다.


<시경(詩經)>도 읽지 못한 채 해설서를 낸 무식한 어떤 학자(?)께서 버젓이 ‘雅’를 ‘주나라 왕실’이라고 해설해놓은 것을 보고, 그의 자식들이 나중에 그 책을 보고 사실을 누군가에게 지적받으면 얼마나 두고두고 창피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글도 그러하지만 말도 그러한 것이다. 뭘 잘 알지 못하면 그저 가만히 입 다물고 있으면 무식이 자신에게서 그치는 것이나 함부로 아는 척하며 잘못된 이야기를 사실인양 떠드는 순간 그 망신은 자신에게서 끝나지 않게 된다. 그러지 않기 위해 주자의 해설을 다시 참고하여 제대로 이 장의 의미를 새겨 보도록 하자.


魯나라 哀公 11년 겨울에 子께서 衛나라에서 魯

라로 돌아오셨는데, 이때 周나라의 의례가 魯나라에 남아 있었다. 그러나, 시와 음악이 또한 상당히 훼손되어 사라지거나 순서가 뒤바뀌었다. 이에 공자께서 사방의 나라들을 周流하시며 (각 나라의 것들을) 이리저리 상고하고 조사하여 그 내용을 아시게 되었는데, 만년에 道가 끝내 행해지지 않음을 아셨기 때문에 노나라로 돌아와 음악을 바로잡으신 것이다.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哀公 11년은 공자가 68세 되던 해로, 세상을 뜨기 5년 전이다. 주자는 점잖게 사방의 나라를 주유했다는 표현을 사용했지만, 사실 천하를 떠도는 그 많은 시간은 공자가 중국 각지의 시를 공부하기 위함이 아니었다는 것을 당시 사람들은 물론이고 지금 <논어>를 공부하는 우리도 안다. 


하지만 결국 공자는 그 어느 나라에서도, 어떤 위정자에게서도 중용되지 못하고 다시 발걸음을 돌려 돌고 돌아 노나라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 처량하기 그지없는 천하를 주유하면서 공자는 다양한 그 지역의 노래와 공부에도 귀를 기울였다. 만약 공자에게 천하를 주유하는 시간과 경험이 없었다면 그러한 상고와 조사가 상세히 이루어질 수도 없었을뿐더러 공자에게 음악을 정리할만한 지식과 계기는 마련되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정치가로서는 실패하였으나 교육자로서 이름을 천하에 날리는 것과 동시에 고향이던 노나라의 돌아와 <시경>을 편찬함으로써 새로운 역사를 또 하나 남기게 된 것이다.

그런데 공자가 예와 악을 언급한 내용은 이 장에서 처음 나오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앞서 공부했던 ‘태백편’의 8장 내용에 ‘興於詩, 立於禮, 成於樂(시에서 배움을 일으키고, 예에서 원칙을 세우며, 악에서 삶을 완성시킨다.)’라는 구절은 대표적인 예와 악에 대한 설명으로 손꼽힌다.


특히 그 순서에 있어서 ‘음악에서 삶을 완성시킨다’는 구절은 바로 이 장의 내용과 맞물리며 공자가 마지막으로 왜 <시경>을 편찬하였는지 그리고 왜 삶의 완성이 음악에서 이루어지는 지에 대한 의문을 배우는 자들에게 화두처럼 던진다.


그래서 이 장에서 음악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김에, 공자가 음악에 대해 왜 그렇게 중시하였는지, 그리고 음악이 공자에게 있어 어떠한 의미를 갖는지 특히 세상을 바로잡는 의미의 정치와 어떤 연관을 갖고 있었는지에 대해서 간략하게나마 논해보고자 한다.

음악은 음계를 원칙으로 한다. 아무렇게나 아무거나 두들겨서는 안 된다. 악보라는 것이 있어 그것에 정확하게 따라야만 한다. 그것은 본래의 음이 그 소리를 제대로 내기 위해서 악사(樂師)가 제대로 연주해야만 그렇게 될 수 있다. 악보 역시 그저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수차례의 작곡 과정을 통해 가장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할 수 있는 형태로 하나의 완성된 음악을 만든 것이고 그것의 질서에 맞게 이후에 연주하는 자는 그 악보에 맞춰야만 본래 그 음악이 의도했던 아름다움을 온전히 그려낼 수 있다. 그래서 그 음악을 작곡했던 이가 어떤 마음으로 음악을 만들었는지 그 성정까지 읽어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음악에 대해 조예가 전혀 없던 공자가 악기를 배우면서 그 즐거움에 빠져 고기 맛을 잊을 정도로 푹 빠졌다는 이야기나, 그 연주하는 음악을 만든 이와 그 시대를 상고하고 거슬러 올라가는 단계까지 이르러 악기를 가르쳐주는 스승을 오히려 겸허하게 만들었다는 이야기들은 공자가 음악을 단순한 즐기기 위한 음악으로 보지 않았음을 여실히 증명해주는 이야기들이다.


이 장에서도 설명하고 있는 바와 같이 <시경(詩經)>에 나온 그 수많은 시들을 편찬할 정도가 되려면 그 모든 것을 기억해야만 한다. 지금처럼 녹음 기능이 있는 녹음기나 핸드폰이 없었던 시대에는 그 음을 수차례 반복하여 기억하는 수밖에 없다. 글만이라면 적어서 기억하겠으나 당시의 시는 노래, 즉 음악과 떨어뜨려 놓을 수 없다. 매일같이 음악을 흥얼거리며 노래하는 방식이 아니었다면 그 모든 시는 기억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공자는 매일을 음악과 함께 지냈던 것이다.

또한 음악은 사람의 성정을 그대로 드러내는 방식의 하나이다. 기쁘면 자연스럽게 노래를 부르고 슬퍼도 그 슬픔의 성정을 드러내기 위해 곡(哭)을 하는데 그것 역시 노래로 이어진다. 화가 나거나 전쟁을 할 때도 격하게 노래를 부르고 일을 할 때도 힘겨움을 잊기 위해서나 서로 힘을 합쳐 해내기 위해 혹은 리듬에 합을 맞추기 위한 합리적인 이유로도 노래를 불렀다. 즉 인간의 희로애락과 음악은 떼려야 뗄 수 없는 밀접한 연관성을 맺고 있었다는 사실을 공자는 누구보다 잘 알았다.


앞서 공부했던 내용에서 외모가 닮았다는 이유로 양화(陽貨) 때문에 사람들에게 오해를 받아 객사를 당할 위기에서 공자가 했던 것은 자로(子路)에게 노래를 하라는 것이었다. 죽음의 위기 앞에서 두려워하던 제자들은 자로를 따라 노래했고, 그 노래로 인해 사람들은 공자가 양화(陽貨)가 아님을 알고 오해를 풀었다고 하였다. 


왜 갑자기 노래를 부르라고 했고, 무슨 마법의 힘이 담긴 것도 아닌데 노래가 날 선 사람들의 적개심을 풀게 하고 오해를 풀게 했을까?


결국 그것도 사람의 성정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읽고 있었던 공자의 경험과 공부에서 나온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정확하게 당시 어떤 노래를 불렀는지까지 기록에 전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 사람들의 마음을 순화시킬만한 노래라면 어떤 것이어도 상관이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의 노래는 지금처럼 멜로디 위주가 아니라 가사를 원활하게 기억하고 전달하기 위한 것이었기에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기에 충분했을 메시지를 담은 노래였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다시 시작했던 질문으로 돌아오자. 음이 자기 원래 있어야 할 자리에서 이탈하게 되거나 악보에 되어 있는 대로 노래하지 못하거나 조화(하모니)를 이루지 못하게 되면 음악은 망쳐진다. 독주(獨奏)도 그러하지만 합주(合奏)는 더 그러하다. 


사람들과의 호흡을 조화롭게 맞춰야만 하고 박자를 맞춰야만 하며 내가 들어가고 빠져야 할 타이밍을 잘 맞춰야만 한다. 그것은 단순히 나 혼자만 잘해서 되는 것이 아니며 무작정 연습만 많이 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음악은 함께 하는 이들과의 호흡을 굉장히 중요시한다.


그렇게 완벽히 조화로워진 음악은 그것 자체만으로도 너무 아름답다. 화려한 악기나 굉장한 테크닉을 구사하지 않더라도 연주하는 이들의 마음이 일치하여 악보대로 이탈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음악의 아름다움을 오롯이 드러낼 수 있는 것이다.


이 장에서 간과해서는 안될 문구가 ‘또’ 있다. 

공자가 노나라에 돌아와 음악을 바로잡았다고 이야기하면서 그 결과를 정리하여 말하길 ‘各得其所(각기 제자리를 찾게 되었다.)’라는 문구로 이 장을 마무리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여기서 ‘제자리를 찾다’라고 내가 번역한 글을 순 한국어로 바꾸자면 ‘자리 잡다’라는 말이 원형이다. 그 정확한 사전적 의미는, ‘외부의 변화에 흔들리지 않을 만큼 정착하다.’라는 의미이다. 사실 이것은 공자 철학의 원형이 되는 정명론(定名論)에 다름 아니다.(처음 나오는 개념이 아니라 앞서 몇 번이나 설명한 것인데, 새롭게 보인다면 대강 읽고 흘려들은 것이니 다시 제대로 공부할 것을 강권한다.) 


간략하게 핵심만 다시 정리하여 설명하자면, ‘임금이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가 신하다워야 하고, 부모가 부모다워야 하고, 자식이 자식다워야 한다’라는 이른바 ‘답게’ 론, 되시겠다. 왜 이것이 이 장의 마지막 언급과 연결되느냐고? 다시 잘 보아라. 원래 있어야 할 자리에 바르게 있어야 하는 것이 음악이고, 본래 그 자리에서 그 역할을 해내는 것이 바로 올바른 정치인 것이다. 

본래 있어야 할 그 자리에 있으면서 그 역할을 하게 되면 위정자는 특별히 뭘 할 것이 없어진다. 본래 있어야 할 그 자리라는 것이 인간이 되찾아야 할 본성이고,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려고 하는 것이 공부인 것이며, 그것이 원래 있는 자리에 어떤 형태로 있어야 하는지를 알고 잘못 놓여 있거나 있어서는 안 될 자리에 있으면 일깨워주는 것이 배운 자가 실생활에 혹은 군주에게 간하여야 할 부분인 것이다. 맞다. 공자의 공부는 이렇게 모두 하나로 이어진다. 그래서 그 마지막의 완성이 음악이라고 한 것이다.


기원전 623년, 노문공 4년에 위나라 대부 영무자(甯武子)가 魯나라를 예방한 적이 있었다. 당시 문공이 그의 예방을 치하하고 연회를 열었고 악공들은 음악을 연주했다. <시경(詩經)> ‘소아(小雅)’의 ‘湛露(담로)’와 ‘彤弓(동궁)’, 두 곡이었다. 그런데 예법에 따라 마땅히 이 같은 환대에 연회를 베푼 문공의 환대에 사례하고 답례로 시를 읊어 화답해야 할 영무자(甯武子)가 마치 그것을 모른 척 어리석은 양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었다. 그의 어리석어하는 척 연기에 무례하다고 느낀 문공이 신하를 시켜 그 까닭을 묻게 한다. 그러자 영무자는 다음과 같이 답변한다.


“신은 악공들이 연습을 하는 것인 줄 알았습니다. 옛날 제후가 정원에 왕을 조회하면 왕은 제후에게 연회를 베풀고 이때 ‘湛露(담로)’를 연주하였습니다. 이는 천자가 태양이며 제후는 그의 명을 따른다는 의미입니다. 제후가 왕을 분노케 한 적과 싸워 전리품을 바치면 왕은 이때 그에게 한 개의 붉은 활과 붉은 화살 백 개, 그리고 검은 화살 천 개를 하사하여 이 연회가 그의 공적에 보답하는 것임을 분명히 알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일개 제후의 신하인 제가 선대의 우호를 잇기 위해 예방했고 군주께서 친히 대접하는 자리에서 어찌 감히 천자가 제후에게 베푸는 큰 예를 받아 스스로 죄를 지을 수 있겠습니까?”


문공이 베푼 연회의 음악이 예에서 규정하는 법도를 참람되이 어겼다는 점을 완곡하게, 하지만 알아듣는 이에게는 얼굴이 달아오를 정도의 핵펀치를 날린다. <춘추좌전>에 나오는 이 내용은 앞에서 배운 <논어> ‘공야장편’ 20장에서 공자가 영무자의 지혜로움을 칭찬하면서 도리어 그의 어리석음을 따를 수 없다는 표현으로 극찬하며 언급되었던 부분의 일화이다.



왜 뜬금없는 일화를 언급하느냐고 묻고 싶은가? 그렇다면 역시 당신의 공부가 한참 덜 여물었으니 <논어>의 첫 장으로 돌아가 다시 꼼꼼하게 공부하기를 권한다. 우리는 공자가 왜 음악을 삶의 완성단계에서 기준이 되는 것으로 삼았는지를 공부하면서 사물이 제 자리를 잡는 것이 궁극적인 무위의 정치임을 배웠다. 그리고 그 정리의 단계에서 예화로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옛날이야기를 해서 이해가 잘 안 간다면 아주 최근의 이야기를 예로 들어보자. 군바리의 딸이 대통령을 하다가 국정농단이라는 사달이 나서 탄핵을 받았을 때, 총리직을 수행하던 법비가 있었다. 경성제대 법학과 출신도 아니면서 어찌나 처세에 능했던지 법무부 장관에 총리직까지 올랐다. 소위 ‘장로’ 소리를 들으며 광화문에서 정신 나간 사람들에게 응원발을 받고 싶어 했던 그가 제대로 된 사람인지 아닌지를 볼 수 있는 결정적인 대목이 바로 대통령직을 대행할 때 그의 행실로 드러난다. 

직무대행에 명패가 무엇이 중하다고...

그는 호가호위(狐假虎威)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대행은 그저 대행일 뿐 언감생심 그 자리를 탐할 수도 없는 자이며 탐해서도 안 되는 자이다. 그저 불가피하게 그 직무를 대행할 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직무를 대행하지 않고 그 권위를 대행하기 시작했다. 당시에 그가 받았던 의전은 총리에 대한 의전이 아니었다. 


직무대행자가 권위를 똑같이 행세하는 것이 바로 참람되다는 것이고 이 장에서 말하는 사물(인간을 포함한)이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경거망동하고 비뚤어진 것이며 음악으로 말하면 심각한 음이탈, 이른바 ‘삑사리’인 것이다. 그 정도로 막 나가는 행태를 보이고서도 당대표를 하네마네 가발이 아니니 머리를 미네 마네 하는 블랙코미디까지는 보지 않더라도 그의 추악한 인성 밑바닥까지 송두리째 모두 드러내 보였다고 할 것이다.


당신 역시 힘겨울 때, 신이 날 때, 슬플 때, 여러 가지 당신의 감정에 맞춰 음악을 들을 것이다. 음악의 조화로움이 그리고 그 가사의 이야기들이 모두 당신의 이야기 같고 당신을 위로하는 이야기 같다며 마음의 평온을 찾고 기쁨을 배가시켜주었을 것이다.


당신에게 음악이 그러했던 것처럼 정치가, 세상이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것이 공자가 음악을 삶의 완성으로 삼았던 근거이다. 


당신에게도 이제 그 깊은 울림이 들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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