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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Apr 05. 2022

왜 그리 사소한 것들부터 시작하라고 하는가?

성인의 경지에 오르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子曰: “出則事公卿, 入則事父兄, 喪事不敢不勉, 不爲酒困, 何有於我哉?”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나가서는 公卿을 섬기고, 들어와서는 父兄을 섬기며, 喪事를 감히 힘쓰지 않음이 없으며, 술로 인해 문란해지지 않는 것, 이 중에 어느 것이 나에게 있겠는가?”

이 장에서는 네 가지 반드시 지켜야 할 것에 대해 언급하며 자신의 삶을 성찰하며 묻는 것으로 마무리 짓는다. 주석도 특별할 것이 없이 이 장과 같은 구조의 글이 ‘술이(述而)편’ 2장에서 보였다면서 언급하는 것이 전부이다. 주석의 내용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이 내용은 제7편(술이-2)에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그 일이 더욱 낮고 뜻이 더욱 간절하다.


당연히 ‘술이(述而)편’의 2장을 기억하지 못할 학도(學徒)들의 기억을 돕기 위해 그 내용을 다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子曰 : 默而識之, 學而不厭, 誨人不倦, 何有於我哉.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묵묵히 기억하며, 배우고 싫어하지 않으며, 남 가르치기를 게을리하지 않는 것, 이 중에 어느 것이 나에게 있겠는가.”

‘술이(述而)편’에서는 세 가지를 두고 자신의 인생을 구체적으로 성찰하며 스스로를 평가했던 내용이었는데, 이 장에서는 네 가지 더 세부적인 것으로 나누어 보다 실생활에서 구체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내용들을 언급하고 있다. 그런데 술이편을 공부하면서는 내용에 집중하여 언급하지 않았던 부분, 그리고 어차피 이 장에서 언급하려고 남겨놓았던 논란의 마지막 문장에 대해 먼저 살펴보지 않을 수가 없다.


이제까지 학계에서는 이 ‘何有於我哉’라는 문장을 어떻게 해석하는가에 대해서 논란이 제법 있어왔다. 이 간단해 보이는 다섯 글자에 대한 논란을 정리하면 크게 네 가지로 해석이 가능하다.


첫 번째는, 내가 본문에 해석한 그대로인 ‘이 중에 어느 것이 나에게 있겠는가?’라는 겸손의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다. 즉, ‘내가 이 네 가지 중에서 제대로 갖추고 있는 것이 없으니 어떤 것을 갖추고 있다 자부하겠는가? 노력하는 수밖에 없구나!’ 정도의 해석이 되겠다. 이렇게 해석하는 것 말고 다르게 해석하는 버전이 세 가지나 더 있나고 놀랄 수도 있겠으나 실제로 이 다섯 글자는 그렇게 변화무쌍한 해석이 가능하다.

이토 진사이(伊藤仁齊)

두 번째는, ‘이것 이외로는 내가 할 줄 아는 것이 없다.’라고 해석하여 오히려 이 네 가지만큼은 주력하여 내가 잘하는 바라고 자부하고 강조하는 것으로 보는 견해이다. 이 해석은 17세기 일본 최고 유학자로 칭송받는 이토 진사이(伊藤仁齊)의 견해인데, 그는 평생에 걸쳐 공자의 <논어>를 연구한 논어 전문가로 꼽히는 학자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해석이 100% 맞다고는 할 수 없겠으나 그의 연구결과로 나온 이 해석도 충분히 받아들일만한 학문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기에 이렇게 소개한다.

오규 소라이(荻生徂徠)

세 번째는, ‘이것은 노력을 안 해도 자연스럽게 되는 것이다.’라고 해석하자는 견해인데, 이 견해는 역시 당대 일본의 최고 유학자로 꼽혔던 오규 소라이(荻生徂徠)의 해석을 따른 것이다. 소라이 역시 해석에 고문 사학을 적용하는 것으로 유명한데, 다소 받아들이기 어색한 부분이 없지 않긴 하지만 그 역시 하나의 연구 결과물로서 소개하여 비교할 수 있도록 제시한다.


마지막 네 번째는, 다산(茶山; 정약용)의 견해로, ‘이 네 가지를 할 수 있다, 없다고 하는 차원 자체를 근본적으로 뛰어넘는다.’라는 해석이다. 상당히 창의적이면서도 대승적인 의미로 공자의 지향점을 더 높고 더 멀리 보려고 했다는 점에서 이 해석 역시 받아들일 수 있는 여지가 충분히 있는 것이라고 본다.

물론 나는 여러 논란에도 불구하고 가장 일반적으로 이해되는 첫 번째 해석 방식으로 원문을 풀었다. 그렇다면 앞에서 제시한 실생활에 아주 밀접하면서도 그 지향점이 원대한 곳을 향하고 있다는 네 가지가 무엇인지 내용을 상세히 살펴보지 않을 수 없겠다.


첫 번째, ‘나가서는 公卿을 섬긴다.’ 여기서 나간다는 것은 당연히 밖을 나간다는 의미가 아니라 조정(朝廷)에 출사(出仕)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벼슬자리에 나가 공무에 임해서는 公卿을 섬기되, 그냥 섬긴다가 아니라 ‘잘’ 섬긴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公卿은 三公(삼공)과 九卿(구경)으로 높은 지위의 관리를 말한다. 단순히 고위관직들에게 굽신거리고 잘 섬긴다는 의미가 아니라 예의를 갖추고 그 자리에 맞는 행실로 최선을 다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두 번째, ‘들어와서는 父兄을 섬긴다.’ 들어와서는 집으로 들어와 거처하는 사적인 생활 전체를 의미한다. 父兄을 섬긴다는 의미는 너무도 당연히 효제(孝弟)를 의미한다. 너무 일반적인 것을 기술한 것이 아니냐고 볼 수 있겠으나 이 장의 의미는 우리 실생활에서 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것을 열거하고 있다는 점에서 올바른 행실의 시작이 되는 가정에서의 언행과 마음가짐을 언급할 때 기본이 되는 효제(孝弟)가 나오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이는 ‘술이(述而) 편’에서 나왔던 ‘仁은 멀리 있는 것인가? 내가 인을 행하려 한다면 인은 바로 이르러 온다’라는 내용의 실질적인 사례가 아닐 수 없다.

세 번째, ‘喪事를 감히 힘쓰지 않음이 없다.’라는 것은 빠지지 않는 예(禮)와 관련하여 가장 대표적인 일이라고 예시한 것이다. 喪事는 장례식을 치르거나 服喪 중에 있는 일을 통칭하는 것이다. 어렵고 까다롭기만 한 예의를 갖추라는 의미보다는 뒤에 ‘감히 힘쓰지 않음이 없다.’라는 표현을 통해 정성을 다하는 것이 예의 기본임을 다시 한번 강조해주고 있다.


네 번째 마지막으로 나온 것은 다소 의외라고 할 정도로 일상적(?)이다. ‘술로 인해 문란해지지 않는다.’라는 내용인데, 바로 뒤의 10편에 해당하는 ‘鄕黨(향당) 편’에서 구체적으로 언급되는 ‘술은 일정한 양을 정해 두지 않았는데, 어지러운 지경에는 이르지 않게 하였다.’라고 한 것과 연결되는 내용이다.


술을 마셔서 이성을 잃어 곤란함을 당하는 것은 흔히 있는 실수이자 누구나 저지를 수 있는 실수라는 점에서 그런 일을 아예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을 강조함과 동시에 자신이 스스로를 절제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어야 함을 강조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앞에서 살펴본 다른 해석들 중에, ‘이것이 오직 나만이 가능한 것이다.’라고 자부했다는 것은 다분히 인간적이기는 하겠으나 이제까지 보였던 인간적이지 않은 성인 공자의 모습과 매칭 시키기에는 위화감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중요한 것은 간단하게 실생활에서 벌어지는 일을 언급한 것 같지만 큰 대맥을 잡아 모든 생활을 두루 지칭하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원문의 방식으로 해석을 택한 것은, 성인(聖人)이 늘 자만하지 않고 항상 부족하게 여겨 탄식하는 모습을 보였던 것의 연장선상으로 이어서 보았기 때문이다. 성인(聖人)의 가르침에 따르면 그 배움은 늘 비근(卑近) 한 일부터 배워서 위로 순차적으로 天理에 통달하려 한다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다.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일이고 쉬운 듯 보이지만 실천하기 어려운 일은 의외로 많다.


형제간에 우애 있고 부모님께 효도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고 행하는 것이 어려운 것 같지 않을 수도 있겠으나 주변을 돌아보면 실제로 그것을 이루며 사는 가정이 생각보다 많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먹고 살기 어려운 집보다는 여유가 있고 지위가 높은 이들일수록 여러 가지 이유로 가족 간의 불화와 부모님에게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을 어렵지 않게 보곤 한다. 왜일까?


조직을 아우르고 나라를 다스리는 높은 자리에 오른 사람들이 자식을 제대로 가르치고 형제간에 우애 있고, 부모님에게 효도하는 것이 어려울 리가 없는데도 그들이 그것을 행하지 못하는 것은 그것이 생각보다 쉬운 것이 아님을 반증한다.


쉽게 생각하면 매일 안부전화드리고, 맛있는 거 있으면 대접하고 좋은 것 있으면 챙겨드리고 마음으로 늘 챙기는 것이다. 그렇게 많은 돈이 드는 것도 아니고 매일같이 집중하고 시간이 많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고 있는 이들이 얼마나 되는가? 바쁘다고? 정신이 없다고?

정말로 먹고살기 어려워 막노동하고 택배일을 하는 이들도 지쳐 쓰러져 잠자리에 들기 전에, 아니면 식사하는 그 짬을 내서도 부모님께 안부전화를 드리고 일하지 않을 때 시간을 내어 어차피 먹는 밥, 함께 식사라도 모시고 하며, 형제들과 모여 밥 한 끼 하며 얼굴 자주 보고 인사를 챙기는 것이 다이다. 어려운 것은 물리적인 이유가 아니라는 말이다.


이 장에서 술 이야기가 나온 것도 수천 년이 지난 현대의 한국사회에도 무관하지 않다. 술은 즐겁기 위해 마시는 것이다. 술만 마시면 시비를 걸고 싸움을 하는 이들이 있다. 습관이다. 술은 당연히 이성을 풀어놓게 만드는 물질이다. 적당히 즐기는 것으로 마시고 도를 넘어서지 않으면 실수할 일이 없다고들 한다.


하지만, 그것은 그 자신만이 알 뿐이다. 얼마를 마시면 취해서 실수를 하게 되는지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없다. 다만, 그러기 전에 자신이 절제하고 실수할 것 같으면 그것을 멈추는 절제력을 가져야만 한다는 것이 중요할 뿐이다.


그런데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지 않다. 실제로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잘못 배운 술버릇 때문에 술을 마시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거나 이성의 끈을 놓아버리고 해서는 안될 언행을 하는 이들을 적잖게 본다. 술에 깨면 마치 전혀 기억이 안 난다는 듯이 자신의 잘못을 마치 제삼자의 일인 양 사과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기억한다. 그리고 그들이 술을 마시게 되면 그런 실수를 한다는 점만큼은 너무나도 또렷하고 명확하게 기억한다. ‘이런 짓을 벌이고서도 다시 술을 마시면 내가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하면서 다시 술잔을 기울이는 짐승들이 적지 않다.


수천 년 전 중국에서도 그랬고, 수백 년 전 조선에서도 양반이라는 자들이 술을 먹고 난장판을 친 일이 비일비재하였음을 기록을 통해 전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변하지 않고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있다.


그래서 공자는 이 장의 가르침을 통해 높고 큰 道를 이루는 경지에 이르기 위한 과정이 결코 일상의 바깥에서 별개의 방식으로 추구하는 것이 아님을 끊임없이 강조한다. 결국 道라는 것을 성취한다는 것이 우리가 사는 실생활에 적용하기 위한 것이지, 말하고 먹고 생활하는 것에서 유리된 것이 아님을 감안하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사안임에도 사람들은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동일한 실수를 반복하며 그 道에 이르는 것이 어려울 뿐이라며 투덜거리고 있는 것이다.


이 장에 직접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행간에 있는 내용을 한 가지만 퍼올려 소개하자면, 성실함을 통한 반복이 자신의 절제를 만들고 효제(孝弟)를 이룰 수 있는 길임을 공자는 여러 차례 강조한 바 있다. 이 장에서 소개한 아주 작은 일상 같은 것들이 차곡차곡 하루하루 쌓이면 그것이 습관을 만들고 그 습관은 더 큰 일을 할 수 있는 자양분이 된다.

예컨대, 매일 아침 같이 성인의 말씀을 읽고 그 뜻을 새기고 하루의 시작을 하면서 자신의 행동에 그 가르침을 담아내고자 하면 그 공부와 실천하고자 하는 의지는 매일같이 스스로를 갈고닦는 ‘수행(修行)’이라는 것이 된다.


운동이라고는 담을 쌓고 있던 사람에게 갑자기 매일같이 러닝을 하고 웨이트 트레이닝을 하라고 하면 힘겨울 수밖에 없다. 그래서 다리에 알이 배기고 온몸의 근육통이 오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것이 하루하고 힘들다고 쉬어버리면 다시 또 시작할 때 그 고통이 반복될 뿐이나, 그 고통을 참고 익숙해질 때까지 매일같이 운동량을 조금씩 늘려가며 몸을 단련해나가기 시작하면 당장 거울을 보면 아무런 일도 일어나 있지 않지만, 한 달이 지나고 반년이 지나고 1년이 지나고 세월이 지나면 어느 사이엔가 자신이 꿈꾸던 몸짱의 모습으로 거울 앞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노력이 사람을 배반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렇게 노력해본 사람만이 아는 일이다.


그저 물커덩거리는 지방을 근육으로 바꾸는 데에도 그만한 노력이 필요한데 사람을 바꾸고 인성을 바꾸고 그 사람의 내면을 모두 바꾸어 환골탈태하게 만드는 노력에 얼마나 많은 시간과 공이 필요할 지에 대해서는 왜 그리 간과한단 말인가?

공자가 이 장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자신이 이것을 갖추었다고 자만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며 자신이 이것을 갖추지 못했다고 굳이 갖추었으면서도 겸손을 보여 더 강조하기 위함도 아니다. 가르침을 주는 스승의 입장에서 자신이 배워나간 기본 중에서도 아주 기본에 해당하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일 뿐이다.


매일같이 다른 사람을 윽박지르고 없는 죄도 만들고 있는 죄도 적당히 덮어주고 이익을 챙기고 가족을 챙기고 그것으로 만족감을 얻고 행복하다며 그 지위를 누리려던 자가 갑자기 높은 지위에 올라서게 되었다고 없던 성인의 자질이 갖춰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것은 매일 아무렇지도 않게 일상처럼 그 일들을 해오고 그렇게 생각하던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늘의 보상과도 같은 것이다.


자신이 가야 할 길이 정해져 있다면 그것을 향해 묵묵히 걸어갈 뿐이다. 조금 마음에 안 드는 결과가 나왔다고 하여 슬퍼할 것도 없고,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고 좌절할 필요도 없다. 어차피 자신이 정해놓은 길을 갈 것이라면 그 방향을 향해 걸어 나가면 된다.


얼마나 남았는지 왜 이렇게 힘든 것인지 투덜거리고 투정 부리기보다는 스스로를 다스리는 가장 기본적인 것부터 갖춰나가면 된다. 그 순간들이 쌓이고 쌓여 당신의 미래를 그려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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