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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Apr 06. 2022

흐르는 시냇물이 썩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끊임없이 흐르는 시냇물은 성인에게 어떤 영감을 주었는가?

子在川上, 曰: “逝者如斯夫! 不舍晝夜.”
공자께서 시냇가에 계시면서 말씀하셨다. “가는 것이 이 물과 같구나! 밤낮을 그치지 않는도다.”

이 장은 만물의 변화가 덧없음을 의미하는 고사성어인 ‘천상지탄(川上之嘆)’이라는 말이 유래한 장으로 유명한 내용이다. 일반인들에게는 다소 생소할 수 있는 내용이기는 하지만,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면서 공자가 탄식하며 위와 같이 말하였다는 내용이다.


이 장의 내용에 대해서도 크게 세 가지 정도의 해석이 분분한 편인데, 간략히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천하를 주유하고 제대로 세상을 바로잡지 못한 채 말년을 맞이한 공자가 속절없는 흘러가버린 세월을 다시 돌이킬 수 없음을 생각하며 도가 무너진 시대에 대한 탄식을 했다고 해석한 것이다.


둘째, 한탄하는 차원을 넘어 인류의 미래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말고 끊임없이 정진하라는 의미의 가르침을 담고 있다는 해석이다. 다시 말해, ‘냇물이 쉬지 않고 흘려 내려가듯 그렇게 부단히 노력하고 또 노력하라’는 천류불식(川流不息)과 같은 의미로 풀이한 것이다.


, 맹자는 ‘샘이 깊은 물은 퐁퐁 솟아올라 밤낮을 쉬지 않고 흘러간다. 구덩이를 채우고 난 뒤에야 흘러가 바다에 이른다.(原泉混混 不舍晝夜 盈科而後進 放乎四海)’라고 하여 영과(盈科)의 뜻으로 풀이했다.


처음 설명을 시작하면서 이 장의 시작을 하면서 ‘천상지탄(川上之嘆)’의 유래가 된 장이라고 설명하였으나, 과연 그 해석이 적확한 것인지에 대해서 나는 잘 알지 못하겠다. 왜냐하면 이렇게 짧은 자연경관을 보고 한 마디 한 것만임에도 불구하고 분분한 해석이 나왔던 이유는, 다른 가르침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장에서 역시 공자가 다른 어떤 자신의 의견을 부연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사실관계만을 서술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서술방식의 가르침은 공자의 평소 사실을 받아들이는 그 말 한마디만으로도 배우는 이들에게 생각할 수 있는 여지를 화두처럼 던져주었기 때문이다.


세 가지 모두 공자의 말에서 유추할 수 있을 법한 것이고 그것들이 사실관계에서 배치되는 것도 아니기에 함께 새길만한 가치가 있다 할 것이다. 그렇다면 주자는 이 장에 대해서 어떻게 해설하고 있는지 주석을 살펴보기로 하자.


천지의 조화는 가는 것은 지나가고 오는 것은 이어져 한 순간의 그침이 없으니, 이것이 道體의 本然이다. 그러나 그 지적하여 쉽게 볼 수 있는 것으로는 시냇물의 흐름만한 것이 없다. 그러므로 여기서 이것을 말씀하여 사람들에게 보여주셨으니, 배우는 자들이 때때로 공부에 털끝만한 간격도 없게 하고자 하신 것이다.


주자는 공자의 의도를 다른 의미가 아닌 있는 그대로의 시냇물이 부단히 흐르는 모습을 서술함으로써 설명하기 어려운 형이상학적 도가 갖는 본연의 의미를 일깨워 끊임없이 흘러가는 그 모습을 통해 부단히 용맹정진(勇猛精進)해야 함을 배우는 이들이 깨닫게 하고자 하였다고 해설하고 있다. 앞서 살펴보았던 세 가지 의미 중에 하나로 역시 의미 있는 해석이라 하겠다.


오히려 자신의 처지를 탄식하며 이제 자신이 어쩌지 못하는 도가 삐뚤어진 세상에 대한 아쉬움을 드러냈다는 식의 고사성어를 만들어낸 이들의 의견보다는 훨씬 공자의 평상시 태도에 가까운 해석으로 보여진다.


왜냐하면 문면에 드러나있는 실질적인 의미에서 행간이 갖는 의미를 포착하기 위한 충실한 접근이기 때문이다. 문면에 보이지 않는데 견강부회(牽强附會)하는 해석은 언제든 그것을 말한 이의 의도를 직접 확인하지 않는 이상 명확하다고 볼 수 없는 우를 범할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다른 장에서도 몇 번 언급된 적이 있지만, 공자는 道에 대해 직접적인 설명을 거의 하지 않았다. ‘道’라는 개념이 가지고 있는 본연의 의미에 대해 구체적인 설명하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기도 하고 그것을 설명한다고 하여 그저 듣기만 해서 와닿고 깨달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장에서와 같이 그저 우연히 바라본 시냇가에서의 광경을 묘사하는 것이 그저 단순한 묘사가 아님은 누구나 생각할 수 있다. 공자는 시냇가에서 바라본 끊임없이 흘러내려가는 물을 보면서 ‘가는 것이 이 물과 같다.’라고 하였다.


자세히 글을 뜯어보면 알 수 있다. 고문의 문법구조상 이 문장에는 비교의 대상이 있는 것이다. 무엇이 이 물과 같은가에 대한 것에서 주자는 해석의 실마리를 잡고 있다. 그리고 그 속성의 특징을 ‘밤낮을 그치지 않는다.’로 잡은 것에도 간과해서는 안될 힌트가 담겨 있다.

밤낮으로 그치지 않는다는 점을 시냇물이 갖는 특징이라고 표현한 것에서 어떻게 내가 흘려보낸 세월에 대한 탄식으로 간단히 치부해버릴 수 있단 말인가? 오히려 물과 같은 것의 비교대상, 그것이 갖는 속성이 이러한데 그 대상을 본받아야 한다고 해석한 주자의 포착점이 더욱 설득력을 갖게 된다. 그래서 정자는 주자가 포착한 그 실마리를 배우는 자들이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리해준다.


“이것이 道體이다. 하늘의 운행은 그치지 아니하니 해가 지면 달이 뜨고, 추위가 가면 더위가 오며, 물은 흘러 끊임이 없어, 모두 도와 일체가 되어 주야로 운행함에 일찍이 그침이 없다. 그러므로 군자는 이것을 본받아서 스스로 힘써 쉬지 않아, 그 지극한 경지에 이르면 곧 순수하여 그치지 아니한다.”


이 주석의 내용은, <논어>를 마치고 나서 어쩌면 아주 한참 뒤에 공부하게 될 <중용(中庸)>중에서 저 유명한 26장인 ‘지성무식장(至誠無息章)’의 요체로 언급되는 내용과 일맥상통한 내용이다. 자연의 만물 변화가 보여주는 끊임없는 변화와 그 운행이 바로 道의 본체(本體)를 설명하는 좋은 사례라고 하며 道가 그러하듯 공부하는 이들이 배우고 익힘을 단 하루도, 단 한순간도 쉼 없이 게을리하지 않아 군자의 경지에 이르게 되면 일부러 그렇게 노력하려고 하지 않아도 자연의 섭리가 그러하듯 자연스럽게 그리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설명에 이어 다음과 같이 부연설명으로 이 장의 가르침을 정리한다.


“漢나라 이래로 儒者들은 모두 이 구절을 깨닫지 못하였다. 이는 聖人의 마음이 순수함이 또한 그침이 없음을 볼 수 있으니, 순수함이 또한 그침이 없음은 바로 天德(하늘의 덕)이다. 하늘의 덕이 있어야 왕도를 말할 수 있으니, 그 요점은 謹獨(홀로 있음을 삼감)에 있을 뿐이다. 내가 상고해보건대, 이 장으로부터 이 篇의 끝까지는 모두 사람들에게 학문에 진전하여 그치지 말라고 권면하신 내용이다.”


‘漢나라 이래로 儒者들은 모두 이 구절을 깨닫지 못하였다.’는 주석의 첫 문장이, 이 장에서 본래는 보이지 않을 ‘천상지탄(川上之嘆)’이라는 고사성어를 만들고 본래의 의미를 혼탁하게 만든 이들의 양심에 화살처럼 쏘아 박힌다. 이 장의 언급 어디에서 도대체 공자의 탄식이 있단 말인가? 어디에 아쉬움이 느껴지고 어디에서 후회의 소리가 들려온단 말인가? 주자에서 정자로 이어지는 설명 어디에서도 공자가 세월의 무상함을 탓하였다는 것을 찾아보기 어렵다.


오히려 이 장의 핵심적인 가르침에 성인의 순수함이 그침이 없다는 본성과 연결시키고 그것을 이루는 가장 근본적인 시작으로 ‘謹獨’이라는 개념을 구체적으로 언급한 것이 눈에 띈다. 결국 부단한 노력을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선배로서의 구체적 방법론을 제시해준 것에 다름 아니다.


자신을 끊임없이 성찰하고 자신의 언행과 마음가짐을 새롭게 하고 그것을 올바르게 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것이 바로 공자가 이 장에서 일깨워주고자 한 것이고, 더 나아가 이 장에서 시작하여 이 편의 전체를 아우르는 의미라고 강조하고 있다.

큰 강과 그 강물이 모여 거대한 대해(大海)가 되는 바다는 그것을 눈앞에 하는 것만으로 그것이 주는 감동과 깨달음과 그 의미가 있다. 하지만 산속에서 마주하게 된 작은 시대의 조그만 웅덩이를 지나 끊임없이 흐르는 시냇물에서도 공자는 의미를 포착하였고 그것을 통해 배우는 자들에게 가르침을 전해주고 있다. 단순히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고 세월이 무상함을 말하는 것은 공자의 교육방식이나 평소 말하는 방식과는 상당한 위화감을 자아낸다.


당신이 어설프게 고사성어 운운하며 이 장을 탄식 어쩌고 하는 내용으로 상투적인 설명을 하는 것에 그저 그렇게 고개를 끄덕이며 넘어가는 일이 없기를 바라며 새롭게 바로잡는다.


작고 좁은 듯 하지만 졸졸 흐르며 끊임없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시냇물은 자연이 갖는 생명력과 힘을 느끼게 한다. 흐르지 않고 고여있는 물은 생명력을 잃고 썩은 듯 냄새가 나고 그 색부터가 맑지 못하고 탁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자연의 섭리는 오묘하기 그지없어 그 썩은 웅덩이에도 비가 와서 물이 차고 위에서 아래로 물이 흐르기 시작하면 웅덩이의 썩은 듯했던 물이 새로운 것으로 바뀌어 차게 되고 다시 생명의 소리를 내며 힘이 생기고 빛이 나기 시작한다. 그래서 물은 자연의 천지만물 변화를 대변하는 존재로 수많은 성인들에게 자연의 영감과 깨달음을 주었다.




나라를 들썩이게 만들고 국민의 절반에 가까운 이들을 허탈감에 빠지게 만들었던 대선이 끝난 지 한 달이 다되어 간다. 당선인에게 절대 나라를 맡길 수 없다는 의지를 보였던 절반의 국민들은 그가, 혹은 그의 측근들이 하는 꼴이 눈꼴이 시다고 혀를 차고 대통령 거처에 대한 문제에서 불거진 점에서부터 벌써 말들이 많다.


당선인을 뽑았던 사람들의 대다수는 당선인이 나라를 잘 다스릴 것이라고 생각했던 이들보다 이전 여당을, 집권여당이라고 몰아줬던 그들의 실정에 대한 철퇴를 가한 터라 당선인에 대한 기대나 지지가 강력하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다시 정치 이야기를 하거나 그 개싸움을 중계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어떤 식으로든 우리 사회가 발전하고 올바른 쪽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그것을 저해하고 자신들의 이익만을 위해 부화뇌동하는 자들을 도려내 버려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https://brunch.co.kr/@ahura/13


다른 매거진을 읽은 학도들이라면 이미 알고 있는 사건이 하나 있었다. 내가 삐뚤어진 것을 바로잡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는 한 사건이다. 간략하게 저간의 사정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현직 목사가 자신의 돌이 갓 지난 아기를 지가 화가 난다고 다투던 상대에게 물건처럼 던지려고 했던 아동학대 사건이다. 왜 정치 이야기에서 갑자기 아동학대 사건으로 점프를 했느냐고 묻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당신이 왜 아침부터 고전을 공부하고 자신을 다스리며 그 공부가 무엇을 위한 것인지 다시 한번 이 이야기를 통해 가다듬길 바란다.


사회를 좀먹고 당신이 살고 있는 사회를 혼탁한 웅덩이로 흐르지 않아 썩게 만드는 것은 당신을 포함한 적당히 그저 좋은 게 좋은 것이라며 넘어가는 수많은 존재들에 의해 좀먹게 된다. 위 사건을 아주 단순하게 보면, 신고를 받은 경찰이 사실관계를 수사해서 아동학대로 그 몰지각한 범죄를 저지른 현직 목사를 처벌하면 그만인 일이었다. 그런데 사회를 좀먹게 하는 데는 앞서 말한 것처럼 수많은 존재들이 가담하기 시작한다.


정식 신고가 이루어져 수사가 시작되면서 형사처벌을 받으면 목사 짓을 하는데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될 목사는 다양한 발버둥을 치며 여기저기 약(?)을 치게 된다. 그리고 담당 수사관은 그 사건이 아무것도 아닌 단순한 말다툼이었다는 식으로 사건을 덮어주게 된다. 당연히 있었던 사실인데 그렇게 덮일 수 없다며 신고자는 경찰을 믿고 감찰을 담당하는 서울지방경찰청 감찰부서에 수사이의를 제기한다.


하지만, 그들 부서는 단 한 건도 수사 부실이나 직무유기로 같은 조직의 동료(?)를 문제 삼거나 징계를 내린 적이 없는 곳이었다. 그렇게 버젓이 사실관계를 덮은 초동 수사관의 비리를 아무 일이 아니었다는 것으로 덮어준다. 다시 경찰청 본청의 감찰계에 민원이 들어간다. 또 그들은 시간을 최대한 끌다가 민원인이 지쳐서 포기하게 만들려고 한다. 그렇게 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는 식으로 보고서를 꾸며 일을 덮는다. 이 정도 되면 현직 목사가 아이를 던지려고 한 게 아니지 않은가?라고 합리적인(?) 의심을 할 만도 하다.


https://brunch.co.kr/@ahura/137


그런데 당시 사실은 사건 당사자에 의해 전부 녹취가 되었다. 그렇게 경찰이 불송치로 덮은 사건에 대해 검찰이 제대로 확인하고 조사해야 하는데 현직 검사들은 워낙 바쁘고 일이 많으시다며 경찰이 보내온 의견대로 그냥 도장을 찍어 불기소로 사건은 덮이는 듯했다.


그런데 서울 목동에서 정인이라는 아기가 죽는 사건으로 나라가 뒤집힌다. 그리고 서울경찰청에는 껍데기만 그럴싸한 ‘아동학대 특별수사팀’이라는 것이 발촉한다. 그리고 민원인은 처음 ‘협박죄’로 고소했던 사건을 정식 ‘아동학대’ 건으로 다시 고발한다. 그리고 해당 경찰서장에게 홈페이지 ‘서장에게 바란다’에 글을 올리고 면담을 요구한다.


해당 경찰서장은 서울경찰청의 형사과장으로 영전해가는 것이 결정된 상태라 자신이 책임자로 있던 당시에 이런 비리가 벌어진 일이 밝혀지면 출세가도에 금이 갈 수 있다며 부하인 여성청소년과 과장인 경정을 시켜 민원인의 입을 막으라고 지시한다.


위에 살펴본 정자의 말처럼 이 장에서 시작된 가르침은 이 편을 아우르는 가르침이니 내용이 길어질 예정이니 왜 물이 썩어가는지에 대해서는 내일 계속해서 설명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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