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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틈틈이 Oct 29. 2018

'엄마'가 아닌,
'엄마사람'으로 살아야 하는 이유

엄마가 되기 전부터 지금까지 같은 회사에서 근무하며,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부터 지금까지의 저를, 제 글을 지켜 본 선배가 있습니다. 그 선배와 얼마 전 점심을 먹었습니다. 각자 바쁜 일상에 같은 건물에서 있으면서도 올해 들어 두 번째 만나는 자리였습니다. 『엄마로만 살지 않겠습니다』가 나오고 엘리베이터에서 만났을 때 “선배, 책 사지 마요. 드릴게요”라고 했었는데 그러고도 한 달이 지난 만남이었습니다. 책을 드렸더니 이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네가 복직 초기에 글을 올릴 때는 그 글들이 울고 싶은데 남들 앞에선 울 수 없어 쓰는 글 같았어. 말은 못 했는데 마음이 많이 그랬다. 요즘 글들은 편안함이 느껴져 좋아.”



“안 힘들었는데요?” 아닌 척했지만 그런 마음에 글을 쓰기 시작한 게 맞습니다. 누구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은데, 누군가에겐 털어놓고 싶은 날들이었고, 그래서 필명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었습니다. 그 새벽에 글을 올리면 조회수가 올라가는 게 신기했고, 얼굴 한 번 보지 않은 사람의 글에 댓글을 달아주시는 건 더 신기했습니다. 아마 울고 싶을 때 슬픈 영화를 찾는 것과 비슷한 마음이었을 겁니다.


돌이켜보면 복직했을땐 잠깐 외도하는 것처럼 일을 했던 것 같습니다. 여전히 아이는 엄마가 끼고 키워야 하는 줄 알았고, 언제나 아이에게 ‘소환’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아이 곁을 비우는 게 미안했고, 엄마가 되어서도 예전처럼 살려고 하는 나 자신이 뻔뻔하게 느껴졌습니다. 엄마가 되어서 엄마로만 살지 않으려고 하는 것 자체가 죄를 짓는 것 같았습니다. 


웅이를 낳고 복직했을 때 옆집에 할머니가 살고 계셨습니다. 출근길에 마주칠 때마다 “일 나가?” 물으셨습니다. “네” 대답하면 “애는?” 물으셨죠. “베이비시터 이모님이 돌봐주세요”라고 하면 “남는 것도 없겠구만, 애만 고생시키네” 혀를 차셨습니다. 일주일에 두세번은 할머니를 만났고, 둘째를 임신해 출산휴가에 들어올 때까지  같은 상황이 반복됐습니다. 



둘째를 낳고 복직을 했습니다. 할머니는 여전히 옆집에 살고 계셨고, 4살이 된 웅이 손을 잡고 집을 나서는 저에게 같은 질문을 하셨습니다. 


“일 나가?” 

“네” 

“얘는?” 

“어린이집에 가요” 

“얘 동생은?” 

“시터 이모님이 오세요.” 


그러면 웅이를 쳐다보시면서 “엄마때문에 니들이 고생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저 혼자 있을 때에야 억지 웃음을 지르며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었지만, 이번엔 상황이 달랐습니다. 웅이가 같이 듣고 있었습니다. “걱정하시는 마음은 알겠는데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아이도 다 알아듣거든요.”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소심하기로 소문난 저에겐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말이었습니다. ‘아이 앞에서 역정내시면 어쩌지’ 걱정은 됐지만 할머니를 만날 때마다 아이가 “엄마때문에 고생”이라는 말을 듣는 건 참을 수 없었습니다. 다행히 할머니는 헛기침을 하시며 발걸음을 재촉하셨고 그 뒤로 같은 질문은 없었습니다. 




사회학자 오찬호는 ‘모성’을 한국사회에서 가장 악질적으로 남용되는 단어 중 하나로 꼽습니다. “사전적 뜻은 ‘어머니로서 가지는 정신적·육체적 성질, 또는 그런 본능’이지만, 사회·문화적으로 함의된 솔직한 뜻을 풀어보자면 ‘어머니라면 당연히 가져야 하는 태도’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라면서요. 

동의합니다. 엄마가 되고는 ‘해야 할 일’이 늘었습니다. 엄마가 되고 싶었던만큼 즐겁게 각오했던 부분입니다. 그런데 그 중 많은 것들에 ‘엄마라면 당연히’라는 조건이 달려있더군요. 자연분만, 모유수유, 3세 신화 등은 모두 엄마라면 당연히 해내야 하는 일들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좋은 엄마 시험대’에 오른 것 같을 때가 많았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어려운 육아는 더 어렵게 느껴졌고, 잘 해내고 싶은 마음이 커질수록 숙제처럼 다가왔습니다. 즐거움과는 멀어졌습니다.  

 
대중심리학자인 브레네 브라운
은 이런 상황에서 벗어나려면 기대치와 현실 사이의 괴리를 깨달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사회의 기대치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질문을 던지라고 제안합니다. 저에겐 옆집 할머니와의 대화가 시발점이었습니다. 그 뒤로는 ‘엄마라는 사람이!’라는 시선에 ‘엄마가 뭐요?’ 말똥말똥 되묻고 있습니다.



물론 교과서적으로는 자연분만이, 모유수유가, 만3세까지 끼고 키우는 게 ‘최고의 육아’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케이스 바이 케이스’라는 말처럼 아이마다 기질과 성격이 다릅니다. 육아서에 나오는 지침을 그대로 적용해도 ‘내 아이’에게는 소용이 없습니다. 또 육아는 아이를 향한 일방통행이 아닌 아이와 엄마의 상호작용이기도 합니다. 엄마를 빼고 아이만 고려한 육아는 반쪽짜리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좋은 엄마가 되고 싶다면, 육아서가 아닌 ‘내 아이’를 공부하면 좋겠습니다. ‘어떻게 하면 아이에게 최고의 것을 줄까’가 아닌 ‘어떻게 하면 나와 아이, 모두에게 최선의 환경을 만들 수 있을까’를 고민하면 좋겠습니다. 그러려면 사회의 시선에서 벗어나 우리 가족안의 기준을 만들고, 그 기준으로 바라봐야 합니다. 적어도 육아에서만큼은 아이와 나, 우리 가족을 중심으로 바라보는 게 가장 큰 그림이 아닐까 싶습니다. 


+ 심리학자인 이자벨 피이오자는 “아이는 ‘부모’라는 하나의 ‘역할’을 마주하고 싶어하는 게 아니라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감정·욕구·생각·가치관·능력·한계를 가진 ‘진짜 사람’을 만나고 싶어 한다”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엄마’를 넘어 ‘엄마사람’으로 살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 '엄마사람'으로 살고 싶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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