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연: 그런데 그래님, 부모는 대체 어떤 사람이에요?
그래: 우리가 ‘부모’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게 꽤 오랜데, 갑자기 부모가 누구인지 궁금하세요?
아연: 네.. 아무리 생각해도 정의를 내리기 어려워서요. 학생은 배우는 사람, 직장인은 직장에 소속되어 일하는 사람. 저에게 주어졌던 맡았던 역할들은 이렇게 정의해도 크게 틀린 것 같지 않았어요. 할 일도 학생은 공부, 직장인은 일이라고 명확히 보였는데 부모는 잘 모르겠어요. 부모는 ‘아이가 있는 사람. 아이를 키우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었거든요. 자꾸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딱히 틀린 건 아닌데 그렇다고 맞는 것도 아닌 것 같아서요.
그래: 저도 부모가 되고 나서 비슷한 질문을 가지게 되었어요. 어쩌면 그 질문이 지금까지 이 일을 하게 만든 바탕이 된 걸 수도 있고요. 지금 그 질문에 보통 어떤 대답을 듣게 될 것 같으세요?
부모 = 아이를 키우는 사람?
아연: 아이를 키우는 사람이요. 그런데 부모가 되어보니 그건 코끼리의 다리만 만지고 있으면서 코끼리라고 말하는 것 같아요.
그래: 저도 그랬어요. 아이를 키우는 사람인 것도 맞지만 분명 그 이상이란 생각이 들지요? 저는 그때 제일 먼저 사전을 찾아봤었어요. 혹시 그 사이에 바뀌었을지도 모르니 지금 같이 찾아볼까요?
아연: 국어사전에서는 ‘집에서 어린아이를 돌보아 주는 사람’이라고 정의하고 있네요. 집에서라니….
영어사전도 찾아볼게요. parents 는 ‘부모’ parents에 ‘-ing’가 붙은 ‘페어런팅(parenting)‘은 ‘육아. 아이 기르기 라고 되어있네요. ‘아이들을 돌보고 자라게 하는 것’이라고요. 국어사전에서도, 영어사전에서도 부모는 아이를 키우는 사람이라고 정의하고 있네요.
그래: 제가 처음 사전을 찾아봤을 때도 같은 정의였어요. 정의는 쉽게 변하지 않네요. 우리나라뿐 아니라 외국에서도 부모를 아이를 키우는 사람으로만 정의하고 있다는 사실이 좀 아쉬웠어요. ‘페어런팅(parenting)’은 ‘부모살이’ 나 ‘부모됨’ 정도가 아닐까 싶었는데, ‘육아. 아이기르기’라는 정의에 동의하기가 어려웠어요. 무엇보다 전 부모로서 정말 잘 살고 싶었거든요. 그 마음은 아이를 키우는 사람으로서 잘 살고 싶은 마음과는 차이가 있었어요.
아연: 맞아요. 부모의 정의에 아이만 있고 부모는 없네요.
그래: 저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는데, 한 번 더 들여다보면 아이도 없어요.
아연: 아이도 없다고요?
그래: 부모가 아이를 키우는 사람이라면, 아이는 부모가 키우는대로 커야 하는 사람이 되니까요. 부모는 아이를 키우기 위해 살고, 아이는 부모가 키우는 대로 커야하는 관계에서는 부모에게도 ‘나’가 없고 아이에게도 ‘나'가 없어요. ‘사람’은 사라지고 서로 역할로만 남는 거지요.
페어런팅의 정의를 바꿉니다
아연: 부모인 저의 입장에서도 ‘아이 키우는 사람’이라는 정의가 답답했는데 아이 입장까지 생각하니 끔찍하네요. 그럼 부모를 어떻게 정의해야 할까요?
그래: 같이 ‘페어런팅’의 정의를 생각해보시면 좋겠어요. 저에게 부모에 대한 정의를 다시 생각하게 한 계기는 막내 현우가 4살 무렵에 있었던 일상적인 경험이었어요. 급성 편도염때문에 컨디션이 갑자기 안 좋아졌어요. 열도 나고 몸살도 심한 상태로 겨우 퇴근을 했는데 다행히 남편이 일찍 와 있더라고요. 남편과 아이들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침대에 누웠지요. 그런데 한 5분이나 지났을까.. 문이 열리더니 현우가 들어오는 거예요. 짧은 다리로 낑낑대며 침대에 올라오더니 저를 꾹꾹 밟으며 침대 머리맡까지 가서 무언가를 부시럭거리더니 내려가요. 몸살 난 상태에서 밟히니까 정말 뼈 속까지 아프더라고요.
아연: 아이는 그럴 수 있다고 해도 전 남편에게 화가 났을 것 같아요. 아이랑 좀 놀아주지…
그래: 저도 그 순간 욱하고 화가 올라왔는데… 일단 아이가 나갔으니 참았어요. 그런데 조금 지나 또 들어와요. 또 저를 밟고 지나가 침대 머리맡에서 부시럭부시럭, 그리고 반복 또 반복. 화가 나는데 화를 낼 힘이 없었어요. 지나고난 지금은 이날 화를 낼 힘조차 없었던 게 두고두고 감사해요. 그러던 중 잠이 들었고, 한 두시간이 지나 일어났던 것 같아요.
눈을 떴는데 침대 머리맡에 종이로 만든 엉성한 꽃 열송이가 다닥다닥 붙어있는 거예요. 딱 봐도 누구 작품인지 알겠어요. ‘현우야~ 이게 뭐야?’ 물었더니 너무나 해맑은 얼굴로 ‘으응.. 엄마 빨리 나으라고~’ 하는 거에요.
아연: 세상에… 엄마가 걱정되서 뭐라도 해주고 싶어서 꽃을 만들고 붙인 거군요.
그래: 전 그 때 모든 게 잠시 일시정지 되는 것 같았어요. 지금도 그 때 그 순간이 생각나는데요. 그전 까지 전 부모인 내가 아이를 돌보고 키운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아이도 아이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엄마인 저를 돌보고 있었던 거예요. 돌본다는 게 단순히 부모와 아이 사이를 수직적으로 연결하고 있는 행위가 아니었던 거지요.
그 순간, 어린 시절 엄마를 위해 뭐라도 하고 싶어 하던 제 모습이 떠올랐어요. 저녁 무렵이 되면 감자를 깎기도 했고,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동생들의 숙제를 도와주고 목욕을 시키기도 했어요. 엄마가 막내를 임신하셨을 때, 입덧 하시는 건 줄도 모르고 밥을 못 먹고 누워있는 엄마가 걱정되서 라면스프 국물에 밥을 넣고 끓여서 가져가던 모습도요. 가정 형편이 넉넉치 않다고 느껴질 때면 버스를 타는 대신 걸어서 학교에 가곤 했어요. 저도 제 나름대로 엄마, 아빠를 돌보며 살아왔더라고요. 아연님도 그런 기억이 있지요?
아연: 네. 이야기를 들으며 많은 순간들이 스쳐 지나갔어요. 할 말 못하고, 눈치보고 참으며 컸다고 생각했거든요. 그게 제 나름대로 엄마, 아빠를 돌본거였다고 생각하니 어린 제가 자랑스럽고 대견해요.
그래: 아…. 정말 대견한거지요. 가족을 돌보려고 애쓴 아이였던 거잖아요. 전 그 이후에 아이들의 행동이 다르게 보였어요. 식사를 마친 후에 그릇을 설겆이 통에 넣는 걸 가르친대로 잘 하는 것으로 보는 대신 나를 도와주는 주체적인 행동으로 이해하게 되더라고요. 자연스럽게 고마운 마음이 더 자주 느껴졌어요. 그리고 부모를 이렇게 정의하게 되었어요. 부모는 아이를 키우는 사람을 넘어 아이와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이고요.
아연: ’부모는 아이와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정의하니 떠오르는 이미지도 달라요. 부모는 아이를 키우는 사람이라고 했을 때는 부모가 아이를 업고 있는 장면이 떠올랐는데 지금은 부모와 아이가 손을 잡고 걸어가는 장면이 떠오르네요. 아이와 같이 잘 걸어가고 싶어요.
그래: 우리는 아이를 잘 키우기 위해서만 살지 않아요. 아이를 뚝 떼어놓고 나만 잘 살려고도 하지도 않지요. 부모가 된 이후엔 아이와 상관없이 나만 잘 산다는 게 불가능 하다는 걸 깨닫게 되니까요. 성숙한 부모는 과거에 ‘내가 이랬는데…’ 에 매달리지 않고 지금 사랑하는 사람과 더불어 잘 살아가기 위한 노력을 합니다. 아이와 더불어 잘 살아가는 부모 안에선 아이도 엄마, 아빠도 사람과 사람으로 존재하고 있어요. 부모살이의 정의를 그렇게 바꿔보고 싶지 않으세요?
[요즘부모 다시보기] 다음회에서는 부모의 정의가 바뀌면 달리 보이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눕니다.
*자람패밀리는 부모의 삶을 연구하며 부모의 성장과 연결을 돕는 사회적기업입니다. 자람캠퍼스에서는 부모를 위한 다양한 워크숍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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