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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틈틈이 May 11. 2016

워킹맘 퇴근길. 오늘도 가방無!

"저녁 먹으러 가?"

"아뇨. 퇴근하는 길이요."

"가방은?"


없습니다. 손에 쥔 건 달랑 휴대전화 하나. 고개를 갸우뚱하는 선배를 뒤로 하고 지하철역으로 향합니다.


처음엔 실수였습니다. 아침 출근길에 웅이 가방 낮잠이불가방 실내화주머니 특별활동가방을 메고 들고 나오다가 제 가방은 잊었습니다. 어린이집에 도착해 웅이 짐을 다 넘기고 나서야 아차 싶었습니다.


가방을 가지러 집에 들르면 지각이 뻔합니다. 주머니엔 휴대전화가 있었고, 휴대전화 케이스엔 비상용 카드 한 장과 약간의 현금이 있습니다. 일단 신용카드가 있으니 지하철은 탈 수 있다, 출근부터 하자고 마음 먹었습니다.


괜찮을까 불안했지만 불편한 건 없었습니다. 평소에도 회사에서 화장을 고치는 일 없고, 그날은 외부 사람을 만날 일도 없었습니다. 신용카드로 지하철을 탔고, 점심값을 계산했습니다. 퇴근길에 빵집에 들러서도, 지하철을 탈 때도 신용카드가 있으니 문제 없습니다.


오히려 편했습니다. 특히 퇴근할 때요.


오후 6시 30분. 공식 퇴근 시간입니다. 하지만 자리에서 일어나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 팀에 애 둘 엄마는 제가 유일합니다. 칼퇴근하는 사람도 제가 유일하지요. 공식 퇴근 시간이지만 눈치가 보입니다. 소리가 나지 않게 의자를 밀고 조용히 인사를 합니다.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가방이 없으니 부스럭부스럭 짐을 챙길 필요 없습니다. 화장실 가는 것처럼 휴대전화만 들고 나오면 됩니다. 가방이 없으니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선후배들에게 '이야 칼퇴근~ 회사 다닐만 하네' 괜한 눈총을 받지 않아도 됩니다. 아무리 작은 가방이어도 무게가 있었는데 두 손이 자유로우니 발걸음도 가볍습니다.


출근길도 수월합니다. 집을 나설 때면 웅이 어린이집 가방에 특별활동 가방, 월요일은 낮잠이불 가방에 실내화 주머니까지 들어야 합니다. 손은 두개 이지만 한 손은 웅이 손을 잡고 걸어야하니 모든 짐은 메거나 한 손에 들어야 합니다. 제 가방 하나가 있고없고는 차이는 컸습니다.



생각해 봤습니다.

가방을 꼭 가지고 다녀야 하나?


가방에는 지갑 립스틱 볼펜 화장지가 있습니다. (가끔 웅이가 깜짝 선물로 장난감을 넣어두긴 하죠.) 카드와 현금이 휴대전화에 있으니 지갑 열 일 없습니다. 립스틱은 미팅이 있을 때 필요하니 회사에 두고 다니면 됩니다. 볼펜? 메모는 휴대전화에 합니다. 회사에선 아이들과 떨어져 있으니 화장지도 없어도 됩니다. 휴대전화는 대부분 손에 쥐고 다닙니다. 가방, 꼭 필요한 건 아니네요.



그래서 다음 날도 가방없이 출근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요.


지난 겨울이 생각납니다. 우리 팀은 오전 9시 20분 회의로 하루를 시작합니다. 저는 우리팀의 알람입니다. 제가 출근하면 팀원들은 회의시간이구나, 테이블로 모입니다. 여유있게 출근하고 싶지만 웅이는 지금도 어린이집에 1등으로 등원합니다. 친구들 기다리며 혼자 노는 시간은 되도록 적게 하고 싶습니다. 제가 더 일찍 출발하려면 베이비시터 이모님도 일찍 오셔야 하는데 이모님도 가족들을 챙기고 출근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전 계속 '회의 알람'입니다.


겨울이라 두꺼운 외투까지 입고 출근하면 옷을 벗는데도 시간이 걸리죠. 그래서 웬만하면 패딩을 입지 않았습니다. 가능한 얇은 외투, 가디건을 입고 다녔습니다. 주변에선 '넌 추위도 안타냐'고 놀라워했지만 그렇게라도 해야 칼출근 칼퇴근하는 눈치가 덜 보였거든요. 감기에 걸리는 것보다 마음 편한 게 우선이었습니다.


휴대전화만 들고 퇴근하던 어느 날. 선배 워킹맘을 만났습니다. 빈 손으로 퇴근하는 이유를 설명하니 선배가 그럽니다.


"워킹맘 퇴근은 퇴근이 아니라 탈출이지. 탈출할 때 제1원칙은 몸만 빠져나오기야. 잘 하고 있어!"


민망하지만, 이럴 땐 브이 한 번 날려줘야 합니다. ^^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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