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넘고 물 건너 말도 탄 콜사이/카인디 호수 트레킹
카자흐스탄에 간 건 꽤 오래전의 일이다.
당시 내 신분은 대학교 4학년 1학기를 앞둔 휴학생이었다. 슬슬 취업 준비를 해야 하는 때였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4학년 1학기라는 꽤 늦은 시기에 교환학생에 지원할 정도로, 해외 생활에 대한 관심이 커지던 때이기도 했다.
졸업 전에 학교에서 지원하는 프로그램은 최대한 활용해야겠다고 다짐하며 학과 홈페이지를 찬찬히 살펴보던 중, "국제 인턴십 프로그램"*을 발견했다. 취업에 필요한 인턴 경험도 쌓을 수 있고, 해외에서 근무해 볼 수 있다는 게 큰 메리트였다. 다만 지원할 수 있는 나라와 회사가 몇 군데 안 되었는데, 그중 카자흐스탄이 눈에 띄었다.
*이 글을 쓰며 오랜만에 학과 홈페이지를 방문해 보니, 지금은 더 이상 국제 인턴십 프로그램을 정기적으로 운영하고 있지 않았다. 코로나 이후로 중단되었을 수도 있겠다. 대신 요즘엔 월드잡 홈페이지 (www.worldjob.or.kr) 등이 잘 되어있으니, 관심 있다면 한 번 살펴봐도 좋을 것 같다.
카자흐스탄(Kazakhstan)
많은 나라를 여행했지만, 그때까지 한 번도 가볼 생각조차 못 해본 나라였다. 앞으로도 갈 일이 있을까 싶었다. 세계지도를 보면 카자흐스탄은 중앙아시아에 위치하여, 유럽이나 북미 대륙보다 우리나라와 훨씬 가깝다. 비행시간은 7시간도 채 걸리지 않는다. 하지만 미디어에서 딱히 접해본 적이 없다 보니, 나에겐 미지의 세계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가보고 싶었다. 새로운 세계를 탐험하고 싶은 마음은 그때도 마찬가지였나 보다. 그런 곳에서 인턴 생활을 할 수 있다니, 신선했다. 아무나 하지 못하는 경험 같았다. 이왕 학교 프로그램을 활용해서 국제 인턴을 한다면, 여행으로 쉬이 가지 못하는 나라에서 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카자흐스탄에 있는 한국기업에 1 지망으로 지원했다. 다행히 결과는 합격. 해당 프로그램으로 같은 학교의 경영학과 동기 1명이 함께 가게 되었고, 카자흐스탄이 러시아어권이다 보니 노어노문학과에서도 2명이 왔다. 그렇게 또래 인턴 3명과 함께 카자흐스탄의 경제도시 알마티(Almaty)에서 6주간 인턴 생활을 시작했다.
다녀와보니 카자흐스탄은 낯선 나라도 아니고, 위험한 나라도 아니었다. 카자흐스탄의 가장 큰 도시인 알마티는 상당히 모던했고, 생활하기에도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 사람들의 생김새는 한국인과 많이 닮아있었고, 문화도 닮아있었다. 그래서 K-POP을 비롯한 한국문화도 꽤 인기 있었고, 밥과 면 종류 음식을 주식으로 하여 음식도 입에 잘 맞았다. 낯설기보다는 여러모로 참 친근한 나라였다.
회사에는 우리 또래의 카자흐 직원분들도 두 분 계셨다. 한국어과를 졸업하고, 한국 예능을 많이 시청해서 한국말을 정말 잘하시는 분들이었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금방 친해졌고, 여섯 명이서 주말이면 열심히 놀러 다니기 바빴다.
그 첫 주말의 행선지는 콜사이 호수 국립 자연공원(Kolsai lakes National Natural Park)이었다. 알마티에서 차로 300km 정도 떨어진 곳인데, 1박 2일 현지 투어를 예약하여 투어 버스를 타고 토요일 아침 일찍 알마티를 출발했다.
1일 차: 콜사이 호수 (Kolsai Lake) 트레킹
2일 차: 카인디 호수(Kaindy Lake), 차른 캐년(Charyn Canyon) 관광
주요 방문지는 콜사이 호수, 카인디 호수, 차른 캐년이었는데, 모두 정말 아름다웠다. 다만 두고두고 잊을 수 없는 것은 콜사이 호수 트레킹이다. 직접 땀 흘려 본 호수이기 때문이리라.
우리는 우리가 가는 곳이 어떤 곳인지도 잘 모른 채, 그저 12km 트레킹이라고 하여 가벼운 마음으로 따라나섰다. 당시에는 '트레킹'에 대한 개념도 잘 정립되지 않아, 그저 등산보다 쉬운 것이라고 생각하였으나 오히려 그 반대였다.
● Trail(트레일) = 도보여행, 산 정상을 오르는 게 목적이 아닌 올레길/둘레길과 같은 도보여행
● Hiking(하이킹) = 등산, 1~6시간 내외로 1개의 봉우리를 오르내리는 가벼운 산행
● Trekking(트레킹) = 종주 산행, 1박 이상, 여러 봉우리를 연이어 가는 산행
● Climbing(클라이밍) = 등반, 암벽을 오르는 행위
● Mountaineering(마운티니어링) = 전문 등산, 암벽 및 빙벽 등반을 포함하는 전문 고산 원정
심지어 뒤늦게 알고 보니 편도가 12km일 뿐, 왕복 24km의 트레킹 코스였고, 대개 좁게 난 호숫가 절벽길을 따라 긴 오르막길과 짧은 내리막길이 반복되는 난이도 높은 코스였다. 콜사이 호수는 크게 3개가 있었는데, 우리의 트레킹 코스는 Lower Kolsai Lake에서 시작하여 Middle Kolsai Lake까지 왕복하는 코스였다.
● Lower Kolsai Lake(고도 1,818m): 차로 접근 가능하고, 여러 게스트하우스와 캠핑지가 있는 곳.
● Middle Kolsai Lake(고도 2,252m): 세 개의 콜사이 호수 중 가장 크고 아름다운 약 50m 깊이의 호수
● Upper Kolsai Lake(고도 2,850m)
지금의 내가 이런 트레킹을 간다면 훨씬 준비가 잘 되어 있을 것이다. 별다른 게 아니다. 그저 배낭에 약간의 간식과 충분한 물, 등산에 적합한 옷과 신발. 그러나 당시 우리는 이조차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대체 무슨 생각이었나 싶은데, 그냥 별 생각이 없었다. 그저 놀러 간다는 것에 신났을 뿐.
나는 배낭은커녕 딱 붙는 스키니진을 입고 있었고, 트레킹에 전혀 도움 되지 않을 두껍고 무거운 후드를 입어 트레킹 내내 들고 다녀야 했다. 우리는 물도 충분히 챙겨 오지 않아 트레킹 중간중간에 있는 계곡에서 물을 떠마셨다.
그렇게 준비되지 않은 채로 걷고 또 걸었다. 한참을 걸었으나 또 한참을 가야 했다. 목적지는 보이지 않았다. 내가 지금 걷는 만큼 이따가 다시 돌아와야 한다는 사실에 힘도 나지 않았다.
그때 트레킹하는 사람들 옆으로 말들이 지나갔다. 얼마간의 돈을 지불하면 목적지인 두 번째 호수까지 데려다주는 것이었다. 당시 저질체력이었던 나는 몇 차례 고민 끝에 나보다 더 지쳐있는 일행 한 명과 함께 말을 탔다.
말을 타니 편했고, 또 재밌었다. 말은 가뿐하다는 듯 호숫가 절벽을 따라 성큼성큼 나아갔고, 계곡물도 아무렇지 않게 건넜다. 가파른 경사의 산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난코스에서 말을 타고, 말을 이토록 이동수단으로 이용해 본 것은 처음이라 신선했다.
다만 말이 나무 사이로 난 좁은 길을 지날 때, 날카로운 나뭇가지에 내 무릎이 크게 한 번 쓸렸다. 말이 내 다리가 있을 공간까지 고려해 주지는 않았다. 상처 난 당시에는 얕은 상처여서 크게 개의치 않았는데 문제는 돌아오는 길에 있었다.
돌아올 때는 다시 힘을 내어 일행들과 전구간 걸어서 돌아왔다. 그런데 그 길은 말들이 많이 지나가고, 따라서 곳곳에 말똥도 많고 파리도 많은 곳이었다. 수많은 파리들은 연약한 내 상처를 귀신같이 알아챘고, 말똥에 흥미를 잃을 때면 내 상처 위로 자꾸만 옮겨 앉았다.
그렇다고 걷는 내내 무릎에 손을 대고 걸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나는 계속 걸어야 했다. 파리들은 아무리 쳐내도 다시 돌아왔고, 그렇게 관리가 안된 내 상처는 크게 덧나 몇 주간 무릎 안 쪽까지 아파하며 고생해야 했다.
또 다른 일행은 트레킹에서 돌아온 뒤 며칠 동안 물갈이를 했다. 아마도 목마르다고 계곡에서 자꾸만 떠마신 물이 문제가 되었으리라.
이렇게 우리는 제각기 고생했지만, 목적지에 다다라서 본 두 번째 콜사이 호수의 아름다움은 이 모든 걸 추억으로 미화하기에 충분했다. 고생 끝에 마주한 호수여서일까, 더 반짝이고 소중했다.
사람들은 호수 앞 잔디에 앉아 너도나도 간식을 나눠먹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트레킹에 지친 우리도 호수에 한 번 달려들고, 찬물에 기겁을 하고 나온 뒤 주섬주섬 자리를 잡았다. 잔디밭 위 여유로운 사람들은 늘 다른 세계 사람들 같았지만, 어느새 우리도 그중 하나가 되어있었다.
이 날의 트레킹은 내가 성인이 되어서 해 본 첫 액티비티였다. 꼭 기록하고 공유하고 싶은 순간이어서 내 첫 인스타그램 포스팅이 되기도 했다. 아직도 그날의 콜사이 호수는 내 안에서 반짝인다. 행복하고, 뿌듯하고, 평화롭고, 아름다운 공간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