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NS보다 정감 있는 달력 메모장
도대체 뭐라고 적으면 들어오시겠습니까!!??
카피라이터는 기발한 아이디어나 감수성으로 특정 상품이나 서비스가 일반인들에게 쉽게 기억될 수 있는 광고 문구나 문안을 작성하는 일을 담당하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들은 주로 제안하는 사람이기에 상대방 입장을 잘 알아야 한다. 카피라이터 정철은 ‘영감은 떠오르는 게 아니라 쓸고 닦고 뒤집어엎으며 찾는 것’이라고 한다. 나도 그런 영감을 탐구하고 있다. 마치 광고의 카피라이터와 같이 나만의 글을 쓰려고 사람들의 마음을 훔치려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나이에 따른 경험의 차이에서부터 디지털 원주민이라는 아이들과 그런 것에 관심도 없는 노인들까지 이 넓은 폭의 스펙트럼을 어떻게 모두 감당하겠는가, 보통 30-40대의 마음을 잡으라고 한다지만 손사래 치고는 그냥 내가 감당할 글을 쓰기로 했다.
어릴 적 우리 집에 걸려있던 달력은 참 묘했다.
동네 사람 생일과 제삿날이 동그랗게 칠해져 있고 그 밑으로는 깨알같이 최근 만난 사람들의 기분을 적어두는 큼지막한 달력이 걸려 있었다. 최근 만난 사람들의 기분까지 적다니 매우 디테일하셨던 아버님이시다. 그런데 그것이 참 효용적이었다. 그래서 묘하다는 것이다.
붕근너머 박 씨 아저씨 술만 취하면 옷을 달라고 한다.
옆집 조산 댁 아주머니 아들이 취직해서 기분이 좋다.
꼬댕집 아저씨 옆 집하고 싸워서 아직 말을 안 한다.
월남 집 아저씨 많이 아픈 것 같다. 등등
그 달력은 사람들과의 관계를 중요시하시는 아버지께서 관리하시는 동네의 정보 산실 이어서 우리들도 그것을 보고 이웃집에 갈 때 대처가 가능할 정도였으며 어떤 말을 해야 좋아하시는지 정도는 눈치껏 알고 있어서 동네 어르신들에게 늘 칭찬을 받고 다녔다.
지금은 핸드폰이 모든 것을 다해주고 있다. SNS만 봐도 오늘 누구 생일이고 어떤 기념일인데 그들이 지금 어디서 뭘 하는지 어떤 것에 관심이 많은 지까지 세세한 정보를 알려주는 침묵의 무감정의 무서운 존재로 정보의 산실이 아니라 정보의 메이커가 되어있다. 하지만 이런 세상에서도 감정이 살아있는 정겨운 아버지 달력 같은 정보의 산실을 예전 잠시 만났었다.
핸드폰 가게 앞에 붙은 문구들이었다.
지금은 어떤 연유인지 잘 붙이지 않지만 짧은 구성의 강력한 문구로 호객을 하였다 “세상에 공짜폰은 없습니다”, “가장 싼 매장은 아닐지 몰라도 가장 정직하게 판매하겠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싼 집 정통부 경고 먹은 집. 경고 먹어도 싸게 드림”, “우리 사장님이 미쳤어요”, "더 싸게 준다고 옆집에서 화를 냅니다" 등등 모두 비슷비슷해서 변별력이 없는데도 계속 나붙더니 얼마 지나자 않자 차별화 경쟁이 불붙어 아주 기발한 그들만의 살아있는 언어의 유희들로 치열하게 나부끼는 전쟁터가 되어 어지러움으로 가득 차 눈살을 찌푸리게 했었다.
그럼에도 신도시에서는 적은 인구에 한집 건너 붙어있는 핸드폰 가게들이다 보니 치열함은 더욱 과열되어 드디어 동네를 파고들기 시작했다. 눈치 빠른 사장님들은 동네 공인중개사들보다도 더 그 동네를 잘 파악하여 살아있는 정보들로 인맥을 만들어 나가셨다.
평생 여기서만 살아 거짓말 못하는 집
OO동장 아들 S대 합격 축하드립니다
e-아파트 입주 환영, 오시면 선물드립니다
사거리 공사로 길이 막혔습니다, 쉬었다 가세요
마치 어릴 적 아버지의 묘한 달력을 다시 들여다보는 듯했다.
이제는 내 글을 쓰겠다고 나서다 보니 그런 독특한 살아있는 글말들을 다시 찾아 나서게 되었다. 아쉽게도 요새 핸드폰 가게는 깨끗해져가고 있지만 그래도 아직 곳곳에 가끔 살아 나부끼고 있어 만나면 반가웠다. 인터넷 속의 언어들은 상식적인 측면에서는 통하지만 사람의 세심한 감정의 디테일은 건드리지 못하기 때문에 좀 더 살아있는 언어가 필요해졌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집에 예전 아버지께서 하셨듯이 서재에 큰 종이를 걸어놓고 날아다니는 독특한 글말들을 붙여 놓고 있다.
쉴 때나 커피 마실 때, 글을 쓰려할 때 그 큰 종이의 글들을 한참 쳐다보면 재미있는 상상이 솟아올라 나만의 글쓰기에 빠져버리게 된다. 마치 어릴 적 우리 집에 걸렸던 추억의 달력 그 정보 산실 속으로 들어가 있는 정겨움의 감정 우러나 진정한 나만의 글을 쓰게 된다. 그래서 지금도 길을 걸을 때면 주변을 살펴보는 버릇이 생겼다.
지난 휴일 아내와 거리를 걷다 운 좋게 경쟁에 지친 답답하신 어떤 가게 사장님이 붙여놓은 살아 날뛰는 글말 한 마리 붙잡아 또 집안 벽 종이에 붙여 놨다.
도대체 뭐라고 적으면 들어 오시겠습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