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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롱혼 Jan 11. 2023

백발이 로망이 되었다

흰머리는 벼슬이고 훈장이다

엘리베이터를 타면 어김없이 거울 앞에 선다. 머리를 숙여 정수리를 비춰 머리카락이 빠져 가운데가 휑해지는 것과 흰머리 올라오는 것을 습관적으로 확인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도 씁쓸해하며 정수리를 뒤적이는데 거울 속에 비친 아내의 머리가 보였다. 염색을 한지 오래되다 보니 흰머리가 많이 올라온 하얀 정수리. 갑자기 울컥 해진다. 나와 아내 둘 다 흰머리가 많아 늘 염색을 하게 된 지 오래되었다. 그동안 흰머리는 유전이라 어쩔 수 없다며 불편한 염색을 참으며 쉽게 넘겨 왔는데 오늘 아내의 모습은 그게 아니었다. 유전이 아닌 고단한 삶이 엿보였기 때문이다. 왜 흰머리가 삶의 고단함으로 비칠까


보통 나이를 먹으면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이 흰머리이다 하지만 스트레스와 유전적 요인으로 앞당겨 나오기도 한다. 앙투아네트처럼 단두대 오르기 전 극심한 스트레스로 하룻밤사이에 백발이 되었다는 전설과 미국 존 매케인도 베트남 전쟁포로로 고문을 당한 후 갑자기 백발이 되었다고 하는데 하지만 스트레스가 흰머리를 촉진한다는 말은 아직 인과관계가 명확하지 않다고 한다. 그럼 유전적인 요인인데 의학에서도 이를 많이 신뢰한다고 한다. 우리만 봐도 그런 것 같다 아버님과 장모님이 모두 백발이시다.


유전을 핑계로 고단함의 감정을 대충 넘기려는데 오늘따라 아내의 흰머리가 자꾸 맘에 걸리며 안타까움에 감정이 촉촉해져 간다. 묵묵히 아내와 걸어가면서 우리의 결혼식 때 주례를 해주신 교장선생님의 주례사가 생각났다. 그 당시 주례사에는 공식적인 멘트가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 사랑하라는 주례사이다. 나는 분명히 똑똑히 들었다. 검은 머리가 파뿌리 되도록 사랑하라 하셨다. 그런 아내가 지금 흰머리가 밀려 올려온 모습으로 옆에 서 있다. 파뿌리가 되어 가는 중인데 그동안 보듬어 사랑을 하지 못했던 것 같다. 미국에서 아이들 공부시킨다고 온갖 고생을 다하면서 버텨온 세월이 분명 더욱 흰머리를 촉진시켰을 것이다. 안타깝다. 슬며시 손이 시럽 다는 핑계로 손을 잡으려니 이유 없이 뿌리친다. 


매정하게 흘러간 시간을 지금에 와서 어쩌랴 서로 열심히 살아왔는데 우린 서로에게 박수를 보내야 한다. 그리고 당당해져야 한다. 그 흰머리는 고단함이 아니라 벼슬이고 훈장이다. 그것을 당당히 뽐내고 드러내야 한다. 사실 언제부터인가 친구의 은색의 멋진 모습에 매료되어 염색을 거부하고 흉내를 내어보기도 했었다. 하지만 옆머리의 은색이 유독 심한 나로서는 그리 멋있지 않고 지저분하다며 주변의 핀잔을 듣고는 다시 염색을 했었기에 멋진 은발은 나의 로망이 되어 있다. 


잠 20:29, “젊은 자의 영광은 그 힘이요,  늙은 자의 아름다움은 백발이라!”

이백, “감추고 싶었던 백발(白髮), 이젠 내 자신감의 원천(源泉)”


나의 바람에 용기를 주는 반가운 소식이 있다. 노화의 상징이던 흰머리의 위상이 변화를 당당하게 수용한 자신감과 매력을 상징하는 키워드가 됐다고 한다. 그리고 더 이상 염색을 하지 않기로 선언한 이들의 예찬론과 팁을 담은 ‘고잉 그레이’란 책이 인기가 있는데 여기에 특별 기고를 한 오금숙 화가는 “그레이 헤어가 되자 왠지 색다른 분위기의 새 옷을 입은 것 같았다”며 “신기하게도 그 후엔 어떤 옷을 입어도 잘 어울려서 SNS에 패션 사진을 올리기 시작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젊은이의 호응도 높아져 입소문이 퍼진 뒤에야 그레이 헤어가 하나의 패션이고 개성의 표현이란 것을 확실히 알게 됐다고 말했다. 더욱이 ‘#그레이헤어’ 해시태그가 달린 포스팅은 210만 개, ‘#실버헤어’는 180만 개에나 이르고 ‘흰머리 신경 쓰지 않기’ ‘그레이 헤어 운동’ ‘실버 여행’ 등의 검색어도 함께 인기다 하니 얼마나 반가운가. 당당하게 흰색헤어의 멋스러움을 뽐내보자.


가식적인 염색을 거부하고 나에게 솔직하고 당당한 벼슬이고 훈장인 백발을 멋스럽게 드러낼 것이다. 나의 로망을 함께 하기위해 아내에게 슬며시 인스타 ‘그롬브레(grombre)’를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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