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롱혼 Jan 13. 2023

내 집이 없어서 다행이다

기어 들어가는 집이 아닌 철학이 있는 집을 꿈꿀 수 있어 행복하다

어릴 적 태어나고 자란 시골집의 추억은 정겹다. 좁은 몸집만큼 넓어 보여 행복했던 집이다. 걸음마를 하며 좁은 툇마루에서 여러 번 마당으로 굴러 떨어져 머리가 빙빙 돌던 기억이 아직도 나는 게 신기하다. 그런 좁은 툇마루의 집에서도 명절 때면 사촌들과 옹기종기 비벼대며 놀았다. 공부를 하면서는 도시로 유학을 가서 하숙과 자취를 하며 남의 집 살이가 시작되었다. 그때는 허름한 조각 집에서도 잘도 살았다. 결혼을 하고 치밀한 아내의 내조로 내 소유의 첫 번째 집을 장만했을 때는 아파트이지만 갑자기 이름이 새겨진 문패가 떠오르며 뿌듯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그때 아내는 우울해했다. 왜냐하면 당시 IMF시절로 갑자기 집주인이 찾아와서 전세로 살던 집이 넘어간다고 하길래 어쩔 수 없이 분양받고 있던 집을 포기하고 인수받은 아픈 집이 내 소유의 첫 번째 집이었다. 


그 후 몇 번의 이사를 거쳐 드디어 신도시에 꽤 큰 아파트를 분양받아 여기가 마지막 우리의 집이라 생각을 하며 오래 살았다. 아이들의 어릴 적 추억이 다 여기에 있고 동네도 익숙해져 떠날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들이 미국유학을 가 있기에 그 뒷바라지를 하다 보니 어쩌다 내가 팔고 나면 가격이 올라 후회한다는 그런 경험했다. 그래서 지금은 전셋집에서 살고 있다. 그런데 불만이 없다. 새벽운동 하기와 회사가 가까워 좋다는 나만의 작은 이기심으로 집에 대해 무덤덤해져 갔기 때문이다. 하기사 아이들은 미국에 정착하여 살고 있고 아내는 일 년이면 반년을 서로 오가며 살다 보니 다들 움직임에 익숙해져 집에 대한 애착과 소유의 마음은 조금 잊은 듯 조용하다. 오히려 그에 대한 반항으로 미니멀리즘이 발동하여 짐까지 줄여가고 있는 상황이니 대신 마음과 정신은 맑아진다. 사실이다. 


물론 내 집을 가져야 한다는 미련은 있다. 여기서 내 집은 우리가 선택한 우리식의 집을 말한다. 가끔 아내와 같이 있을 때면 은퇴를 하고 둘이서 전국 어디든 마음에 드는 동네를 골라 내 감정이 깃든 내 집을 꾸며 살자며 나중의 여유를 말하곤 한다. 아직 한 곳에 정착을 못하고 있는 나와 아내이기에 이런 희망을 가질 수 있다는 생각에 오히려 기분도 좋고 새로운 경험의 기대도 갖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집 없는 설움의 이야기가 불쑥 나오는 일이 생겼다. 지금 살고 있는 전세 아파트에서 2년 살다 보니 주변 생활에 익숙하게 되어 계약만료가 되어도 막상 떠나기가 싫었다. 그런데 마침, 집주인이 중간에 바뀌면서 보증금을 조금 더 내고 2년을 더 살아도 좋다는 허락을 해주어서 마음의 여유까지 생겨 집에 하자가 있어도 약간의 불편은 쉽게 감수가 되었다. 그런데 전세만기 3주 전에 급한 집안 사정이 생겼다고 이사를 해 달라고 연락이 왔다. 아니 만기를 3주를 남겨 놓고는 이게 무슨 말 인가 법적으로도 말이 안 되는 것 같다. 당연히 불평을 하며 따져 묻다 보니 그 집도 사정이 있었다. 다퉈봐야 의미가 없어 바로 마음을 접고 급하게 여기저기 부동산을 알아보니 집을 올 수리를 해주고도 지금의 전세가격 그대로 해주겠다고 하는 집이 옆동에서 나왔다. 다행이다. 오히려 좋아졌다. 새로운 깨끗한 집에서 살게 된 것이다. 화가 많이 나서 그동안 미처 느껴보지 못했던 집 없는 설움이라는 이야기를 불쑥했었지만 결과적으로 새로운 평안을 주기 위해 나에게 기회를 준 것 같아 감사를 하고 있다.


집이란 무엇인가?

누군가 그런다 집은 자존심이다. 집은 인격이다. 집은 은신처이다. 집은 교환이고 화폐다. 집은 약속이다. 집은 욕망이다. 집은 사랑이다. 집은 집구석이다. 집은 나다. 집은 동굴이다. 등등 사람들 마다 집에 대한 생각이 다를 것이다. 현실적으로 대부분 재테크로 사고, 팔고, 빌려주는 교환의 가치로 보고 있기에 집에 대한 철학은 별로 없는 것 같다. 그런데 동굴이라니 아마 음주 후에 집에 기어들어 간다고들 표현해서 그런가 보다. 이렇듯 재테크의 교환가치를 빼면 집은 비하되는 말장난의 수단이 되어있어 안타깝다. 집에 대한 철학의 부재는 명확하다. 예전 독일 휴뮬러라는 회사에 장비 검수를 갔을 때 그곳 엔지니어는 주말이면 직접 자기 집을 짓고 있다 하길래 깜짝 놀란 적이 있었다. 우리나라도 TV에서 보다 보면 자신의 집을 직접 설계하고 손수 짓고 있는 사람을 만나기도 한다. 자신이 꿈꾸던 집을 규모와 상관없이 직접 구상하여 애지중지 애착을 넣어가며 짓고 멋진 이름까지 붙여주고 살면 얼마나 감동적 일까, 설령 직접 짓지는 못해도 내 집에 자신의 철학을 공유하여 집과 내가 동일시되어 산다면 말이다. 


다행히 지금 내 집이 없어서 철학이 있는 집을 꿈꿀 수 있어 행복하다. 


매거진의 이전글 백발이 로망이 되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