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군생활은 비교적 순탄한 편이었다. 후방의 작은 해안부대에 배치되어 1년 9개월을 무탈히 지냈다. 당시 지휘관의 강한 병영 부조리 근절 의지가 있었기에 기억에 남을만한 폭력에도 노출되지 않았다.
그러나 사람으로 인한 위기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내 경우에는 그 사람이 함께 징집된 병사들이 아닌, 40세가량의 부사관이었다. 행정보급관이었던 그가 준 스트레스가 너무 심해 집에 전화를 하다가 숨이 넘어갈 듯 울었던 기억이 있다.
그는 상승 의욕이 강한 사람이었다. 주목받고자 하는 그의 시야에 가장 거슬리는 이는 근접 기수 부사관인 인사담당관이었고, 공교롭게도 나는 인사행정병이었다. 그 탓에 나는 줄곧 이해할 수 없는 불합리함과 폭언을 감당해야 했다.
훈련 때면 짙은 부산 사투리로 '너는 내 부하냐, 그이의 부하냐'하는 유치한 문제로 고성을 지르거나 군종활동, 웃는 표정 등 별 트집을 찾아내 감정을 담아 쌍욕을 퍼부었다. 지옥 같은 시간이 지나면 생활관의 동기들이 저마다 한 마디씩 위로를 하거나 함께 욕지거리를 뱉어주었지만, 22살은 그리 단단한 나이가 아니었다.
나는 매일 아침 기상나팔이 울리면 오늘은 제발 그를 마주치지 않게 해 달라고, 하루 두 갑을 태우는 그에게 큰 병이 생기기를, 오토바이를 타고 출근하는 그에게 불의의 사고가 생기기를 기도했다. 진심으로 간절히 바랐다. 일상은 똑같았지만 변에는 피가 섞였고, 원인불명의 두통이 사라지지 않아 국군대전병원에서 머리에 MRI 촬영도 했다. 동기들은 몇 달 새 험하게 변한 내 언어를 낯설어했다.
'봉디쌤'의 정신이 무너지는 장면을 보는 순간, 억눌려 잊혀가던 이 기억들이 떠올랐다. 충격적인 연출이었으나 충격적이기보다 '그래, 그럴만하지, 많이 힘들었지' 하는 연민이 들었다. 오히려 그러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그의 어깨를 잡고 함께 울고 싶었다.
모든 종류의 폭력이 묵인되는 군대에서 그의 인간성 상실 장면은 특별하고 드문 일이 아니었다. 군 조직은 가장 효과적인 무력 발휘를 위해 다른 어느 집단보다 철저한 계급성, 전체성, 폐쇄성을 특징으로 한다. 문명의 방식이 작동하지 않는 그곳은 오랫동안 '그래도 된다'라고 속삭이며 평범하게 살던 전국의 황장수를 괴물로 만들었다.
문명사회의 여론에 못 이겨 만든 마음의 편지, 국방헬프콜 등 몇몇 땜질은 딱 눈에 보이는 육체의 폭력을 막았을 뿐이다. 최근 터져 나오는 부실급식사태에서 보듯이 사병은 언제나 집단을 위한 소모품이고, 어떤 방식으로든 잘 작동하면 그만이라는 인식이 여전하다.
전역날, 위병소 문을 나서니 몸과 마음을 괴롭혔던 모든 스트레스성 증상이 사라졌다. 군대는 그런 곳이었다. 현실세계와는 말끔히 분리되어, 불합리함도 상처도 모두 묻어두고 나오는 곳. 그렇기에 게임처럼 현실에서는 차마 하지 못할 일도 쉽게 벌어지는 곳.
폭력은 무력을 활용하는 집단의 숙명과 같은 속성일 것이다. 그러나 언제까지고 애써 눈을 감기보다 힘들어도 직시하는 편이 인간으로 살기 위한 지향점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제는 좋아졌다는 망각의 유령과 싸우기 위해 만들었다", D.P의 원작자가 SNS에 올린 글이다.
군은 드라마의 물음에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장관의 말과 유튜브 영상(좋아요 70, 싫어요 1.2만), 그리고 D.P 보직 폐지로 답했다. 그리고 며칠 전 또 한 명의 20대 장병이 생을 포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