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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든 Jan 25. 2022

<테넷(2020)> 리뷰

1.

놀란 감독은 따뜻한 주제를 과학적인 장치로 표현하는 데 능하다. 인셉션, 인터스텔라 등 이름만 들으면 알만한 그의 작품들이 모두 그랬고, <테넷> 또한 그렇다.


2.

여러 리뷰 중 ‘석·박사 이상 관람가’라는 표현을 보았다. 영화 GV를 물리학자와 진행하고, 많은 리뷰어들이 온통 엔트로피니 양자니 어려운 용어들을 쏟아내니 어렵게 느껴질 법하다. 그러나 직접 보니 우려한 것처럼 과학이론의 비중이 높은 영화는 아니었다. 이론을 하나하나 이해하려 하기 보기보다 영화의 메시지에 주목하며 느낄 것을 권한다.


3.

이해에 도움이 될 만한 과학적 원리는 딱 한 가지이다.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과거-현재-미래는 이미 펼쳐져 존재한다.”

당황스럽지만, 현대 물리학에서 공히 받아들여지는 명제이다.


4.

과거와 미래의 상태는 시공간이라는 좌표에 이미 펼쳐져 있다. 그리고 인간은 '현재'라고 부르는 한 점만을 인식할 수 있다. 시간이라고 부르는 개념은 이 좌표에서 특정 법칙에 따라 이쪽에서 저쪽으로 이동, 변화하는 정도를 측정한 단위로 생각하면 되겠다. 다시, 기억할 것은 ‘시간은 흐르지 않으며, 과거-현재-미래는 이미 펼쳐져 존재한다’는 것이다.


5.

<테넷>은 이 개념을 중심으로 영화적 상상력을 추가한다. 시간의 역행, 미래가 원인이 되어 과거에 그 결과가 나타나는 것이다. 미래의 한 사건이 먼저 존재하고, 인과를 거슬러 과거의 사건을 일으킨다. 그렇게 영향받은 과거의 사건으로 인해 다시 미래의 사건이 벌어지는 식이다. 주인공(그리고 관객)은 과거부터 미래까지의 모든 사건을 직접 경험한 후 그 연결고리를 깨닫는다.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 그리고 주인공과 관객에게는 같은 물음이 생긴다.


- 이 모든 게 정해진 운명인 거야?

- 좋을 대로 불러

- 너희는 뭐라고 부르지?

- 현실



6.

위에서 과거와 미래라는 표현을 쓰긴 했지만, 이 시간의 좌표를 이동하는 주인공의 시점은 ‘현재’ 뿐이다. 그 현재의 바깥은 보지 못한 채 최선의 결정을 하며 이야기를 진행시킨다. 알지 못하고, 알 방법도 없는 미래의 모습은 그에게 중요하지 않다. ‘운명’에 갇히지 않고, ‘현실’에서 할 일을 할 뿐이다. 영화의 대사처럼 ‘무지를 무기 삼아’ 행동하고, 그로 인해 숨겨진 미래가 드러난다.


7.

영화의 제목 TENET(신념, 신조)은 주인공에게 미션을 주는 단체의 이름이다. 주인공은 이 TENET에 의해 주도자(Protagonist, 주인공의 배역명)가 되어 운명을 개척한다. 운명을 외부의 감옥으로 인식하고 체념할지, 나 자신으로 인식하고 보이는 현실을 충실히 살아갈지는 테넷을 받아들이는 태도에 달린 것이다.


8.

영화에 나타나는 운명론, 미래가 이미 존재하지만 자유의지는 여전히 유효하다는 생각은 기독교 세계관의 ‘섭리’를 떠오르게 한다. 신의 넓은 계획은 인간이 알 수 없다. 단지 주어진 삶을 충실히 살아가다 보면, 어느 순간 지나온 길이 빈틈없이 짜인 계획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인간은 운명에 떠밀리는 객체가 아닌, 현실 위에 신의 계획을 이루는 주체가 된다.


9.

이를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문장을 빌려 정리해보자면,

“우리가 운명이라고 부르는 것은 외부에서 인간의 내부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내부에서 외부로 나가는 것이다.”



10. 대부분의 불안은 아직 마주치지 않은 미래를 두려워함으로 느끼게 된다. 무지에 의한 것이다. 미래가 어떤 형태일지는 알 수 없는데, 무지는 그에 대한 온갖 두려운 상상을 몰고 덮쳐온다. 그래서 우리는 현재를 살지 못한다.


11.

놀란 감독은 두 시간 반 동안 시간을 비틀고, 반으로 접고, 거꾸로 돌리면서 확실한 메시지를 전한다.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 무지를 무기 삼아라. 현실을 닫힌 감옥이 아니라 올라타고 여행할 수 있는 파도로 받아들이자. 그렇게 현재를 살아보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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