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박한 나의 휴대폰 정리 4단계
2022년 12월 31일이다.
몇 년 전 '연말에는 한 해를 정리하기 위해 주소록을 보며 정리한다'라는 글을 본 이후, 마음이 동해서 그 해부터 나도 12월 31일에는 꼭 나만의 의식을 취하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간단하고 개운한 마음으로 새해를 새로이 맞이하는 나만의 팁.
1단계. 주소록 삭제
일단 연락처 주소록에 들어가서 필요 없는 이름을 ㄱ부터 z까지 쭉 훑는다. 생각보다 필요 없는 일회성 연락처가 덕지덕지 붙어있기도 하고, 생각보다 내가 연락이 너무 뜸했구나 하고 마음이 아련해지는 이름이 나타나기도 한다. 그리고 근엄한 마음으로 삭제를 시작한다.
한때는 뭐든 버리지 못했다. 언젠가는 연락할 일이 있겠지,, 언젠가는 필요하겠지,, 하며 쌓였던 나의 주소록들. 하지만 휴대폰을 몇 번 잃어버리며 강제로 주소록을 정리당하고 그 다음을 살아보니 '언젠가는'이라는 기대 하나로 쟁이고 살기에는, 나의 냉장고는 큰 용량이 아니었구나라는 것을 깨달았다. 강제로 주소록을 삭제당해서 심지어 가족 번호까지 생각이 안 나 곤란하기도 했었지만, 그럼에도 '나'라는 존재는 변하지 않고, 무리 없이 살아간다는 사실은 주소록을 잃어버려본 사람은 알 것이다. 그렇게 끊어질 연이면 진작에 끊어졌어야 한다. 그 이후 이제는 내가 연말이 되면 '주도적으로' 내가 먼저 삭제 버튼을 누르는 의식을 집행한다. 카카오톡 그룹채팅들과 친구목록 역시 같은 기준으로 삭제하고 정리한다. 내가 없다고 어차피 세상이 바뀌는 것도 아니고 내가 단절되는 것도 아니다. 오늘만은 과감해야 한다.
2022년. 나는 주소록을 살펴보며 올해로 연락이 이미 끝난 업체 관련, 학원 관련, 일 관련 사람들을 지웠고, 기억도 안 나는데 저장되어 있는 일회성 연락처를 지웠다. 하지만 지우면 영영 연결고리가 끊어질 듯한 오래된 추억 속 지인 일부는 올해도 역시 지우지 못했다. 그리고 이름을 보자마자 그동안 뜸했던 게 미안한 나의 사람에게는 연락하기 좋은 연말을 핑계 삼아 따뜻한 커피 쿠폰을 메시지랑 보내고 연말을 핑계 삼아 연락을 드리기도 했다. 내가 '주도적으로' 연락처 주소록을 정리하는 것 만으로 내 인간관계가 깔끔이 정리되지는 않겠지만, 누구에게 집중하고 뭐가 중요한지 바로 잡아가는 의식 만으로 '나'의 마음은 꽤 깨끗하고 명료해진다.
2단계. 앱 삭제
그다음으로는 앱을 삭제한다. 살다 보면 자꾸 늘어나는 옷장처럼, 내 휴대폰 역시 언제 설치했는지 모를 별 가지 앱들이 어느새 들어차 있으며 자꾸만 용량이 다 찼다고 앵앵거리던 한 해였다. 올해 나는 무엇을 새로 깔고 무엇을 가장 많이 사용했을까? 그리고 무엇을 비워야 할까?
작년 말에는 SNS를 다이어트하고 싶어서, 관련 앱들을 삭제했다. 육아 기록을 공유하던 고리가 없어지는 게 처음엔 아쉬웠지만, 어느새 남의 일상이 궁금하지도 내 일상을 자랑하지도 않게 되었다. 해외 인연이 사그라지며 필요가 없어진 앱도 지웠다. 내가 자주 보는 유튜브와 블로그 앱으로 들어간 후, 보지 않는 채널과 새 글 피드 목록을 골라서 삭제했다. 생각보다 선택하는 게 옷장의 옷을 버리는 것처럼 어렵고 시간이 꽤 걸렸다. 그래도 그 기준점을 내년에 꼭 필요한가를 둔 냉정한 판정관이 되어서 구독과 피드 알림 삭제 버튼을 누르다 보니, 내 집에 나도 모르게 얼마나 많은 것들이 섞여 있었나 놀랍기도 했다. 온라인 세상 속 대 이동의 날이 31일로 설정된게 참으로 적당하다.
올해는 은행 앱, 환율 앱 등 금융 앱이 늘어나 있다. 뭐 가시적 성과는 없지만, 경제와 세상의 거시적인 흐름에 무관심했고 편중됐던 나의 뇌가 말랑해지느라 전보다 분주해진건 사실이다. 내년에는 그저 받아들이기만 하지 말고, 내가 포스팅을 직접 하고 실행해보면서 엄청난 정보의 폭풍 속에서 내가 안다고 착각하지 않고 소화를 제대로 하는데 집중하고 싶다. 무엇보다 그 안에서 내가 생산과 나만의 재창출로 가능한 항목에 시간을 쏟아서, 세상 속에서 내가 살아남을 수 있는 능력을 찾아가며 효율적으로 살아가고 싶다.
올해 내가 사용 기록이 적어 삭제한 앱은 쇼핑몰, 커피, 자가진단, 날씨 관련 앱이었다. 언택트는 풀려가고 있지만 경제가 위축되고 있는 세상의 흐름과 내 휴대폰의 흐름은 신기하게도 동기화되고 있다.
3단계. 사진과 영상 삭제
이제 사진과 동영상 다이어트에 들어가 본다. 내 사진첩 유형은 매우 간단하다. 아이. 말. 덕질. 아이 사진을 가족밴드에 다 옮기고, 말 사진은 관련 폴더로 정리하고, 덕질은 개인 계정에. 플랫폼과 클라우드를 활용해서 혼란한 구슬 들을 각자의 위치에 다들 착착 저장해 넣는다. 매년 많고 많았던 아이 사진들이 사춘기가 돼 가면서 함께 찍어주지 않다 보니 올해 급격히 줄어있는 걸 발견해서 꽤 쓸쓸하기도 하다. 그리고 잊혔던 순간의 사진들을 보다 보니 한 달 한 달의 기억이 모두 아련하고 소중해진다. 사진이 너무 많아 휴대폰 정리앱을 사용하니 조금 속도가 나고 이를 발판으로 싹 마치고 나니 이불 빨래한 것처럼 개운하다. 새해 귀한 손님맞이하는데 이 정도 준비는 해야지. 내년엔 무슨 사진과 영상이 내 휴대폰에 담길는지 궁금하다.
마지막. 스팸 재설정
뭔 놈의 스팸 메시지는 끝도 없이 지치지도 않고 나를 찾아내는지 모르겠다. 온갖 광고가 휴대폰 메세지함과 이메일함에 자꾸만 늘어가 있다. 오늘이 이놈들 잡을 대 박멸의 날이다. 스팸을 재설정하고, 수신 거부하고, 다 지워버린다. 귀찮아서 자꾸 미뤘더니 1년 동안 참 많이도 쌓였다. 묵은 때를 빼듯이 한참을 지우다 문득 보이는, 진짜 메시지와 메일들을 발견하며 무슨 일을 했는지 사회에서의 '나' 자신이 보인다. 그래. 한해 살아내느라 고생했다 애썼다 나야.
와.
정리 끝!
이제 새해가 다가온다. 이제 나는 성탄절과 한 살 먹음이 마냥 설레던 아이가 아니고, 새해라고 별거 없다는 것을 다 알아버린 어른이다. 어제 이어 오늘처럼, 같은 날의 연속일 뿐이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이렇게 공식적으로 새 달력으로 바뀌고 나이도 한 살 바뀌는 새해의 전 날. 누워서 남의 시상식만 보기엔 뭔가 밋밋하다. 세월의 흐름이 재미없고 뭔가 아쉽기도 하다.
그렇다면 휴대폰을 열어 한 해의 나의 인연과 관심사를 돌아본 후 비우고, 군더더기와 때를 제대로 지워가는 거다. 하나하나 지우고 또 지우고 정리하고 또 지우다 보면, 다가오는 새 손님 맞이할 예의는 차려진 것 같다. 새해에는 누가 또 한 해 동안 어떻게 또 머물다 갈진 모르겠지만 빈 방에서 최대한 편하고 즐거우며 야무지게 잘 머물었으면 한다.
12월 31일. 이제 내 폰은 꽤 비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