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안 하며 시간을 제대로 죽여보고 싶었다. 해야 하는 모든 것을 모조리 안 하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그럴 수가 없었다. 늘 해야만 하는 게 최소 하나는 있었다. 학교를 다녀야 한다던지, 회사에 가야 한다던지 했다. 방학에도 학원에 가던지 알바를 해야 했다. 명절엔 어딘가 또 가야 하고, 휴일엔 집안일을 하고 장을 보고 빨래를 해야 한다.
그래도 휴대폰 보며 쉴 틈이야 당연히 늘 있다. 하지만 유튜브를 켜도 들어야 할 구독리스트가 있었다. 밀리의 서재에도 읽어야 할 책이 있었다. 영양제도 챙겨 먹아야 하고, 아참 매일 운동 걸음수도 채워야 한다. 단톡 정보방에서는 부동산 글을 읽어줘야 하고, sns도 챙겨봐야 한다. 긍정적 생각도 해야 하고, 부정의 고민을 털어버리는 마인드셋도 해야 한다.
제기랄! 이제 그만!! 스위치를 좀 끄고 싶어!!라고 외치지만 답도 없던 나에게 갑자기 일생일대의 기회가 왔다. 유래 없는 열흘간의 긴 명절 연휴였다. 이번엔 명절 당직근무도 안 걸렸다. 그런데 중딩 아들이 웬일로 시험공부한다며 시골에 안 간다고 한다. 어라?? 그걸 또 양가에서 용납해 준다. 덕분에 나까지 남게 되었다. 둘만!! 세상에 이건 개껌이다. 아이와의 밥타임이나 대화 외에는 24시간 내내 내 맘이었다. 둘만 있으니 치울 것도 먹을 준비도 너무 쉽다.
나는 모든 끈을 놓았다. 출근도 운동도 안 하고, 밥도 안 챙겨 먹었다. 청소도 빨래도 안 했다. 봐야 하는 유튜브와 책도 다 덮고, 최대한 시간을 죽이는 말초적 생활만 해봤다. 생산적인 모든 것을 완전히 버렸다. 그냥 알고리즘을 따라 낮이든 밤이든 끌리는 대로 콘텐츠를 유랑하다 새벽 네시에 과자를 먹다 불을 켠 채 잠들어도 아무도 건들지 않았다. 그렇게 하루, 이틀, 사흘..., 일주일이 다되어갔다. 나는 이렇게 살다 보면 질리고 지쳐 나가떨어지며, 결국 다시 일상으로 올라올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했다.
하지만, 내 믿음은 완전히 틀렸다. 세상엔 시간낭비할 온갖 향락이 너무 많았다. 내 마음은 지치기는커녕 향락의 과실을 따먹으며 꽈리를 틀고 그냥 주저앉을 자세였다. 시간이 물처럼 흘렀다. 결국 그런 나를 예상치 못하게 제어한 건, 내 신체였다. 막 살기엔 내 체력이 이미 전성기를 지났던 것이다. 눈이 아프기 시작했다. 빛 번짐과 건조증이 심해져서 휴대폰을 더 보고 싶어도 못 볼 지경이 되어서야 나는 인생의 낭비 세상에서 뒷덜미가 잡혔다. 안 챙겨 먹으니 속도 좀 안 좋아졌다.
그렇게 좀 황당하지만, 결론은 내 혹사당한 눈알의 시위로, 아무도 모를 난생 최초의 집구석 시간 죽이기 최장기 여행은 끝이 났다. 그리고 어느덧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나는 하나하나 이고 지며 다시 의무 할당량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냥 좀 삐뚤어지고 싶었다. 인생의 낭비, 좀 하다 죽으면 어떤가? 하는 마음으로 살았던 거의 열흘간의 집구석 시체체험. 나에게 평생 잊지 못할 여행이 되었다. 지구 반대편 아프리카 여행도, 값비싼 크루즈 여행도 이보다 이질적일 수는 없을 것이다. 다음번에 또 이런 기회가 올까? 그날이 온다면 나는 마치 개기일식을 기다리는 경건한 마음으로 대기했다가, 온 힘으로 내 인생을 지대로 낭비해 볼 테다.
단, 그러려면 체력이 필요하니 오늘부턴 완벽하게 방탕할 그날을 위해, 안구를 비롯한 내 몸을 살피기로 합의를 보았다. 영양제 다시 먹고, 밤에 휴대폰 안 하고, 밤에 안 먹고, 운동하고, 근육 늘리고,,, 젠장. 또 늘어난다. 이놈의 루틴!! 아무것도 안 할 수는 없다. 결국 돌고 돌아 다시 내 행복을 위해 루틴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기로 결심했다는, 웃기고도 슬픈 나의 집구석 시간 죽이기 여행 이야기를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