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의 아부 대잔치에서 나는 사실 완전히 망했다. 윗분과의 만남 속에, 총칼 없는 전쟁 같은 대화가 화기애애하게 오갔다. 어차피 이 모임은 전쟁일 것이라는 부담감 때문에 나는 긴장이 심해졌다. 너무 정신을 못 차리니깐 신경증 완화 약을 좀 먹어보라고 지인이 권유했지만 먹지 않았다. 감기 열이 안 떨어져서 당일 아침 타이레놀만 먹었을 뿐이었다. 거기서부터 꼬인 것이었을까? 만남 자리에 가보니 대부분 어리고 당찬 초면의 직원들이었다. 그냥 막내여서 착출된 것 같기도 했다. 연차가 가장 높은 것도 나였고, 잘해보라고 떠밀려서, 가장 원거리에서 상경한 것도 나였다. 한마디로 뻘쭘했다.
그래도 어떻게든 최대한 경청하고 웃으려 노력했지만, 도대체 뭐라고 하는지 주제가 들어오지 않았다. 주제가 안 들어오니 대꾸하기 어려워서 그냥 끄덕거렸다. 이 기회에 나를 어필해야 하는 것 같은데 도무지 틈이 안 왔다. 젊은이들은 약속한 듯 1,2,3, 게임하는 것처럼 정적을 쉴 새 없이 파고들며 각자의 역할에 대한 어필과 공손한 아부를 마음껏 펼쳐댔다. 나는 전혀 치고 들어가질 못했다. 1초만 정적이 와도 누군가가 치고 들어왔고 내 말은 목 어딘가까지 올라오다가 다시 명치 속으로 들어가기를 반복했다. 긴장이 궁극에 이르며 시간이 지속되자, 결국 나는 현타가 오며 스스로 이 게임을 포기했다.
사진을 수차례 찍으며 만남이 끝났고, 양손에는 꽃다발과 상자들이 주어졌다. 가뜩이나 옷과 신발이 불편한데 거추장스러운 꽃을 주렁주렁 들고 다시 먼 길을 걸어 돌아가야 했다. 나 자신에게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도대체 왜 나는 입도 뻥끗 못했을까? 비행기 타고 어렵게 올라와서, 멍석을 펴줬는데도 왜 나는 내 존재감을 전혀 드러내지 못하고 영혼 없이 웃다가 돌아가는 걸까? 결국 또 낙방인가? 왜 이리 나는 행동이 이렇게도 변하지 않는 걸까?
회사를 나와서 일단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다 집어던졌다. 구두도 집어던지고 싶었지만 참았다. 며칠이 지난 오늘에야 불현듯 깨달았다. 그날 나의 행동은 사실 너무 당연한 것이었다. 강점검사에서 나의 최하위 항목은 '커뮤니케이션'이었다. 내가 가장 약한 분야이니 당연히 나는 잘 해낼 리가 없었던 것이고, 직감적으로 그걸 알기 때문에 그전부터 심하게 불안 증세를 보인 것이었다. 발표였다면 외워서라도 했겠지만, 순발력과 아부력, 눈치력 까지 있어야 하는 그 '커뮤니케이션 전쟁'은 뭐 하나도 나에게 유리하지 않았다.
그래. 어쩔 수 없었다. 뭐 어쩌라고. 내가 이렇게 생겨먹은 걸. 스스로 실컷 인정하고, 한참을 들어줬다. 먹구름이 조금씩 다시 흩어지는 것 같다. 그래도 어쩌겠나. 내 마음 다 들어주는 건 나뿐인데, 일이 안 잡히고 여전히 불안하지만 그래도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어떤 상황이어도 무조건 나를 사랑하며 절대 나를 방임하지 않을 것임을 다시금 떠올려 본다. 에효, 어쩌겠나. 강점 1위가 '성취'인 내가 아무리 마음을 진정시키려 해도 결과 앞에 이리 불안한 건 너무나 당연하다. 더 이상 나에게 가혹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더 사랑해주고 싶다.
불안이도 인정하고, 분노도 인정할게. 무기력도, 짜증도 인정해 줄게. 누구나 강점이 있고 약점이 있거늘, 누구에게나 그만의 이유가 있고 그만의 감정이 생기는 건 지극히 당연하다. 그리고 그 감정의 주인공인 나는 나의 모든 감정을 이해하고 만져주고 끝까지 이끌어 갈 것이다. 왜냐하면 너희들의 주인공은 바로 나니깐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