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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찬란 Mar 18. 2024

식탁의 행보

눈에 가시인 낡고 작은 식탁이 이사 후에도 베란다에 방치되어 있었다. 이 식탁은 몇 번의 이사에서 점점 필요성이 없어진 아주 오래된 물건이다. 다리에 엄청 흠집이 많고 헤졌으며, 상판은 꽃무늬다. 이전 집에서 아들이 거실에서 게임을 하기 위해 데스크톱을 사용하면서, 한두해 컴퓨터 책상 대용으로 사용되었다.


그때도 난 저게 낡아서 마음에 안 들었다. 이사 후 컴퓨터 책상을 당근으로 사게 되어서, 이제 이 낡은 식탁은 정말 쓸 데가 없다고 생각했다. 이게 예쁜 베란다를 떡 하니 막고 있으니 바깥 풍경 시야를 방해하기만 하는 것 같아서 나는 호시탐탐 처리를 엿보았다.


드디어 오늘 시간이 나서 아침에 당근에 드림으로 올렸고, 점심에 올 수 있다는 사람이랑 약속을 했다. 그리고 아이에게 지나가는 말로, 저 책상 점심에 누구 주기로 했다고 말한 후에 볼일 보러 나갔다가 약속 30분 전에 돌아왔다. 집에 온 나는 아들에게 이제 곧 책상 거래하는 사람이 오니깐 그냥 방 안에 있으라 했다.


생각지 못한 난리가 났다. 아들은 갑자기 왜 자기 허락도 안 받고 자꾸 드림하냐고 나에게 심통을 세게 부렸다. 나는 이제 컴퓨터 책상도 새로 생겼고, 저건 앞으로도 사용 안 할 건데 필요한 사람이 쓰는 게 물건에게도 좋지 않냐며 내 논리를 폈다.


그랬더니 갑자기 아들은 예전에도 마음대로 인형 드림하지 않았냐고 화를 냈다. 그게 몇 년 전인지도 기억이 안나는 엄마와, 속상했던 아들의 과거가 또 있었다는 것에 두 번째로 놀랐고 사태가 심각함을 그제야 인지했다.


아들은 “엄마한테 소중한 물건인데 사용 안 하는 거 있으면 남한테 줄 거야?”라고 외치더니 방안으로 잠적했다. 나는 아차 싶었다. 저 방치된 낡은 식탁이 아들 것인지도, 소중한 존재가 된 지도 전혀 몰랐기 때문이다. 거래를 한 게 후회가 됐지만, 이미 약속 15분 전이라 되돌릴 수는 없었다.


약속 10분 전 아들이 방문을 나왔다. 그런데 펑펑 울면서 식탁 정말 안 주면 안 되냐고 물었다. 아.. 정말 아이에게는 극심한 충격이라는 게 느껴졌다. 너무 늦었긴 하지만 그래도 한번 상대에게 취소 이야기 해보겠다고, 안될 수도 있는데 그러면 어떨 수 없는 거라고 달랬다.


급하게 채팅을 보내니 상대에게 전화가 왔다. 오는 중이라고 하는데, 이 상황을 다 설명하는 것이 어려웠다. 나는 그저 사정상 드림이 어렵게 됐다고 변명하며 사과를 수차례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헛발걸음 하게 만들어서 죄송하다고 계속 사과했다. 나는 벌벌 떨며 눈 질끈 감고 거래를 취소하고, 결국 약속을 어긴 진상 판매자가 되었다.


울고 있는 녀석에게 다가가서 다행히 취소가 돼서 안 가져갈 거라고 말했다. 이 식탁이 내 것인 줄만 알았지, 네 물건인지 인지 못해서 내 맘대로 처리하려 해서 미안하다고 했다. 아들은 고맙다고 말하고 문 닫고 계속 울더니 시간이 지나서야 잠잠해졌다.


뭐가 서운했을까. 정든 물건과의 이별이 저리 아쉬운 걸까. 아니면 자꾸 맘대로 결정하는 엄마가 그렇게 싫었던 걸까. 너의 필터로 보이는 세상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나보다 키가 큰 아들은 아직도 아기 시절의 애착 인형을 지금도 맨날 안고 다닌다. 필통 하나 몇 년째 잘 안 바꾼다. 옷도 주구장창 하나만 입어서 뭘 사준 적이 거의 없다. 아들이지만 감정이 터지면 아주 가끔 우는데 그게 오늘이었다.


나랑 다른 듯 같은 나의 아이다. 다 알 것도 같지만 사실 매일 너에 대해 잘 모르겠고 나는 여전히 부족하고 자신이 없다. 오늘은 당근온도가 몇 도는 깎였고 모르는 누군가를 헛걸음하게 한 민폐를 끼쳤다. 민폐를 가장 싫어하는데, 그걸 어겨서 지금도 얼굴이 화끈거린다. 식탁과 아들 둘 다 빛의 속도로 나를 떠나갈 뻔했는데, 아이의 눈물 호소쯤 돼야 깨달은 나도 참 둔하다.


한바탕 소동이 끝나고 야식으로 같이 치킨을 뜯어먹으며 몇 마디 농담을 주고받는데, 아이의 시간 속으로 들어간 그 순간이 예전보다 몇 곱절 더 소중하게 다가왔다.  조금 더 많은 시간 많은 마음과 마음을 가까이 맞대고 싶어졌다. 아니, 나는 아이의 마음이 떠나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러니 내가 더 포근히 열어두고 기다렸어야 했다.


그나저나 저 못난이 식탁도 이제 애착인형처럼 가지고 살아야 한다니 당황스럽다. 인형을 수차례 꼬매줬던 것처럼, 저것도 리폼을 좀 배워봐서 뭐라도 써야겠다. 그리고 녀석 출가할 때 다 이고 지고 나가라고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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