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은 준비된 자에게만 미소 짓는다
아버지 인생에는 중요한 터닝 포인트들이 있었다. 그 고비마다 하늘이 힌트를 주듯 기회가 찾아왔고, 아버지는 그 기회를 알아볼 줄 아는 분이었다.
과수원을 시작하고 양계 일을 병행하게 된 계기는 우연이었다. 서울에 볼일을 보러 가셨던 아버지는 시간이 남은 김에 종로의 한 중고서점에 들르셨다. 평소 관심사였던 농축산업 관련 책을 읽던 중, 양계업은 투자금이 적고 생육 기간이 짧아 이점이 많다는 대목을 발견하셨다. 정보를 얻는 것조차 쉽지 않았던 1970년대였다. 아버지는 책 속의 정보를 그냥 넘기지 않고 곧장 행동으로 옮기셨다.
다행히 과수원은 넓었고 병아리를 키우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닭의 배설물은 흙의 거름이 되었으니 그야말로 일석이조였다. 책의 내용대로 6개월이 지나자 병아리는 암탉이 되어 알을 낳기 시작했다. 척박한 황무지 과수원에서 얻은 계란은 그야말로 황금알처럼 값진 결과물이었다. 그 귀한 알을 시장에 내다 팔며 가족은 긴 고생의 터널을 버틸 생계 자금을 마련할 수 있었다.
만약 그때 양계 일을 하지 않으셨다면, 과수원이 자리를 잡기까지의 10년이라는 세월을 어떻게 버티셨을까. 농산물보다 수익률이 좋았던 계란은 텅 빈 과수원을 하나씩 채워갈 든든한 투자금이 되었다. 그날 종로 서점에서의 선택은 지금 생각해도 '신의 한 수'였다.
시간이 흘러 묘목들이 자라며 과수원의 면모를 갖춰갈 즈음이었다. 과수원에서 일하던 아버지 앞으로 동네 이장님이 낯선 동행인과 지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이장님, 어디 가세요?” “군청에서 나온 분과 동네 시찰 중인데, 점심이나 먹으러 가려던 참이오.” 근처에 마땅한 식당이 없다는 걸 알았던 아버지는 선뜻 제안하셨다. “누추하지만 우리 집에 가서 한 끼 하고 가세요.”
그렇게 나눈 소박한 식사 자리에서 아버지는 또 다른 기회를 발견했다. 이장님과 동행한 이는 명주군(현 강릉시) 소속 공무원이었다. 당시 정부는 과수 산업 육성을 위해 일본에서 밤나무 묘목을 들여오는 프로젝트를 추진 중이었다.
아직 묘목을 심을 땅이 넉넉했던 아버지는 그 공무원의 제안을 받아들여 일본산 밤나무 묘목을 심기 시작했다. 우연한 만남으로 시작된 밤 농사는 품질과 작황 모두 훌륭했다. 그때 심은 밤나무들은 이제 나이가 들어 많이 사라졌지만, 여전히 가을만 되면 풍성한 밤을 우리에게 선물해 준다.
그 시절은 지금보다 인심이 후했다고들 하지만, 모두가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그 시절 부모님께서도 사는 게 빠듯한 형편이였지만 아버지도 늘 베풀기를 좋아하셨고 엄마도 같은 마음이셨다.
어느 날, 온 동네를 돌며 쌀을 빌리러 다니다 마지막으로 우리 집을 찾아온 유순 어머니가 있었다. 거절당할까 봐 차마 입을 떼지 못하고 아궁이 불만 쬐며 머뭇거리던 그분에게 어머니가 물으셨다. “왜 그래, 무슨 일이 있어?” “우리 집 양반이 배앓이가 심해 쌀죽을 끓여줘야 하는데, 아무도 쌀을 안 꿔주네….” 엄마는 그 말을 듣자마자 쌀독에서 쌀을 한 바가지 넉넉히 퍼 주셨다. 우리 집 쌀독 역시 넉넉하지 않았지만, 엄마는 베푸는 일에 주저함이 없었다. 그 고마움을 잊지 않은 유순 어머니는 만날 때마다 그때 이야기를 하며 감사의 인사를 전하곤 하셨다. 이렇게 젊은 부부가 이웃에게 진심으로 대하니 어찌 하늘이 복을 주지 않을 수가 있을까?
1970년대 급격한 경제성장과 함께 과수 산업도 동반 상승했다. 노태우 대통령 시절에는 저온 저장고 지원 사업이 있었고, 아버지 역시 그 혜택을 받았다. 저장고가 없던 시절엔 창고에 쌓아둔 사과의 절반이 썩어 나갔지만, 저장고 덕분에 겨울에도 신선한 과일을 팔 수 있게 되었다.
아버지의 지난날을 돌이켜보며 문득 든 생각은 '운(運)'이었다. 중요한 순간마다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잡을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자신의 일에 대한 진심, 부지런함, 그리고 이웃을 향한 선한 마음이었다.
두 분은 정말 그렇게 사셨다. 1년 365일 중 제대로 쉰 날은 손에 꼽을 정도였고, 최선을 다해 노력하며 이웃에게 친절을 베푸셨다. 그 마음이 하늘에 닿아 축복으로 돌아온 것이 아닐까.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은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유효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