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많이 늦었지만 결국 약속을 지킨 아버지 그리고 나

그리고 나도 나와의 약속을 결국 지켰음을..

by 디지로그마담앤


“나는 과수원을 할 거예요. 한 10년 정도 고생하면 자리 잡히고 난 뒤 세계 구경을 시켜줄게요.” 아버지는 일종의 결혼 공약을 세우셨다. 엄마는 그 약속이 정말 이루어질까 그런 고민할 시간도 없이 결혼 후의 삶은 빛처럼 흘러갔다. 더군다나 6명 자녀의 교육 의무를 다하다 보니 어느덧 결혼 후 40년이 지났다. 아버지는 약속을 위해서일까? 부모님은 그때부터 정말 해외여행을 신나게 다니셨다.


내가 대학교 들어갈 무렵은 6남매 중 위 셋 언니, 오빠는 가정을 꾸렸고 넷째 언니는 직장에서 자리 잡았다. 그래서일까 부모님의 마음이 한결 여유로우셨다. 부모님이 속한 계모임은 강릉시에서 가장 여행을 자주 가는 인기 있는 모임이었다. 심지어 단골 여행사 사장님께서 우리 집에 찾아오시곤 했다. 선물을 가지고 오신 이유는 누구나 알 수가 있었다.


동남아는 물론이고 미국, 유럽, 호주 뉴질랜드 등 기회가 될 때마다 여행을 다니셨다. 집에서는 좀처럼 활짝 웃는 아버지를 본 적이 없었는데 해외여행 속의 사진에는 아버지는 늘 활짝 웃고 계셨고 엄마와 다정하게 찍은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친구분들과의 여행이기에 훨씬 재미있고 행복하지 않으셨을까?


“아버지! 그렇게 해외여행을 다니니 뭐가 좋으셨나요?" “그랜드 캐년이 정말 멋지더라고. 뉴질랜드도 참 멋지고! 그런 새로운 풍경이 좋고 한국에 없는 새로운 식물이나 과일 보는 것도 좋았어.”

그렇게 여행을 좋아하시는 아버지! 하지만 살면서 자녀들과 여행을 한 번도 가자고 하신 적이 없다. 자식들이 가자고 해도 좋아하지도 않으셨다. 물론 부모님께서는 그 흔한 자녀들이 보내준 여행을 다녀오신 적도 없다. 아버지가 가고 싶으실 때 친구분들과 알아서 즐겁게 다녀오셨다. 아버지는 자식에게 기대하는 타입이 절대 아니셨다.


아버지 못지않게 나 역시 여행을 참 좋아하는데 어느새 아버지가 연로하셔서 여행을 친구분들과 가시는 게 힘들어진 시기가 찾아왔다. 아버지는 진심으로 동물을 좋아하셨고 ‘동물의 세계’ 프로그램 애청자셨다. 지금도 케이블에서 동물 채널만 찾아보실 정도다. 결혼 전 아버지와 아프리카 여행을 소망했지만 효심이 부족한 탓에 결국 이루지 못하고 결혼하였다.


생각한 일은 언젠가는 꼭 이루어지게 마련이다.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많은 아버지의 모습이 나에게도 있기에 꼭 같이 여행을 해보고 싶었다. 신혼여행으로 가고 싶었으나 가지 못했던 브루나이 여행을 결혼 10주년 기념으로 갈 수 있게 되었다. 브루나이는 신비로운 나라라 바로 위 넷째 언니네도 같이 가고 싶다고 해 흔쾌히 같이 가기로 했다. 그런데 생각하지도 못한 아버지가 불쑥 “나도 그 나라는 못 가봤는데 가보고 싶구나.”라고 말씀하셔서 당황스러웠다.


안타깝게도 엄마는 관절이 너무 아파서 가실 수가 없었다. 그렇게 아버지는 넷째 딸, 다섯째 딸 가족과 가장 하이라이트인 장난꾸러기 외손자 3명의 재롱을 핑계 삼아 함께 첫 해외가족 여행을 다녀오셨다. 사실 가장 신난 건 나였다. 그렇게 아버지와 함께 비행기를 타고 여행을 가다니 꿈만 같았다. 여행지에서 활짝 웃는 아버지 모습이 너무 보기 좋았다. 호텔 근처에는 원숭이가 많아 눈으로 직접 볼 수 있어 아버지가 특히 좋아하셨다.


보트 타고 근처 바닷가를 돌며 다양한 새나 악어를 보는 호기심의 눈빛으로 즐거워하셨다. 특히 바닷물의 염분을 먹고사는 맹그로브 나무를 직접 보시며 새로운 자연을 배우는 모습이셨다. 70대 중반의 아버지였지만 아버지는 그때도 잘 걷지 못하셔서 사위와 손자들이 꼭 보필해드려야 했다. 그 여행이 결국 나에게는 처음이자 마지막이 된 아버지와의 여행으로 끝났다.


아버지는 엄마와의 결혼 약속을 아주 충실히 지켜셨다. 동네에서 엄마보다 여행을 많이 다닌 분은 없으셨다. 지금 생각하면 아마도 그때가 부모님의 가장 전성기 시절이었다. 부모의 책임을 충실히 하고 남은 시간을 두 분을 위해 그렇게 보내신 게 자식 입장에서 너무 감사한 일이다.


나 역시 스스로 약속한 아버지와의 여행을 지키게 되었다. 나에게는 그 여행이 정말 의미가 남다른 여행이었다. 그러나 아버지에게는 많은 여행 중 하나의 추억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약속이란 약속을 한 사람이 스스로 지킬 때 의미가 더 크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모님의 해외여행은 엄마보다 아버지에게 훨씬 의미가 큰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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